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6:25-34의 본문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의 의식구조-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라는 주제로 설교한 내용입니다. 이 설교는 제가 S교회 부목사로 부임해서 한 첫설교로 했던 내용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염려에 대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염려하는 것이 여기에 다 있습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함입니다.
오늘날의 모든 사람들처럼 유대인들도 일용할 양식과 음료수와 의복에 대해서 염려하였습니다. 요즘 버전으로 하면 “얼짱 몸짱, S라인과 초콜렛 복근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만큼 먹고 또 빼고 만들고 다듬을지, 돈 많이 벌면 요즘 유명한 개그프로그램의 대사처럼 ‘기분 좋다고 소고기 사묵겠지’, 에서부터 대학생들과 청년들은 ‘졸업하면 어디에 취직하지? 국시, 임용고시, 고시는 몇 번 만에 붙을까?’”, 기성세대분들은 자녀들의 진로와 교육과 양육비에 대한 고민, 살림과 가계에 대한, 가족들에 대한 이런 고민들일 것입니다.
우리인생에 노래가사처럼 ‘언제 쨍하고 해뜰날이 올까?’ 염려하고 걱정하고 고민하는 것, 그것이 인생이다. 그런 고민은 의례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 나이에 맞는 고민들이 있고 우리들은 인생의 고민학교를 늘 출석하며 도장을 찍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라고 해서 우리가 가진 고민들과 크게 동떨어지거나 그들의 고민의 질이 떨어지는 고민이고 우리의 고민은 고상하고 센스 있는 고민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고민은 다 고민일 뿐이고 염려는 염려일 뿐입니다.
네이버사전에는
- “염려 [念慮][명사]앞일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마음을 써서 걱정함. 또는 그런 걱정“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염려는 ‘메리스’(나눔, 분열됨)에서 파생. 마음이 둘로 나누어져 안정되지 않고 혼란한 상태를 말합니다.
주님은 이런 인생들에게 오늘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머리가 굵어지기 시작하면 돈을 모으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오늘날은 돈으로 안되는 게 생명의 문제와 천국 가는 것 빼고는 웬만하면 다 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이 모든 고민들이 돈이면 다 해결이 됩니다. 돈은 이제 ‘능력’이 되었습니다. 이제 누가 ‘능력’을 보이지 않는 능력으로 환산합니까? ‘능력있는 남자’에서 ‘능력’은 보이는 것입니다. 보여야 합니다. 이렇게 물질이 큰 비중을 차지한 요즘, 주님은 이러한 인간의 ‘축적의 심리’, 끊임없이 쌓아두고자 하는 욕심에 대해서 ‘공중의 새’를 빗대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26절).
(26)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새들은 자기들의 먹이를 쌓아두거나 저장하지 않습니다. 늘 먹이를 찾아다니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용할 양식’에 만족하며 삽니다. 왜냐구요? 새들은 ‘김치냉장고, 냉장고’가 없기 때문입니다. 쌓아두면 못 먹기 때문입니다. 까마귀나 독수리들은 죽은 고기를 좋아하니 그놈들에게는 냉장고는 절대 안 팔릴 것입니다. 오히려 더 구린 냄새가 나고, 오히려 더 잘 썩은 것-medium도 아닌 well done-이 감칠맛난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공중의 새들은 그들이 살아가는 곳이 바로 공중이기 때문에 쌓아 둘 곳도 없습니다. 열심히 지은 둥지 안에는 음식을 저장할 곳 보다 새끼들의 보금자리로도 벅찹니다.
마틴 루터는 ‘산상수훈에 대한 주석(1521)’에서 ‘보시다시피 예수님은 새를 우리의 선생님으로 삼으신다...달리 말하자면 공중에 있는 작은 새의 수만큼 우리에겐 많은 교사와 설교자가 있다.’고 했습니다.
-새를 보라Watch Birds!
어떤 사물에 눈을 고정시키거나 자세히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새들의 깃털과 생태를 연구하고 감상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신학자였지만 평생 독신으로 지내면서 새를 연구했던, 그래서 새 박사이기도 했던 존 스토트가 그러했습니다.
시 한편이 있다. 울새와 참새의 대화를 기록한 시이다.
울새가 참새에게 말했다.
“나는 정말 알고 싶어.
왜 이 근심 많은 인간들은
이토록 안절부절못하며 바쁘게 사는지.“
참새가 울새에게 대답했다.
“친구야, 내 생각엔 그들에게
하나님 아버지가 안 계신 게 분명해.
너와 나를 돌보아 주시는 그 분이 말이야.“
-체니(E. Cheney)
이 본문을 우리는 예수님은 미리 생각하는 것을 금하신 게 아니었습니다. 이 점에서 흠정역KJV이 “내일을 위해 아무 생각도 말라”(Take no thought for the morrow)라고 번역한 것은 중대한 실수다.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는 “근심스런 생각을 하지 말라” 혹은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당연히 미래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도 그렇게 하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개미를 본받아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여름에 양식을 저장하기 때문입니다(잠 6:6-8).
[잠 6:6-잠 6:8]
- (6)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 (7)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
- (8)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실제로 어떤 새들은 개미처럼 미리 양식을 쌓아 둡니다.
캘리포니아 지방의 도토리딱다구리(Acorn Wood-pecker)는 나무 구멍이나 전봇대에 노련한 솜씨로 도토리를 저장합니다. 그리고 때까치들(Shrikes)은 적당한 가시에 곤충을 찔러 꽂아 저장 식품을 비축합니다.
디모데에게 보내는 바울의 편지에서는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하니라”(딤전 5:8).
