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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신명기

신명기 21장 22-23절, 나무에 달린 자

by Message.K 2023. 11. 15.

신명기 21장 22-23절의 본문을 가지고 '나무에 달린 자'라는 제목으로 설교한 내용인데, 서론에서 독서(책)에 대해, 그리고 성경책에 대해, 그리고 그 성경 중 신명기에 대한 개괄을 살짝 이야기하면서 본문에 대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설교한 내용입니다.

 

 

신명기 21장 22-23절, 나무에 달린 자 설교 썸네일
신명기 21장 22-23절, 나무에 달린 자

 

 

 

 

 

들어가기... 여러분, 독서를 좋아하는가? 책읽기를 좋아하는가?

책은 제2의 창(window)이다. 또 하나의 세상을 바라보는 창문이다. 얼마나 많은 책을 읽고 섭렵하고 정독하느냐에 따라서 사람은 세상을 바라보는 창문의 숫자는 늘어날 것이다.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

-남자는 모름지기 다섯수레에 실을 만큼의 많은 책을 읽어야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요즘 시대는 책을 읽기가 참으로 힘든 시대이다. 중.고등학생과 청년들은 인터넷이다, 컴퓨터다 해서 읽지 못할 뿐만 아니라 기성세대는 신문과 텔레비전을 보는 것에 시간을 할애하기에 더 그러하다.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더 책은 우리에게 멀어져 가는 듯 하다.

 

책읽기도 힘든데 성경읽기는 오죽하겠는가? 이러한 말이 있다.

 

‘책을 읽는 사람은 결국 성경을 읽게 되고, 성경을 읽는 사람은 결국 책을 읽게 된다’

 

여러분은 어떠한가? 마틴 로이드 죤스 목사님은 ‘영적 부족은 곧 지식의 부족’이라고 했다. 제임스 패커 박사는 ‘우리는 아는만큼 믿을 수 있고 기도할 수 있다’고 했다. 그만큼 책은 우리의 영혼을 기름지게하고 풍성하게 한다. 찰스 스펄젼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부던히도 애쓰면서 많은 책을 읽었고 3-4천권 정도의 책을 재검토해 보았다”

 

그는 후에 1,437권의 책에 대한 서평을 남겼다고 한다. 여러분이 잘 아는 요한 웨슬리는 말을 타고 가면서 독서를 했다. 그러면서 그는 수천권의 책을 읽었다. 그는

 

“책을 읽지 않으려면 사역을 집워치워라!”

 

고 했다. 아무튼 우리 삶에 있어 책은 참으로 소중한 등불과도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무엇이며 성경읽기는 어떠한가?

성경도 아시다시피 책이다. 성경이라고 오죽하랴!!! 책은 읽지 않더라도 성경은 부디 읽으시기를 바란다. 성경은 영생에 이르는 길이 있다. 성경을 사랑하시길 바란다. 틴데일은 감옥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면서도 히브리 성경 사전을 갖다달라고 했다. 제가 너무 여러분들의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했는가? 너무 수준 높은 기준을 말하였는가? 그렇지 않다. 이것은 하나의 도전이다. 이것은 하나의 자극이다. 언제나 이상은 우리를 들뜨게 하지만 현실은 우리를 초라하게 만드는가? 그렇다면 우리의 초라한 현실로 돌아와서 여러분에게 질문하고자 한다.

 

 

 

