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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사사기.룻기

사사기 11장~12장 7절, 입다-Somebody의 영웅이 되려고 너무 애쓰지 마라

by Message.K 2023. 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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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 사사기 11장부터 12장 7절까지는 사사 입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입다는 여러가지 논란이 많은 사사이기도 한데, 입다의 인생을 살펴보면서 'Somebody의 영웅이 되려고 너무 애쓰지 마라'란 주제로 설교, 묵상한 글입니다.

 

사사기 11장 1절~12장 7절 묵상 강해설교, 입다 썸바디Somebody의 영웅이 되려고 너무 애쓰지 마라
사사기 11장 1절~12장 7절 묵상 강해설교, 입다 썸바디Somebody의 영웅이 되려고 너무 애쓰지 마라

 

입다의 출생

사사 입다의 이름을 풀이하면 '그가(신이) 열었다'라는 뜻이 됩니다. 그의 이름이 지적하고 신은 과연 누구를 가르키는가? 여호와 하나님일까? 아니면 가나안의 여러 신들 중에 하나일까? 질문할 수 있겠는데요.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을 보니 Block이란 학자는 그의 이름이 가나안 신을 염두해 된 것으로 생각한다고 합니다.

 

입다의 자라온 배경과 행실은 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 순조롭거나 당연한 일이 아니었음을 시사하는데요. 그는 길르앗이란 사람과 창녀 사이에 태어난 사생아(11:1)입니다. 여러 가지 정황을 감안해 보면, 그의 아버지 길르앗을 유력한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문제는 그의 어머니가 창녀(기생 pristitute)라는 것인데요. 게다가 그의 어머니가 가나안 여인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입다가 성장했을때 그는 이복 형제들로부터 추방을 당하게 됩니다.

 

"너는 우리의 어머니가 아닌 다른 여인의 아들이므로, 우리 아버지의 유산을 이어받을 수 없다."(11:2, 새번역)

 

 

 

 

 

입다의 건달 생활

입다는 돕 땅으로 쫓겨나서 자수성가한 삶을 살기 보다는 건달, 불량배들과 어울려 지내는 삶을 살았는데요. 그의 주변에 건달들이 모여들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아비멜렉이 형제들을 살해하기 위해 고용했던 용병들과 똑같은 명칭을 여기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4절). '그와 함께 출입하였더라'(3절)는 말은 건달들이 '입다를 따라 약탈하러 다녔다'로 성경학자들은 해석합니다. 암몬 사람들과 전쟁을 하려고 모여든 길르앗 사람들 중에 입다의 모습이 보이지 않은 것은 그가 불량배의 삶으로 전락했음을 시사해 줍니다. 그는 국가에 대한 애정이나 애착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으며,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누구든지 칠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입다의 출현배경에 대한 이야기는 이전에 다뤘으니 참고 바랍니다.

 

사사기 10장 묵상, 입다의 등장배경과 하나님의 입장

구약성경 사사기 10장 6절부터 나타난 사사 입다가 등장하기 전까지의 배경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어쩌면 이스라엘 사사 중에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사사, 입다가 아닐까 싶은

kkarl21.tistory.com

 

입다가 머물렀던 땅은 돕(좋은 땅)이었지만, 그 '좋은 땅'이 결코 좋은 땅이 되지 못한 것은 입다의 라이프스타일이 약탈의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런 사람을 지도자로 추대할 정도라면, 그들이 처해 있던 상황이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를 찾아오다

