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사사기 2장 1-10절의 본문을 토대로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라는 주제로 과거에 했던 설교를 포스팅하고자 합니다. 여호수아와 함께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을 경험했던 세대 이후, 전후세대의 문제점을 같이 나눠 보고자 합니다.
오늘의 본문내용이다.
[삿 2:1-삿 2:10]
(1)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에 이르러 가로되 내가 너희로 애굽에서 나오게 하고 인도하여 너희 열조에게 맹세한 땅으로 이끌어 왔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에게 세운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2)너희는 이 땅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며 그들의 단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도다 그리함은 어찜이뇨(3)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4)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5)그러므로 그 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하니라 무리가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6)전에 여호수아가 백성을 보내매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그 기업으로 가서 땅을 차지하였고(7)백성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8)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일백 십세에 죽으매(9)무리가 그의 기업의 경내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산 북 딤낫 헤레스에 장사하였고(10)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프롤로그...
아주 오래전 서점가에서 베스트셀러로 유명했던 책을 기억하는가? 그것은 바로 ‘람세스’이다. 프랑스의 작가, 크리스티앙 자크가 쓴 아주 흥미진지한 소설이다. 총 5권으로 된 소설인데 그 소설의 스토리가 되는 배경이 바로 출애굽기이다.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애굽의 왕의 이름은 무엇인가? 성경에서는 ‘바로’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이것은 여러분이 잘 아는 ‘파라오’의 다른 말이다. 그 때 모세가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킬려고 하고 바로 즉 파라오는 그들을 계속 노예로 남겨둘려고 했다. 이 시대의 왕이 바로 람세스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람세스 2세였다.
이 소설을 쓴 작가는 원래 소르본 대학에서 철학과 고전문학을 전공했는데 그는 고고학과 이집트학으로 방향을 전환했고, 결국 이집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소설에서는 람세스는 하나의 신적인 인물로 묘사되어지고 있다. 히타이트인들과의 카데슈전투에서 람세스는 자신의 이집트군이 거의 전멸 상태에 이르게 되었는데 갑자기 번개같은 신적인 힘을 발휘하더니만 히타이트인들을 완전히 초토화시키는, 그리하여 패배로 치달았던 전세를 다시 승리로 전환시키는 놀라운 능력 뿐만 아니라 거대한 야생 황소와의 대결에서 그 놈을 굴복시킨다던가, 코끼리를 자신의 절친한 친구로 사귄다던가, 거친 사자와 친구가 되는 등의 신비적인 능력, 더 나아가 그가 즉위할 당시에는 풍년이 들었으며, 비가 오지 않은 가뭄날에는 신전에 가서 제사를 드림으로써 비를 만들어냈던 인물이었고, 거대한 문명과 문화적 업적을 남겼다. 여러분이 잘 아는 스핑크스나 이집트의 대부분의 신전은 람세스가 즉위할 때 거의 다 세워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소설이 조금은 람세스에 대해 과장한 탓도 있지만 람세스의 위대한 업적은 과히 놀랄만하다.
하지만 이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성경과 배치되는 내용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혹자는 이것이 반기독교적인 소설이라고도 한다. 나도 그런 것에는 동의한다. 구원의 역사를 단순히 람세스 위주로 해석을 해놓은 저자의 이집트 편향적인 태도가 무척 마음에 거슬린다. 여러분이 만약 이 책을 읽게 된다면 이런 점을 유의하면서 읽기를 바란다. 제가 지금 람세스를 왜 얘기하느냐? 그것은 바로 한 사람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 지를 실감하기 위해서이다. 람세스가 죽고 난 이후로 그와 비길만한 사람은 이집트 왕조에 없었다. 그의 업적과 그의 행적에 그 어느 누구도 따라올 자가 없었던 것이다. 이 소설에서 람세스는 하나의 신화같은 존재였다.
“람세스 2세는 알렉산더 대왕이나 케사르와 나란히 고대에서 가장 추앙받는 영웅의 한 사람이다. 남쪽 아부 심벨로부터 북쪽 타니스에 이르기까지 약 1500킬로미터에 달하는 지역에 람세스 2세의 발자취가 깔려 있다. 지금 이집트에서 이루어지는 매년 백여 차례 가 넘는 발굴의 대부분이 람세스 2세와 관련이 있다. 당시 평균 수명이 40세이었던 때에 90세가 넘게 살았던 람세스 2세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 생명 력의 진실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시무라 사쿠지(일본의 이집트 학자)
“람세스의 재위 기간은 이집트 역사상 가장 두드러진 시기이다. 19세기 이집트 학자들이 그를 대왕이라고 부른 것은 신전에 묘사되어 있는 대로 전쟁에서 보인 용맹성과 함께 재 위 기간 동안의 번영 때문이며, 그의 백성들이나 후손들도 그를 대왕으로 여겼다. 제 20 왕조의 왕은 9명이나 그의 이름을 땄고 그의 후손이라 주장할 수 있는 것을 영광이로 여겼다. 그는 유능한 행정가였으며 백성들에게 평판이 좋은 왕이었다.”-브리태니커 백과사전
람세스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불꽃과 같은 인물이었다. 물론 성경적으로는 하나님의 계획, 출애굽을 방해한 인물이지만, 이 한 사람의 영향력을 제가 얘기한 것을 통해서나마 조금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본론...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
오늘 우리가 보고자 하는 본문 가운데 바로 람세스와 같은 엄청난 영향력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미쳤던 한 사람이 역사의 뒤안길,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는 장면이 1:1이후로 또 다시 기술되어지고 있다. 그가 이루었던 그 하나님의 비젼, 엄대한 계획은 다른 후손들에게 맡겨진 채 말이다. 6-7절을 보라!
