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시편 1장 1-6절의 본문을 토대로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는 주제로 설교한 내용을 포스팅하고자 합니다. 시편 1편은 '시냇가의 심은 나무' VS '바람에 나는 겨'라는 대조적인 장면을 통해 '복있는 사람'을 정의해주고 있습니다.
Prologue: 시편에 대해
시편은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읽고 암송하고 그런 장르의 성경이다.
제가 몸담은 예전의 모교회에선 전도회 헌신예배, 학생회 헌신예배, 청년회 헌신예배...이런 헌신예배만 되면 서기가 앞에 나가서 회원을 호명하면 그 회원은 성경을 암송하곤 했는데 그 암송된 성경 구절 중에서 시편이 가장 많은 것으로 기억된다. 이처럼 시편은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자주 읽혀지며 자주 암송되는 성경이다. 또한 성경통독을 하기 힘들어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시편의 짧고 간략한 장들로 인해 성경통독을 애써 시편부터 하고자 하는 시도들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시편은 인물중심이나 이야기중심으로 된 다른 성경들과는 달리 유독 문학적인 냄새나 분위기가 많이 풍긴다. 그것은 바로 시를 담아둔 장소가 바로 시편이어서 그런 것이다. 이러한 시편은 대대로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에게 흔히 하나님을 찬양하는 도구가 되었고 영감을 불어넣는 촉매제가 되어왔다. 또한 찬양의 가사로도 많이 불려진 성경이기도 하다. 이는 시편이 ‘영감 받은 유대교의 찬송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시편의 내용은 다른 성경들과는 달리 <개인적이고 영적인 체험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당하는 모든 감정들에 대한 체험을 잘 보여주고 있기에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아 온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개괄Outline
시편 1편은 두 부류의 사람, 즉 복 있는 사람과 복 없는 사람으로 나누고 있는데 그것을 비유하기를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바람에 나는 겨로 각각 표현하고 있다. 좀 더 직설적인 표현을 쓰자면 의인과 악인을 대조시켜 놓고 있다.
- 1-3절까지가 의인(복 있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고,
- 1-5절은 악인(복 없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며,
- 6절은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의 차이를 설명해 주고 있다.
복 있는 사람(1절)
복 있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인가?
그 사람은 바로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와는 관계가 먼 사람이다. 이러한 것들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사람들이다.
법적으로 위법한 행위를 도모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그리스도인으로써 양심의 가책을 받는, 죄책감을 느끼는 행위를 스스로 행하지 않는 것이다. 가책을 받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자신에게 죄를 범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옳지 않다고 명하신 모든 죄악의 행위들을 쫓아가는 것을 단호히 거절하는 것이다. 그것은 때론 우리의 감정과 우리의 이성을, 기분을 다치게 한다. 우리의 욕망과 우리의 생각을 뒤로 미루게 한다.
나만의 기준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감정과 충동으로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을 시도할 때가 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건 맞지 않건간에 나의 기준에 서서 내 생각, 내 고집, 내 성격, 내 기분, 내 감정에 따라 나의 행동을 이끌게 한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본성이다. 인간의 죄악스러운 본성이다. 아담과 하와가 왜 선악과를 따먹었겠는가? 그 인류의 시조였던 그 두 사람에게도 우리와 똑같은 이런 심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 기분에 맞아야 하고, 내 취향에 맞아야 하고, 내 기호와 내 스타일에 맞추고 싶어하는 그것, 그러한 우리의 심성이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신 하나님조차도 자신의 틀에 끼워 맞출려고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한테 맞춰야지. 내가 하나님한테 맞추어야 하나?’ 라고 대구할 것이다. 물론 이런 배은망덕한 경우가 있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경우는 결코 여러분 안에 없다고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또한 위선일 것이다. 우리는 늘 살아가면서 우리의 뜻에 따라 학교를 선택하고, 배우자를 선택하고, 직업을 선택하고 자식의 진로를, 자신의 사업계획을 우리의 뜻 안에서 고민한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고민하기보다는 우리들의 뜻 안에서 우리의 생각을 관철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자주 본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이용하기도 한다.
‘설마 우리가 그 위대하신 하나님을 이용하였을라구?’