이전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입장을 밝히시면서 전심이 보이지 않는 간구, 회개가 없는 눈물과 부르짖음에 '딴 데 가서 알아보라'고 하셨던 사사기 10장의 내용이 있는데요. 그러니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이제는 입다에게 옵니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이스라엘에게 이용당하지 않겠다고 하시자 사람들이 입다에게 손을 내밉니다. 입다는 이들이 자기를 이용하려는 의도를 역이용해 자신의 입지를 굳히고자 '내가 과연 너희의 머리가 되겠느냐?'(9절)고 묻자 장로들도 흔쾌히 수락을 합니다. 당시 장로들이나 요즘 지도자들이나 별반 다를게 뭐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천박한 출신의 불량배에게 어떻게 '머리'의 자리를 줄 수 있단 말입니까? 세상적으로 손가락질하면서 비판하고 괄시하기 딱 좋은 입다의 처지인데, 장로로들이 왜 이렇게 선뜻 이런 대답을 하는가요? 그들이 입다를 물망에 올린 이유는 비록 그가 불량배의 우두머리이긴 하지만, 그 사람만큼 싸움에 능숙한 사람이 이스라엘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선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끄고 보자는 주의였습니다. 길르앗 사람들은 10장에서도, 이런 실용주의적인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바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의 리액션이었죠. 길르앗 사람들은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 암몬 자손이 길르앗에 진을 쳐서 군사적인 압박이 치달았을 때(삿 10:17)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입다를 선택하게 됩니다. 입다가 싸움을 하긴 좀 했나 봅니다. 

 

 

 

 

 

삿 11:1 
길르앗 사람 입다는 큰 용사였으니 기생이 길르앗에게서 낳은 아들이었고

 

입다를 '큰 용사', '굉장한 용사'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역설적인 것은 입다의 전투 능력, 싸움 실력을 어떻게 입증하였느냐는 것이죠. 그건 바로 건달생활을 통해 지난 수년 동안 길르앗 사람들의 마을과 성읍을 약탈하고 습격하면서 이런 명성을 쌓았다는 것입니다. 절박해진 길르앗 사람들은 평소 그들을 그토록 괴롭혔던 기생충과 같은 인물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습니다. 장로들은 입다에게 장관, 즉 '지휘관'이 되어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이 단어는 구약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입니다. 항상 전쟁과 연관되어 사용됩니다. 이는 장로들이 입다를 지도자로 세우긴 세우지만, 그의 역할을 전쟁터에서만 제한하고자 하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입다는 장로들의 이런 꼼수를 미리 알아채고 자신을 쫓아냈던 지난 날의 명예를 회복하고자 길르앗 시민의 권한을 회복시켜달라고 제안합니다. 장로들은 원칙주의자였다면 입다를 찾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기회주의자였습니다. 결국 입다가 '지휘관'이 아니라 '머리'(즉 통치차)의 자격을 줄 것이라는 말을 받아내자 움직이게 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맹세까지 하는 장로들입니다. 길르앗의 가장 볼품 없는 자가 길르앗의 머리가 된 셈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입다가 이렇게 된 것을 결코 자수성가였다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불안한 출발, 그 어디에도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입다를 통치자로 세우는 과정 속에 하나님은 어떤 역할을 하셨느냐는 것입니다. 입다가 통치자로 세움을 입어 11절에 '입다가 미스바에서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 앞에 아뢰니라'고 했는데요. 이게 정말 진실된 예배인지 의심이 갑니다. 입다가 지금 통치자가 되고 싶어 안달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영광과 나라의 명예회복을 위한 것도 아니었고 오로지 자신의 명예회복에 올인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자신의 출생과 살아온 삶의 이력 속에 받았던 상처와 트라우마를 벗어버리고자 하는 몸부림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전쟁에서 승리하면 통치자가 되게 해주겠다는 말을 한 후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 앞에 아뢰니라'고 했는데요. 여기에 자신이 고통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길르앗 사람들의 보금자리를 약탈하면서 살아왔던 건달의 삶을 청산하고 회개하는 모습이 보였던가요? 오로지 입다의 계획과 입다의 플랜만 있을 뿐입니다. 자신의 울분에 찬 삶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개과천선하고 싶어하는 모양새 뿐이라는 느낌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어디에도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입다의 이런 모습 속에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났다면 오히려 그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닙니다. 입다를 지도자로 세운 것은 장로들이고 백성들이지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동안 불신하는 사람(기드온)을 세우신 적은 있어도 불량배들의 두목을 지도자로 세우신 적은 없습니다. 물론 아비멜렉의 경우도 있지만, 그도 자청해서 왕이 되 것이고 하나님은 오히려 그를 심판하셨습니다. 입다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이 세운 최초이자 유일한 사사입니다. 어느덧 이스라엘은 사사를 세우는 하나님의 고유 권한을 침해하고 있다고 younger는 이야기했는데요. 불량배의 두목 입다의 지도력이 시작부터 불안합니다. 

