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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마태복음

마태복음 6장 12절, 용서forgiveness의 사람

by Message.K 2024. 10. 18.

주기도문의 죄용서에 대한 구절인 마태복음 6:12을 가지고 '용서의 사람'에 대한 설교를 한 것인데, 영화 '밀양'의 이야기를 하면서 여주인공 신애와 유괴범의 관계를 되돌아보면서 잘못된 용서의 예와 죄 용서 청원은 동시에 용서의 서약이라는 점을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6장12절, 용서 청원은 동시에 용서 서약이기도 하다, 나무 십자가와 그 아래 성경책이 펼쳐져 있는 이미지가 배경으로 나온 사진
마태복음 6:12 용서의 사람, 용서 청원은 동시에 용서 서약이기도 하다

 

 

(마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Prologue..."밀양...Secret Sunshine"

예전에 이슈가 되고 있는 영화 ‘밀양’, 전도연에게 칸영화제의 여우주연상의 영예를 안겨준 그 영화의 내용을 잠시 나눠보고자 한다.

신애(전도연)는 밀양으로 내려온다. 아들 준과 함께 남편을 잃고 무언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밀양행을 선택한 것이다.

 

‘밀양...Secret Sunshine'

하지만 신애는 뜻하지 아니한 유괴사건으로 하나의 희망의 씨앗과도 같은 아들 준을 잃어버린다. 삶을 체념 한 듯 살아가는 그녀에게 다가온 약사 아줌마의 다소 억척스럽고 유별난(?)-기독교인인 내가 보아도 너무 심한 접근법이었다. 좀 짜증났다...ㅠ.ㅠ- 전도로 인해 우연히 찾은 예배당...기독교에로의 회심...나는 무슨 간증영화를 보는 줄 알았다. 하지만 순간순간 이창동 감독의 영화이고, 전도연과 송강호가 출연하는 영화임을 늘 자각해야만 했다.

나는 영화에 몰입하게 되면서 이게 무슨 기독교의 회심을 다루는 영화인가? 종교영화인가 하는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그런 착각을 후에 무색하게 만든 대목, 대사가 있다.

 

“사람이 죽이고 미안하다고 하면 다야?”

 

운전하다가 횡단보도에서 웬 중년부부를 치일 뻔한 신애에게 던져진 말이었다.

이 대사는 이 영화의 ‘용서’에 대한 이해도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용서에 대한 다소 미해결된 숙제를 던져주고 있는 ‘밀양’...

어쨌든 영화는 ‘용서’의 테마로 흐른다. 기독교적인 사랑의 표시이기도 한 ‘용서’....

신애는 마산교도소에 수감하고 있는 자신의 아들을 유괴하여 죽인 살인자에게 찾아간다. 그를 용서를 하려고, 당신의 죄를 내가, 아들의 어미인 내가 용서한다고...신애가 그 말을 끄집어내려고 한다. 웬걸? 살인범의 얼굴은 신애의 얼굴보다 더 좋았다.

 

‘얼굴이 좋으시네요?’

그러면서 신애는 자신이 하나님을 만났고 그래서, 굳은 결심으로 살인범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왔음을 이야기하려는 찰나에 그가 입을 열었다.

 

‘잘됐다고...나도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고...자신의 죄를 하나님께서 이미 용서해서 너무 감사하다고...’

그러면서 살인범은 환한 얼굴을 보여준다.

유괴살인범, 신애의 아들을 죽인, 자신의 아들을 죽인 흉악범이 눈앞에서 죄수이고 살인자임에도 불구하고 더 맘 평안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신애는 배신감을 느낀다. 그것은 절대자에 대한 배신감이었다.

여기서 충격을 받는 신애...

내가 용서를 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벌써 용서를 했다고?

 

나는 이 대목을 보면서 하나님과 사람, 절대자와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용서(수직적인 용서)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용서(수평적인 용서)의 큰 거리감의 간격을 느꼈다. 이것은 오늘 주기도문에 나오는 마 6:12의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의 대목과 연결된다.

주기도문에서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용서가 있어야(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하나님과 인간의 용서가 가능하다(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영화에서 신애가 느끼는 심각한 딜레마-아들을 잃은 어미가 용서해주지 않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유괴살인자를 용서할 수가 있는가?-로 연계시켜 보면 우리가 흔히 용서를 이야기할 때 하나님, 즉 절대자와 자신과의 관계에서 청산할 것이 청산되어지면 용서받았다고 느끼면서 평안을 누린다.

 

하지만 영화는 어쩌면 인간과 인간 사이의 청산해야 할 무게의 빚은 하나님과의 용서가 있었다 하더라도 인간적인 차원에서 청산해야하고, 용서의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은연중에 말하는 것이 아닐까? 이것은 용서가 반드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식의 심판과 형벌의 법칙을 적용해야 한다는 전제를 까는 것은 아닐까?

영화는 그런 의문점을 던진다.

 

필립 얀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라는 저서에서 오늘날의 시대가 ‘은혜가 없는 시대(세상)’ 라고 했다.

시인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는

 

“인간에게서 은혜를 빼면 얼마나 초라한 존재가 되는가.”

