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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시편

시편 139편 7-12절 설교, 내가 피할 수 없는 하나님

by Message.K 2023. 5. 1.

 구약성경 시편 139편 7-12절의 본문을 바탕으로 "내가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이란 주제로 설교한 내용을 포스팅하고자 합니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을 다시 한번 기억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 듯 합니다. 

 

 

 

시편 139편 7-12절, 내가 피할 수 없는 하나님
시편 139편 7-12절, 내가 피할 수 없는 하나님

 

 

7-12절: 내가 피할 수 없는 하나님

  여기서도 역시 다윗은 ‘주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니 계신 곳이 없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의 눈빛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넌센스퀴즈 중에 ‘세상에서 제일 큰 알은?’ 그렇다. ‘눈알’이다. 우리의 눈은 굉장히 넓은 광경과 시야를 확보한다. 눈이 그렇다. 부채꼴모양으로 눈은 우리의 눈에 들어오는 것들의 시선을 낚아챈다. 그런데 하나님의 눈은, 하나님의 눈알은 얼마나 크신지 우리의 모든 것을 보신다. 하나님의 눈알이 얼마나 큰지를 살펴보자.

다윗은 

(7)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주의 영을 피해서 어디로 가며, 주의 얼굴을 피해서 어디로 도망치겠습니까?

 

상상해보라.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동자, 그것도 엄청나게 큰 눈동자가 우리를 꿰뚫어보신다. 하나님의 거대한 얼굴이 우리를 보시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분으로부터 도망칠 수가 없다.

 

 

 

요나의 경우를 보자.

(욘 1:3)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의 면전에서 우리를 숨길 수 생각한다. 아니 착각하고 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다.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는 끊임없이 도망한다. 경찰과 형사들의 추적을 피해서 대부분은 결국 잡힌다. 그러다 그중에는 ‘화성살인사건’같은 완전범죄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얼굴로부터는 결코 도망질 칠 수 없다. 또한 인간의 내면에 움틀거리는 양심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죄책감과 죄책으로부터 결코 완전히 자유 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선으로부터 절대 자유로울 수가 없다.1)

그래서 다윗은 8-9절에서

[시 139:8-시 139:9] 
(8)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여기서 ‘하늘’, ‘음부’, ‘새벽날개’, ‘바다 끝’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무소부재심하심을 회화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다.

  비행기를 타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하늘 위, 구름 위에서 바라본 땅은 참으로 가마득하다. 시인은 우리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여기서 음부는 ‘스올’이란 단어로 죽음의 상태에 대한 회화적인 표현이다. ‘황천’, ‘하계’라는 말과도 바꾸어 쓸 수 있다. 이 음부는 여전히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으나(시 88:4-5),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를 체험하지는 못하는 곳이다(행 2:31). 그리고 이 ‘음부’는 죄에 대한 값으로 내려간다(시 55:15). 시인은 우리가 죽음의 상태에 들어가 죽음의 그 언덕에서 돗자리를 편다하더라도, 지옥의 구석에 자리를 편다 할지라도 주님은 그곳에 계신다고 말씀하신다.

 

 

 

 

 또한 9절을 쉽게 번역한 성경을 보면,

-내가 저 동녘 너머로 날아가거나, 바다 끝 서쪽으로 가거 거기에 머무를지라도

 

  여기서 ‘새벽날개’는 아침에 태양이 수평선 위에 떠오를 때 순식간에 그 빛이 퍼지는 것을 묘사하는 말로 빠르다는 의미이다. 빛의 속도는 1초에 지구 일곱바퀴 반을 돈다고 한다. 시속 30만 km이다. 페라리는 외제 스포츠차는 300km를 아무 탄탄하게 달릴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새벽날개 스포츠카는 30만 km의 엄청난 스피드, 빛의 스피드로 달린다. 페라리의 1000배 속도이다. 전투기의 속도도 절대 따라올 수 없다. 우리가 빛의 속도인 새벽날개 스포츠카를 타고 바다 끝 정말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가서 숨는다 하더라도 시인은 말하기를 ‘거기에도 계십니다’라고 말한다.

바다 저편은 히브리인들의 개념으로는 서쪽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과 하나님의 면전에서 끊임없이 도망치려고 해도 도망칠 수 없고 자유로우려고 해도 자유 할 수가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낯으로부터 피하려고 했던 요나처럼 행동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숨어 있는, 내가 도망친, 사람의 인적이 드문, 오직 나만이 아는 그 깊은 고통의 지하심연에서 하나님의 손을 붙드는 것이 더 현명할 것이다. ‘피할 수 있을 때까지 피해보지만’ 궁극적으로 피할 수 없는 현실이며 피할 수 없는 정면대결이라면 시인처럼 ‘거기에서, 바로 거기에서도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기를 원해야 할 것이다’.