오늘 우리가 볼 <신명기>라는 책을 여러분들은 아는가?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렇게 5개가 바로 ‘모세오경’이라고 한다. 저자가 바로 모세이기 때문에 ‘모세오경’이라 한다. 저자가 만약 아브라함이었다면 ‘아브라함 오경’이라 했을 것이다. 그 중 신명기는 레위기, 민수기와 더불어 사람들이 극히 읽기에 지겨워하는 성경이기도 하다. 성경을 일독하고자 하는 사람들, 구약통독을 시작하는 사람들은 이제 성경을 좀 읽으면서 하나님의 꿀 같은 말씀을 보고자 하는 열망으로 성경을 창세기부터 출애굽기 죽 읽어간다. 천지창조부터 시작되는 성경의 파노라마는 다소 재미있게 들린다. 그러면서 레위기에 다다른다. 이제껏 나름대로 주님의 말씀을 읽어왔다는 자신의 열심을 스스로 은근히 자랑하며 뿌듯해할 때 ‘레위기’라는 벽이 앞에 부딪힌다. 꿀을 기대했던 성도의 마음은 이젠 그 꿀이 쓴 약으로 둔갑했다. 그 엄청난 레위인들, 제사장들 그리고 제사를 어떻게 지내야하는지에 대해 시시콜콜, 조목조목 적혀있는 27장의 레위기를 다 읽으면 그래도 ‘해냈다. 읽었다’는 충만감으로 그 다음 성경을 편다. 하지만 그 다음도 만만치 않다. ‘민수기’...민수기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유랑하던, 방황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사람이름도 많이 나오고, 숫자도 많이 나오고, 역시 어안이 벙벙한 이야기가 무려 레위기보다 더 센 36장의 분량을 가지고 있다. 그래도 성경을 꾸준히 읽는 성도는 낙심치 않고 레위기의 36이라는 거대한 강을 건너서 오늘 보고자하는 ‘신명기’에 도달한다. 레위기의 쓴 혹독함을 지나, 민수기의 강렬한 빡셈을 지나 이제껏 왔건만 ‘신명기’는 더 기가 찬 말씀이다. ‘율법이야기’, ‘법이야기’가 전부이다.

 

제가 예전에 친구가 법대를 다니면서 고시공부를 하길래, 교과서인 법전(형법, 사법, 민법, 상법...)을 잠시 들추어보았는데 머리가 띵한게 어지러웠다. 그 법전처럼 오늘 우리가 보는 ‘신명기’도 여러분의 머리를 띵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띵한 성도님들에게 힘을 주는, 위로를 주는, 강장제가 되는 말을 남기고 싶다.

 

“성경을 일독한 사람은 구원의 반열에 들어선 것이라고 확신해도 좋다”(정근두 목사 왈)

 

하지만 성경을 계속적으로 읽고자하는 성도들에게는 저는 권하고 싶은 것이 무작정 본문으로 들어가지 말고 관심을 좀 더 기울여 보고자하는 성경의 배경이나 사전지식을 조금이나마 알고서 들어간다면 더 없이 성경 읽기에 재미를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신명기의 이야기를 좀 더 하자면 ‘이스라엘의 법전’이라고 명할 수 있겠다. 이스라엘은 당시 신정국가(하나님이 왕이 되시는 국가↔민주국가(국민이 왕), 공산국가(공산당이 왕))이므로 법이나 법전은 우리나라의 헌법재판소나 대법원에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법을 모세오경의 저자인 모세가 대필한 것이다. 그 대필한 것이 바로 신명기이다. 신명기는 앞의 레위기와는 달리-레위기는 제사장(성직자)들이 지켜야할 법전-일반 백성들이 지켜야할 법 목록을 기록한 것이라고 보면 쉬울 것이다. 그러니깐 신명기는 이스라엘의 <민법총서>,<민법을 총정리>한 것이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약속의 땅에 들어갈 백성들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

 

는 법을 정리한 것이 바로 ‘신명기’이다. 이렇게 신명기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여러분이 성경을 대할 때 조금은 쉽지 않을까 해서 이야기해 보았다.