 

 

 

 

입다의 인간적인 장점: 대단한 협상가

입다는 11:12-28에서 대단한 협상가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입다는 일단 암몬 사람들과의 평화적인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입다와 암몬 사람들의 협상은 고대 근동의 소송양식의 여러 요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마치 법정에서 원고와 피고가 서로 다투는 듯한 분위기로 대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입다의 이야기에 사용된 히브리어 단어가 1000개에 달하는데, 이 중 345개가 암몬 족과의 협상에 묘사되는 사용되었습니다. 암몬 족과의 협상이 입다 이야기의 1/3 이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입다의 협상능력을 부각시키고자 하는 이유나 그의 통치력과 행정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닙니다. 암몬과는 이토록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반면에, 입다의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동족인 에브라임 사람 42,000명을 아무런 사전 협상 없이 몰살하게 됩니다. 입다는 암몬 사람들과는 대화로 문제를 풀기를 노력했지만, 동족과는 대화할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매정한 사람이라는 것을 고발하는 것 입니다. 왜 이런 입다의 모습이 나타날까요? 이것은 심리학적으로 해석해 보자면 입다의 트라우마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동족들에게 내쫓는 자신의 과거의 콤플렉스가 전쟁을 할 때에도 드러난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사사를 하나님께서 세우셔도 여러가지 실수와 약점이 수없이 노출되는데, 입다는 장로들의 접근으로 사사가 되었기에 더 많은 트라우마를 우리에게 노출시키고 있는데요. 

입다는 마치 왕이 된 것처럼 이스라엘의 사절단을 암몬 왕에게 보냅니다. 입다는 왜 암몬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치는지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유를 묻습니다. 암몬 왕의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올라올 때에 아르논 강에서부터 얍복 강과 요단 강에 이르는 나의 땅을 점령하였다 그러니 이제 말썽 부리지 말고 그 땅을 내놓아라."(13절, 새번역)

 

이 이야기는 말 그대로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이야기입니다. 입다의 관점에서는 협상의 여지가 별로 없어 보였습니다. 지금 암몬 왕이 내놓으라는 땅은 지금 전쟁을 하고 있는 길르앗 사람들의 땅입니다. 암몬 왕은 말 그대로 전쟁은 불가피한 것을 감안하고 내놓은 요구인 듯 보입니다. 자신들이 군사적으로 우월하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발상이 아닌가 싶은데요. 왜냐하면 지난 18년 동안 이스라엘은 변변한 대항 한번 못했기 때문에 암몬 왕이 이런 교만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한 행동입니다. 

 

 

 

 

 

입다는 크게 몇 가지 이유를 제시하며 암몬 왕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했습니다.

 

첫째, 입다는 역사적 사실을 근거한 논리로 암몬 왕의 주장을 반박했습니다(16-22절).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입다의 주장을 정리하면, 이스라엘은 에돔, 모압, 암몬 사람들에게서 땅을 빼앗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암몬은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아간 암몬 땅을 돌려달라고 주장할 역사적 근거가 없습니다.

