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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마태복음

마태복음 6장 9-13절, 주기도문 강해⑦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용서 없는 용서 청원은 헛되다'

by Message.K 2023.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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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신약성경 마태복음 6장 9-13절의 본문을 기초로 주기도문 7번째 강해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에 대해서 같이 해석하고 설교한 내용을 포스팅하고자 합니다.

 

주기도문강해 7,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주기도문강해 7,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마 6:9-마 6:13]
 (9)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10)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11)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12)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13)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구체적인 죄의 행위들을 사하여 주시옵소서

  여기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를 누가판과 마태판을 비교해 보면, 마태판에는 “우리의 빚들을 사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했고, 누가는 “우리의 죄들을 사하여 주시옵소서”라고 말한다. 누가가 이렇게 복수를 사용해서 ‘죄들’이라고 한 것은 단순히 크게 ‘죄의식을 제거해 주시옵소서’ 또는 ‘죄의 권세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옵소서’라는 것을 의미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구체적인 죄의 행위들을 사하여 주시옵소서’라고 말하기 위함이다.

 

 

 

죄를 '하나님에 대한, 이웃에 대한 빚debt'으로 보았다

  여기서 누가는 왜 ‘죄들’이라고 하고 마태는 ‘빚들’이라고 했을까? ‘빚들’이라고 하는 것이 예수님의 원래 용어이다. 마태가 예수님의 원래 언어를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누가판의 죄 용서 청원 두 번째 부분을 보면,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자들 모두를 용서합니다”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누가도 이 청원 두 번째 부분에서는 ‘빚’이란 단어를 쓰고 있다. 이것을 고려할 때 마태의 ‘빚’이라는 원어가 원래 언어라고 볼 수 있다.

  누가가 ‘빚’이라는 단어를 의미상 ‘죄’라는 단어로 바꾼 것은 의도적이라고 볼 수 있다. 유대인들은 죄를 ‘하나님에 대한 빚’으로 보았고 또 ‘이웃에 대한 빚’으로 본 것을 반영하고 있다. 특히 죄를 ‘하나님에 대한 빚’으로 보았다.1)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모두를 용서해 주니깐 하나님도 용서해 주십시오

  다시 마태복음으로 돌아오면,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용서해 주었듯이 하나님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라고 할 때, 우리 어감으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모범으로 내세운다는 것이다.2)

그렇게 되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한 것 같이 하나님도 우리의 죄의 빚을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의미가 된다.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모범으로 내세우는 것 같이 되어 있다. 누가판에서도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모두를 용서해 주니깐 하나님도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뜻으로 되어 있다. 우리 이웃에 대한 우리의 용서를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듯한 어감을 준다.

 

 

 

죄 용서 청원은 동시에 용서의 서약이다

  요아킴 예레미아스는 마태복음의 용서에 대한 본문에 사용된 시제가 ‘동시성의 완료형(perfectum coincidentiae)’ 즉 동시적인 것의 완료형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의미로 해석하면 “하나님,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와 동시에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자들(죄들)을 용서하겠나이다”라는 의미이다. 이 죄 용서 청원의 두 번째 부분은 죄 용서를 청원함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부수적인 서약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마태복음 5장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산상설교에서 보여주신 이웃사랑에 대한 확장판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하나님께 “나의 죄들을 용서해 주시옵소서”라고 간구하면서 마음속에는 ‘저 놈이 나에게 나를 험담하고 나를 못살게 굴어서 내가 저놈을 언젠가 손을 봐주어야겠다’는 미움과 복수, 이웃에 대한 원한과 증오심을 품고서 “하나님이여, 나의 죄들을 용서해 주시옵소서”라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일 ‘저 놈만은 내가 용서할 수 없다’라며 그 죄를 꼭 움켜쥐고 있으면서, “하나님이여,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 죄 말고 다른 죄만 용서해 주시옵소서”라고 하는 것이 되는데 그 또한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죄 용서를 빌고자 한다면 '자기의 죄를 버릴 각오'를 해야

  죄 용서를 빌고자 한다면 ‘자기의 죄를 버릴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의 용서가 나에게 구체적으로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 나의 이웃에 대한 용서의 태도를 동반하지 않는 죄 용서 청원은 하나님은 나의 죄를 용서하는데, “나는 죄 용서 받지 않겠습니다”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저 놈에게 원수를 갚겠다’는 그 죄만은 빼놓고 용서해 달라는 것은 가당찮은 것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곧 내가 용서할 수 없는 그 놈에 대하여 저지르는 그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용서조차 받지 않겠다는 태도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용서 없는 용서 청원은 헛되다

마태복음 18:23-35의 본문은 우리의 용서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주기도문의 용서정신이 어떠한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예화. 비유이기도 하다.