(10)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다윗은 사울로부터 근 10여 년 동안 끊임없이 도망자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자신의 목숨과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늘 새롭고 숨기 좋은 은신처를 찾아야만 했다. 그가 깨달은 영적인 진리는 세상의 그 어떤 장소나 공간이라 하더라도 하나님만한 피난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수없는 시편에서 주님은 자신의 피난처임을 고백하고 있다. 예를 들자.

(시 62:7)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다윗은 어떠한 장소나 어떠한 공간에 자신이 거한다 하더라도

(10)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거기에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여 주시고 주의 오른손이 나를 힘있게 붙들어 주십니다.

 

라고 고백하고 있다.

 

  여기서 ‘오른손’이라고 했는데 성경상에서 ‘오른쪽, 오른편’은 이러한 의미가 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의 오른편에 계신다고 할 경우 그 분이 자신의 방패로 그를 보호하신다는 뜻이다.

(시 109:31)저가 궁핍한 자의 우편에 서사 그 영혼을 판단하려 하는 자에게서 구원하실 것임이로다

  

오른편, 오른쪽은 또한 전쟁터에서나 법정에서 사용되는 의미이기도 하다.

오른손에는 무기를 왼손에는 방패를 든 용사, 전사의 이미지를 떠올려 보라.

(시 16:8)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또한 왕의 오른편에 있는 자는 왕을 보호할 특권이 있었다. 왕의 오른편에 있다는 것은 신뢰의 표현이고 영예로운 자리에 있다는 것을 의미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시 16:11)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이처럼 오른편, 오른쪽은 의미심장한 구석이 있다.

 

  친애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떠한 자리에 있는가? 절망과 고통의 자리에 있는가? 아니면 벼랑 끝에 서서 불안하고 두려운 자리에 서 있는가? 전지하신 하나님, 무소부재하신 하나님-나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시자 내가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을 붙들라! 그 분은 다윗의 고백처럼 여러분의 피난처가 되어주실 것이다. 여러분의 소망의 오른손이 되어주실 것이다.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시인은 또다시 11-12절에서 주님의 전능하심을 고백하고 있다.

[시 139:11-시 139:12] (11)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12)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

 

-내가 말하기를 “아, 어둠이 와락 나에게 달려들어서, 나를 비추던 빛이 밤처럼 되어라” 해도, 주님 앞에서는 어둠도 어둠이 아니며, 밤도 대낮처럼 밝으니 어둠과 빛이 다 같습니다. 이전에 불렸던 CCM 노래 중에 '넘지 못할 산이 있거든'이란 곡이 있습니다. 그 가사를 한번 볼까요?

 

넘지 못할 산이 있거든

넘지 못할 산이 있거든
넘지 못할 산이 있거든 주님께 맡기세요
넘지 못할 파도 있거든 주님께 맡기세요
우리 가야할 길은 멀고도 험하여
허덕이며 가야하는 우리 인생인데
이럴 땐 우린 누굴 의지하나요
주님밖에 없어요
나는 그길 갈 수 없지만 주님이 대신 가요
참지 못할 분노 있거든 주님께 맡기세요
참지 못할 슬픔 있거든 주님께 맡기세요
우리 살아 갈길은 눈물의 골짜기
내힘으로 참지 못해 늘 흐느끼네
이럴 땐 우린 누굴 의지 하나요
주님밖에 없어요
나는 그 길 갈 수 없지만 주님이 대신 가요

 

 

 

  주님 앞에서 넘지 못할 산이 없고, 주님 앞에서 어두워서 보이지는 시야가 없다. 우리 주님의 불꽃같은 눈동자는 지금도 이 세상을 가득 메우시고 충만하게 그 영광을 선포하고 있다. 나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내가 피할 수 없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모든 것을 쏟아놓고 우리의 곯아터진 상처와 흔적들을 내어놓고 그 분의 도우심을, 그 분의 오른손의 도우심을 구하라!

 

 

 

 

  우리는 6-12절에서 내가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을 대면하였다. 우리가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은 구약에서 뿐만 아니라 신약에서도 여전히 확연하고 또렷하게 보여주셨다. 그 핵심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피할 수 없다. 죄로 가득한 인생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피할 수 없다. 대면할 수밖에 없다. 아니 십자가와 정면 대결해야만 한다. 정면 대결해야 만이 우리의 ‘모든 무거운 짐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릴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공의와 사랑의 만족점이며 교차로이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공의(죄에 대해 진노하시고 심판하심)와 하나님의 사랑(죄는 미워하시되 죄인을 끝까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심)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피할 수 없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죄인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다.