 

라고 탄식했다.

 

 

나는 용서는 은혜가 바탕이 되어야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유괴살인범도 신애가 받은 상처만큼 똑같이 그렇게 한다고 해서 신애의 마음이 위안과 위로가 되지 않는다. 죽어간 아들의 생명이 다시 돌아올 수 없다. 신애의 찢겨진 상처와 영혼은 복수나 보복의 원리에 의해 꿰맬 수 없는 부위이다. 우리들은 언제나 받은 만큼 돌려주고 싶은 그런 강한 reaction의 반응response이 존재한다.

용서...결코 쉬운 것이 아님을 영화는 보여준다. 용서는 인간적인 선행이나 미덕이나 자기도취와 자기최면으로 되어지는 것이 절대 아니다. 용서는 신적인 은혜가 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용서는 은혜를 필요로 한다...

자신의 가슴을 완전히 찢어놓는, 자신의 인생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미안하다? 라는 식의 말 한 마디? 그것이 용서는 아닐 것이다.

 

 

 

용서라는 것은 ‘은혜’, ‘신적인 그 무엇’이다.

영화의 원작 이청준의 ‘벌레이야기’에서 나는 문득 벌레를 ‘벌레보다 못한 내가 용서받을 수 있나요?’라는 가사가 있는 찬송가가 생각난다. 그 책을 읽어보지 못한 단순한 내 생각이다. ‘벌레보다 못한 나’라고 유괴살인범은 자신을 표현했다. 용서...그것은 신적인 은총이다. 은혜이다. 인간의 어떤 것으로 그 공백을 메울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적인 용서의 권리조차 하나님에게 빼앗긴 신애의 극도의 배신감은 그녀를 더 허무하고 절망케 한다.

 

영화 ‘밀양’은 인간의 본성과 존재에 대한 깊은 철학적인 질문과 의문들을 하게끔 하고 있다. 그래서 더 격찬을 받아 마땅하겠다.

그 충격으로...그 때부터 또 다시 신애는 정신적인 거친 소용돌이 속에서 헤맨다. 신애로 분한 전도연의 연기는 정말 섬뜩할 정도로 리얼하다.

이창동 감독은 밀양을 모든 것을 초월하는 ‘이런 사랑도 있다’ 는 식의 남녀 간의 사랑으로 영화 포스터라는 공간, ‘밀양’에서 해석해 나가는 듯하다. 어쨌든 밀양은 한 영혼, 한 여인에 대한 초월적인 사랑을 보여준 대목에서 좀 더 인간존재에 대한 사려 깊은 사색을 할 수 있는 장을 마련했다는 데서 후한 점수를 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용서에 대한 부분은 시원하지 못한 게 아쉽다.

세상은 은혜에 굶주려 있다. 신적인 은혜, 신적인 용서에 굶주려 있는 현실이다.

 

 

다시 성경본문으로 돌아오면,

여기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를 누가판과 마태판을 비교해 보면,

  • 마태판에는 “우리의 빚들을 사하여 주시옵소서”
  • 누가는 “우리의 죄들을 사하여 주시옵소서”

누가가 이렇게 복수를 써서 ‘죄들’이라고 한 것은 단순히 크게 ‘죄의식을 제거해 주시옵소서’ 또는 ‘죄의 권세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옵소서’라는 것을 의미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구체적인 죄의 행위들을 사하여 주시옵소서’라고 말하기 위함이다.

 

 

누가가 ‘빚’이라는 단어를 의미상 ‘죄’라는 단어로 바꾼 것은 의도적이라고 볼 수 있다. 유대인들은 죄를 ‘하나님에 대한 빚’으로 보았고 또 ‘이웃에 대한 빚’으로 본 것을 반영하고 있다. 특히 죄를 ‘하나님에 대한 빚’으로 보았다.

다시 마태복음으로 돌아오면,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용서해 주었듯이 하나님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라고 할 때, 우리 어감으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모범으로 내세운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한 것 같이 하나님도 우리의 죄의 빚을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의미가 된다.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모범으로 내세우는 것 같이 되어 있다. 누가판에서도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모두를 용서해 주니깐 하나님도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뜻으로 되어 있다. 우리 이웃에 대한 우리의 용서를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듯한 어감을 준다.

 

 

죄 용서 청원은 동시에 용서의 서약이다

요아킴 예레미아스는 마태복음의 용서에 대한 본문에 사용된 시제가 ‘동시성의 완료형(perfectum coincidentiae)’ 즉 동시적인 것의 완료형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의미로 해석하면 “하나님,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와 동시에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자들(죄들)을 용서하겠나이다”라는 의미이다. 이 죄 용서 청원의 두 번째 부분은 죄 용서를 청원함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부수적인 서약이라고 볼 수 있다.

