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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시편

시편 149편 설교, 찬양할지어다 즐거워할지어다 노래할지어다

by Message.K 2023. 4. 27.

구약성경  시편 149편의 본문을 가지고 '찬양할지어다, 즐거워할지어다, 노래할지어다'라는 주제로 과거에 설교했던 내용을 포스팅하고자 합니다. 이 짧은 본문을 통해 하나님을 즐거워하면서 찬양하고 노래하는 라이프스타일이 어떠한지 한번 알아보고자 합니다.

 

시편 149편설교, 찬양할지어다 즐거워할지어다 노래할지어다
시편 149편설교, 찬양할지어다 즐거워할지어다 노래할지어다

 

 

① 찬양할지어다

 

(1)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회중에서 찬양할지어다

  사랑하는 지체 여러분, 이 세상에 과연 새로운 노래가 있을까? 아니 영원한 새노래가 있을까? 작년에 흥행했던 영화 ‘맘마미아’ , 아바의 음악을 리메이크하거나 새롭게 편곡해서 내놓은 그 음악은 대박을 터뜨렸다. 내용은 정말 아무것도 없다. 정말 반윤리적이고 패륜아적인 내용, 엄마에게 남편이 3명! 딸 소피에게 아빠가 3명! 정말 엉망진창인 애정행각인데 그게 묻힐 수 있었던 것은 바로 ‘ost’때문이었다. 나는 그 음악이 좋아서 영화도 보기 전에 ost를 구입해서 귀에 닳도록 들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인간의 음악이란 것은 귀에 닳도록 들으면 질린다는 것이다. 변화가 없으면 시들해지는 것이 음악이란 것이다. 여러분이 아무리 좋아하는 가요나 팝송이 있다 치자, 그러나 그 음악을 계속 들어보라! 처음 부를 때의 그 감동은 사라지고 만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만든, LIMIT를 가진 인간이 만들었기 때문에 limit가 남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영원한 ‘새 노래’는 없단 말인가? 이 세상에 새 노래는?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 각 개인 차에 따라서...모더니즘이 만들어낸 고전음악, Classic을 들을 때마다 색다른 느낌을 준다. 물론 개인차가 있겠지만.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는 늘 새노래로 노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 1절에 나오는 새노래는 두 가지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겠다.

 

 

 

  첫째, 이 새노래는 말 그대로 ‘새로 작곡하고 작사하고 만들어낸 곡, 노래’로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전에 수많은 복음성가와 찬송가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올해부터 우리교회가 21세기 찬송가를 사용하듯이, 새로운 곡들을 듣기를 원하신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쉽게 질리시고 식상해하시는 분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재능과 은사를 통해 만들어진 새로운 곡들로 찬양받기를 기뻐하신다는 말이다. 여러분이 부모가 되었다고 가정해 볼 때, 자녀가 늘 똑같은 노래만 부르고 똑같은 짓(소꿉놀이, 딱지치기 등)을 하면 좋아할 부모는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애들도 커가고 변해가고 성숙해간다. 그러면서 부르는 노래가 다르고, 라이프스타일이 달라진다. 변화하는 모습을 보기를 원하는 부모의 마음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변화를 보기를 원하시는데 특별히 우리가 부르는 노래의 변화를 보기를 원하신다. 이 세상에 음악없이 사는 사람들은 드물다. 비디오 없이 사는 사람은 있어도 오디오 없이 사는 사람은 드물다는 이야기.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인해 믿음이 생긴다는 말씀과 일치한다. ‘믿음은 보는 것에 나는 것이 아니라 들음에서 난다’는 말! 듣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다.

 

 

  다시 돌아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새 노래’로 예배하기를 기뻐하신다. 그렇다고 늘 3부 예배 때 다른 곡을 추구하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저는 아직 잘 불려지지 않은 곡들은 1-2곡 정도 계속 부르기를 원한다. 그것은 우리의 예배의 경직화를 우려한 것도 있지만 특별히 우리 교회의 젊은이들이 ‘새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젊음은 그게 좋은 것이 아닌가? 나카타니 아키히로가 자신의 책 '20대, 30대에 하지 않으면 안 될 50가지'에 많은 나라에서 똥를 누라는 이야기! 그것은 그만큼 젊은 시절에 많은 외국 경험, 신선한 경험들을 해 보라는 이야기이다. 노래도 마찬가지이다. 찬양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영혼의 노래의 영역도 더 넓어져야 하고, 더 새로운 변화와 스타일과 곡들로 도전해보고 싶은 그것이 바로 젊음이라고 생각한다. 여러분이 60대-80대의 어르신들이 아니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나이가 들면 새로운 곡을 배우고 싶어도 배우지 못한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생체리듬이 그렇게 변화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젊음이 있을 때 우리가 새로운 곡들로 주님을 더 깊이 예배했음 좋겠다.