 

 

본론...오늘 보고자 하는 본문은 신명기 34장 중에 21:22-23

이 본문도 이스라엘의 ‘민법총서’중의 한 부분이다. 신명기를 다 읽어보진 못하지만 대충 훑어보면 ‘-해라,-하지 말라,-어떻게 하면 어떻게 된다’이런 식의 아주 세부적인 법조항을 이야기하고 있다. 22-23절 내용도 마찬가지다. 내용의 골자인즉, 사람이 죄를 지어 죽어 나무에 달리면 그 당일에 장사지내라는 말이다. 그 다음날에 장사 지내면 왜 안 되는가? 그 이유를 23절 뒤에 적고 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도 오늘날처럼 ‘사형’ 즉 ‘극형’에 처해질만한 죄목이 있었을 것이다. ‘죽을 죄’를 지은 사람 말이다. 이를테면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그것도 칼로 잔인하게 죽이는 예전의 패륜아나 아니면 다른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게 만든 살인자라든가 그런 자들, 파렴치범, 가정 파괴범이 오늘날은 ‘죽을 죄’ 곧 사형으로 판결된다. 이것은 민주국가인 우리나라가 그러하고 그 당시 신정국가인 이스라엘은 보다 더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엄격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21:18-21에 보면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속을 썩인 자는 돌로 쳐죽임을 당했음’을 알 수 있다. ‘죽을 죄’를 지은 사람은 돌을 던져-(구약시대의 사형집행방법)-사형을 집행하고 ‘나무’(V.22)에 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구약시대에 일종의 경고로서 가끔 시체를 나무에 매달아 놓았던 것이기에 정말 중대한 죄악, 기억하기도 싫은 죄악을 저지른 자에게 그렇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더 나아가, 나무에 죽은 시체를 다는 것은 이스라엘 국민들에겐 무언가 다른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는 그들만의 규칙, 법이 있었던 것이다. 마치 우리나라 사람들만이 가지고 있는 전설, 신화, 속담, 설화 같은 것 보다 더 강력한 것 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4자를 싫어한다. 그러나 미국에선 13이라는 숫자를 불길하게 여긴다. 그래서 미국의 많은 고층 호텔에는 13층이 없다고 한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 전광판을 보면 10, 11, 12에서 14로 건너뛴다. 왜냐하면 그들은 13이라는 숫자에 대해서 대단한 두려움, 비합리적인 두려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아무리 14층이라고 부른다 해도 여전히 그 층은 13층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잊어버리고 있다. 아무튼, 이것은 단지 숫자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이스라엘의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라고 믿는 그 신념은 이러한 것 보다 훨씬 더 강렬한, 더 센 어떤 것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이것은 신정국가에 있어 하나의 ‘법’, ‘율법’이었던 것이다.

 

 

나무에 단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죄수가 놓이게 되었다는 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표였다. 이러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마땅한 죄수, 죄인들의 시체는 하루만에 백성들에게 ‘너희들은 이렇게 살지 말라’는 강렬한 시각적 효과를 남기고는 나무에서 내려 장사지내야 했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의 <땅>은 하나님의 축복 그 자체였다. 그것은 기업이었다. 그러기에 그러한 하나님의 기업이 죄인의 신성모독적인 피로 말미암아 더러워지는 것을 결코 용납지 않으셨던 거룩하시고 정결한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여기에서의 나무는 형벌과 사형 집행에 사용된 나무 일 뿐이다. 돌을 던져 사형을 집행했던 구약시대에는 나무 십자가라는 것이 없었다. 나무 십자가 처형이 없었다. 그러나 구약시대 에 없었던 십자가 처형은 신약시대로 넘어와서 당시 알려진 세계의 변두리에 살던 ‘야만인들’에 의해 고안되었다. 베니게인과 카르타고인들이 십자가 처형을 처음 실시했고, 뒤에 희랍인과 로마인에게 받아들여졌다. 아마 이것은 지금까지 행해졌던 모든 처형 방법 중에서 가장 잔인한 방법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사람이 극도의 고통을 느낄 때까지 죽음을 늦추기 때문이다. 거기에 달린 사람은 여러 날 동안을 죽지 못하고 고통을 당할 수도 있었다. 유대인들과는 달리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기업인 땅을 더럽히지 말라는, 그리하여 하루만에 시체를 치우라는 신명기율법을 알 리가 없었을 것이다. 십자가 처형은 대상은 로마 시민은 거의 드물었고(극단적인 국가 반역죄), 대개가 종들과 천민, 저급한 범죄자(nonperson)들이었다.