 

둘째, 입다는 신학적 논리로 암몬 왕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했는데요(23-24절). 이 땅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땅에 만족하는 것처럼, 암몬 사람들도 그들의 신 그모스에게 받은 땅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입다의 이런 논리는 굉장히 평범해보이지만, 성경적으로 보면 매우 심각한 신학적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입다의 말은 여호와와 그모스를 동급으로, 혹은 여호와와 그모스를 같은 신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셋째, 입다는 암몬 왕의 개인적인 능력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25절). 입다는 모압 왕 십볼의 아들 발락을 예로 들면서 암몬 왕에게 발락을 배우라고 합니다. 입다의 평가에 의하면, 암몬 왕은 결코 발락만한 인물이 못 된다 암몬 왕보다 훨씬 능력이 있었던 모압 왕 발락도 이 땅을 차지하는 것에 대해 침묵했다면, 암몬 왕도 이스라엘의 이 땅을 빼앗으려는 생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발락과 이스라엘의 분쟁은 영토에 관한 것이 아니었고 입다가 하는 말이 부분적으로는 맞지만 부분적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넷째, 입다는 연대적인 논리로 암몬 왕의 주장이 억지임을 지적했습니다(26절). 이번에도 입다는 수사학적인 질문을 사용하는데요. 만일 암몬이 이 땅에 대해서 정당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왜 이때까지 잠잠했었냐는 반론입니다. 

 

입다는 여기서 300년이란 숫자를 이야기하는데, 여기서 우리가 염두해 둬야 할 것은 입다는 지금 정치적인 발언을 하고 있는 것이지 역사적인 사실들을 나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밀곰을 그모스로 바꿔치기 했고, 발락 사건을 상당히 왜곡했습니다. 게다가 300이란 숫자는 정수입니다. 문자적이라기 보다는 상징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입다가 300(100 X 3)년을 언급하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암몬 사람들에게 이스라엘이 이 지역에서 오랜 세월 동안 살아왔다는 사실을 각인시키기 위함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입다는 군사적인 충돌이 불가피하다면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의 결론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협상은 이제 두 사람의 자존심 싸움으로 이어져

입다도, 암몬 왕도 협상의 테이블에 앉긴 했지만, 두 사람 모두 타협할 생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비록 입다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고 있긴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이용할 뿐 그분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섬김에 별 관심이 없는 듯 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런 입다를 들어 사용하실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될 것이라고 younger란 학자는 지적합니다. 결과적으로 이 전쟁은 두 사람의 자존심 싸움으로 전락했는데요.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설득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입니다. 입다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실까 하는 의심이 드는 사람, 자신의 영달과 이익, 명예 회복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 드는 사람의 전형적인 타입입니다. 

 

 

 

 

여호와의 영이 임하여 암몬이 대패하다

협상은 무의미하게 되었고 암몬과 이스라엘의 충돌은 불가피하게 보여집니다. 그런 와중에 뜬금없는 문장이 나옵니다.

 

사사기 11장
29 이에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입다가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서 길르앗의 미스베에 이르고 길르앗의 미스베에서부터 암몬 자손에게로 나아갈 때에
30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 주시면
31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에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시니'라는 문장이 29절에 나오는데요. 제가 이전에는 이 문장을 보면서 입다는 불우한 출생과 환경 속에서 살았지만 하나님께서 출신에 상관없이, 환경에 상관없이 당신께서 원하시면 입다같은 사람도 사용하실 수 있다 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였는데요. 요즘 다시 입다 이야기를 대하면서 느끼는 것은 입다를 하나님께서 세우셨기 때문에 여호와의 영이 임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짖음에 비록 근심하셨지만(삿 10:16, 온전한 회개가 없었기 때문에), 여호와의 어쩔 수 없는 긍휼로 인해서 입다에게 영을 부으셨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영이 임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권한을 주신 것(empowerment)이라고 younger라는 학자는 지적합니다. 단순히 전쟁을 위한 권한을 주셨다는 것인데요. 하나님의 영이 임했다면 하나님의 영에 의해 통제를 받아야 하는데, 입다의 삶은 그러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이러니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고 그로 인해 33절에 아몬 자손을 '매우 크게 무찌르니 이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항복하였더라'라는 좋은 결과를 가져왔지만, 여호와의 영이 임했을 때 입다가 30-31절에 괴상한 맹세, 무모한 맹세가 어이가 없어 보입니다.