 

 

 

 

 두 번째, 새노래는 단순히 ‘새 곡, 새 노래’라는 의미를 넘어 Born again의 노래라는 것! 우리가 거듭나기 전에 부르는 노래와 거듭난 후의 부르는 노래는 다르다. 아무런 감흥이나 감동없이 부르는 노래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노래와는 다른 노래라는 것이다. 요나가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도망하였던 시절에 불렀던 불순종 상태의 노래와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지옥(스올)의 고통을 체험하고 바닷가에서 토함을 당해서 부른 노래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은 바로 영적으로 새롭게 회심하고 변화된 노래, 그러한 새 노래, 회심한 노래를 듣기를 원하신다. (중고등부 시절에 POPsong을 진짜 많이 들었던 경험, 그러나 찬양단의 밴드를 맡으면서 고3 PoPsong tape를 모조리 정리했었다, 지금 같으면 그렇지 않겠지만 그 당시에는 그렇게 결단했다-이원론의 소지가 있긴 하지만. 그것이 나의 신앙의 결단이었다). 영적으로 새롭게 변화되는 노래를 부르라! 수련회나 부흥회나 집회를 참석하고 나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나면 노래가 달라진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달라질 징조이고 표징이다. 사람은 어떤 노래를 부르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이 달라진다. 비극을 노래하는 사람들은 늘 비극적인 삶을 살 것이고, 희극을 노래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희극적인 삶을 살 것이다.

  선택하라! 어떤 노래를 부르기를 원하는가?

 

 

 

 

② 즐거워할지어다

(2)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자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시온의 자민은 저희의 왕으로 인하여 즐거워할지어다

  요즘 이스라엘이 속된 말로 겁대가리도 없이 팔레스타인의 가자지구를 침략하고 폭격하고 요즘 정말 막 나간다. 왜 이스라엘이 이런 짓을 자행하는가? 물론 미국의 후원을 받는 것도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의 정체성1)이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 나라는 강력한 선민의식에 근원한 이스라엘 정체성 때문에 그 땅덩어리 작은, 우리나라보다 더 작은 나라가 그토록 설치는 것이다.

  본문에서 이스라엘은 단순히 그 민족적인, 혈통적인 이스라엘을 넘어 초월적인 이스라엘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의미하는 것이다. ‘신의 분노 작전’을 수행할 정도로 치밀하고 의기양양한 이스라엘! 우리들은 유대인들처럼 그렇게 극단적이지는 않을지라도 우리는 말씀처럼 ‘자기를 지으신 이로 말미암아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주님을 모시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시온의 주민은 그들의 왕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사랑하는 청년, 대학부 지체 여러분!

  여러분들은 여러분을 지으신 하나님, 그 왕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한 적이 있는가?

일주일 살아가면서 여러분은 지으신 자로 말미암아 즐거워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는가? 솔직히 여러분이 일주일동안 그런 순간, 하나님과의 대면하는 encounter의 순간이 없다면 3부 예배 때 그 일주일의 모든 시간을 커버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존 맥아더 목사님의 ‘참된 예배’라는 책이 나오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는 일주일에 한 번 드리는 예배가 예배만이 아니라 예배는 말 그대로 삶이다’라는 말이 한국교회에 통용되어 왔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그토록 강조했던 ‘삶은 예배’라는 그것이 우리의 삶에 얼마나 자리잡고 있는가? 예배는 다른 게 아니고 바로 ‘자기를 지으신 이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는 것’이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찬양을 드리면서 감격에 젖고 즐거워하는 것,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감동에 젖는 것, 그것이 바로 예배,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그것이 바로 예배가 아닌가?

 

 

  문득 그런 책제목을 보았다. ‘예배인가? 쇼인가?’

  여러분은 어떤가? ‘자기를 지으신 이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고 세상의 왕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는’ 순간이 없는 그것은 예배가 아니라 쇼이다. 찬양예배를 드리던, 열린 예배를 드리던, 닫힌 예배를 드리던...KTF만 ‘쇼를 하는게 아니고’, 그리스도인들도 예배를 위장한 ‘쇼’를 많이 한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지체 여러분!

  하나님으로 인해 즐거워하라! 하나님 때문에 한 번이라도 즐거워해 보라! 즐거움의 순간을 추구하라! 한 번이라도 노력해보라! 이 세상은 수 많은 즐거움에 노출되어 있다. 돈만 있으면 수 많은 즐거움을 취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수 많은 오오락 예능 프로그램을 우리는 쉽게 접하면서 과묵하고 다운된 예배 분위기와는 차별된 쌈빡하고 신선한 즐거움을 취할 수 있다. 마일리지나 포인트만 좀 있으면 쉽게 지난 프로그램도 다운받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즐거움과 하나님으로 인한 즐거움을 차원이 다른 것이다.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즐거움에 여러분 자신을 한 번 내려놓아 보라!