 

철학자 키케로는

 

“로마 시민을 결박하는 것은 범죄이고, 그에게 매질을 하는 것은 가증한 것이고, 그를 죽이는 것은 거의 살인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면 로마 시민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은 무엇인가? 그렇게도 끔찍한 행동을 묘사할 수 있는 적절한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고 하였다. 그러기에 유대인인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처형당한 반면, 로마 시민권을 가진 바울은 참수형을 당했다는 전설은 고대 풍습과 일치한다. 또한 예수님 옆에 달린 두 강도는 정치범이거나 테러범, 아니면 열혈당원(하나님나라는 폭력으로도 이룰 수 있다는 적극적인 무리들, 로마군들과 전투도 서슴치 않음)-그들에게는 모욕을 줄대로 준다-일 것으로 보인다.

 

 

십자가에는 세 가지 형태가 있는데 T자형의 성 안토니 십자가, X자형의 성 앤드류 십자가, 칼 모양(♀)의 십자가로, 이것은 죄목이 적힌 명패를 머리 윗부분에 못박아 붙였기에, 마지막 것이 예수님이 처형당하신 십자가 형틀로 여겨진다. 십자가 처형에 대한 유죄 판결이 내려지면, 죄인은 가죽끈으로 된 채찍으로 ‘채찍질’을 당한 후 성문 밖 사형 집행장까지 노예처럼 십자가를 지고 갔다. 그리고 발가벗긴 채 십자가와 함께 땅에 뉘어 팔이나 아니면 손이 묶이거나 못 박혔다. 그리고 이 형틀이 높이 들려 위로 든든히 세워지면 묶이거나 못박힌 범죄자의 발은 땅으로부터 떨어져 있게 된다. 그 십자가가 세워지는 소리가 ‘쿵’하고 울리면 사람들은 저마다 움찔했다고 한다. 소름끼치는 소리였을 것이다. 십자가에 달린 당사자는 더할 것은 물론이다. 죄수의 몸무게는 범죄자가 걸터 앉아 있는 돌출된 나무못에 의해 지탱된다. 그 상태로 죄인은 기운이 빠져 죽게 된다. 또 어떤 문헌에는 몸이 무거워 내려오는 상체를 받히기 위해서 십자가 나무에 안장을 달아놓기도 했다고 한다. 때로는 다리를 부러뜨려 빨리 죽도록 했다. 이것은 격심한 고통, 발작적인 근육의 수축,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더 빨리 죽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는 부러뜨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주님은 다른 사람보다 더 일찍 죽으셨기 때문이다. 주님은 보통 죄인들보다 더 빠른 시간, 6시간만에 죽으셨다 .십자가의 고통은 너무나 격렬하고 고통이 심해서 자기를 낳은 엄마, 어머니를 저주하기도 했다고 한다. 온 세상을 향한 저주와 욕설을 퍼부어대기도 했다. 또한 세상에 대한 증오와 모욕을 ‘소변을 갈기면서’ 죽었다고도 한다. 당대의 저술가들은 이렇듯 잔인하고 비열한 형태의 십자가 죽음을 대단히 고통스러운 것으로 상술하고 있는 반면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고통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없는 것이 제 의견으로는 아쉽다고 생각한다.

 

 

 

나무 십자가... 우리 주님께서 거기서 죽으셨다

‘유대인의 왕’이라는 그 당시의 소문을 들은 로마군들은 이것은 ‘정치적 폭동’, ‘소란죄’를 적용시켜 가장 치욕스럽게 옷을 벗겨, 발가벗긴 채 우리 주님을 못박았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무에 달려 죽으셨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세상의 온갖 모욕과 치욕과 수모를 다 껶으시고 죽으셨다.

 

왜 죽으셨는가? 왜 십자가에 달리셨는가?