(6)전에 여호수아가 백성을 보내매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그 기업으로 가서 땅을 차지하였고(7)백성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믿음의 지도자가 살아 있을 때 그들은 신앙을 그나마 지키면서 하나님을 섬기기에 힘썼다. 여호수아와 함께 출애굽의 체험과 하나님이 전쟁을 주관하신다는 뜨거운 감격과 승리의 경험을 했던 사람들의 생전에는 이스라엘에게는 믿음의 황금기였다. 그러나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110세에 죽고 장사한 후, 또한 여호수아와 함께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했던 사람들도 다 죽고 나자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의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들은 이른바 전후세대들이었다. 이들의 선조들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면 전쟁에서 분명히 승리를 보장받았지만 그것을 조금이라도 의심하였다면, 그들은 패배를 면치 못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한다는 사실을 몸으로 직접적으로 부대끼며 살았던 그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똑바로 섬기지 못했다면 죽음의 형벌을 감수해야 했기에 늘 각성하면서 하나님을 섬겼던 이들이었다.
여러분 잘 알지 않는가? 여호수아와 그 시대 사람들은 그 엄청난 성, 여리고 성을 어떻게 무너뜨렸는가? 요즘 현대전으로 말하자면 미사일과 탱크와 여러 가지 전투에 사용될 무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 여리고성을 단지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성을 7일 동안 돌고서 나팔을 부는 것, 그 하나로써 여리고 성은 무너졌다. 그것도 안으로 무너졌다. 그들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기다랗고 날카로운 창과 검과 방패가 충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에 달려 있었다.
여리고성을 쉽게 물리친 그들이 아이성을 치는 데는 패배하였다. 왜 그런가? 아이성에 대한 정탐군의 보고는 이렇게 나온다(여호수아 7:3)....정탐꾼들이 돌아와서 여호수아에게 보고하는 광경이다.
여호수아에게로 돌아와서 그에게 이르되 ‘백성이 다 올라가게 말고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마소서’
하므로....아이성은 여리고 성에 비해 심히 작았다. 그리하여 백성 중에 3천 명만 차출되어 전쟁에 나섰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했는가? 36명의 생명을 앗아가고서 허겁지겁 그들은 도망하여야 했다. 왜 이런 문제가 생겨났고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아뢰었다. 분해하며 어찌 이러한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구하자 그 해답은 바로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한 나의 언약을 어기었나니 곧 그들이 바친 물건을 취하고 도적하고 사기하여 자기 기구 가운데 두었느니라’
-바로 한 사람, 아간이 하나님께 바친 제물에 손을 대어 도적질하였기 때문에 전쟁에서 졌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하나님은 삶과 죽음과 생명을 좌지우지하시는 분이셨다. 그들은 그것을 피부로 절실히 느끼면서, 주위의 동료가 하나님의 진노로 죽음을 당하는 광경을 목격하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갔던 자들이었다. 삶의 현실을 피부로 느끼며 그 현실 가운데 임하는 하나님을 경험하며 살았던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신앙은 하나의 이론이나, 신화나 관념이나 공허한 메아리가 아니라 삶 속에서 끊임없이 용솟음치는 그 무엇이었다. 하나님을 잘 섬기면 축복이 돌아왔지만 행여나 하나님을 삶 속에서 무시하거나 인정치 않는 행위가 나타났을 때는 그 결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전쟁에서 패배하거나 그로 말미암아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자신들의 위험에 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늘 하나님 앞에서 깨어서 살았던 자들이었다. 그만큼 현실로 다가오는 무게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모습이 요구되어진다. 너무나 밋밋하고 너무나 현실에 안주하고 타협하고 그리하여 신앙은 온데 간데 없는 그런 천박한 믿음의 모습이 아니라 바로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있는 역동적인 믿음의 모습 말이다.
그러나, 그들 이후로 태어난 후손들이 문제였다
그들은 삶이 영적 전쟁임을 실감하지 못하고 적당하게 자신의 삶을 꾸려갔던 것이다. 그들의 실패의 원인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는데 있었다(V.10). 그들은 지적으로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했다. 하나님과의 일대 일의 관계로 만나지 못한 것이었다.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교제를 누리지 않았다. 아마 누가 하나님에 관한 무슨 이야기를 하면, 건성으로 “아, 우린 이미 그것에 들어 알고 있어”, “예전에 다 들었던 얘기인데?”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신앙의 직접적인 체험이 없고 감격이 없는 자들이었다. 이것이 바로 제 2세대들의 증후군이다. 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가?