 

 

 

③ 노래할지어다

(시 149:5)성도들은 영광중에 즐거워하며 저희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

 

시편 기자는 여기서 두 가지를 이야기한다.

성도들의 특권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① 영광2)중에 즐거워하며...

즐거워하긴 즐거워하는데 영광중에 즐거워한다고? 그 의미가 무엇인가?

우리는 영광을 경험하는가? 일상 가운데서 한 번씩 영광을 경험하는가? 아침마다 영광을 경험하는가? 어쩌면 영광은 우리들과 가장 동떨어진 단어가 아닌가? 영광중에 즐거워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일상 가운데서도, 우리의 죄악이 만연한 세상 가운데서도 분명히 체험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마라톤 경주자의 마지막 피날레에서 관중들로부터 받는 환호와 환대와 함성? 그것을 영광이라 표현할 수 있을까? 최고의 성적을 받은 장학생이 단에서 받는 상금과 트로피, 그로 인해 받는 그 박수와 갈채를 영광이라 표현할 수 있을까?(저는 상 받은 경력이 별로 없어서 모르겠다, 신학교 졸업할 때 성적으로 딱 한번 상 받았군. 사단장 표창장(선행상)을 받았군! 더 큰 상을 받아 본 사람 없는가?)

  내가 생각해 보건대, 우리는 아무리 해도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영광을 이해할 수 없고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추측해보면,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나, 기도를 통해서나, 찬양을 통해서나 아니면 다른 어떤 영적인 도구들을 통해서 느끼는 ‘영적인 카타르시스’같은 것이 영광에 속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영광을 조금이라도 맛볼 수 있는 자격은 바로 ‘성도’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성도는 영광중에 즐거워하며...여러분이 바로 그 성도들이다. 그 영광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지 모르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영광을 경험케하시고, 그 영광중에 즐거워할 수 있게 하소서.

 

 

 

② 저희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

  특별히 시편 기자는 여기서 세상의 수많은 장소들이 있는데 하필이면 잠자리에서, 우리가 잠을 자는 우리 하루의 일상의 가장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그 자리에서 노래할지어다고 말한다. ‘침상’은 그렇다. 우리가 하루를 시작하고 접는 곳이 바로 ‘침상’이다. 시인은 그 곳에서 노래하라고 말한다. 아침에 일어나기 너무 힘겹고 어렵고 무겁지만 눈을 떴을 때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그리고 하루의 마지막을 마무리할 때, 피곤하고 지쳐서 잠자리에 드는 그 장소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고 말한다.

  여러분들은 잠자리에서, ‘침상에서’뭘 하는가?

  아침에 노래가 나올 목 상태이든, 아니든지 간에 시인은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저희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라고 말한다.

  하루의 시작과 끝을 하나님께 찬양하는 가운데 노래하고 말한다. 그것도 ‘기쁨으로’!

  과연 우리는 삶이 피곤하고 힘겹고 수많은 문제들과 기도제목들로 둘러싸여 있는 가운데서도 ‘기쁨’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그렇다. 어렵고 힘들더라도 우리는 기뻐할 수 있다.

기쁨3)은 쾌락과는 다른 상태, 기쁨은 즐거움과는 다른 정신적인 경지이다. 노래할 수 없는 자, 노래하라고 말했다.

(사 54:1)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4) 구로5)치 못한 너는 외쳐 6)노래할지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 보다 많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아기를 낳지도 못한 여인, 아기를 낳아서 기르면서 수고하지도 못한 여인-아기가 없기 때문에-은 노래하고 외쳐 노래하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뒤 따르는 구절의 의미는?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 보다 많음이니라

 

 

 

  이 말은 지금은 홀로된 여인이고 자식도 없고 자식을 키울 수고도 필요치 않지만 후에는 많은 자식을 가지게 될 것임을 말하고 있는 미래적인 예언이 아닌가? 그런데 이것은 과학적으로, 합리적으로 생각할 때 말이 안 되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못박으면서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고 있다. 사람의 말이 아니라 성인이나 유명인이나 정치인이나 권력가의 말이 아니라 바로 약속을 가장 잘 지키시기로 유명한,‘하나님의 말’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반드시 이뤄지는 약속의, 언약의 말씀인 것이고 성취의 예언인 것이다.

  아기 없는 여인이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로 화할 수 있는 매개체는 바로 ‘노래할지어다, 외쳐 노래할지어다’에서 나오는 바로 ‘찬양, 노래’인 것이다. ‘노래’가 사람을 변화시키고 미래를 변화시키고 삶을 새롭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래가 가진 힘, 능력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 나라는 민족적인 한이 많은 민족이다. 그래서 노래가 전부 서글프고 한이 많고 슬프다.