단지 시대가 그를 받혀주지 않았기에 억울하게 ‘정치적 쿠데타의 주동인물’로 낙인찍혀 돌아가셨나? 단지 민중이 그를 모함하여 어처구니없이 ‘누명쓴 죄인’으로 죽으셨나? 그렇다. 물론 그러한 직접적인 이유, 직접적인 사인도 있다. 하지만 더 큰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바로 주님의 자발적인 결단이었다. 헌신이었다. 모든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그대로 침묵하신 채 말 못하는 벙어리처럼, 그토록 많은 무리들에게 산상설교를 하셨고 수많은 무리들 앞에서 말씀을 설파하셨던 그 분이 왜 죽을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죽기를 각오한 사람처럼 침묵을 지켜셨나? 한 마디의 항변도, 한 마디의 억울함에 대한 통탄함도 외치지 않으셨나? 그것은 바로 주님은 ‘그 나무, 그 십자가’를 위해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었다. 주님은 그 목적을 잊지 않으셨다. 주님은 십자가를 항상 가슴에 품고 계셨다. 주님은 자신이 흙의 인생으로 온 소명을 아셨다. 그 십자가를 위해 성육신하셨고, 그 십자가를 위해 사역하셨고, 그 십자가를 위해 죽기로 작정하셨다. 주님도 어릴때부터 33세까지 살아오시면서 주위에서 들리는 십자가의 소문을 들으셨을 것이다. 그 형벌이 얼마나 무섭고 그 형틀이 얼마나 섬뜩한지를 이미 알고 계셨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은 그 십자가를 품으셨다

그 십자가를 늘 기억하셨다. 그 십자가를 위해 늘 기도하셨다. 그러기에 베드로가 주님께 십자가를 지시지 말라고 부탁했을 때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우리 주님은 그 십자가가 육체적으로 너무 고통스러워 “이 잔을 내게서 옮길만 하거든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단지 육체적인 고통과 힘듬과 아픔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마음을 더 갈기갈기 찢어놓는 것은 하나님과의 단절된 영적 관계 때문이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성자 하나님이셨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은 삼위로서 하나이신 우리 하나님이시다. 그 삼위의 하나님께서 늘 끊임없이 교제하셨는데 성자 주님은 이제 죽음의 관문을 통과해야만 한다. 그것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교제하시고 사랑하시고 돌아보았던 삼위의 하나님, 삼위의 신적인 관계가 멈춰 서 버리는 것이다. 끊어져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의 단절이었다. 빛이 어두움이 되는 순간이었다. 제가 아무리 이렇게 설명해도 여러분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저도 못한다. 지금 휴가 가신 당회장 목사님도 이해 할 수 없다. 위대한 영적인 모든 선조, 요한 웨슬레, 로이드 죤스, 죠지 뮬러, 찰스 스펄젼, 죠지 휫필드, 허드슨 테일러...조차도 못했다고 생각한다.

 

 

왜? 우리는 하나님이 한 번도 되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흙의 인생이다. 우리는 육신의 인생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영의 인생이셨고 신의 삶이었다. 그는 거룩의 인생이었고 우리는 타락의 인생이었다. 그는 정결함이셨지만 우리는 죄악덩어리였다. 그는 죄악의 일점일획도 용납지 않는 하나님이시지만 우리는 죄를 밥 먹듯, 물먹듯하는 죄인이다.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어찌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리오? 그저 주님이 그런 맘을 주신다면 맛배기만 볼 뿐이다. 저는 주님의 십자가 고통을 사람들이 육체적인 고통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말할 때 심한 이질감을 느낀다.

 

아주 오래 전의 일이다. 외국의 어떤 청년이 주님의 십자가를 체험한답시고 십자가에 달리는 비슷한 사건이 뉴스에 보도된 적이 있었다. 전 그때 그런 생각을 했다. “그 청년의 십자가와 주님의 십자가는 같은가?” 결코 그렇지 않다. 결단코 그렇지 않다. 결단코. 우리주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십자가였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셨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였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주님은 나무에 달리셔서 죽으셨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셨다

