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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사사기.룻기

사사기 2장 11-23절, 사사를 세우사

by Message.K 2023. 4. 8.

구약성경 사사기 2장 11-23절의 본문을 가지고 '사사를 세우사'라는 주제로 설교하는 내용을 포스팅해 봅니다. 혼돈의 시대에 사사judge를 세우셔서 일하신 하나님을 한번 살펴 볼까요?

 

 

사사기 2장 11-23절, 사사를 세우사
사사기 2장 11-23절, 사사를 세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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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미 토요토미가 쓴 ‘참 사랑, 그 어디에’라는 작은 소책자를 여러분 중에도 읽어 본 사람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책에서는 사랑에는 3가지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1.만약에(If)사랑

몇해 전 동경에서 한 젊은이의 자살이 일간지의 첫 면을 장식했다. 심한 경쟁을 뚫고 동경대학교의 입시에 합격함으로써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고 싶었던 그는 중학교 시절부터 방과후 과외를 하는 등 매우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난 그는 결국 떨어지고 말았다. 아버지를 볼 면목도 없고 자신의 실망을 잊고 싶어 그는 하코네 온천지로 일주일 동안 놀러 갔다. 집에 돌아오자 그는 성난 아버지와 마주쳤다. “시험에 떨어지고 나서도 하코네 같은 곳에 가다니 부끄럽지도 않느냐?” 하고 아버지는 아들을 나무랐다. “하지만 아버지, 기분이 울적하면 하코네에 가도 된다고 언젠가 말씀하셨쟎아요?” 그 말에는 대꾸도 않고 아버지는 화가 난 김에 아들을 심하게 때렸다. 그날 밤 그 청년은, 가스 출구로부터 전열기로 통하는 벽의 고무 튜브를 절단한 뒤 그 튜브를 입에 넣고 개스를 들여 마시고는 자살하고 말았다. 신문에서는 자살의 이유가 신경 쇠약이라고 단순하게 말했다. 그러나 신경 쇠약이 일어난 것은, 아마도 자신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 단지 아버지의 큰 기대를 채워 주느냐 않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너무나 갑작스레 깨달았기 때문이다.

 

 

 

 

2.때문에(Because)사랑

일본에서 매우 아름다운 여성 하나가 세탁물처리 회사에서 일하던 중, 어느 날 보일러가 폭발해 얼굴과 가슴, 손 등에 화상을 입었다. 그녀의 용모는 너무나 보기 흉하게 되어 병원에서는 얼굴을 항상 붕대로 감고 있었고 의사 이외에는 아무도 만나려 하지 않았다. 그녀와 약혼했던 청년은 그 약혼을 취소했다. 그녀가 죽기 전 몇 개월동안, 같은 시에 살고 있는 그녀의 부모까지도 그녀를 만나러 오지 않았다. 그녀가 누리던 사랑은 하룻밤 새 사라져 버렸다. 이는 그녀가 받은 사랑이 미모에 근거했기 때문이다. 미모가 사라지자 그 사랑도 가버렸던 것이다.

 

 

 

3.그럼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사랑...

이것은 어떤 끈이 달려 있지도 않고, 보답으로 무엇을 기대하지도 않기 때문에 ‘만약에’식의 사랑과는 다르다. 또한 사랑받는 사람의 속에 어떤 매력적인 점이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도 아니므로 ‘때문에’식의 사랑과도 다르다. 이 사랑은 자신의 됨됨이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됨됨이가 어떠함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받는다.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서 가장 추하고 불행하고 천하다 할지라도 이런 ‘불구하고’식의 사랑을 만나면 그는 사랑을 받을 수 있다. 그는 그런 사랑을 받기 위해 어떤 자격이 없어도 된다. 그는 착해지거나, 매력적이 되거나 혹은 부해짐으로 말미암아 그 사랑을 얻으려 할 필요가 없다. 그에게 있을지 모르는 악습, 잘못, 무지 혹은 나쁜 경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있는 그대로의 사랑을 받는다. 그는 전혀 무가치해 보일지 모르지만, 무한한 가치가 있는 사람처럼 사랑을 받는다.

