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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사무엘상.하

사무엘상 6:13-21, 용납된 제물과 심판받은 벧세메스

by Message.K 2023. 12. 30.

사무엘상 6:13-21의 본문은 '용납된 제물과 심판받는 벧세메스'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님을 모르는 블레셋 사람들의 제사와 하나님을 아는 벧세메스 사람들이 드린 제사의 성격과 특징, 그리고 하나님의 반응이 왜 다른지, 벧세메스 사람들은 왜 심판을 받았는지 알아보자.

 

사무엘상 6:13-21, 용납된 제물과 심판받은 벧세메스
사무엘상 6:13-21, 용납된 제물과 심판받은 벧세메스

 

 

 

 블레셋 사람들은 암소가 무언가에 끌린 듯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길을 가는 것을 보았다. 그러면서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이 당한 재앙이 우연의 일치가 아닌, 여호와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새끼를 둔 암소들이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길을 갔기 때문이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궤가 돌아온 것을 보고 기뻐했다. 7개월 전에 전쟁터에 법궤를 빼앗겼을 때 실로에 임했던 슬픔과 통곡이 이제는 기쁨과 환호성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수레가 멈춘 곳에서 그 수레를 장작 삼고,소들을 제물 삼아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다(14절). 모든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그런데 성경에선 15절에 이렇게 이야기한다.

 

  레위인은 여호와의 궤와 그 궤와 함께 있는 금 보물 담긴 상자를 내려다가 큰 돌 위에 두매 그 날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께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리니라

 

  그런데 율법에 의하면 수소만이 제물이 될 수 있었다.

레위기 1:3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릴지니라

 

  벧세메스 사람들은 이 일로 인해 율법을 범한 것이다. 따라서 잠시 후 그들에게 임하는 재앙도 이 일과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사실 가장 이상적인 시나리오는, 새끼들을 뒤로 두고 온, 어미 암소들을 인도적인 차원에서 돌려보내고, 자신들의 가축 중에서 수소를 바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사람이 제물을 바칠 때마다 그 사람에게서 어느 정도의 희생을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다윗은 이 대목을 정확히 간파한 인물이었다.

 

사무엘하 24:24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다윗이 은 오십 세겔로 타작 마당과 소를 사고

 

  다윗은 일국의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저주를 거두는 예배, 제사의 장소로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을 지목했다. 일국의 왕이라면 당연히 그 타작 마당의 부동산 정도는 백성에게서 세금 거두듯이 거둬들일 수도 있고, 백성이 자발적으로 선물을 줄 수도 있는 대목이었다. 잘 봐달라는 선물이나 뇌물조로 말이다. 하지만, 다윗은 그 땅을 값을 주고 샀다. 아라우나가 그냥 선물로 드리겠다고 해도 다윗은 극구 사양했다. 다윗은 예배의 정신, 제사의 필수적인 정신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것을 내려놓는 희생, 헌신의 자세였다. 값 없이는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겠다, 희생없이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저자세가 깔려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벧세메스 사람들은 법궤가 돌아온 이 감격적인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한 제사의 원칙을 준수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즉흥적으로 행동한 듯 보인다. 예배, 제사는 좋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윗이 생각했던 그 예배의 정신을 벧세메스 사람들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법궤를 자신들의 수호신으로, 하나님의 부적처럼 여겼다. 그 수호신이나 부적처럼 여긴 그 법궤가 돌아왔을 때, 여전히 하나님의 마음은 개의치 않고 자신의 방식대로 하나님을 대하고 있다. 블레셋 사람들은 법궤를 수레에 실은 것도, 자기들 나름대로 새 수레에 실은 것도 하나님은 용납하셨다. 왜냐하면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의 백성이 아니고 율법의 ‘율’자도 모르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예배드리고 제사 드려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15절의 말씀처럼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께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그 다른 제사는 제사장이 드린 제사가 아니기도 하고, 또한 수소 대신 암소를 제물로 삼은 것이기도 있다.

 

성도 여러분, 순종이 결여된 제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 사울은 사무엘이 기다리라고 했지만 결국 제사장이 아닌 왕이 제사를 드렸다. 그로 인해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 이스라엘의 초대왕이 되고야 말았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했다. 하나님의 마음이 합한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께 전심으로 예배하는 자가 되라!

 

  하나님의 법궤가 자신들의 품에 들어왔다고 해서 벧세메스 사람들은 의기양양한 것 같다. 이제 주도권이 이스라엘에게로 돌아온 것으로 착각했다. 그 착각은 바로 19절에 드러난다. 무슨 행동을 한 것인가?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명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슬피 울었더라

 

수레에 실고 온 여호와의 궤가 신비롭긴 했겠지만, 그것은 분명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기에 거룩하게 다뤄져야 하지, 함부로 대해선 아니 되었다. 하지만 벧세메스 사람들은 하나님의 궤를 함부로 대했다. 실로에 있던 성막도 이미 지난 전쟁에서 파괴되었다. 엘리와 아들들도 죽었다. 뚜렷한 지도자가 없었다. 블레셋에서 돌아온 법궤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혹은 어디에 안치해야 할지 공동체가 고민해야 할 문제였다. 그런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고민은커녕 자신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법궤 안을 들여다보는 불경스러운 일을 저질러 큰 재앙을 초래했던 것이다.

 

  이 일로 인해 (오만)70명이 죽었다. 마소라 사본은 오만이 붙어 있지만, 벧세메스의 인구가 많아야 몇 천인데, 오만이란 숫자는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증거로 인해 번역본들은 괄호를 앞에 두고 있다. 영어 번역본들 중에서 거의 대다수가 70명으로 표기하고, 요세푸스 또한 처음으로 70명이라고 한 것은 역사적 근거로 작용한 결과이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을 비인격적인 사물 대하듯이 대하시는 그런 불경스런 행동이 벧세메스 사람들에게 재앙을 초래한 것이다. 요세푸스는 하나님이 벧세메스 사람들을 치신 이유를 그들이 제사장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이제 조금 하나님에 대한 개념에 눈을 뜨는 듯 하다.

20절 벧세메스 사람들이 이르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누구에게로 올라가시게 할까 하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은 인생이다. 허물은 남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고, 죄는 원래 가야할 방향에서 삐뚤어지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이런 허물과 죄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사죄받아야 할 제목들이다. 오늘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하나님 위에 군림하면서 벧세메스 사람들이 행동하는 것처럼 내가 마치 하나님이냥 경솔할 적은 없는가?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모든 주도권을 내어드리길 바란다. 하나님을 함부로 대하는 처사는 없는가?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나도 존중히 여긴다고 말씀하셨다! 이 새벽에 자신의 모습을 내려놓고 우리 안에 벧세메스의 사람들과 같은 행동은 없는지 돌아보며 회개하는 아침에 되길 바란다.

 

 

수레가 멈춘 곳은 여호수아의 밭의 큰 돌이 있는 곳이었다. 수레가 왜 여기 멈추었을까? 과거 여호수아의 시대에 법궤가 처음으로 가나안 땅에 입성할 때를 기억할 수 있겠다. 화려했다. 하지만 법궤가 처음으로 이 땅에 들어왔을 때 이스라엘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연 건처럼, 이 법궤가 여호수아의 밭에 멈춘 것은 앞으로 이 땅에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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