 

[마 18:23-마 18:35] 
(23)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24)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25)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한대(26)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27)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28)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29)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30)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31)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32)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33)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34)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35)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이 비유의 마지막 말은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로 되어 있다.

  

 

이 비유에 의하면 만 달란트 빚진 자에 대하여 왕이 그 빚을 탕감해 준다. 즉 용서해 준다. 만 달란트는 예수 당시 갈릴리와 베뢰아 주민 전체가 로마 정부에 내는 1년 세금이 이백 달란트 밖에 되지 않는 것에 견주어 본다면 그것이 얼마나 큰 돈인지 알 수 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금액이다. 이에 비해 백 데나리온(한 데나리온은 장정의 하루 품삯)은 장정이 100일 일한 것에 불과하다. 어마어마한 빚인 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사람이 그 이웃에게 빌려 준 조그만 빚을 탕감하지 않으면 자신의 죄에 대한 탕감이 무효라는 것이다.

 

  주기도문의 청원들은 모두 서약이다 
주기도문의 청원들은 청원인 동시에 모두 다 서약이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오늘 우리의 생명에 필요한 것을 공급하여 주시옵소서라는 의미의 청원만이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양식에 의해 살겠습니다. 우리가 아담적 존재로 살지 않겠습니다. 우리의 힘을 우상화하고 우리의 일을 우상화하고 우리의 일의 열매를 우상화하지 않겠습니다”라는 서약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그 앞에 나오는 청원도 마찬가지다.

 

#. 하나님 나라가 임하시옵소서

-“나 스스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겠습니다”는 서약을 동시에 담고 있다. 그러기에

 

#.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나도 나에게 죄 지은자에게 죄를 용서해 주겠습니다”라는 서약을 담고 있다.

 

 

 

주기도문은 바리새인의 경건주의적 소극성을 반대한다

  이 대목은 마태복음 전체, 복음서 전체에 흐르는 바리새인의 경건주의적 소극성에 대적하는 것이기도 하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신앙생활 하는 것이나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을 기껏해야 음식을 가리고 손을 잘 닦고 그릇 닦는 것 정도의 경건으로 여겼다. 외면을 굉장히 신경 쓰는 그들이었다. 유대인들의 방식대로 하자면 돼지고기를 먹었나 안 먹었나, 부정한 음식을 먹었나 안 먹었나 하는 것이 우리를 더럽게 하는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하고 행동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이 참으로 우리를 더럽게 한다고 정곡를 찔러 말씀하셨던 것을 기억할 수 있다.

  김세윤 박사는 한국 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경건주의적 소극주의가 나타난다고 이야기한다. ‘

한국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여기에 많이 빠지는 것 같습니다. 한국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삶을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세 가지만 하지 않으면 되는 것쯤으로 아는 것 같습니다. 술 안 마시고, 담배 안 피우고, 제사 안 지내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만 잘 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바로 경건주의적 소극주의입니다. 담배 안 피우고, 술 안 마시고, 제사 안 지내는 사람이 천만 명이 아니라 4천만 국민 전부라 해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진정한 살롬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점을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3)

 

 

 

 

용서받으려고 한다면 먼저 용서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한국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윤리적인 성장과 진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기도문에 나타난바 대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용서에 대한 대목’은 우리 한국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용서받으려고 한다면 먼저 용서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해 준다. 우리는 용서의 사람이 되기로 서약, 맹세를 함과 동시에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받은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용서 없는 용서 청원은 헛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국 교회에서, 아니 더 나아가 한국 사회에서 주기도문에 나타난 용서의 청원이자 동시에 용서의 맹약이 이 ‘용서의 정신’을 가지고 우리 주위의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용서를 보여주고, 용서의 사람이 되고, 용서의 대가이신 예수님의 사랑을 전해주는 멋진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1)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음을 간략하에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2) 마태복음은 ‘완료형’으로 사용되었고, 누가복음은 ‘현재형’으로 사용되었다. 즉 동사의 시제가 서로 다르다.

김세윤, 주기도문강해(서울: 두란노, 2003), 168.

3) 김세윤, 175.

 

 

신약성경 마태복음 6장 9-13절의 주기도문강해 7번째 설교로 주기도문 내용 중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를 해석했는데요. 주기도는 '청원인 동시에 서약'이며, '용서받으려고 한다면 먼저 용서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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