 

 

 

무모하고 어리석은 맹세를 하는 입다

일종의 '서원 기도'를 드리는 것인데, 서원기도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입다가 승리가 확보되면 번제를 드리겠다는 것인데, 그 번제물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명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주석가들은 그의 서원을 즉흥적이고 무모한 짓이라고 했고, 혹은 하나님을 이용하려 드는 일 등으로 해석하여 매우 부정적인 행위로 취급하는데요. 그의 서원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으며, 결코 지나쳐서는 안 되는 약속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입다가 여기서 짐승이나 동물을 염두해 두고 이런 맹세를 했다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이 논쟁에 해결을 주는 한 가지 중요한 단서는 고대 근동에서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사람을 환영할 때 짐승이 동원되지 않았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입다는 인간 번제를 약속한 것인데요. 우리가 알다싶이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을 번제로 받으시는 경우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한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테스트하기 위해 하신 제안이지 결국 이삭 대신 숫양을 번제로 바쳤는데요. 율법은 인간 번제를 법으로 금하고 있습니다. 만약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 번제를 좋아하신다면 신약의 예수님이 하신 말씀, '한 영혼이 온 천하 보다 귀하다'라는 말과 배치되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역을 하는 사사 입다가 이런 맹세를 한다는 것은 왜 입다를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 아니라 길르앗 장로들에 의해 세우셨는 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입다는 불행한 출생,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고 불량배들 속에서 약탈자로 살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권리와 이익, 더 나아가 생명에 대해서도 별로 관심이 없이 자랐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사사가 될 때 과거를 제대로 청산하고 회개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보고 자란 이방 종교의 풍습과 세계관이 그의 이런 발상을 가져온 것입니다. 

 

 

 

 

 

입다의 맹세의 가장 큰 문제, 인신제사human sacrifice

입다는 길르앗 사람인데, 당시 그 지역에 살던 이방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모압 사람의 영향을 받아 그모스를 숭배했습니다. 그모스 숭배자들의 특징은 제사 중 가장 순수하고 감동적인 제물로 인간, 특히 아이를 번제로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요. 입다가 안고 있는 가장 큰 신학적 문제가 바로 여호와께 사람을 번제로 드릴 생각을 했던 부분입니다. 

 

또 한편으로 여호와의 영이 임했다는 것은 암몬과의 승리는 확보된 것이라는 사실을 입다가 믿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입다는 하나님의 약속 보다 자신의 장점인 타협, 협상을 하나님께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제안을 하는 것이죠. 길르앗 장로들에게 자신이 승리하면 '머리'가 되게 해달라고 한 것처럼, 이번에는 하나님께 승리가 주어진다면 번제물 운운하는 것입니다. 입다의 이런 협상은 결국 그에게 올가미가 되고야 맙니다. 하나님께서 그 번제물 때문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에서 나오는 긍휼, 불쌍히 여기는 마음 때문에 구원하는 것인데, 입다는 계속 자신의 공로와 업적을 자꾸 만들어 가고자 합니다. 그것도 자신이 제일 자신 있어하는 협상을 통해서 말이죠. 그가 불량배 시절에는 그 협상 능력이 어느정도 통했는지 모르지만, 암몬 왕과의 협상에서 성공했나요? 

 

 

 

입다의 서원에 대해 트리블Trible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서원을 하는 것은 불신을 드러내는 행위이다. 입다는 영의 은사를 받기보다는 하나님을 묶기 원했다. 그에게 공짜로 온 것을 그는 벌고자 하며 이용하려 든다. 그의 서원은 믿음의 표현이 아니라 의심의 언어이다. 용기가 아니라 통제이다. 이런 서원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침묵하신다."

