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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시편

시편 84편 1-12절,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

by Message.K 2024. 1. 30.

구약성경 시편 84편 1-12절의 본문을 가지고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란 주제로 설교한 내용을 포스팅하고자 한다. 가장 소중한 예배와 성전을 잃어버린 이들이 성전을 향한 기쁨을 갈망하는데, 그 성전은 단지 건물이 아니라 그 곳에 임한 하나님때문임을 강조하는 해석으로 전개해 보겠습니다.

 

시편 84편 1-12절,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
시편 84편 1-12절,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

 

 

시편들 중에 가장 인기 있는 시편 84편

시 84:10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시온과 그 성전을 노래하는 시편들 중에서 시편 84편은 가장 인기 있는 시편이다. 이 시편은 하나님의 처소인 성전에 대한 기쁨을 비교와 경험을 토대로 표현하는 아름다운 시이다. 시를 읽어보면, 너무나 간절함과 너무나 애절함을 느낄 수 있다. 사람은 원래 소중한 것은 잃어버리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더 처절하게 느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시편은 ‘여호와의 집’에 나아갈 수 없는 형편에 처한 한 레위인이 성전과 성전의 하나님을 애타게 사모하면서 드린 기도의 시편이다. 시인은 지금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는 일을 제한받고 있기에 과거에 그가 누렸던 성전에서의 하나님과의 달콤함 교제에 대한 갈망을 노래하고 있다. 이 시편은 오랫동안 늘 새롭게 해석되어 왔지만, 아마도 이 시인은 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를 약탈했을 당시에 잡혀가서 강제로 앗수르 사람들과 함께 있게 된 것 같다(왕하 18:13-16).

 

  이 시편을 압도하는 주제는 하나님과 그분의 성전에 마음대로 하나님의 집에 나아갈 수 있는 자들의 복(4-5, 12절)이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을 사모하는 기쁨과 여행에 대한 언급(5-7절), 그리고 성전에 들어가는 장면(10절) 등을 볼 때, 이 시편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행진하는 순례자들의 노래였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름 부은 자, 즉 왕을 영접하시기를 기도하는 내용(8-9)은 왕이 이 행렬과 성전 뜰로 나아가는 의식에 참여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장소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장소에 담긴 추억이다

우리들은 어떤 장소를 떠올릴 때 그 장소나 건물이 주는 이미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장소와 연관된 기억과 추억이 더 많은 이미지를 좌지우지 하는 것을 보게 된다.

 

  제가 어린 시절 시골에서 자랄 때 우리 집에서 5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강둑이 있었고 강이 흘렀다. 그 강을 사이에 두고 마을과 마을이 연결되어 있었는데, 제가 사는 동네에 교회가 있었기 때문에 이웃동네에 사시는 성도님들은 그 강을 건너서 예배에 참석하셔야만 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강둑과 강둑을 연결시켜주는 다리가 없었기 때문에 비가 많이 와서 강이 범람하면 저쪽 동네에 있는 분들이 교회 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어떤 때는 포크레인이 중간에서 포크레인의 포크통 안에 사람을 싣고는 이쪽에서 저쪽으로 이동시켜주기도 했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바로 그 다리이다. 그 다리는 시멘트로 후에 만들어져서 저쪽 동네와 이쪽 동네를 아주 자연스럽게 연결시켜주어서 성도님들이 예배에 참석하는 예전처럼 옷이 다 젖으면서까지 강을 건넌다든가, 포크레인의 힘을 빌리는 헤프닝은 하지 않게 되었다. 제가 초등학교 시절에 저를 자주 괴롭히는 후배가 있었다. 지금은 이렇게 배도 나오고 덩지가 있어 보이는 몸매이지만, 그 당시는 거의 앙상한 나뭇가지 수준의 체격이었다.

 

어린 시절, 교회 형님이 저한테 붙여준 별명이 ‘빼짝꾸리우스’였을까?

  여러분, 믿기지 않죠? 교회에 낯선 누군가 와서 부목사님들 이름을 묻다가 ‘그 목사님 있쟎아요! 배나온 목사님!’, 이러면, 다들 <배나온 목사님>이라고 하지 않을까? 그 사실을 모르면, 교회에서 간첩이라는. 사람이 변한다. 마른 장작같은 몸도 배가 나온다. 세월 앞에선 언제나 변하기 마련이다.