 

 

이 사랑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이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만약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너를 사랑하리라’‘네가 도덕적이고 선한 사람이 되면, 네가 교회에 나가면, 네가 기독교 활동에 공헌을 하면, 네가 성경을 읽으면, 네가 기도하면, 네가 목사나 신부 등등이 되면, 너를 사랑하겠다’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그 분은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신다. 그 분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이용할 만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행해야 할 요구 사항과 조건도 있지 않다. 어떻게 이것을 증명할 수가 있느냐?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실이 그 증거이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것이 바로 완벽하고 순수한 ‘그럼에도 불구하고’식의 사랑이다. 성경이 바로 이것을 기록하고 있다. 오늘 우리가 볼 본문도 이러한 맥락에서 들여다보고자 한다.

 

 

 

 

본론

우리는 지난 주에 믿음의 선조, 여호수아와 그와 함께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전쟁에 동참했던 무수한 백성, 선조들의 죽음 이후에 출생한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오늘은 그들이 어떠한 행동 방식과 삶의 자세를 가졌는지를 보면서 그러한 그들에게 대응하시는 하나님의 반응을 살펴보고자 한다.

 

 

V.11-13에서는 그들이 범죄한 것이 나온다. 그들은 하나님을 내팽개치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는 작태가 드러난다. 그들은 그들을 출애굽시켜서 노예에서 해방시키신 그 구원자 하나님을 뿌리치고 또 다시 방황하면서 우상을 섬기고 있다. 가나안 사람들은 많은 지역신-요나의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지역신(Local God)’이었다-들을 믿었다. 바알은 폭풍의 신이요 생산의 신이었다. 아스다롯은 여신으로 바알의 배우자였고 생산의 신이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렸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을 완전히 잊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가나안의 의식과 풍습을 따르고 가나안의 신을 섬기면서 또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는 행동을 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섬기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혼합 종교를 용납하지 못하신다. 이스라엘백성들은 말 그대로 ‘눈 앞에 보이는 ’ 것들에 취해 있다. 그들이 부여잡고 있던 것도 눈 앞에 보이는 쾌락과 즐거움이며 그들이 섬기고 있는 것도 눈 앞에 보이는 물체인 우상이었다. 모든 것들이 ‘눈 앞에 보이는 것’뿐이었다. 그들은 그러한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고서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멸시하고 있다. 무시하고 있다. 그들이 얼마나 타락하며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거리는지를 보라! 그러한 죄와 하나님은 상반되는 극과 극이다. 죄가 있는 곳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으며, 하나님이 계신 곳에는 죄가 존재할 수 없다. 그러기에 백성들의 그러한 구도는 하나님에게 어떠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는가?

(V.12...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며)

그러한 그들의 죄악상은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살펴보자!

 

V.14-15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방에 깔려 있는 가나안 족속의 잔재들을 통하여 그들을 노략당하게 하신다. 그들은 전쟁에서 패배할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얻어 터지고 있다. ..진노하사...당케하시며...파시매...당치 못하였으며

 

 

 

 

그리고 중요한 구절이다. V.15-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매...이러한 재앙의 이유는 그들의 죄악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자기의 사람들, 자기의 백성들이 사탄의 노예로, 죄악의 노예로 살아가는 모습을 그냥 방관하시며 기다리시지만은 않으셨다.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들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로, 자기에게로 돌아올까 노심초사 기다리시면서 애타하는 탕자를 기다리시는 그 아버지의 마음으로 기다리신다. 자기의 아들들이 고통중에 헤매는 것을 고의적으로 놔두신다. 그러한 고통과 힘겨움 속에서만이 하나님의 귀중함을 알기 때문이다. 세상가운데 계속적으로 절망하게 내버려두신다. 그러한 아픔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의 품을 기억하라고 말이다. 우리 인간은 너무나 간사해서 계속적으로 태평하고 무사안일하게 되면 언제 또 신앙을 팔아먹을지 모른다. 왜 그런가? 인간은 원래 죄인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죄인인 것이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께로 귀화할 수 있는 통로를 하나님은 때때로 ‘고통’이라는 터널로 사용하실때가 있다. 하나님이 이렇게 상황을 내버려두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떠했다고 나와 있는가?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

 

 

이스라엘인들의 내적인 혼란과 죄책감의 뭉치는 그들을 넉다운시켰다. 삶이 자꾸만 꼬이기 시작한다. 그들은 다른 이방인들의 발굽아래에서 압제당하며 노예생활을 했는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때때로 이러한 징계라는 채찍으로 우릴 돌이키게끔 만드시기도 하신다. 그러하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고통은 또 다른 하나님의 뜻’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여러분에게 어떠한 열악한 환경이나 아픔이나 어려움들이 여러분을 부여잡거나 휘어잡고 있는지 한 번 돌아보라!