 

 

입다가 이 맹세를 했을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반응입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셨다'는 것입니다. 입다가 진짜 하나님에 대해 민감한 지도자였다면, 하나님의 침묵에 대해 고민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입다는 지금 자신의 명예회복, 자신의 자존심 걸린 전쟁에 하나님을 조력자로 두고 베팅을 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니 도박을 하는 사람들처럼 자신의 베팅에만 관심이 있지,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이 전쟁은 입다의 전쟁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전쟁이었습니다. 

 

 

사사기 11장

32 이에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과 싸우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의 에 넘겨 주시매

 

이 전쟁의 승리의 주인공은 입다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입다와 이스라엘을 도구로 삼아 20성읍을 쳐부수는 대승을 거두게 하십니다. 

 

 

 

 

 

입다의 무지와 딸의 순진함이 낳은 비극

입다의 희생제물의 타켓은 다른 사람, 즉 남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입다의 뒷통수를 제대로 치십니다. 입다가 개선장군처럼 미스바의 집으로 돌아왔을때 그를 맞이한 첫 사람은 바로 자신의 무남독녀였습니다.

 

 

사사기 11장
34 입다가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에 이를 때에 보라 그의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
35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어찌할꼬 내 딸이여 너는 나를 참담하게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하니

 

입다의 무모한 맹세, 번제물은 남이라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자신의 무남독녀였습니다. 자신의 딸이 가장 먼저 아버지의 전쟁 승리를 축하해주고 환대해주고 있습니다. 입다의 딸은 아버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하찮은 사람(Nobody), 건달인생으로 늘 전전긍긍하면서 살다가 제대로 이번 기회를 통해 대단한 사람(Somebody)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을 가장 기쁘게 생각한 것은 그의 딸이었습니다. 입다는 왜 이것을 생각하지 못했을까요? 자신의 승리를 가장 기뻐해 줄 사람이 딸이란 사실을 말입니다. 늘 남의 것, 남의 인생에 피해를 주면서 약탈을 일삼았던 입다는 '남의 것'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결정적인 순간에 그가 잘못 살아왔던 삶의 방식이 여기에서 제대로 터지게 됩니다. 자기가 했던 맹세, 서원의 희생제물이 바로 자기 딸이란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어리석은 것은 입다의 무지입니다. 입다는 여호와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나 모르는 인생입니다. 자신의 서원이 잘못되었다면, 잘못된 맹세에 대해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회개하면 되는 것입니다. 최악의 경우 자신의 딸을 희생시키기 보다 자신이 서원을 어기고 하나님의 심판을 감수하면 됩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자신의 알량한, 그것도 잘못된 믿음과 신학과 신념을 지킨다는 명목하에 자신의 딸을 죽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딸의 죽음을 제물로 받으셨을까요? 입다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제물로 삼았습니다. 바로 다른 사람의 생명이었습니다. 근데 알고보니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무남독녀였습니다. 옛 유대인들의 미드라쉬(midrash)에 의하면, 입다는 딸을 제물로 바친 죄 때문에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 몸이 토막 나서 죽었다고 합니다. 

 

 

 

 

 

입다의 이런 무지에 대해 왜 주변에서 아무도 말리지 않았을까요?  바로 이 시대가 사사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입다의 이런 영적 무지와 병든 신앙에 대해서 지적해주고 알려줄 만한 제사장이나 레위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사기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악화가 양화를 악화로 만드는 경우인데요. 이스라엘의 가나안화가 가시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Klein이란 학자는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는 일은 아버지의 무지함ignorance와 딸의 순진함innocence이 빚어낸 비극이다'

 

라고 했습니다. 

 

사사기를 '통곡의 책'(a book of weeping)이라고 하는데, 책의 중심 부분에 위치한 입다의 이야기, 그리고 입다의 딸의 죽음에 대한 이스라엘 여인들의 통곡이 있는 셈입니다.