유대인들은 ‘나무’와 ‘십자가’를 구분하지 않았으며, 또한 나무에 달리는 것과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을 서로 구별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십자가에 못박힌 범죄자에게는 자동적으로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라는 율법의 끔직한 진술을 적용시켰다. 그들은 하나님의 메시야가 나무에 달려서 하나님의 저주 아래에서 죽으리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로마의 배경을 가졌든, 유대인의 배경을 가졌든, 혹은 그 양편을 모두 배경으로 가졌든, 초기의 기독교 반대자들은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요, 인간의 구세주인 자가 십자가 위에서 그의 삶을 마쳤다는 주장은 아주 좋은 웃음꺼리와 냉소거리로 남았던 것이다. 그것은 미친 생각이었다. 이 사실은, 팔라틴 언덕에서 발견된 2세기의 것으로 보이는 어떤 집 벽의 낙서가 잘 대변해 준다. 그것은 현재 남아 있는 것 중 가장 오래된 십자가 그림으로서, 하나의 만화적 묘사이다. 그것은 당나귀 머리를 가진 사람이 십자가에 달려 있는 모습을 조잡한 그림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 왼쪽엔 한 사람이 경배의 표시로 한 쪽 손을 들고 서 있다. 그 밑에는 삐뚤삐뚤한 글씨로 ‘알렉사메노스는 신을 경배한다’라고 씌여져 있다고 한다. 지금 이 풍자화는 로마의 킬헤리안 박물관(Kircherian Museum)에 소장되어 있다. 이것은 바로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숭배하는 것은 마치 이 풍자화처럼 ‘당나귀를 숭배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2세기의 사모사타의 루키안(Lucian of Samosata)은 그리스도인을 비난하기를 “십자가에 못박힌 그 괴변가를 믿으며 그의 율법 아래에서 살고 있다”고 하였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당나귀숭배처럼 보이는가? 유대인들은 율법을 그렇게 조목조목 따지다가 결국 그리스도를 놓쳤다. 결국 그리스도를 죽였다. 결국 그리스도를 버렸다. 자기네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라고 그렇게 그렇게 본디오 빌라도에게 외쳤으면서 후에는 어처구니없는 하나님의 율법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이다”를 적용시키는 엄청난 죄악을 저지른다. 이것은 유대인의 자가당착적인, 모순적인 죄악이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유대인들이 여러 세기 동안 하나님의 메시지를 거부하던 일의 절정을 보았으며, 또한 하나님의 심판이 유대인의 민족적 특권 의식, 선민의식을 종식시킬 것을 예언하셨다(막12:1-12; 포도원의 악한 농부의 비유). 유대인들 그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유대인 그들이 주님을 못박았다. 그러나 바울은 거기에다 덧붙이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3)

 