  저는 지금 성격과는 달리, 아니 지금도 그런 성격이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그 때에는 굉장히 내성적이었다. 그 후배는 학년이 나보다 한 학년이 낮았지만, 나이가 똑같았다. 왜냐하면 내가 한 해 학교를 일찍 들어간 탓에 말이다. 그런데 이 친구는 자기에게 저보다 나이가 3-4살 많은 큰 형이 있었기 때문에, 그 형의 백을 믿고, 또 같은 동갑인 친구도 있었는데, 그 백을 믿고 그러는지 나를 늘 못 살게 굴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저는 결심을 했다.

‘한번 붙어보자!’는 강한 결의! -여러분, 원래 조용하고 내성적인 친구들이 화를 내면 무섭다. 화를 토해내는게 어디로 튈지 모르지 않나?

 나는 그 친구를 한 번은 그 다리 밑으로 불러서 왜 자꾸 날 괴롭히냐고 물으면서, 큰 용기를 내어 실컷 두들겨 패 버렸다. 결국 나의 오기로 말미암아 나는 후배의 기세를 확실히 꺾어 놓았고 그 후배는 다시는 나를 괴롭히지 못했다. 여러분, 막연한 두려움이 우리를 더 힘들게 한다.

 

두려움은 ‘나쁜 일이 꼭 일어날 것만 같다고 느끼는 마음’이라고 새소식반 공과에 나온다. 나쁜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고 일어날 것만 같은 느낌이다. 우리는 수많은 두려움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그 중이 대부분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인데, 미리 당겨서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이다(맥스 루카이도의 글, 참조).

 

 저는 시골에 한 번씩 내려가면 그 다리를 꼭 지나게 되는데 그 때 추억이 떠오를 수 밖에 없다. 나의 용기백배한 소중한 추억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주의 궁정에 담긴 추억을 기억하는 시인

 오늘 시인은

시 84:10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라고 적고 있다. 먼저 ‘주의 궁정에서 한 날’과 ‘다른 곳에서의 천날’을 비교하고 있다. 시인은 ‘주의 궁정’에서의 소중한 추억이 있었을 것이다. 저의 과거의 다리와 관련된 추억보다 더 강렬한 기억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주의 궁정’에서 강조점이 ‘궁정’(건물, 빌딩)에 있는 것이 아니다. 궁정, 궁궐이 주는 화려함, 럭셔리, 휘황찬란함, 풍성함, 넘침, 대리석, 금은보석…이러한 이미지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주’에게 강조점이 있다. ‘주의 궁정’ 이것은 성전, 하나님의 처소, ‘주님께서 거하시는 곳, 장소’라는 말과 일맥상통하겠다. 시인은 주님과 함께 누렸던 기쁨, 주님의 성전에서 누렸던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스런 체험과 감격을 말하고 있다. 그 성전에서 하나님을 경험한 장엄한 체험, 아니면 시인의 인생을 훑고 지나갔던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 이적과 변화, 능력 등…그래서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날 보다 낫다’고 고백하고 있다. 구약시대에 있었던 법궤, 그리고 성전…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그 곳에서의 즐거움과 기쁨, 하나님의 만지심, 치유하심, 응답하심, 계획하심, 인도하심, 그리고 찬양함에 대한 감격을 고라자손이 적고 있는 것이다. 고라 자손은 레위의 증손자로서 모세와 아론에 대한 반역을 도모하다가 죽은 인물의 후손들로서, 이들은 다윗에 의해 성전 문을 지키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주의 궁정을 향한 애끓은 마음은 주님과 함께 했던 궁정에서의 추억 때문이다

 시인이 ‘주의 궁정, 주의 성전’을 향한 애끓는 마음을 시편 84편 전체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성전에서 만끽한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 흔적 때문이었다. Issac Watts는 예배당과 교회들을 “그 사랑 있는 곳 거룩한 성이니, 내 하나님 뵈옵고자 나 항상 사모합니다”라고 가사를 적고 있다.