하지만 우리는 그 위대하신 하나님을, 하나님보다 더 위대한, 주님보다 더 위대한 나의 본성에 맞추고자 이용할 때가 있다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그렇게 행동하고 나서 후에 우리의 뜻이 무너지거나 우리의 계획이 뒤틀어지면 그 때서야 두 손들고 앞에 가 하나님 앞에 후회의 눈물과 회개의 통곡을 한다. 그것이 바로 복음서에 나오는 ‘탕자의 모습’이다.
우리에게 얼마나 이러한 모습이 많은가?
사탄은 언제나 우리 자신을 부추켜 우리의 생각을 정당화시키며 합리화시킨다.
사울의 합리화
마치 사울이 사무엘이 더디 오는 것을 보고 다급해진 나머지 자신의 생각 하에 제사를, 예배를 주관했던 그 어처구니없는 발상처럼 우리도 우리 스스로의 행동을 정당화시킬 때가 얼마나 많은가? 아무리 위대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사람의 본성은 어찌 할 수 없나 보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이 코 앞인데, 선지자 사무엘이 더디 오자 선을 넘고야 만다. 왕이 제사장의 권한을 침해한 것이다. 오만방자한 행위였다. 사울에게 있어 제사, 예배는 하나님께 주도권을 드리는 어떤 행위가 아니라 전쟁을 위해 빨리 치뤄야 하는 세레머니, 일종의 주술적인 행위였기에 자신이 관여했던 것이다. 정말 사울이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다' 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는 기다려여야 했다. 이스라엘의 전쟁의 자신의 전쟁의 기념비를 쌓기 위한 액션이 아니라 모든 것이 주님에 손에 달려있음을 다시 한번 주지해야 할 순간이었다. 하지만 사울은 사무엘이 더디 온다고 자신이 예배를 주도하고 주관해 버리고선 자기의 행동을 합리화시켰다.
다윗의 합리화
우리가 그렇게 존경하는 인물 다윗, 다윗은 시편의 73개의 시를 기록하였다.
그 다윗도 자신의 밧세바와의 불륜을 감추기 위해, 그 임신을 숨기기 위해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를 살인하는 의도적인 범죄를 저지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 하에 인생 만사가 진행되는 것이지만, 사람이 아무리 경건하다고 해도 죄에 빠지게 되면, 욕심에 눈이 멀게 되면 하나님의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불륜을 저질렀고, 그 불륜을 감추기 위해 불륜녀의 남편을 살인하는 계획을 결국 실행하는 다윗이다. 다윗도 죄를 짓게 되면 별 수 없이 나락을 떨어지는 인간임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의 합리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자신의 아내가 너무나 아름다운 나머지 이방 나라 왕에게 빼앗길까봐, 그로 인해 자신의 목숨이 달아날까 봐 사라가 자신의 누이라고 합리화시키지 않았는가?-실제로 사라는 자신의 친척이자 누이였지만 엄연한 아내였고 마누라였다. 가정의 가장인 아브라함이 어떻게 자신의 아내를 지키고자 하는 노력 보다 오히려 자신의 목숨과 생명을 우선시하여 이런 거짓말 같지 않은 거짓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참으로 찌질한 아브라함의 액션이 아닐 수가 없다. 하지만 사람이 위기에 노출되면 자신의 약점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거기에 아브라함의 합리화가 있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를 멀리한다고 시편1편의 저자는 말하고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그 위대한 조상 아브라함도 그러한 어처구니없는 실수와 죄를 저질렀고, 다윗은 더 했다. ‘하나님의 마음에 심히 합한 사람이라는 칭송을 받았던 다윗’조차도 그러한 범죄를 저질렀는데 우리같이 심히 약한 사람은 어찌해야하는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2절)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2절)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 설사 우리가 잠시 잠깐 악인의 꾀와 계획 속에서, 죄인의 길과 방법에 들어서서, 오만한 자리에 앉을찌라도 여호와의 율법이 그 사람의 마음속에 가득한 이상 다시금 회복되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본성과 심성으로는 도저히 악인의 꾀와 죄인의 길과 오만한 자리에 머무를 수밖에 없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길에 들어설 수 있게 된 것은 여호와의 율법이라는 것이다. 말씀 때문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말하고 있다.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 그 마음 속에 말씀이 있어 즐거워하는 자는 복된 사람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말씀 없이는 우리 자신을 지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며, 이 말씀은 곧 우리 주님이시다.(요 1장)
우리는 하나님 없이 우리의 생을 살아간다는 것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부분적으로 하나님을 배제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기에 우리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이 묵상하여야 한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께서 터무니없는 명령이나 우리의 기대와는 딴판으로 응답하실 경우가 더러 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께 투정하고 하나님을 원망한다.
