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시편 23편 1절의 본문을 기초하여 "The Lord is My Shepherd"라는 주제로 대학.청년들에게 과거에 설교한 내용을 포스팅하고자 합니다. 다윗이 언제 이 시편을 기록했는지에 대해 유추해보고, 팔레스타인 지방에서의 목자와 양의 관계도 살펴보겠습니다.
시편 23편
흔히 이 시가 다윗의 어린 목동 시절에 지은 시라고 생각, 외적인 증거는 없다. 하지만 읽다가 보면, 오히려 다윗이 말년에 지은 시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 시 속에 나오는 표현이 그런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자기 이름을 위하여’,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 ‘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히’등의 표현은 10대의 소년 양치기가 쓰기에는 동떨어진 표현이다. 10대에 얼마나 조숙했길래 그런 표현이나 단어들이 나오겠는가? 이것들은 목가적인 전원생활에서 비롯된 내용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치열한 싸움판과 같은 인생경험과 연륜을 지나오면서 깨닫게 된 사실에 대한 신앙적인 표현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이 시가 자기 아들 압살롬에게 공격을 받아서 도망가는 극심한 시련을 당한 직후에 쓰였다고 보기도 한다(카알 델리취). 만약 정말 이 시가 압살롬의 쿠데타 사건에 쓰였다면, 정말 사람의 인생은 그냥 평범하게 살기만 하면, 별 어려움 없이 형통하게 살기만 한다면, 과연 거기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생생하게 살아 숨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윗이 정말 승승장구하면서 잘 나갈 때는 밧세바와의 불륜과 그의 남편, 우리야를 살해하는 범죄의 자리에 나아갔었다. 하지만 다윗이 승승장구하다가 비극중의 비극인, 아들이 아버지를 모반하는 이런 중차대한 불효와 반역의 사건이 있었기에 그는 ‘여호와는 나의 왕, 나의 국왕, 황제’라고 하지 않기 보다는, 오히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그렇다면 시인은 가장 곤고하고 어려운 시기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고백하는 셈이 된다. 다윗을 가장 다윗답게 만든 시편이기에, 더 인기 있고 잘 알려진 시편23편이 아닐까한다.
여호와
우리가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들을 때에 출애굽기 6장을 생각하게 된다.
출애굽기 6:2-4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이니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칭호는 그분의 가장 고유한 칭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히 하나님의 본명을 입에 담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십계명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죄많은 인간의 입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본명을 거명한다는 사실 자체가 계명을 범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거룩한 이름을 호명하는 것조차 쉽게 용납되지 않았다.
“너는 너의 하나님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 20:7)
구약에서 ‘여호와’라는 이름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이라는 호칭과 구분되어서 사용된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라는 이름은, 특별히 하나님이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아니하시며 홀로 스스로 자존하시는 분임을 알려 주거나, 또는 그 분의 이름을 계시하는 것이 당신이 선택하신 백성들과의 언약 관계에 있음을 강조할 때 자주 사용하였다(출 3:13-14).
하나님은 지존하시고, 자존하신 분이시고 또한 여호와라는 칭호는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 약속(언약 관계)에 있을때에 이 호칭을 사용한 것을 기억하자!
나의 목자
여호와는‘나의 목자’라고 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말은 당신을 경외하고 따르는 자들의 그룹, 순종하는 자들만의 목자가 아니라, 자기의 고집대로 각기 제 길로 행하여 길을 잃어버린 자들,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도 목자가 되어 주신다. 그뿐이 아니라 아직 신앙으로 들어오지 아니한 불신자들도 자신의 양떼로 여기시는 하나님이시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요10:16)
목자는 삯군과 다르고다! 목자는 삯군이 아니다.
요 10:13-16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삯군은 알바생보다 못하다. 사장과 정식 직원과 알바생과는 차이가 있다. 다들 회사를 사랑하겠지만 사장, 직원, 그리고 알바생의 생각하는 것은 천지차이다. 하나님은 양들을 대하실 때 알바하는 사람들처럼 하지 않으신다. 알바하는 사람들은 피곤하면 눈속임으로 대충 청소할 수도 있고, 지각할 수도 있다. 자기 근무한 것을 제대로 정직하게 기록하지 않고 임금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목자는 삯꾼처럼 일하지 않으신다. 목자는 삯꾼처럼 양들을 무심하게 대하지 않는다. 목자의 시선은 언제나 따뜻하다. 99마리 양이 있었지만, 1마리 양을 잃어버렸을 때 가만히 있지 않았다. 99마리 중에 1마리밖에 잃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99마리가 있기 때문에 한 마리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생각을 할 수 없다. 무신경한 것이 아니라 99마리를 놔두고 1마리를 찾아나선 것이다. 그것은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물량적인 계산, 수학적인 관점이 아니라 관계 때문이다. 양과 목자의 관계 때문이란 말이다. 목자는 그 잃어버린 양의 이름을 불러가면서 찾아나서는 것이다! ‘양돌이 찾아 삼만리’
예수님은 자신을 요한복음에서 ‘나는 선한 목자’라고 직접 발언하셨다.