(롬 3: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우리의 죄에 대한 죄값을 우리는 치루어야 한다. 세상의 법을 어긋 범법자들은 자신의 죄에 대한 대가를 벌금형이나 감옥형이나 혹은 사형으로 죄값을 치른다. 죄에 대해서 반드시 심판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의이다. 우리에게 지은 죄가 있다면 하나님의 선하신 공의로운 심판이 임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처절한 심판의 단두대일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를 부인하고 싶고, 거절하고 싶고 피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조차도 그 하나님 아버지의 공의의 심판, 십자가의 심판, 저주의 심판, 공의를 피할 수가 없었다. 나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시기에 나는 하나님의 공의를 피할 수 없음을 기억하자. 그리고 겸손하게 순전하게 하나님을 섬기자.

  

 

 

둘째,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피할 수 없다.

  공의의 하나님을 우리는 피하고 싶어 하지만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에 감동하며 환영한다. 하나님은 죄는 미워하시되 죄인은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은 온갖 상처와 멍으로 가득할 것이다. 아들에 대한 가슴앓이로 인해 아들을 심판하고픈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공의로 다스리시기를 원했을 것이다.

  

 

 

프랜시스 톰슨의 '천국의 사냥개'

  프랜시스 톰슨(Francis Thompson)은 ‘천국의 사냥개’라는 매우 인상적인 표현으로 하나님을 비유했다. 프랜시스 톰슨은 사랑받지 못하고 외로운 유년기를 보냈으며, 로마 카톨릭 신부가 되는 데에도, (아버지를 이어) 의사가 되는 데에도, 그리고 군인이 되는 데에도 연이어 실패했다. 어떤 그리스도인 부부가 그의 시적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도와줄 때까지 그는 런던 거리를 방황하며 지냈다. 이 시기 내내 그는 무엇인가를 쫓는 자신과 무엇에 쫓기는 자신 모두를 인식하고 있었고, ‘천국의 사냥개’라는 시에서 그것을 설득력 있게 잘 표현하였다. 그 시는 잃어버린 탕자의 이야기와 맥락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그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네, 밤에도 그리고 낮에도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네, 수많은 세월 동안을.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네, 내 마음속 미궁 같은 길로.

  그리고 슬픔 속에서도

나는 숨었네, 겉으로는 연이어 웃으면서도

  희망에 부풀어 오르다가도

두려움의 골짜기 거대한 음울 속으로

  곤두박질쳐 버렸네.

나를 따라오는, 추적해 오는 그 힘찬 발소리로부터.

  그러나 서두르지 않고

흐트러지지 않는 걸음걸이,

  일부러 속도를 내며, 장엄한 긴박함으로

두드린다-그리고 한 목소리가 두드린다.

  발소리보다 더 긴박하게-

‘네가 나를 배반하기에, 모든 것이 너를 배반한다’2)

 

 

아버지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쳤던 탕자와 그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구도...

하지만 아버지의 그 공의의 이면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다. 아들에 대한 원망과 아픔과 상처로 가슴은 찢어졌고 긴 기다림으로 진노의 체벌을 준비했다고 상상해 보라. 하지만 잃어버린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광경을 목도했을 때 그가 들고 있던 체벌을 가하기 위한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눅 15:20)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죄인들이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에 입을 맞추라. 하나님의 사랑을 얼싸 안으라!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찬송가 404장 3절의 가사에 잘 드러나 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 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렇게 죄인들을 향해 말씀하신다.

 

“가여워라, 너는 알지 못하도다,

네가 얼마나 사랑받을 만하지 못한 존재인지!

너처럼 비천한 자를 사랑할 이 누가 있으랴,

나, 오직 나 외에는?

  

 

나의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 내가 피할 수 없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게서 가지고 가지고 간 모든 것은

너를 해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네가 그것을 내 품에서 찾게 하려는 것이라...

일어나라, 내 손을 잡아라, 그리고 내게로 오라!”3)

 

 

나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내가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초청에 응하라!

나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내가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을 일평생동안 기억하시는 King's Army의 모든 지체들 되시기를 소원한다!

 


1) 제임스 L. 메이스, 신정균 역, 현대성서주석: 시편(서울: 한국장로교출판부, 2002), 547-548.

 이 시편기자는 자신의 존재 전부가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그러나 이 시편 기자는 자신을 하나님에게 갇힌 자 또는 하나님의 단순한 수단으로 보지 않는다. 이 시편기자는 하나님을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자유롭다.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의 한계이지만, 그는 하나님께 대해 실제적인 인격체이다. 하나님은 이 시편기자를 위해, 이 시편기자에 대해 자유롭다. 이 시편기자를 향한 하나님의 관계하심은 이 시편기자의 생각을 뛰어넘는다. 그가 아는 것은,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지식은 기이할 뿐이다...

2) 존 스토트, 양혜원 역,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서울: IVP, 2004), 19-20.

3) 존 스토트, 20.

 

 

시편 139편 7-12절의 본문을 가지고 '내가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이란 주제로 설교한 내용을 공유했는데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속성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도, 하나님의 공의도 피할 수 없다는 이야기, '천국의 사냥개'이야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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