주님께서 왜 스스로 십자가의 죽음을 자처하셨는가? 왜 스스로 예언의 성취니, 율법의 완성이니 하시면서 십자가를 결단하셨는가? 그것은 그가 죄가 많아서가 아니었다. 그가 죄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율법은 언제나 죄가 있으면 그 죄의 댓가를 요구했다. 죄를 대속해 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죄가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거할 수가 없다. 그러기에 그 죄를 커버할, 그 죄를 제거해 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죄를 없애 줄 무엇은 언제나 ‘피흘림’이 필요했다. 레위기(16:5)에선 대제사장이 이스라엘 전체 회중, 전체 백성의 죄를 속하고자 “속제 제물을 위하여 수염소 둘”을 잡았다. 그 중 한 마리는 희생되어서 통상적인 방식대로 그 피를 뿌리지만, 살아 있는 한 마리 염소는 대제사장이 그것의 머리 위에 양손을 얹고서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었던(21)” 것이다. 그렇게 하고 나서 그 염소를 광야로 내 보냈다. 염소는 “그들의 모든 죄를 지고 무인지경”(22)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그 두 마리는 바로 속제 제물(a sin offering-단수)이었다. 그 각각의 염소는 하나는 속죄의 수단을, 다른 하나는 속죄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과 나, 하나님과 우리,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은 오직 대속적인 죄의 담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선언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기억하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는 말씀을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는 말씀이다. 그리스도가 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죄로 인해 저주의 굴레를 뒤집어 썼다는 것이다. 그 죄는 예수의 죄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죄이다. 우리의 저주이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마땅히 받아야할 죄이며 저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저주는 바로 우리의 저주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그 하나님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성육신하셨고 십자가에서 짐승처럼 죽으셨고 결국은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의 죄악과 저주로 말미암아 버림받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으로, 그 인간이 짐승으로, 짐승이 이젠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 저주였다. 하나님께서 친히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레위기의 그 말씀처럼 친히 단번에, 한번에 두 마리의 숫염소가 되셨던 것이다. 우리의 속죄제물이 되셨던 것이다. 우리의 대속물이 되셨던 것이다. 우리의 죄의 댓가, 죄의 형벌이 되셨던 것이다. 죄에 대한 심판을 친히 그분이 담당하신 것이다. 여러분의 이기심, 탐심, 음란함, 질투, 시기, 분쟁, 화냄, 사기, 분노, 욕심....을 위해서 그 분이 죽으셨다. 여러분의 그 죄성 때문에 그 분이 십자가에서 짐승처럼 죽으셨다. 여러분의 죄 때문에 그 분이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돌아가셨다. 여러분이 벌거벗긴 채 매맞고 창에 찔리고 가시에 찔리고 못박히고 피흘려야 할 그 하나님의 심판의 나무를 주님이 대신 감당하셨다. 여러분이 죄로 인해 고통 당해야 하고 울부짖어야 하고 신음해야 하고 절규해야할 그 하나님의 저주의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죽으셨다. 나의 죄, 너의 죄, 당신의 죄, 당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 온 인류의 죄악을 위해서, 온 우주를 위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리고서 우리 주님, 십자가에서 일곱 마디의 말을 남기셨다(가상칠언). 주님이 십자가에서 이 마지막 칠언째를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

 

 

 

 

그분의 사역의 마침표같은 발언. 그것이 무엇인가?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테페(테)르스타!!!”

...다 이루었다!‘다 이루었다!’‘다 이루었다!’ ‘승리를 이루었다!’ ‘세상의 죽음을 이기었다!’ ‘온 우주의 구속을 이루었다!’ 이 때 시제는...<영원히 이루어진 상태로 있을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그의 사역의 완성의 외침이었다. 예수님의 나무 십자가에서의 마지막 외침이었다.

 

 

 

 

마무리Epilogue...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적인 차원에서 보면 가룟유다가 예수를 제사장에게 넘겨주었다. 제사장은 그를 다시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다. 빌라도는 그를 군병들에게 넘겨주었다. 군병들은 그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하지만 하나님의 차원에서 보면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를 내어주셨다. 성자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내어주셨다. 우리를 위하여 내어주셨다.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베드로는 하나님의 계획과 인간의 악함의 결과로 돌렸다. 왜냐하면 인간 악의 폭로인 십자가는, 동시에 그렇게 폭로된 인간의 악을 제압하려는 하나님의 목적의 계시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는 왜 죽으셨는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

첫 번째 대답은 그는 죽으신 것이 아니라 죽임을 당하셨다는 것이다.

두 번째 대답은 그는 죽임을 당하시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자신을 내주심으로써 죽으신 것이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서 나무(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 저주는 우리가, 당신이 받아야할 하나님의 저주였다. 그 저주는 우리가, 당신이 받아야할 하나님의 형벌이었다. 그 저주는 우리가, 당신이 받아야할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구약성경 신명기 21장에 등장한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는 구절을 해석해보고 그것에 대한 영적인 의미를 설교하는 내용입니다. 그리스도가 받아야 할 모든 저주는 실상은 죄인인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라는 메시지입니다.

 

 

 

요한복음 8장 1-11절,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ft.영화 프리스트)

요한복음 8장 1-11절의 본문을 가지고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에 대한 설교를 하면서 영화 '프리스트Priest'를 이야기해 보았는데요.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 죄인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이 곁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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