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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시편

시편 23편 6절, 천국의 사냥개The Hound of Heaven

by Message.K 2024.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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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불린 유일한 성경상의 인물, 다윗이다. 다윗의 시편 23편은 너무나도 유명한 시편이다. 그 많은 유명한 구절 가운데 저는 오늘 유독 6절의 말씀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 구절을 가지고 '천국의 사냥개'라는 주제로 설교한 내용을 공유한다.

 

시편 23편 6절, 천국의 사냥개The Hound of Heaven 썸네일
시편 23편 6절, 천국의 사냥개The Hound of Heaven 설교

 

 

 

 

 천국의 사냥개The Hound of Heaven

우리가 간혹 외국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사냥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냥을 할 때는 언제나 그 사냥한 동물을 잡아채기 위해 데리고 다니는 동물이 있다. 바로 사냥개이다. 아주 날씬한 몸매를 자랑하는 독일산 도베르만 핏셔나 털이 아주 유난히 많은 닥스훈트 등이 있다. 이 사냥개는 주인이 사냥한 동물을 잡기 위해 끝까지 추격하여 주인의 목적을 달성케 해준다. 이러한 이미지를 가지고 이 본문을 설명해도 좋을 듯하다.

   히브리어 원문은 이렇다.

‘진실로 선과 인자가 나의 모든 생명의 날들 동안에 나를 추적하리니’

 

  존 스토트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다윗을 따른다’는 이 말씀을 마치 사냥개가 끈질기게 추격하듯이 따른다는 이미지로 표현했다. 아마도 원문의 의미를 살린 해석이 아닐까 싶다. 그 추격자는 도베르만 핏셔나 점박이 무늬가 있는 달미시안의 주인공도 아니고, 바로 ‘천국의 사냥개The hound of Heaven’인 것이다. 하나님의 천국의 사냥개가 끊임없이 우리를 추격하고 있다는 것이다.

 

프랜시스 톰슨이란 인물이 ‘천국의 사냥개’라는 시를 썼다.

 나는 그에게서도 도망쳤네, 밤에도 그리고 낮에도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네, 수많은 세월 동안을.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네, 내 마음 속 미궁 같은 길로.
      그리고 슬픔 속에서도
나는 숨었네, 겉으로는 연이어 웃으면서도,
    희망에 부풀어 오르다가도
    두려움의 골짜기 거대한 음울 속으로
 곤두박질쳐 버렸네,
    나를 따라오는, 추적해오는 그 힘찬 발소리로부터.
   그러나 서두르지 않고
   흐트러지지 않는 걸음걸이,
 일부러 속도를 내며, 장엄한 긴박함으로,
    두드린다-그리고 한 목소리가 두드린다,
    발소리보다 더 긴박하게-
‘네가 나를 배반하기에, 모든 것이 너를 배반한다.’

 

 모팻 고트리(R. Moffat Gautrey)란 작가는 처음에 이 시를 읽었을 때 시의 제목 ‘천국의 사냥개’가 굉장히 불쾌했다고 한다. ‘하나님을 사냥개에 비유하는 것이 적합하단 말인가?’ 하고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러나 나쁜 사냥개 뿐만 아니라 좋은 사냥개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스코틀랜드 북부에서 서식하며 잃어버린 양을 찾아다니는 콜리는 감탄할만한 사냥개였다. 또한 양을 찾아다니는 양치기 개(좀더 정확하게는 양을 찾아다니는 목자)에 관한 주제는 신구약 성경 모두에 나온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시편 23편의 마지막 절은?

 

  진실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가 사는 날 동안(all days o my life) 나를 따르리니

  나는 주의 집에서 영원토록 살겠습니다.

 

  고트리는 여기서 ‘따르다’라고 다소 약하게 번역된 히브리어를 좀 더 강한 말로 바꾸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원어의 의미처럼,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가 사는 날 동안 나를 추적하고, 붙어 다니며 괴롭게 하고,
내 걸음 하나하나를 미행하리니”

로 말이다. 그것은 끈질기지만 목적이 분명하고, 자애롭지만 무자비한 추적이다.