요한복음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한복음 10: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예수님은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고, 양과 목자인 자신과의 친밀한 관계를 말씀하셨다. 우리의 목자라는 표현보다 ‘나의 목자’라는 표현이 훨씬 더 친밀하고 개인적이며 주관적으로 느껴진다.
목자와 양
목자는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짐승을 치는 사람이다. 목자라는 단어를 통해서 다윗은 자신이 누구인지 또 자신이 알고 있는 여호와는 누구이신지, 여호와가 지존자이시고 전능자이시지만 아버지와 같은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이 간단한 단어를 한 마디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가 목자라는 말은, 시인은 자신이 양이라고 보는 것이다.
우리는 양에 대해 여러 가지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양을 기질적으로 양순하고, 사람의 말을 잘 듣고, 다른 가축과 다툴 줄 모르는 순한 성품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과 가까이 지내며, 목축을 위하여 잘 길들여지며, 비교적 친근하고 깨끗한 짐승이라는 이미지이다. 그래서 우리는 양들이 파란 풀밭에서 한가로이 뛰노는, 그림과 같은 장면을 연상하며 거기에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을 투영해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선입견이다. 정작 중동 지방에 사는 양은 다르다. 중동지방에서 가장 상스러운 욕 중의 하나가 무언지 아는가? 우리는 ‘개’라는 동물을 사용하지만, 이 친구들은 뜻밖에도 ‘양’을 사용한다. ‘양 같은 놈’이라는 말! 그 지방 사람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천박하고 치욕적인 욕설이다. 그들에게 있어 ‘양’이란 동물은 생각이 모자라고 어리석으며 고집이 세고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모르고 지저분한 짐승의 대명사이다.
양이 힘이 없고 연약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우리의 선입견일 따름이다. 덩치가 큰 양은 대단히 힘이 좋다. 앞발을 뻗어 버티고 있으면 좀처럼 끌고 가기 어려운 고집불통의 짐승중의 하나이다.
이사야는 53:6에서 양을 이스라엘 백성에 비유하면서 그들의 특징인 고집과 독선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을 거스르는 불순종의 길로 가게 될 것임을 예고하였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양의 가장 결정적인 특징은 눈, 시력이 매우 나쁘다는 것이다. 분명하게 물체를 분간하는 지점이 약 2~3m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양은 선천적으로 눈이 나쁜 짐승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짐승 중에 가장 길을 잘 잃어버리는 동물의 대명사로 양을 거론하는 이유가 그런 약점 때문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양은 이빨도 튼튼하지 못하다. 표범이나 사자처럼 자기의 적을 물어뜯을 수 있는 강력한 이빨을 가지고 있지도 못하다. 그렇다고 해서 염소처럼 적수를 받아 넘어뜨릴 날카로운 뿔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에게는 치타처럼 빠른 다리, 곰같이 날카로운 발톱도 없다. 숲속의 카멜레온처럼 자신을 숨기거나 변신할 있는 능력도 없는, 순백색 동물이 바로 양!
양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동물
양의 특성을 종합해보면, 그 친구는 “혼자 살아갈 수 없는 동물이다”
목자가 없으면 양은 살아갈 수 없는, 보호자가 없으면 양은 살아갈 수 없는 동물이 바로 ‘양’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사람은 바로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없이 살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 오직 여호와 그 분만이 자존하시고, 지존하시고,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말은 ‘하나님, 저는 당신의 보호와 인도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예전에도 그러하였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러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참회록 고백
“내가 하나님의 품안에 안기기까지는 영혼에 안식이 없었나이다.”
목자되신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기질과 성품과 자질까지도 다 고려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사람마다 다루시는 방법도 달리 하신다.
저는 책을 좋아한다. 책 읽는 것도, 책 읽지 않고 책장에 꽂아두고 진열된 책을 보면서 지적 허영심을 즐긴다. 이론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와이프는 책읽기는 즐기는 타입은 아니다. 책을 좋아해서, 서점에 가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죽치고 있다가 시간 엄청 보내고 나오면 내가 왜 그렇게 많은 시간을 보냈나 싶을 정도로 후회하는 유형이다. 그런 저에게 하나님은 책읽는 여자 보다는 실천하기를 즐기는 행동가 유형의 아내를 붙여주신 것은 정말 하나님의 작전인 듯하다.
예전에, 아들에게 먹일 분유가 떨어져 분유를 사러 가야하는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다. 아침 7시에 홈플러스 매장을 찾아가 직접 직원에게 분유를 구입하는 행동의 센스를 발휘했던 아내였다. 나라면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남편보다 더 센스있게 움직인 아내, 하지만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부성과 모성을 모두 가지신 분이시다. 인간의 모든 필요와 니즈에 가장 섬세하게, 디테일하게 케어하실 수 있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 34:10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의 것으로 인해 부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부요함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이 다윗의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바란다.
오늘은 시편 23편 1절의 본문을 가지고 "The Lord is My Shepherd"라는 주제로 설교한 내용을 공유해 봅니다.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양과 같은 인생에 우리의 만족이 되시는 하나님으로 감사하는 우리 모두가 되었음 하는 바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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