  그러나, 찬양은 `이러한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사야는 외치고 있지 않은가? 하루의 시작할 때, 하루를 마칠 때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해보라.

 

  사랑하는 지체 여러분,

  새노래로 찬양할지어다!

  자기를 지으신 이로 말미암아 즐거워할지어다!

  여러분의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

 

 

 


1)  전세계 900만명의 시청자가 TV로 지켜보던 1972년 9월의 뮌헨 올림픽 도중, 사상 유래없는 끔찍한 테러 사건이 발생하는데, 바로 팔레스타인 테러집단 '검은 9월단'이 선수촌을 난입, 이스라엘 선수단 11명을 인질로 붙잡은 뒤 무참히 살해한 것이다. 전세계는 충격에 휩싸이고, 이스라엘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피의 보복을 결심한다. 곧 정부는 이스라엘 비밀첩보조직 '모사드(Mossad)' 소속의 최정예요원들을 소집하고 애국심에 넘치는 애브너 요원을 중심으로 한 복수단을 조직, 테러 사건에 가담한 팔레스타인의 11명을 차례로 암살하는 임무을 지시한다. 현대사에서 가장 대담한 암살극이라고 알려져있는, 일명 '신의 분노 작전(Operation Wrath of God)'이 시작된 것이다!(영화, <뮌헨>의 줄거리)

 

 

 

2)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께서 이세상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못마땅해 할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위해 노력하고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답지 못하다’는 심기 불편한 생각을 가지게 될 때가 있다. ‘하나님, 너무 이기적이신거 아니냐? 우리더러 네 이름을 네 자신을 위해서 살지 말라고 하면서 하나님은 왜 이기적이게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산다고 하느냐?’라고 삿대질할 수 있다. 지각이 있고 도덕적으로 깨어 있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자신의 영광’에 있다는 사상에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서 강하게 반대한다. 참다운 신, 참된 하나님이 고작 ‘자신의 영광’에 관심을 가지신다는 것은 ‘신성모독’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 J. I. Packer는 이렇게 답하고 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도덕적인 열심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늘 자기 자신을 추구하는 죄악에 대해 예민하다. 자신을 만족시키려는 소원은 도덕적인 연약함과 결함에서 기인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스로 최선을 다해 자기를 높이려는 욕구와 대면하여 싸우려고 애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중심적이라고 하는 것도 동등하게 잘못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높이신다는 개념을 열렬하게 거부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 자기를 추구하는 죄의식에 대하여 예민한 생각을 갖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러한 견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결론을 말하자면, 이러한 생각은 사실상 철저한 잘못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의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것이 우리에게 합당하다면, 하나님께서 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 잘못일 수 있는가?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지는 것보다 더 높은 목적을 가질 수 없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 그렇지 않다는 것인가? 사람이 하나님보다 더 작은 목적을 추구하는 것도 잘못이다. 그렇다면 나가서 하나님께서 자신보다 더 작은 목적을 추구하는 것도 잘못이다. 사람이 마치 자기가 하나님인 것처럼 생각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옳을 수 없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이 아니라는데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 나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만사에 당신의 영광을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사실상 하나님을 하나님 되지 못하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하나님 아닌 존재로 만들려는 것 보다 더 큰 신성모독이 없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시 46:10)

3) 기쁨- joy; delight; gladness; 『환희』 rap-ture; 『만족』 pleasure; gratification; 『축의』 congratulation(s)

4) @n"r;

발음 : {raw-nan'} : 라난

어원(기원) : 기본어근

TWOT : 2134,2179

품사 : 동사

파생어: 없음

  본래 의미는 '삐걱거리다'(또는, 찍찍 우는 소리를 내다), 즉 '소리치다' (일반적으로 기뻐서):- 기뻐서 외치다, 부르짖다, 기뻐하다, (매우) 즐거워하다(~게 하다), (기뻐서) 소리치다(~게하다), (기뻐서, 크게) 노래하다(~게 하다)

5) 구로(劬勞)【명사】【~하다|자동사】 자식을 낳아 기르느라고 수고함.

6) hN:ri

발음 : {rin-naw'} : 리나

어원(기원) : 7442에서 유래

TWOT : 2179c

품사 : 명사,여성형

파생어: 없음

  본래 의미는 '삐꺽거리는 소리'(또는, 비명 소리), 즉 (기쁘거나 슬플 때 내는) '함성':- 외침, 즐거움, 기쁨, 선언, 흥겨움, 고함, 노래(부르기), (승리의) 환호성

  1)울리는 외침

 

 

 

오늘은 구약성경 시편 149편을 대학.청년들을 대상으로 설교했던 설교제목 "찬양할지어다 즐거워할지어다 노래할지어다"라는 내용을 공유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원한 존재이유는 '그 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to enjoy'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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