‘하나님 왜 내게 이러한 고통을 주셨나요?
하나님, 왜 내게 이러한 아픔을, 이러한 시련을, 이러한 실패를 주셨나요?’
라고 외칠 것이다.
왜 그렇게 밖에 우린 질문할 수 없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 안에 ‘말씀생활’이 없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생활이 없고,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삶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우리 삶에 고통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고통은 늘 우리 삶 속에 불거져 나온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환경과 상황들 가운데서도 우리가 ‘평안’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말씀’때문인 것을 기억하라. 우리가 늘 고통 속에 헤매기에 ‘평안’을 유지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우리 안에 '말씀‘이 없기 때문이다.
빌립보서 4:6-7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믿음을 장사지내는 제자들
우리는 다락방에 앉아 제자들이 예수님이 죽은 것으로 인해 절망한 모습을 요한 복음에서 볼 수 있다(20:19). 그들은 당대의 사람들처럼, 군중들처럼 예수님이 무언가 대단한 정치적인 메시야나 권력자의 한 자리를 차지할 것을 기대했지만, 너무나 허무하게 십자가에 매달려 버리셨다. 그들은 예수님 옆에 따라다닐 때는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웠던가? 하지만 이제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리셨고 제자들은 다 뿔뿔히 흩어져버렸고 그들의 믿음과 3년의 제자생활은 너무나 허망하게 휘발되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두려워했다. 군중들은 예수님이 정치적인 메시야로 등극하길 기대했고 그래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호산다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하면서 환호하고 환대했지만, 지금의 군중은 자신들의 기대를 져버린 예수에 대해 등 돌렸고 허망하게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에 대해 혀를 차며 욕하며 비난했다. 그의 제자들 또한 잡히기만 하면 때려 죽여도 괜찮은 분위기였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 다락방에 문을 꼭 닫고 숨어지내고 있다. 세상의 모든 소망이 사라져버린 것처럼 그들은 풀이 죽어 좌절과 절망에 압도되고 있었다.
왜 그러했는가?
제자들에겐 말씀이 살아 있지 않았다.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동고동락할 때는 그들의 삶 속에 예수님은 살아있었다. 예수님은 살아있는 로고스, 말씀 그 자체였다. 그들은 예수님이 살아 있을 시에는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님을 믿었지만, 예수님이 육신의 먼지가 되어 무덤 속에 장사지냈을 때는 그들의 믿음도 무덤 속에 고스란히 장사지내게 되었다. 우리의 믿음이 이와 같지는 않는가?
삶이 조금만 힘들면 우리의 믿음을 장사 지내 버리는 제자들의 모습!