 

  우리가 시편 23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본문인 6절에 오기까지는 대부분의 시제가 현재 시제로 표기된다. 본문 6절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할 때에 영어 성경으로 읽으면 “Surely goodness and love will(shall) follow me”로 미래 조동사가 사용된다. 앞으로 그렇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일관성 있게 현재 시제가 사용된다. 목자의 인도를 지금 받으며 행복해 하는 만족함의 고백인 것이다.

 

 

 

하나님의 선하심-보시기에 좋았더라!

 시편 23편은 성경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지만 다윗이 아마도 말년에 지은 것으로 보여진다. 말년에 지어졌다면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을 것이고, 그가 왕이 되기 전에 시를 지었다면 그의 굳은 결의가 배여 있는 대목일 수 있겠다. 하지만 시적인 분위기를 생각해 볼 때 아마 전자, 즉 말년에 지은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다윗은 쫓는 인생 보다는 쫓기는 인생으로 10여년의 넘는 젊은 시절을 보냈다. 도망자의 신세였다. 사울은 끊임없이 자신을 원수와 적으로 간주하며 ‘다윗 죽이기’에 혈안이 되었다. 다윗은 끊임없이 도망쳐야만 했다. 더 나아가 이 시편23편이 압살롬의 반역 이후에 지어진 다윗의 시편이라고 했을 때, 다윗은 이제 반역자, 아들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는 형편가운데 미래지향적인, 소망형으로 6절을 고백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사울이 다윗을 쫓는 모습, 아들 압살롬이 다윗을 쫓는 모습은 마치 사냥개가 그 사냥감을 쫓는 모습과도 흡사했다. 그러나 다윗은 이 모든 인생의 터널을 지나고 난 후, 자기를 지금도 쫓고 있는 것, 앞으로 쫓게 될 것이 있는데 바로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라고 말한다. 선하심은 ‘토브’이고, 인자하심은 ‘헤세드’이다. 우리는 선하심을 이야기할 때 내 기준에서 선하심을 이야기한다. 사업도, 직장도, 가정도, 자녀들도, 공부도, 시험도 모두가 내 기준에 맞게끔 충족될 때 ‘선하다’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이것은 기준이 자기 기준, 인간의 기준일 뿐이다. 단순히 예쁘다든지 사람의 마음을 만족을 준다든지, 칭찬과 인정을 한 몸에 받는 것을 우리는 선, ‘토브’라고 한다. 이 말은 창 1장에서 4번이나 나온 단어이다(12, 18, 21, 31).

  바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이다. 인간적인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기준에서 보시기에 좋아야 선이라는 것이다. 이 선은 우리가 신약성경과 연결된다.

 

(롬 8:28)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여기에서 나오는 합력하여 선을 이뤄가는 그 의미를 말하는 것이다. 인생의 모든 우환질고를 다 겪은 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는 것이 바로 ‘선하심’을 뼈저리게 느꼈다.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을 때는 제왕의 자리가 눈앞에 다가온 것 같았다. 그러나 웬걸~강산이 변하고도 남는 시간동안 뼈 빠지게 도망치기에 바빴던 인물이 바로 다윗이었다. 다윗이 정신질환에 걸리거나 강박증 환자가 되지 않은 것이 다행일 정도다. 다윗이 그 왕권Kingship을 쫓아갈 틈도 주지 않고 하나님의 고난의 사냥개가 그를 쫓아다닌 것이다. 그 아픔과 슬픔과 비통함과 불면의 시간과 도망자의 길은 3절에 나오는 것처럼 ‘의의 길’이었다. 시편은 끊임없이, 성경은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의인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선하고 아름다운 고매한 인격자를 지칭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성경상의 의인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하나님의 편에 선 자, 율법의 편에 선 자를 지칭한다. 그의 도덕성과는 별개이다. 다윗이 왕권에 집착했다면 사울처럼 몰락했을 것이다. 만약 다윗이 왕권을 거머쥐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했다면 시편 23편 1절의 문장이 바뀌었을 것이다. ‘여호와는 나의 국왕이시니’정도로 바뀌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의 시편 23편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시작한다. 그것은 다윗이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으신 하나님을 만나면서 겸손과 겸허를 배웠기 때문이다. 또한 더 나아가 그가 목동시절에 양떼를 돌보는 섬세한 배려와 관심처럼, 하나님은 그 보다 더 하게 신실하게 인도해주셨기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말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그냥 입에서 줄줄 나온 것이 아니다. 자신의 수많은 인생의 역경들의 실타래 가운데 그 모든 것을 합력하여, 조율하고, 조화시켜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의 선을 만들어 가신 하나님이셨던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선하심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왜냐하면 천국의 사냥개, 하나님의 선의 사냥개가 우리를 끊임없이 추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믿으라!