 

 사사기 11:40 이스라엘의 딸들이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하더라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

최승호의 시인의 시 중에서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라는 제목이 있습니다. 정말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모든 것인 나 라는 존재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먼저 알고 그 실체를 파악한 다음, 그 현실 위에 내 자존감을 세워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벌레만도 못 한 인생이라는 처절한 속죄와 참회가 수반된 죄인이라는 의식 위에서 나를 누구보다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입히는 것이 바로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라고 제가 해석해 보았는데요. 

 

 

 

입다의 한계: Nobody Complex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입다의 문제, 입다의 한계는 바로 '아무것도 아닌Nobody Complex'가 너무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점입니다. 기생(창녀)의 어머니에게서 출생하여 집안에서 배다른 형제들로부터 쫓겨났던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입다가 문제였습니다. '노바디 콤플렉스'가 너무 심하니깐 그걸 이스라엘의 암몬과의 전쟁에서 명예회복하고 싶은 겁니다. 노바디가 썸바디Somebody가 되고 싶은 거죠. 자신이 노바디이니깐 다른 사람도 노바디처럼 대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건달의 약탈하는 삶을 살고 다른 사람의 인생을 노바디처럼 다루었던 것입니다. 자신을 존중히 여기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존중하는 법도 모릅니다. 타인을 존중하는 법도 모릅니다. 가장 먼저 입다는 성공이나 사역이나 입신양명, 명예회복을 운운할 것이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아야 했습니다. 노바디의 인생을 제대로 영적으로 조망하면서 회개하고 사역을 하기 전에 말이죠. 그런데, 입다는 너무 노바디 콤플렉스가 심합니다. 처절하게 버림당한 자신의 상처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길르앗 장로들이 왔을 때도 '장관' 보다 더 한 '머리'가 되길 원했고 이스라엘의 통치자Somebody가 되길 원했던 것입니다. 암몬 왕과의 협상 테이블에서도 계속 자신의 장점을 부각시키면서 자존심 싸움을 했습니다. 계속 인정받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영이 임했음에도 불구하고 의심하면서 또 다시 무모한 맹세, 번제물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럴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인간은 모두가 다 노바디입니다. 하지만, 그 노바디의 인생에 하나님께서 오시면 썸바디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썸바디가 되시니깐. 우리는 더 이상 노바디가 아니라 썸바디, 즉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입다는 그걸 모르고 있습니다. 이 무지에서 입다의 모든 비극은 출발했습니다. 

 

 

 

입다는 동족, 에브라임 사람 42,000명을 가차 없이 죽였다

12장 1-7절에는 또 다시 동족인 에브라임 사람들이 와서 입다에게 트집을 잡습니다. 에브라임은 사사기 8장에서도 기드온을 찾아와 트집과 불평을 내어놓자 기드온이 아주 부드럽게 잘 대처해서 넘기는데요. 협상 능력이 스스로 장점이라고 생각했던 입다가 12장에 와서는 말로 위기를 넘길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원래 그런 성향이 있구나 하고 동족이니깐, 같은 민족이니깐 넘기면 될텐데 입다는 발끈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능력, '강한 용사'(11:1),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함'(11:29)을 에브라임 사람들 42,000명을 죽이는 데 사용합니다. 어찌 보면 입다는 이방인인 암몬 왕과는 처음에는 대화를 시도했는데, 오히려 동족인 에브라임 사람들과는 '닥치고 죽여!'가 나온 것 조차도 저는 입다의 콤플렉스로 보고 싶은데요. 입다는 기생인 어머니가 가나인인 출신이었는데, 어릴 적 집안에서 이스라엘 집안 사람들에게서 쫓겨났습니다. 그 트라우마와 콤플렉스가 아직도 여기에 남아 있나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입다의 존재에 너무나 크게 남아 있었던 '노바디 콤플렉스'입니다. 자신의 딸을 비극적으로 죽여놓고 오히려 분풀이는 동족에게 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추측도 해보게 되네요. 