하나님은 결코 여러분을 창조하셔서 대한민국땅에서 자라나게 하시고, 그 지역을 끼고 있는 **교회라는 시골교회에 어처구니 없이, 우연하게 보내신 것이 아니다. 다 하나님의 프로젝트에 의해서 여러분을 이런 상황으로 보내신 것이다. 여러분의 가정적인 분위기나 환경이 과히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다. 그러한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고통과 힘겨움의 배후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이다.

 

 

 

 

본문을 보라! 엄청난 우상숭배의 죄악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을 징계하시는 하나님은 분명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것이 마치 우리 인간들처럼 “그래 잘 됐다. 이제 네 놈들 맛 좀 봐라! 내가 뭐라카더노? 응! 너거 내 말 안 들었제, 자식들! 이제부터는 나의 복수전이다!” 이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마구 쳐부숨을 당하도록 내버려두시면서, 마구 배꼽을 잡고 웃으면서 고소해하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비록 이스라엘이 엄청난, 하나님을 모독하는 우상숭배의 죄악을 저질렀지만 그들이 이러한 징계를 통하여 돌아오시기를 바라시는 신호탄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힘들어하고 아파하면 같이 아파하신다는 것을 여러분 알지 않는가? 비록 죄악으로 인하여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을 죄의 늪으로 빠져 들어갈 때에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힘듬과 고통을 동참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최덕신씨가 지은 “동참”이라는 곡의 가사내용을 알지 않는가?...

 

 

 

 

 

하나님은 그냥 미지근하게 아무 느낌과 감정도 없이 자기 백성들이 잘 하면 기계적으로 축복을 마구 주고 자기 백성들이 죄를 짓거나 잘못 살면 기계적으로 형벌을 마구 내리는 그런 비인격적안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격체이신 것이다. 그는 마치 부모가 자식이 잘못 했을 때 벌을 주면서도 가슴 아파하는 그런 심정이다. 눈물을 머금으면서 벌을 주시는 것이다.

 

 

그러한 고통중에 있던 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결국 자신의 그 흘러넘치는 사랑을 드러내시고 마신다. 그들을 너무나 불쌍하게 여긴 나머지 어떤 계획을 세우시게 된다. 그 계획의 결정체는 이 하나로 대변된다. 그것이 무엇이냐? 16절..오늘의 설교제목처럼 <사사를 세우>시는 것이다. 사사는 히브리어로 “쇼페팀”이고 영어로는 “Judge"로 번역된다. 사사는 위기에 처한 국가를 구원했던 군사적 지도자로서 사법에 관한 권력뿐 아니라 정치, 종교, 경제에 관해서도 통치권을 행사하였던 인물이다. 그러나 사사는 왕과는 달리 지역적인 지도자였다. 사사가 세워지게 된 배경은 다름아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너무 힘들어 기도의 간구로 부르짖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 ...18절을 보라~이는 그들이 대적에게 압박과 괴롭게 함을 받아 슬피 부르짖으므로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셨음이어늘...)

 

 

이것은 우리에게 우리가 아무리 어마어마한 죄를 지어도 하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하나님은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마음에 있는 죄나 죄책감의 무게로 인해 하나님을 부담스럽게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꺼릴 때가 많다. ”내 꼬라지가 이런데, 어떻게 감히 하나님께 나아가겠냐? 다 때리치워뿌라!“라고 자기가 자기 스스로를 포기할 때가 있다. 이것은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만큼 위험한 생각은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결코 포기치 아니하시는 한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그러하기에 우리 자신들도 결코 우리의 상황과 여건을 탓하거나 자신을 자책하면서 절망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한 개인의 죄악을 덮지 못 할만큼 작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오만함이며 사탄의 술책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는가?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의 사랑을 과소평가할 때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찬송가의 가사처럼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고 쓸 수 도 없을“만큼 큰 사랑인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죄가 있건, 없건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때때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뻔뻔함이 요구될 때도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공로로 되어진 거라고 착각하는 경향을 우리 인간들은 은연중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코 그것은 아니다.

