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2장 35절의 본문을 가지고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라는 제목으로 설교한 내용이며, 이 설교목표는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물러감과 동시에 한 사람의 등극을 대조시키면서 어떻게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을 같이 나눠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한 사람’을 통해서 역사의 물줄기를 틀어 가신다
우리 그리스도교의 역사 가운데 여러 신앙의 위인들을 찾아볼 수 있겠지만 특히 마르틴 루터를 여러분은 잘 알 것이다. 그는 로마 교황청 그 성전건축대금을 충당하고자 면죄부-이 면죄부를 돈을 사기만 하면 죄는 저절로 없어진다는 사기성의 문서-를 팔려고 할 때 그는 과감하게 95개조의 반박문을 내걸고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혁명적인 선언을 내걸면서 종교개혁의 선구자가 되었다. 이 ‘한 사람’이 없었다면 우리 기독교가 과연 이렇게 흥왕하게 되어질 수 있었을까? 하나님은 언제나 ‘한 사람’을 주목하시고 그 ‘한 사람’을 통해서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우리는 본다. M. Luther같은 ‘한 사람’이 오늘 본문에도 등장하고 있다.
한 사람의 물러감과 또 한 사람의 등장
오늘 본문은 한 사람의 물러감과 또 한 사람의 등장을 다루는 배경을 안고 있다.
물러가는 사람은 바로 ‘엘리 제사장’이고, 등장하는 사람은 ‘사무엘’이다.
한 사람의 충실한 제사장
그렇다면 오늘 이 본문에 나오는 ‘충실한 제사장’은 누구이겠는가?
당연히 ‘사무엘’이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바로 사무엘이다.
먼저 한 사람이 물러가는 배경을 살펴보자.
엘리 제사장은 이스라엘의 기둥과도 같은 유일한 성직자, 제사장이었다. 그 당시는 오늘날처럼 교회가 골목골목마다 있을 수가 없었다. 요즈음은 십자가가 여기저기에 있지만 그 당시는 유일한 성전에, 유일한 한 사람의 목사(성직자)만이 있었다. 사람들은 엘리 제사장이 전하는 설교와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것을 배우는 시기였다. 그만큼 엘리 제사장의 어깨는 무거웠다. 그의 책임의 막중함에 비해서 엘리는 그다지 아름다운 모습이 성경상에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사무엘의 등장과 대조적으로 아주 비극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엘리는 나름대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였지만 그게 사람들에게 크게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 것 같다. 성경에는 다윗처럼 엘리의 어린 시절이나 청년시절에 어떠한 활약을 했는지를 이야기하기보다는 엘리의 노년시절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엘리가 매우 늙었더니(2:22)...
엘리가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해서
2:29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지게 하느냐’
(하나님의 엘리에 대한 평가)
에 잘 나타난다. 엘리는 평범한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 제사장이라는 귀중한 직무에는 하나님을 가장 먼저 삶의 중심에 두는, 우선순위에 두는 모습이 있어야 했지만 엘리에겐 하나님보다 자기 자식인 홉니와 비느하스에 더 초점을 두었다. 엘리는 또한 홉니와 비느하스가 성전에 수종드는 여인과 불미스러운 관계를 가진 것에 대해-이것은 분명히 간음죄였다-아들들을 경책하거나 의분을 느끼기보다는 그냥 덮어두는 식으로 일을 마무리지었던 것이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려고 귀중한 짐승을 제물로 가져오면 그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척하면서 자기들이 갈고리로 덥석 먹어치웠던 불경건한 모습도 보여준다. 엘리의 가문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열 받으실 만한 짓만 골라했던 것이다. 이 때 만약 엘리가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머금고 다윗처럼 침상을 젖이면서 회개하고 통곡하였다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엘리에게 다윗에게 부어주었던 은총을 내렸겠지만, 엘리는 그러하지 못했다.
1:9에서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문설주 곁 그 의자에 앉았더라’
엘리는 자신의 노년기에 이르러 아들에 대한 걱정과 삶에 대한 불안과 번뇌들에 휩싸여 기도하기보다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냥 흔들의자에 앉아 저물어가는 황혼을 바라보는 평범한 노인의 모습밖에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마치 자기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에 대해 구경만 하는 한 사람의 관중처럼 그렇게 성경은 기술하고 있다.
우리들에게 엘리와 같은 모습은 없는지 모르겠다. 자기가 지은 죄와 벌여놓은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치 못한 모습들, 그러한 광경을 그냥 무심하게 구경만 하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는가? 일주일 동안 인터넷은 죽으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책에 먼지만 쌓여가게 한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불경건이다. 수학문제집과 영어 단어장은 죽으라고 암기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 한 장 읽지 않는다면, 식사기도만 하고 그 외의 모든 기도는 어디로 간지 사라져버린 우리들의 모습이 바로 엘리의 모습과도 똑같은 것이다. 엘리는 그 당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제사장이듯이 우리 또한 하나님의 제사장들이다.
벧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세상에 대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왕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엘리와 같은 모습을 가져서 되겠는가?