제자들은 예수님과 같이 사역을 할 때 예수님이 하신 약속의 말씀을 붙들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씀을 잊어버렸다. 깡그리 채 잊어버린 것이다. 그들은 오직 예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에겐 말씀을 묵상하는 삶이 없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무언가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내놓고 싶은 출세욕도 있었을 것이고, 자신의 명함을 내놓고 싶은 명예욕도 있었을 것이다. 3년 동안 제자훈련한 것이 아무런 의미도, 힘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 안에 말씀이 없을 때는 제자들의 모습과 똑같은 모습이 우리에게도 나타날 것이다. 신앙을 위장한 허세가 그랬고, 믿음을 포장한 제자활동이 그러했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부활 후에 그들에게 그 다락방에 나타나셔서 첫 마디를 던지셨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말씀이 없는 세상에는 평강도 없다. 말씀이 없는 세상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오셨다. 살아있는 말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어린 아이들에게 우리는 ’예수님은 어디있니?‘라고 물으면 ’내 맘속에‘ 있다고 대답한다. 그렇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이시다. 이 거룩한 율법, 성경에 예수님이 나타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라는 말은 영어성경에는 ’그의 즐거움이 그의 율법 안에 있다‘, ’복 있는 사람의 즐거움은 말씀 안에 있다‘라고 말한다. 여러분의 즐거움이 말씀 안에 있는가? 아니면 세상 안에 있는가? 여러분의 즐거움이 성취욕, 출세, 성공, 결혼, 사업, 자식사랑, 재물, 명성, 인기에 좌지우지되는가? 아니면 말씀 안에 뿌리박고 있는가? 앞에서 이야기한 다윗은 물론 그런 파렴치한 죄악을 저질렀지만 곧 회개하였고 다시 다윗의 다윗다운 모습을 회복하였다. 그는 평생 하나님 앞에서 순수한 사람으로 서 갔다. 그의 즐거움은 자신이 목동시절에 묵상했던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이었다. 그 말씀은 세월이 흐르면서 다윗의 삶에 뿌리를 내려 일평생 그의 삶을 주관케했던 즐거움의 원인이었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 보다 더 하니이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시편 4:7-8)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시오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 나의 하나님이시오 나의 피할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오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로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시편 18:1-3)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 찬양 가사
1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는 나의 반석이시며 나의 요새시라
주는 나를 건지시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
나의 피할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그는 나의 여호와 나의 구세주
2 나의 생명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는 나의 사랑이시며 나의 의지시라
주는 나를 이끄시어 주의 길 인도하시며
나의 생의 목자되시니 내가 따름이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생명의 면류관으로 내게 씌우소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그는 나의 여호와 나의 구세주
시냇가에 심은 나무(3절)
시편 기자는 말씀을 즐거워하는 자,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를 비유하기를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고 했다.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시냇가에 심긴 나무는 시내로 인해 늘 수분과 영양분을 끊임없이 공급받기에 나무로써 부족한 것이 없다. 그 나무는 고갈되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시냇가에 심겨졌기 때문이다. 시내는 그의 엄청난 수원지이기 때문이다. 말씀을 늘 가까이하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복되다. 그 뿐만 아니라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를 억지로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멀리하게 된다. 말씀이 우리의 의지가 되기 때문이다. 말씀이 우리의 기분을 헤치지 않고 순종하게끔 하기 때문이다. 말씀은 이러한 능력이 있다. 죄를 멀리할 뿐만 아니라 죄를 정복하는 힘이 있다. 이런 힘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만이 가질 수 있는 능력이다. 반대로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사람은 결코 이러한 능력을 소유할 수 가 없다. 왜냐하면 그 사람에겐 ‘말씀이 없기 때문이다’. 조금만 흔들리고 조금만 어려워도 금방 쓰러져 버리는, 금방 믿음의 자취를 감춰버리는 사람들은 바로 ‘바람에 나는 겨’같은 사람이다. 바람 부는대로 자신의 모든 것들이 움직이는 겨처럼 그 사람은 그렇다는 것이다. 자신의 기분과 감정과 취향과 뜻에 따라 휘청거리는 삶을 잘 표현해 주는 말이다.
V.6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Epilogue: 시냇가에 심은 나무인가? 바람에 나는 겨인가?
여러분은 지나온 세월동안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가? 말씀에 늘 거하는 삶을 살아왔는가? 아니면 말씀과 동떨어진, 말씀이 없는 삶을 살아왔는가? ‘시냇가에 심은 나무’로써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많이 맺는 삶을 원하신다면 말씀 속에 늘 거하라. 성경을 늘 가까이하라. 그 성경의 밀림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여러분의 상처를 치유하고 부흥되는 역사를 잊기를 간절히 바란다. 지나온 시간들이 ‘바람에 나는 겨’와 같았다면 그 모든 것을 여호와의 율법 안에서 자복하고 회개하며 ‘시냇가에 심은 나무’ 즉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되시기를 삼가 소망합니다.
오늘은 시편1편 1-6절의 본문을 가지고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는 주제로 강해설교한 내용을 공유하는데요. 특별히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여호와의 율법을 계속 기억하면서 뿌리내릴 때 평강이 가슴 가득히 안기는 삶이며 '바람에 나는 겨'와는 대별되는 삶임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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