 

 

 

히브리서 10:19~...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V.19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V.20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육체니라

V.21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V.22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여기서 분명히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담력과 용기를 주는 것을 ‘자기 자신의 마음 상태나 영적 상태’라고 얘기하지 않고 있다. ‘자기 자신이 가진 어떤 헌신의 태도’나 ‘의로움’이 아니라고 한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기독교는 그리스도교가 아니라 인간교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고 있다. “예수의 피”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의 피를 힘입어...그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이라는 것이다. 그의 붉은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나아가서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면서 이렇게밖에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이다. 여기에 기독교의 비밀이 있다. 기독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파워만이 영향력을 발휘해야 하는 것이다.

 

 

 

자, 그런데 여기서 주시할 것은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의 응답으로 무엇을 주셨나 이것이다.

그것은 바로 사사를 세우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과 비젼과 미래를 건설하시기 위해 무언가를 작정하실 때 반드시 사람을 세우는 것부터 시작된다. 여러분, 성경을 훑어 보라! 하나님은 꼭 사람을 세우심을 통해서 자신의 사역을 감당해 나가신다. 어떤 방법론이나 어떤 프로젝트나 계획과 안건보다 먼저 사람을 통해서 사역하시기를 원하신다. 그 크신 하나님이 세상사람들을 다 복음화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식은 죽 먹기다. 그러나 하나님은 굳이 사람을 세우셔서 사역하시기를 바라시는 분이시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역의 본질이다. 그러기에 선교니, 전도니 하는 이런 아주 보잘 것 없는 방법이지만 그것들을 행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열매를 맺게 하시며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바로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이다. 죄의 아우토반을 달리고 있는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건지기 위해서 ‘사사’를 세우신 것이다. 그 한 사람의 영향력을 통하여 그 마을과 그 지역사회와 국가가 다시 한 번 부흥의 기회를 맞이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베푸신 것이다. 사사는 하나님의 은혜의 응집체였다. 여러분의 잘 아는 신앙의 인물들 중 사사는 많다. 아는 사람 없는가?

 

 

 

 

여러분, 우리 다같이 꼭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어떤 기계나 순간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일들을 감당케 하시지 않으신다.(복음화를 위해 ‘삐라’를 뿌리는 방식) 조금은 미련하고도 위험부담이 큰 죄인들인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심으로부터 그의 사역은 시작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여러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획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여러분에게는 작은 일이 될 수도 있고 큰 일로 여기질 수 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다 떠나서 하나님께서 죄 많은 인생들을 부르셔서 자신의 사역자로 삼으셨다는 것을, 자기의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것을 감사하자.

 

 

 

결론

오늘 본문에서도 비칠 뿐만 아니라 사사기 전체, 더 나아가 구약, 신약 성경전체에는 지겨울 정도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의 길로 돌아서다가 다시 돌아오고 다시 배반하고... 이러한 반복적인 싸이클이 계속된다. 역겨울 정도로 그러하다. 이제는 좀 그만 하겠지 싶으면 다시 또 죄를 짓게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며 나의 모습인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흙으로부터 와서 잠깐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이 비천한 인생에 다가오신 그 하나님을 찬양하자. 이 죄많은 우리들을 구원하신 그 하나님을 찬양하자. 사사시대에 그 죄악의 구덩이에서 허우적대던 이스라엘을 구하시기 위해 사사를 세우신 하나님이 21세기를 앞둔 오늘날 미천하고 보잘 것 없는 우리를 자신의 사역자로, 일꾼으로 세우신 것을 찬양하자!

 

 

 

오늘은 구약성경 사사기 2장 11-23절의 본문을 바탕으로 '사사를 세우사'라는 주제로 설교한 내용을 포스팅했는데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사사judge'라는 지도자를 세우심으로 일하셨다는 이야기를 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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