하나님은 이 엘리가문을 완전히 몰락시키게 하셨다. This must stop!(V.30결단코 그렇게 아니하리라)
우리는 또한 한 사람의 등장을 살펴보고자 한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솔직히 애를 가지지 못하는 여자였다. 그러나, 그녀가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하고 서원함으로 말미암아 사무엘을 가지게 되었다. 사무엘을 서원함대로 젖을 뗀 후부터 성전에서 양육되어졌다.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성전에서 온갖 망령된 행동에 젖어 살 때 사무엘은 순결하게 신앙과 믿음을 키웠다.
2:21‘...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2:26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
엘리의 가문이 추락하고 있을 때, 사무엘은 서서히 빛을 발하는 상태였다. 사무엘은 사람들에게만 인정받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서도 인정을 받았다. 엘리의 중심은 평범한 노인이 가진 허무함이 배여 있다면, 사무엘의 중심에는 어린아이에게서 찾아 볼 수 없는 특별한 그리스도인의 면모가 있었다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사무엘은 말씀을 가까이하고 하나님과 대화하는 기도의 자세가 있었다. 엘리 가문의 사람들이나 사무엘이나 별 다를 바 없는 부족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자기 중심에 어떻게 두느냐에 따라서 엘리 가문과 사무엘의 길은 엇갈리고 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어떻게 소개하는지 보라.
V.35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준비된 이 한 사람을 이렇게 당당하게 소개하고 있다.
여러분들은 어떠한가? 하나님께 여러분들을 보시면서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그리스도인 누구누구를 일으키리니 누구누구는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라고 소개할 만 한가?
순수한 하나님의 품안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세계에서 길러지고 양육된 사무엘의 등극을 예고하는 이 말씀은 빛을 잃어 가는 한 나라, 이스라엘에게 엄청난 희소식이었고 다시 한번 소망을 가지게끔 하는 메시지이다. 이스라엘은 이 한 사람, 사무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나라로 다시 태어나려고 하고 있다. 사무엘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인정받고 후원을 입은 한 사람이었다. 성경의 뒷장을 보면 알지만 사무엘은 독신으로 하나님만 섬기는 훌륭한 사역자로 역사를 장식하고 있다.
하나님은 오늘도 ‘한 사람’을 부르시고 계신다. 대은 교회 학생회 회원들인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목하신다. 하나님은 그리고 말씀하신다.
V.30...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하나님은 올해에도 동일하게 ‘한 사람’,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한 사람’을 부르시고 계신다. 옆에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지금 이 순간 가만히 생각해 보자. 나는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멸시하는가?
그러한 모습은 여러분들이 성경을 어떻게 대하는가, 그 태도에 달려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말씀을 대하는 태도 말이다. 역사 속에서 부흥은 언제나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여러분 느헤미야를 아는가?
느헤미야는 비록 자신이 이방인의 나라에 권력에 자리에 올랐지만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급급하지 않았다. 보통사람들 같으면 어떻게 하면 좀 더 승진하고 좀 더 높은 자리로 ‘빽’을 써서 권력의 힘을 발휘해볼까 했지만 느헤미야는 이 모든 것을 포기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성전, 예루살렘의 성전이 무너지고 훼파된 것을 보면서 가슴이 너무 아파서 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집인 성전이 아수라장이 되었는데 자신이 권력의 자리에 앉아 호의호식하는 것이 너무나 가슴이 아팠기 때문이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단호히 용기를 낸다. 아닥사스다왕-크세르크세스-에게 직접 자기가 고국의 성벽을 재건하는 일을 맡겠다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이 말은 잘못하면 자신의 목이 달아날지도 모를 위험천만의 일이었다. 권력의 자리에 앉아서 자신에게 권력을 준 나라를 위해 힘쓰기보다는 말 그대로 쑥대밭이 되 버린 조국 이스라엘의 성벽을 건축하는 일을 생각한다는 것은 일종의 반란이나 쿠데타로 오해되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셨고 느헤미야는 자신이 직접 조국의 훼파 된 성벽을 재건하고 백성들의 사회적. 경제적 삶을 정돈하였던 것이다.
우리 시대에도 이러한 느헤미야와 같은 충실한 제사장, 사무엘과 같은 충실한 하나님의 사람, 그리스도인이 필요하다. ‘한 사람’이 필요하다. 그저 좋은 대학, 좋은 학과에 들어가서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것이 꿈이라면 그게 세상 사람들하고 다를 바가 무엇이 있는가? 우리가 천국 가기 위해 오기 싫은 교회를 억지로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짐승처럼 나온다면 거기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하나님은 지금도 한 사람을 찾고 계신다. 성경을 늘 묵상하며 그 말씀에 엎드릴 줄 아는 사람, 그 성경 구절을 가지고 자신의 기도제목을 부여잡고 기도하는 한 사람을 찾고 계신다. 세상에 영향을 주며 살아가는 그 한 사람, 그 한 사람이 바로 여러분인지도 모른다. 그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라! 그러면 여러분이 바로 그 ‘한 사람’이다. 바로 ‘충실한 제사장’이다.
오늘은 삼상 2장 35절의 본문을 가지고 영적으로 몰락해가는 엘리가문을 지우시고, 새로운 한 사람, 충실한 제사장, 사무엘을 준비시키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 보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영적 제사장이기에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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