 

  찰스 스펄젼 목사님은 부인과 함께 여러 가지 질병으로 고생을 했다. 늘 병석에 누워 있는 아내를 간호하던 스펄젼 목사는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부인보다 먼저 오십대 초반에 천국에 가게 되었다.

  사랑하는 아내의 손을 잡고 이 세상을 하직하며 위대한 설교자가 남긴 마지막 말은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그리고 그 유언은 바로 하나님의 선을 자신의 삶의 목적으로 받아들인 사람의 최후가 어떠한지를 보여 준다. 평생을 복음과 함께 살다간 하나님의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여보, 나는 좋으신 하나님과 함께 그토록 행복한 세월을 보냈다오!”

 

 

 

하나님의 인자하심-아가페가 정녕 나를 추격하리니!

이 인자하심이란 단어의 ‘헤세드’(히브리어)보다 헬라어 단어가 우리에게 더 친숙하다. 그것은 바로 ‘아가페’이다. 인자하심이란 말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성품과 관련이 있다. ‘하나님의 아가페가 정녕 나를 추적하리니’.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 아가페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없다면, 우리는 영원히 죽어 마땅할 인생들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초월적인 광대한 사랑, 아가페가 끊임없이 우릴 추격하고 있다. 아가페의 사냥개가 우리를 추격하고 있어서 우리는 겨우 숨을 쉴 수 있고, 은혜의 잔을 마실 수 있는 것이다. 다윗은 자신의 인생을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끊임없이 인도하시는 목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를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 다윗은 이것을 자신의 왕권과 왕조의 생명력과 자신의 영향력 보다 더 굳게 확신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의 황금시대를 열었던 자기의 왕조, 왕권의 중심인 화려한 ‘다윗의 왕궁에서 영원히 거하리로다’고 하지 않고 뭐라고 하고 있는가?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다윗은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끝없이 추격해 오기에 나는 그 여호와의 집에, 그 목자이신 주님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다윗의 시대나 요즘이나 마찬가지로 ‘영원’이란 단어는 현실과 동떨어진 낯선 단어이기도 하다. 하지만 다윗은 내세의 믿음과 심령의 고백이 있었기에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어떤가?

문득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오늘날의 사람들은 무척이나 바쁜 스케줄과 일정으로 인해 쫓기는 인생을 산다. 또한 무언가를 쫓는 인생을 살고 있기도 하다. 성공과 승진과 명예와 권력과 물질과 외모와 매력과 인기를 쫓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자기를 따라오는 지에 대한 확신도 없이 말이다. 다윗은 목자이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자신의 뒤에서 쫓아오시면서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풍성하게 베푸시는 은혜를 만끽한 인물이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이제 다윗처럼 21세기의 시편 23편을 다시 써야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천국의 사냥개가 지금도 우리를 추격해오고 있음을 기억하며 감사의 찬양으로 하나님께 화답하자!

 

(6)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시편중에 가장 사랑받는 시편 23편 중에서 6절의 본문을 가지고 '천국의 사냥개'란 주제의 설교를 한 내용인데, 특별히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믿는 자들에게는 사냥개처럼 따라온다는 이 해석, 특별히 찰스 스펄젼의 최후의 고백이 너무나 감동적이었다는 포스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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