  참새도, 제비도 자유롭게 집을 짓고 새끼를 위한 보금자리를 마련하는데 자신을 할 수 없으니 안타까워하며 부러워하고 있다.

 

 여러분은 이러한 감동 어린 시인의 고백에 동의하는가? 이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길 바란다. 내가 교회의 중직자이고, 리더이고, 직분자이고, 교사이고, 성가대대원이고... 뭐 이러한 책임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내가 즐거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중요한 직무를 맡고 있어서 의미 있는 장소가 아니라, 나를 알아봐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가치 있는 장소가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에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뜨거운 그 분의 은혜와 감동의 체험과 경험과 역사가 나를 훑고 지나갔기 때문에 이 성전을 사모하셨음 좋겠다. 이 성전은 우리의 일터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이고, 하나님의 집이다.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공간이며 장소이다. 주인되시는 하나님과의 깊은 인격적인 관계로 말미암아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어떤 좋은 곳에서의 천 날 보다 낫다’고 고백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란다.

  

  이 세상에 좋은 곳은 진짜 많다. 별 다섯 개 호텔도, 신혼여행의 주요지인 전세계 수많은 관광도시, 휴양도시, 8도 가운데서도 아직 발견되지 않은 대단한 도시, 분단의 아픔 가운데 있지만 가보고 싶은 금강산, 우리나라 팔 도의 아름답고 멋진 명소들, 더 나아가 가 보지는 못했지만 미국의 그랜드 캐년의 웅장함, 엄청나게 큰 땅 덩어리, 호주, 아프리카, 아메리카, 오대양 육대주, 지구촌의 곳곳, 추운 곳, 더운 곳, 사람 많은 곳, 사람 적은 곳, 텔레비전이나 신문이나 책으로 그렇게 광고하고 그렇게 아름답고 살기 좋게 그려지는 이 지구촌의 곳곳의 모든 명소들…그 곳에서의 천 날 보다 시인은 ‘주의 성전’에서의 하루가 더 감칠 맛 나고 더 아름답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시인은 ‘시 84:10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시편 기자는 편안한 장막에서 많은 날을 지내는 것 보다 비록 문지기 일지라도 하나님의 성전에서 지내는 하루가 좋다고 노래하였다. ‘내 하나님 집의 문지기’…고라 자손에 속한 레위인이 성전 문지기로 봉사했다. 여기서는 ‘아주 보잘 것 없고 미천한 일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전은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 두기를 기뻐하시는 곳으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하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성전을 갈망하는 것은 곧 살아계신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이었다(시 42:2).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전을 사랑했고 성전에 올라가기를 간절히 사모하며 마음과 몸이 쇠약해질 정도로 노래했다(시 84:2). 그가 얼마나 성전을 얼마나 열렬하게 사모했던지, 성전에 기거하는 참새와 제비가 부럽다고까지 하였다(시 84:3). 시편기자가 이렇게 노래했던 이유(시 84:10)는 하나님과 함께하며, 늘 하나님을 만나는 삶이 가장 복된 인생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4절에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다. 예배드리기 위해 순례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는 자에겐, 때론 6절에 눈물골짜기를 만나지라도 하나님께서 많은 샘이 솟는 소생의 은혜를 부어주실 것이다. 예배하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결단한 마음은 예배의 대로가 있는 자이다. 그들이 통행하는 곳에는 이른 비, 즉 가을비의 은택이 있을 것이다. 가을비가 태양이 작열하던 이스라엘의 산과 골짜기를 푸른 채소와 곡식으로 뒤덮이게 만드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로운 돌보심이 있다는 것이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가슴에 시온의 대로가 있기를 원한다. 올해의 표어가 무엇인가? ‘성숙과 미래가 있는 교회’이다. 성숙의 첫 번째 타이틀은 ‘주일성수’이다. 우리가 주일날 맘껏 예배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자. 규칙적으로, 정기적으로 예배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라. 자유롭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는 북한 동포들의 위해 기도하되 우리의 예배의 특권에 대해 더욱 감사하자. 고라자손은 자유롭게 예배하는 것에 갈망하고 있다.

