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사사기 1장 16-36절의 본문을 토대로 "삶은 개구리"라는 주제로 과거에 설교한 내용입니다. 개구리는 자신이 처한 위기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적당주의'에 취해 지내다가 결국 파국을 치닫게 되는 모습이 오늘 이스라엘의 모습이 아닌가 싶네요.
서론
"삶은 개구리"의 일화를 다들 아실 것이다. 개구리는 차가운 냄비 속에 갇혀져 있었지만 그곳이 좋았다. 아늑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몸이 더 나른해지기 시작했다. 인간들이 즐기는 사우나가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하지만 온도는 점점 따뜻함을 넘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냄비에서부터 탈출하고자 몸부림을 쳐 보았지만, 이미 자신의 몸은 마비가 온 상황이었고 결국 개구리는 뜨거운 냄비 속에서 천천히 '삶은 개구리'가 되고야 말았다. 개구리가 천천히 삶겨져 가는 과정을 다룬 이 비유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삶은 개구리처럼 안일하고 편안함에 안주하다 보면 결국 자신이 그 비참한 형국에서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말해주는데, 오늘 구약성경 사사기 1장에서 보여준 이스라엘의 모습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다.
본론
오늘 보고자 하는 이 본문은 이 “삶은 개구리”의 이야기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예화이다. 그렇다면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는 지난 주에 이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가나안 땅을 정복해 가는지를 살펴보자. 지난 주까지, 그러니깐 15절까지는 가나안의 남부, 남쪽 지방의 정복사업이었다면 오늘은 북부 지방을 정복하는 광경이 펼쳐진다. 이스라엘의 12지파가 그 땅을 어떻게 정복해 가는지를 아주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다.
먼저 무슨 지파가 등장하는가?
유다지파(V.16-20), 베냐민(V.21), 요셉(V.22-26), 므낫세(V.27-28), 에브라임(V.29), 스불론(V.30), 아셀(V.31-32), 납달리(V.33), 아모리(V.34-36)
대략 이러한 내용이다. 그들 지파들이 무슨 땅을 정복하러 가서 그 땅을 차지하고 그 후에 거기에 거주하는 가나안 사람들을 어떻게 하였는지에 대한 결과를 설명해주고 있다. 우리가 구약중의 사사기라는 본문에 별로 익숙치 않아서 그렇지 알고 보면 아주 쉬운 내용이 담겨져 있다. 여기에 벌어지고 있는 내용은 바로 그들이 전쟁의 승리 후에 포로들을 어떻게 대하였는가에 초점으로 모아지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들을 어떻게 대햐였는지를 보라! 힌트를 주자면 본문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동사가 무엇인가?
‘쫓아 냈다, 쫓아내지 못 했다’,
그리고 좀 적게 나오는 ‘사역을 하다’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정복하라고 하신면서 그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신 바가 있는데 그것은 무엇인가? 바로 그 땅에 있는 모든 가나안 인들을 멸절시키거나 그 땅에서 발 붙히지 못하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단호하고도 엄격한 명령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가나안 인들을 완전히 쫓아내지 못했다. 이 본문은 마치 볼링장에서 볼링을 치는 광경과 비슷한 광경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든다. 분명히 퍼펙트는 따 놓은 당상인데 스트라이크, 더블, 터키, 포키.... 그들은 스트라이크는커녕, 스패어처리도 제대로 못 하고 계속되는 프레임에서 오픈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들은 퍼펙트를 놓쳤다. 그들이 가나안 정복의 퍼펙트를 놓친 이유는 많을 것이다. 19절을 보라! 유다자손이 가나안인들을 온전하게 추방시키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은 가나안 골짜기 거민들을 쫓아가 거의 승리의 마지막 순간에 그들에게 강한 철병거라는 무기가 있었기 때문에 주춤거리다가 그냥 주저앉고 말았다. 그들의 눈에는 전쟁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믿음보다는 눈 앞에 있는 그 태가 나고 시퍼렇고, 강한 철로 만든 강력한 무기인 철병거가 더 크게 보였던 것이다.
19절에는 분명히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하셨다는 기록이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정적인 승리의 기회를 놓치고 만다. 유다자손이 그 형제 시므온과 함께 골짜기 거민을 쳐부술 때와 같은 그런 하나님의 임재를 왜 느끼지 못 했을까? 그것은 바로 유다의 인간적인 두려움이 심히 컸기 때문이다. 단순히 전투에 있어 전력차이라기보다는 그들은 하나님의 초토화시키라는 명령에 순종도 아닌, 그렇다고 불순종도 아닌 흐지부지한 신앙 상태를 고수한다. 이른바 적당주의이다. 그런 광경은 요셉 족속을 제외한 베냐민 지파에게서도, 므낫세, 에브라임, 스불론, 아셀, 납달리, 아모리에게도 드러난다. 그들은 처음에는 전세를 완전히 거머쥐고 승리를 바라다가도 마지막에 가서는 주저앉고 만다. 조금만 더 믿음을 발휘하면 하나님께서 보장하신 승리는 저희의 것이 될 것인데 말이다. 그러다가 승리가 안 된다고 생각하고는 타협을 하기 시작한다.