 

 

 

 

 

썸바디Somebody의 영웅이 되려고 너무 애쓰지 마라!

모든 사람들이 '썸바디 증후군'에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썸바디가 되고 싶어 SNS에서도, 온오프라인에서 기웃거리기도 합니다. 썸바디의 영웅이 되려고 합니다. 입다는 자신의 콤플렉스와 트라우마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자신의 사역의 결과 무남독녀를 비명횡사하게 만들고 동족 에브라임 사람 42,000명의 죽입니다. 사사들 중에서 가장 비극적인 결과물을 낳은 사사가 아닐까 싶은데요. 앞서 보았던 사사 기드온도 만만치는 않습니다. 그 또한 자신의 아들 70명에다 첩의 아들, 아비멜렉까지 다 죽었으니 말이죠. 정말 사사 시대는 무서운 시대였습니다. 말씀이 없는 시대, 혼돈과 카오스의 시대였으니 사람들이 다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던 시대였으니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 또한 말씀이 없다면, 메시지가 없다면, 하나님이 없다면 우리 또한 날마다 '썸바디의 영웅'이 될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이런 것은 교회 밖의 세상에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도 저마다 썸바디의 영웅이 되고자 하는 몸짓이 더러 있습니다. 

 

고난주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신의 썸바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고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 에브리바디Everybody를 위해서 말이죠. 주님이 우리의 썸바디이십니다. 주님이 우리의 썸바디의 영웅이신 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을까요? 만약 우리가 아직도 무언가 되고자, 썸바디의 영웅이 되고자 한다면 우리 또한 입다의 '노바디 콤플렉스'에 빠져 있는 것인지 모를 입니다. 여러분, 너무 썸바디가 되려고 애쓰지 마시길 바랍니다. 입다가 썸바디의 영웅이 되려고 하다가 주위의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습니까? 자신의 딸부터 시작해서 에브라임 사람들의 수많은 유족들에게 상처를 남기지 않았나요?

 

 

 

 

래 글을 쓰기 전, 제가 입다이야기를 묵상하면서 처음에 정했던 주제는 '사역 보다 마음다스림이 먼저'라는 주제였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역과 대단한 성공과 엄청난 일을 하려고 너무 애쓰지 말기를 바란다는 취지에서 였습니다. 사사 입다가 사역을 하지 않았다면, 사사로 나서지 않았다면 자신의 무남독녀와 에브라임 사람 42,000명의 생명을 건졌을텐데 말이죠. 사역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고, 자신의 상처를 그리스도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 상처를 하나님 안에서 해결하지 않고 사역을 과도하게 하다 보니 사달이 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입다에게 열심이 없었나요? 열정적이었습니다. 열정이 있었으니 맹세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를 돌아보고 마음을 다스리고 하나님 앞에 제대로 앉아 있는 영적인 훈련이 없는 사람이 사역을 하면 민폐인 것입니다. 사사 입다는 하나님 앞에 섰을때 어떤 이야기를 들을까요? 아닙니다. 사사 입다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제 자신을 돌아보기에도 모자란 시간이고 인생입니다. 

 

입다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주는 사사, 반면교사입니다. 

 

사사기 12:7
입다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육 년이라 길르앗 사람 입다가 죽으매 길르앗에 있는 그의 성읍에 장사되었더라

 

사사들 중에서 가장 짧은 기간 통치한 인물이 바로 입다입니다. 고작 6년입니다. 

 

 

 

구약성경 사사기 11장~12장 7절까지 기록된 사사, 입다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해 보았는데요. 노바디의 인생에서 썸바디가 되기 위해 애썼던 그의 비극을 반면교사 삼아 '입다, 썸바디의 영웅이 되려고 너무 애쓰지 마라'란 주제의 묵상이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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