 

  얼마 전에 메일이 하나 왔는데, 제가 아는 친분이 있는, C국의 선교사님이었다. 갑자기 나라를 떠나라는 오더가 내려온 것이다. 출입국관리소의 처장이 하는 말,

“너희가 받는 비자와 너희가 하는 활동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비자를 줄 수 없다!”

“우리가 하는 활동이 뭐냐?”

 “네 마음에 더 잘 알 것이다.”라면서 직접적인 대답을 회피했다.

  떠날 때는 그 처장이 “미안하게 됐다!”라는 말도 하면서 악수도 했다고 한다.

 

  예배의 자유를 위해 선교하러 간 그들이 매몰차게 거절당하고 하루아침에 모든 살림살이는 경매를 부치고, 빚을 내어 비행기표를 부랴부랴 구입해서 한국으로 귀국한다고 한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낫기 때문에 그 예배의 자유를 선포하기 위해 간 타국땅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한 순례자의 이야기이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은 다른 어떤 삶보다 나은데, 이는 그분이 빛(27:1)과 생명(56:13)의 근원이신 ‘해’(Sun)이시며 우리를 모든 위협에서 보호하시는 ‘방패’이시기 때문이다(11절). 그래서 그 분은 자신의 ‘은혜’로 우리를 자신에게 이끈 다음 자신의 영광을 우리와 공유하신다(벧후 1:3-4),

 

3.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4.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러나, 아무 조건 없이 그렇게 하시지는 않는다. 그분이 자유롭게 주시는 ‘좋은 것’(11절)은?

정직히(blameless, 마 5:48) 행하는(walk, 삶의 양식이자 그런 삶을 촉구하는 동기다)자들’을 위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들을 복되게 만드는 것은 업적이 아닌 신뢰다(12절).

 

여러분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는 어디인가? 하나님의 사랑의 뜨거운 추억이 있는 장소는 어디인가?

 

시 84:10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정말 이렇게 고백했던 한 사람을 소개하고자 한다. 주일성수하면 이 사람이라고 할 정도로 말이다.

 

 

올림픽 금메달 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던 주일성수의 화신, 에릭 리들

그 사람의 이름은 에릭 리들이다. 그는 육상선수였다. 하지만 자신의 주종목이 주일날 열리는 것을 알고는 그 게임을 포기한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네티즌이 난리가 났을 것이다. 개독교라고 하고, 신앙생활도 어지간히 광신적으로 하라고 하던지, 너는 국가대표인데, 참가도 안할거면 왜 대표로 출전했냐고? 온갖 비방과 비판을 들었을 것이다.

주일에 벌어진 100m 경기에서는 영국의 헤롤드 아브라함이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그의 기록은 에릭 리들보다 약간 뒤졌습니다. 다시 말하면, 에릭이 출전했으면 에릭이 금메달을 획득했을 거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아쉬운 마음보다 에릭 리들은 기쁜 마음으로 헤롤드의 우승을 축하해 줍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결코 에릭 리들을 버리지 않으시죠. 에릭 리들은 자신의 주종목이 아닌 200m에서 동메달을 땄고, 400m 에도 출전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400m에서 에릭은 다른 선수들의 들러리였습니다. 당시 결승을 치루기 전 예선전에서만도 2번의 세계신기록이 깨어집니다. 첫 번째 세계신기록을 깬 사람이 스위스의 ‘임바흐’, 마지막 두 번째 세계신기록을 깨고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였던 미국의 ‘피치’ 같은 선수들이 400m에서는 각광을 받고 있었습니다. 에릭은 평범한 기록을 세우며 1,2차 예선을 통과합니다. 이런 에릭에 금메달을 기대하는 사람은 당연히 없었죠.

 

드디어 400m 결승의 날 1924년 7월11일 금요일 저녁 7시가 다가왔습니다. 근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에릭이 그날 배정받은 트랙은 제일 불리한 바깥 구간이었습니다. 가볍게 몸을 풀고 출발 준비를 한 후 출발 신호를 기다린다. 트랙에서 출발자세를 취합니다. 출발신호가 떨어지고 선수들은 무섭게 출발하기 시작합니다. 에릭 리들은 신들린 사람처럼 첫 코너를 돌았습니다.