어떻게 타협하는가? 어떤 지파들은 그들을 일부 지방에 정착하도록 허용하고서 자기들의 편리와 안일한 삶을 위해서 감당하기 쉬운 일에만 몰두한다. 어쩌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승리에 도취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험란한 광야생활을 거쳐서 가나안에 들어서자 그들은 계속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성경의 계속되는 내용에는 결코 이스라엘이 완전히 박살이 났다라던가, 아니면 극심한 참패를 당하였다는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그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비옥한 땅을 자신들의 소유로 가지게 된다는 그 엄청난 환희에 젖어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남긴 경고와 명령들을 망각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마치 어제 잠실에서 벌어진 한.일 전 축구경기에서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어처구니 없는 2:0으로 진 것과 비슷하다. 우리나라는 5승 1무로 월드컵 본선 진출의 티켓도 따 놓은 상태이고, 조 1위에다 한 번의 패배도 없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지지난주의 우즈벡과의 경기를 무려 4골차이나 벌이면서 완승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팀은 계속되는 승리와 패배를 모르는, 매스컴에서는 차범근의 축구와 팀에 대한 찬사로 말미암아 아주 들떠 있던 상태였는데 그러한 가운데 우리나라는 하나의 비수를 맞은 셈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그런 안일한 생각들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 정도쯤이야 봐 주지 뭐’라든가, ‘꼭 이렇게까지 가나안 백성들에게 대할 필요가 있을까?’ 그러면서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좋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니냐?’라는 식의 생각과 사고방식에 젖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기들의 영토에 남아 있는 적들을 완전히 쫓아내지 않았다. 이것은 바로 불완전한 순종이었으며, 일종의 타협화였다. 그래서 중도에 그들은 적 소탕작업을 흐지부지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적당주의는 곧 세속화를 불러 일으켰다. 결국 이스라엘 사람들도 가나안 사람들의 종교와 우상을 숭배하기에 이르렀고 나중에는 축복의 땅 가나안에서 쫓겨나기에 이르른다.
지지난주 설교시에 들었던 말씀을 기억하는가? 유다 백성이 시므온 지파와 함께 올라가서 전쟁을 치를 때, 아도니 베섹을 어떻게 하였는가?그들은 그를 쫓아가서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잘라 버렸다. 그것은 명백히 이방인의 관습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오늘 이 본문에 나타나는 현상들의 하나의 복선이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조금씩 조금씩 밀려오는 죄의 습성을 허용한다. 마치 암세포처럼 그것이 이스라엘을 삼켜 버리고 있다. 암이 어떤 것인가? 초기에 발견하면 충분히 막을 수 있지만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게 되는 것이 아닌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죄의 암이라는 병명의 초기 증상을 드러내고 있다. 죄에는 사람의 능력으로 제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죄에는 무자비함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데에는 무모함이 때로는 필요하다. 사람의 마음 속에는 죄를 짓고 싶어하는 성향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다. “거민을 쫓아 내지 못 했다”하는 말은 마치 후렴구처럼 계속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22절과 26절에 가나안 족속을 초토화시킨 요셉족속도 나중에 단 자손의 전쟁에 도움을 줘서 승리를 하게 되지만 그들도 역시 마찬가지로 35절에 초토화시키지는 않고 있다. 이스라엘 지파들이 타협의 한계를 자꾸만 넘어가고 있음을 본다. 그들은 처음에는 하나님에 대한 강한 믿음으로 전쟁터에 나섰지만 시간이 지나갈수록 그들은 전쟁의 신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들의 무기와 전투력으로 승리하게 되었다고 착각하고만 있는 것 같다. 이럴 때가 위험한 것이다. 신앙을 지키는데 있어서 어려운 환경이나 시험이나 위기상황이 있다면 더 하나님을 찾게 되지만 평탄하고도 쉽고도 고만 고만한 삶이 계속되면 우리들도 결국 ‘삶은 개구리 ’꼴이 난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박해를 받던 로마 황제 시대에 어느 로마 황제가 황제 숭배를 거절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믿음에서 돌이키기 위해 믿음을 버리든지 아니면, 목숨을 버리든지 둘 중에 하나의 선택을 하도록 했다. 그 말을 들은 지혜로운 신하가 말했다.
“폐하! 죽이는 것으로는 결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저들은 죽으면 돌아갈 천국이 있기 때문에 죽기를 오히려 고대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화가 난 황제는 그러면 죽이지는 말고 더 혹독한 고문을 해서 저들이 믿는 주를 배신하게 하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그 신하는 또 대답했다.
“폐하, 그것은 더더구나 안 됩니다. 저들은 이 땅에서 예수를 위해 받은 고난만큼 천국에서 상을 받는다고 믿기 때문에 고문당하기를 더욱 더 환영할 것입니다.”
신경질이 난 황제는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저들을 항복시킬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신하는 대답했다.
"어떤 수를 써서든지 죄를 짓게만 만드십시오. 그러면 저들은 꼼짝없이 믿음을 저버리게 될테니깐요.“
결론
여러분에게 있는 암세포는 무엇인가? 여러분의 삶 가운데 있어서 불어나고 있는 죄라는 암세포는 없는가?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암세포이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죄’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끊임없는 이방인의 관습과 하나님께 대한 불완전한 순종과의 타협은 그들을 멸망으로 이끌게 된다. 여러분에게 이러한 죄가 없는가? 여러분은 자신에게 죄가 있다는 것을 알면 즉각적으로 회개하는가? 아니면 개기는가? 알고 있는 죄 가운데 그 일부를 그대로 방치해 두고 무관심한 것은 아닌가? 이스라엘의 패망의 원인은 하나님께 대한 불완전한 순종과 타협에 있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는가? 혹시 적당주의가 삶에 자리잡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자.
사사기 1장 26-36절의 본문을 기초한 '삶은 개구리'라는 주제의 설교인데, 이스라엘이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 초기의 승리에 도취되어 하나님의 명령을 적당하게 타협하면서 은근히 불순종하는 모습이 마치 '삶은 개구리' 모습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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