이 본문을 가지고 우리가 요즘 많이 드는 보험, 가족의 안정과 생명에 대한 보험 즉, 성경이 생명 보험 혹은 미래를 위해 저축하는 것을 인정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근심하고 걱정하는 것을 금하시는 것이지, 사려 깊은 생각을 금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지각 있게 미래를 대비하는 것과 상치되지 않습니다.
공중의 새들은 근심하거나 염려하지 않고 주어진 하루하루를 잘 살아갑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르신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양육하시고 부양하시는 새들, 그들보다 우리 인간이 더 중요하다고 지적하십니다.
- (27)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여기서 키는 대개는 ‘성인’, ‘다 자란 상태’, ‘육체적 성숙’을 뜻하나, ‘목숨’, ‘생명’이란 의미도 가집니다.
우리가 염려를 1시간 하면, 생명이 1시간 연장된다면 우리는 염려인생으로 죽치고 앉을 것입니다. 그러나 염려는 건전한 것이라기보다는 부정적인 정서, 심리입니다. 그 염려로는 생명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 (28)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 (29)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들의 백합화...양귀비과의 아네모네, 하얀 데이지 혹은 수관 마거리트로 추정됩니다.
백합화가 자신의 동절기 준비를 위해 길쌈(동식물로부터 실을 뽑아 양털, 삼, 아마 등 옷감을 짜는 행위)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까? 바느질을 하면서 월동준비의 수고를 하질 않습니다. 이 들판에 ‘흔하디 흔한 바람이 불면 피는 꽃’의 주인공인 이 백합화를 솔로몬이 그렇게 누렸던 지혜와 명성과 위엄과 영광스런 비쥬얼한 것(솔로몬의 옷으로 상상했을 자주색, 아네모내색..시각적인 대조를 보여주고 있다)이 도저히 따라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신 하나님의 창조의 솜씨’는 ‘유에서 유를 만들어낸 인간의 제2창조의 솜씨’는 확연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마 6:30-마 6:32]
- (30)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은 당시 땔감이었습니다. 시골에 가면 볼 수 있는 불쏘시개가 바로 ‘들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쏘시개로 사용되는 땔감용 들풀도 챙겨주시는데 하물며 우리 인간들, 하나님의 자녀들의 필요를 왜 챙겨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실 고민과 걱정과 염려를 우리가 다 빼앗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릴 때 한번 쯤 부모님에게 어른스러운, 대견한 걱정을 해서 칭찬을 받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 부모님이 시골에 일하러 가시고 저녁에 오시는데, 당시 연탄보일러에 ‘연탄’을 초등5년 때 갈아넣은 사건 때문에 아직도 칭찬을 받습니다. 하지만 돌아보면 제게 얼마나 칭찬할 게 없었으면 연탄 갈아넣은 것으로 대견해하시고 칭찬하실까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초등학교도 안 들어간 아이가 늘 부모님께서 걱정하실 대학등록금 걱정과 대출받은 돈 걱정, 시집 못 간 노처녀인 큰 누나의 장래걱정까지 하면서 한숨을 폭폭 내뱉는다면 부모님께서 과연 좋아하실까? 마치 우리가 걱정하는 수준이 그런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아처럼 버리지 아니하시고 떠나지 아니하신다’하지 않았습니까?
- (히 13:5)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 Stay away from the love of money; be satisfied with what you have. For God has said, "I will never fail you. I will never forsake you."*
이러한 먹고, 마시고, 입고 하는 모든 일상적인 염려와 걱정은 이방인들도 하는 고민과 걱정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고민의 수준 자체가 달라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차이점, 대별점의 대목은
[마 6:33-마 6:34]
- (33)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 (34)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이러한 고민의 차이점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매일의 의식주와 눈에 보이는 것을 치장하기 위해, 과시하기 위해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의식구조, 고민의 구조와는 다른 그리스도인만의 의식구조, 고민의 구조를 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의식구조, 그리스도인들의 건강한 의식구조, 세상과는 확연히 다르고 차이가 나는 혁명적인 의식구조를 소유하기를 기뻐하십니다. 그 혁명적인 의식구조는 바로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있어,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공과 출세와 인기와 명성과 인정과 칭찬과 환영과 대박의 세상 가운데 우리도 그 가운데 생존경쟁의 치열한 경쟁전을 펼쳐야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에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명령에 반응하는 여러분만의 ‘그 나라와 그 의’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왜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해야 합니까? 그 나라는 땅의 나라가 아니라 바로 ‘하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믿음과 하나님의 나라가 일상 생활과는 관계가 없는 것처럼, 하나님께 믿음을 고백했으면서도 매일의 실제 생활에서는 끊임없이 염려하고 걱정하고 근심하는 사람들에 대한 지적!
- (마 11: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벧전 5:7)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하루의 고민만을 하기에도 벅찬 우리의 하루입니다. 고민을 하되, 걱정을 하되, 염려를 하되, 하나님을 위한 고민과 걱정과 염려를 한 번 해봅시다. 그리고 과연 하나님께서 뒷짐 지고 가만히 서 계시는지, 아니면 우리가 서 있는 삶의 현장에 보이지도 아니하시는 죽은 하나님인지, 아니면 우리의 필요에 정말 늘 부응하시고 민감하게 반응하시는 ‘공중의 새’, ‘들의 백합화’,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조차도 품으시고 생각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은 과연 어떻게 대하시는지,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떻게 배려하시고 채우시는지를 기대하면서 우리의 의식구조의 혁명을 가해보기를 축원합니다!
“만일 하나님의 나라를 최우선적으로 구하지 않는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스도교에서 손을 떼라! 만일 그 나라를 두 번째로 구한다면,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존재임을 장담한다-헨리 드러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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