경기를 지켜보던 전문가들은

 “에릭이 저런 속도를 유지하다가는 도중에 쓰러져 죽을지도 모른다”

 

고 불안함을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쓰러진 선수는 안간힘을 다해 뒤쫓던 스위스의 임바흐였고, 끝까지 뒤를 쫓던 미국의 피치보다 2야드 정도 앞서 결승점을 통과하면서 ‘47초 6’이라는 세계신기록까지 세우고, 금메달을 목에 겁니다. 경기를 마치고 경기장을 벗어나 가장 먼저 한 일은 물론 탈의실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나도 존중하리라

그런데 그가 결승전에 출전할 때, 담당 안마사가 그의 손에 쥐어준 쪽지가 있었습니다.

 

“In the old book it says, ‘He who honours me-I will honour’ Best wishes always” 
“구약에 이런 글이 있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나도 존중하리라’, 최선의 영광이 있기를 빌면서”

 

그는 처음 400m 우승의 비결을 묻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처음 200m 는 제 힘으로 최선을 다했고, 나머지 200m 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빨리 달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후에 파리 올림픽을 회상하면서 다시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100m를 포기하고 그 대신 400m 경주에 대비한 훈련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400m가 내게 가장 적합한 종목임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가장 적합한 경주로 나를 인도해주셨던 것입니다.”

 

그는 주일은 자기를 위한 날이 아니고, 주님을 위한 날이라는 사실을 삶으로 설교한 위대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졸업하고 올림픽이 있은 다음해인 1925년 그동안 쌓은 모든 명예와 성공의 기회를 포기한 채 육상은 직업이 아니라, 중국선교사 활동을 하기 위한 훈련의 과정이었다고 선포한 후 중국으로 선교사역을 위해 떠나게 됩니다. 그는 오히려 그 모든 것 대신에 외국인들이 빈번히 학대받는 중국에서의 고난 받는 삶을 선택합니다.

 

선교하다가 그가 일본인 수용소에서 과로와 영양부족, 후두염과 독감으로 앓다가 조용히 세상을 떠난다. 수용소 장례식장에서 그의 올림픽 금메달 리스트로서의 화려한 경력이 동료 선교사와 목사들을 통해 스피커에서 흘러나왔을 때에야 수용소내의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비로소 처음 알았다고 한다. 그는 누구에게나 자랑거리인 듯한 올림픽 영웅으로서의 화려함을 자랑치 않고, 오직 주님이 맡겨주신 자기 일만을 묵묵히 감당해 나갔을 뿐이었습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나도 존중하리라’

 

물론 저도 청년.대학부를 담당하는 목사로서 난감할 때가 있다. 에릭 리들처럼 아주 보수적으로 믿음생활할 것을 청년.대학부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올림픽경기를 포기할 정도로 하나님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했던 에릭 리들의 마인드와 정신을 배우라고만 이야기할 수 있겠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시길 바란다. 그것은 바로 예배를 사모하고,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의 소중함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 일에 헌신하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을 높이실 것이다

시인의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었음 한다. 하나님과 늘 함께하는 삶 그 자체로 인해 여러분의 믿음의 지경과 영역이 더욱 넓어지기를 원한다. 오늘 하루도, ‘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따르는 충직한 문지기로 있을지언정’ 죄의 자리, 절망과 패배와 타협과 안주의 자리에서 일어나시기를 바란다. 또한 세상의 다른 좋은 곳, 멋진 곳에서의 많은 시간들, 우리에게 주어질 수많은 시간들, 수많은 사람과 일들과 업무와 볼 일들의 시간들 보다 주님 앞에서 앉아 있는 이 시간,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예배의 시간이 더없이 나은, 더없이 행복하였음 한다.

 

시 84편을 통해 우리들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시온의 대로가 뚫려 있는지를 한번 돌아보길 바란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만나는 이 일에 삶의 최우선순위를 두고 살아가시길 바란다. 주일성수는 필수이지, 선택이 아님을! 하나님은 주일에 복주시고 안식을 주셨다고 했다. 개인과 가정과 교회의 예배가 회복되길 원한다. 시인의 고백이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교회의 성도들의 고백이 되었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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