 

죄 용서를 빌고자 한다면 ‘자기의 죄를 버릴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의 용서가 나에게 구체적으로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 영화 ‘밀양’에서 신애는 돈 있는 척을 한다. 밀양에 땅투자를 할 것이라고 하면서 거짓말을 한다. 자신의 거짓말이 날개를 달아 이웃들에게 부풀려진 이 소문, 오히려 자신의 아들을 납치, 유괴, 살인으로 이어지게 만드는 도화선이 되었다. 물론 신애는 밀양에서 정말 잘 살고 싶었다. 남편을 잃고 돈까지 없어 보이는 모습이 보이기 싫었다. 그것은 신애가 가진 자기 특유의 상처에 대한 제스처였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이라는 죄악이었다. 영화에서는 신애가 기독교로 회심하고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간증과 고백과 자랑을 마구 늘어놓는다. 너무 빠른 고백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 은혜에는 자신의 죄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회개의 돌아봄이 없었다. 단지 자신의 상처와 아픔에 대한 임시적이고 일시적인-그녀는 그 은혜가 임시적인 것처럼 행동한다. 정말 임시적일 수도 있다-위안과 위로의 처방에 집중하였다. 이것을 구도화해 보면,

 

  • ❶신애의 상처와 아픔.
  • ->❷하나님의 은혜(위로와 위안의 차원).
  • ->❸신애, 자신의 죄에 대한 심각한 반성과 회개.
  • ->❹살인범에 대한 심각한(?) 용서.
  • ->❺더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경험함.

 

영화에서는 ❸의 과정이 누락되어 있다. 자신의 돌아보는 과정이 빠져 있다. 그리고 ❹의 과정으로 가는 것이 너무 성급했다. 교인들도 너무 성급하게 서두른 것도 있다. 용서가 그렇게 쉽게 속전속결(速戰速決)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면,

나의 이웃에 대한 용서의 태도를 동반하지 않는 죄 용서 청원은 하나님은 나의 죄를 용서하는데, “나는 죄 용서 받지 않겠습니다”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저 놈에게 원수를 갚겠다’는 그 죄만은 빼놓고 용서해 달라는 것은 가당찮은 것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곧 내가 용서할 수 없는 그 놈에 대하여 저지르는 그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용서조차 받지 않겠다는 태도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용서 없는 용서 청원은 헛되다

마태복음 18:23-35의 본문은 우리의 용서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주기도문의 용서정신이 어떠한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예화. 비유이기도 하다.

 

[마 18:23-마 18:35]

(23)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24)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25)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한대(26)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27)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28)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29)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30)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31)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32)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33)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34)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35)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이 비유의 마지막 말은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로 되어 있다.

이 비유에 의하면 만 달란트 빚진 자에 대하여 왕이 그 빚을 탕감해 준다. 즉 용서해 준다. 만 달란트는 예수 당시 갈릴리와 베뢰아 주민 전체가 로마 정부에 내는 1년 세금이 이백 달란트 밖에 되지 않는 것에 견주어 본다면 그것이 얼마나 큰 돈인지 알 수 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금액이다. 이에 비해 백 데나리온(한 데나리온은 장정의 하루 품삯)은 장정이 100일 일한 것에 불과하다. 어마어마한 빚인 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사람이 그 이웃에게 빌려 준 조그만 빚을 탕감하지 않으면 자신의 죄에 대한 탕감이 무효라는 것이다.

 

 

영화 ‘밀양’에서 전도연은 확실히 용서의 사람이 되지 못했다. 그녀가 용서의 은혜를 체험하기 위해선 세월의 무게감이 좀 더 필요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용서는 하나님의 신적인 은혜이다. 일만 달란트의 은혜의 무게를 체감하지 못한 자는 이백 데나리온의 빚에 신경이 곤두설 것이다. 밀양의 ‘신애’는 은혜 받은 척한 것은 아니지만 일만 달란트에 견줄만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 영화를 통해 불신자들과 불신 세상에 너무나 값싸게 보일까봐 나는 ‘밀양’이 우려된다.

 

 

  • 주기도문의 청원들은 모두 서약이다
  • 주기도문의 청원들은 청원인 동시에 모두 다 서약이다.
  • ‘용서받으려고 한다면 먼저 용서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해 준다.

 

ERNEST HEMINGWAY의 단편소설 중 “The Capitol of the world”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스페인 아버지가 집을 나가 마드리드로 간 아들과 화해하기로 다짐한다. 아버지는 뒤늦게 양심에 가책을 느끼며 “엘리베랄” 신문에 이런 광고를 낸다.

 

“파코, 화요일 정오에 몬타나 호텔에서 만나자. 다 용서했다. 아빠.”

 

파코는 스페인에서 흔한 이름이다. 아버지가 그 곳에 나가자 파코라는 이름의 젊은 남자가 무려 800명이나 나와서 저마다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헤밍웨이는 용서에 굶주린 소설가였다.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에 굶주려 있다. 하나님의 용서에 굶주려 있다. 우리가 먼저 용서의 사람이 되기 위해선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가 필요하다. 마태복음 6:12을 통해 '용서의 사람'에 대한 이 설교에서 우리는 용서의 사람이 되기로 서약, 맹세를 함과 동시에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받은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을 보여준다.

 

 

 

주기도문강해 중에 마태복음 6:12에 대한 강해가 있다. 중복된 내용도 있지만, 필요하다면 참고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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