첫째, 현 상태에 만족해하기 때문이다. 영적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고 안락한 삶 가운데 안주하려 들기 때문이다.
둘째는 하나님의 축복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참으로 은혜로 여길 줄 모르기 때문에 결국 이런 타락으로 가는 것이다. 11절부터 차차 살펴보면 그들은 우상 숭배를 거침없이 한다. 버리고...좇아...진노하게 하였으되...(V.12)
그들은 하나님을 지식적으로만 알았지 체험치 못 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상황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는 말이 있다. 그것은 바로 V.1에 나타난다.
우리에게 이러한 모습은 없는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말 그대로 지식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고 현실과 세상에 만족해하며 안주하는,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람들이 도전하였고 응전하였던 그 파란만장한 삶을 거부한 채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그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는 얼마만큼의 감사의 삶이 있는가? 늘 짜증과 울분과 불평과 불만과 한숨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는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가 버릇없고 철없고 예의바르지 못한 요즘 애들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후손들이나 요즘 애들을 탓하기 이전에 먼저 우리가 자문해야 할 것은 우리들이 바로‘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가 아니냐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를 쉬며,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가 희미해져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자.
길갈에서 보김으로
여러분 아는가? 길갈은 여호수아에서 매우 중요한 장소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적적으로 요단강을 건넜을 때 처음으로 정착한 곳이 길갈이었다(수 4:19). 그리고 거기서 그들은 할례를 행하였고 유월절을 지킴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였다. 길갈은 승리의 장소요, 축복의 장소였다. 반면 보김은 ‘울음’이라는 뜻이다. 길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순종했고 그래서 승리를 경험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그들의 위치는 “보김” 곧 울음과 심판의 장소가 될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이스라엘은 지금 길갈이 아니라 보김에 와 있다.
V.4-5을 보라! 여기서 이들이 드린 예배와 통곡은 완전한 회개가 아니었다. 그러니깐 순수한 마음으로 회개한 것이 아니라 단지 후회하는 마음이었다.
(4)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5)그러므로 그 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하니라 무리가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있지 않는가? 죄로 인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도 하지만 결국 자세히 돌아다보면 여전히 죄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죄와 타협하는 마음이 있다. 그것은 회개가 아니라 후회의 한숨일 뿐이다. 그들이 길갈에서 보김으로 추락하게 된 것은 결국 하나님을 온전히 순종치 않은 데 있었다. 100% 온전한 순종을 주께 드리자.
여러분의 삶은 어디에 와 있는가?
길갈에 와 있는가? 아니면 보김에 와 있는가? 혹은 길갈에서 보김으로 내려오는 중인가? 역으로 보김에서 길갈로 내려 오는 중인가?
생각해보자!
에필로그....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미래의 충격’이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했다. 인류생존의 최근 5만년을 대략 62년의 생애로 나눈다면 그 동안 약 800회의 생애가 있었던 것으로 된다. 이들 800회의 생애 중에서 650회의 생애는 동굴에서 보냈다. 최근의 70회의 생애에 와서야 문자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해졌고, 그 중에서도 일반대중이 인쇄된 언어를 볼 수 있게 된 것이 마지막 6회의 생애에 와서이다. 또 시간을 어느 정도 측정할 수 있게 된 것은 마지막 4회의 생애에 와서였다. 어디에선가 누군가가 전동기를 사용하게 된 것은 마지막 2회의 생애에 이르러서였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모든 물품들의 절대다수는 현재의 800회의 생애중에 개발된 것들이다.
우리는 21세기를 지나고 있다. 지나간 20세기는 이러한 800회의 생애에 걸맞는 변화가 있었는데 그것은 과히 크나큰 전쟁이었던 것이다. 세계대전의 발발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로서는 6.25사변이 있었다. 우리는 그러한 전쟁의 참상과 비극을 모르고 자란 말 그대로 전후 세대들이다. 우리가 혹시 본문에 나오는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아닌지 돌아보자. 우리는 지금 앨빈 토플러가 말한대로 800회의 생애를 살아가면서 엄청난 문명의 이기를 누리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문명의 변화 속에서 하나님이 잠식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컴퓨터로 인해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되는 사이버 시대에 우리는 과연 이스라엘 백성 중에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가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바로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오늘날의 현실이요, 우리의 현실이 아닌지...
또한 마지막으로 자문해 본다.
“우리는 과연 길갈에 머무르고 있는가? 아니면 보김에 머무르고 있는가?“
우리는 그 옛날 선지자 호세아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길 원한다.
(호세아 6:3)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6)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오늘은 구약성경 사사기 2장 1-10절의 본문을 토대로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라는 주제로 과거에 행했던 설교내용을 공유합니다. 신앙은 지식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체험적 지식이 필요하다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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