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주기도문에 대한 강해 4번째 포스팅으로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문구에 대해서 해석하고 설교한 내용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주기도문의 이중구조, 간략함의 특징,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함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마 6:9-마 6:13](9)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10)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11)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12)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13)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주기도문의 이중 구조
주기도문은 크게 두 부분,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한 청원과 나머지 이 모든 청원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6장 33절1) 전반부인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6장 10절의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라는 기도의 요약이고, 6장 33절의 후반부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것은 주기도문의 “우리에게 양식을 주시옵소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옵소서”라는 세 개의 우리 청원들이라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오면 다 해결되는 양식, 죄용서, 사탄의 시험으로부터의 보호 등을 요약한다고 볼 수도 있다.2)그만큼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중요함을 시사한다.
주기도문은 간략함을 특징으로 한다
우리는 유대교의 대표적인 기도인 카디쉬와 18번 축복 기도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비교할 수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유대 기도 특히 18번 축복 기도는 굉장히 복잡하고 중언부언하는 기도라는 점이다. 이에 비해 주기도문은, 특히 예수의 주기도문이 원래 네 마디 청원으로 되어 있다면 너무나 간결한 기도라 생각할 수 있겠다. 또한 유대 기도들은 3인칭으로 되어 있지만,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아자 가까운 친근감을 나타내는 2인칭 표현 즉 ‘당신’이란 표현을 쓰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ex, ‘아빠’라는 용어로 시작함으로써 친근감을 나타냄).
셋째로, 18번 축복 기도는 4번부터 9번까지 기도는 일상에 필요들을 구하고, 10번부터 16번까지가 종말론적 청원이다. 일상의 것을 먼저 구하고 나중에 종말론적 소망을 나타낸다. 이에 비해 예수의 기도는 거꾸로 되어 있다. ‘아빠’라는 용어로 시작하여 하나님 나라의 옴에 초점을 맞춘 종말론적 오리엔테이션을 가진 기도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청원이 중심이고, 하나님의 나라의 옴과 동시에 우리에게 주어질 일상의 필요들에 대한 기원이 이어진다. 18번 축복 기도는 잡다한 요청을 하지만, 예수의 기도는 우리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필요를 구한다. 예수의 기도가 유대의 기도와는 매우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3)
나라이 임하옵시며
우리가 흔히 전도할 때 자주 쓰는 전도 구호는 ‘예수 믿고 복 받고 잘 살자’라는 것과 ‘예수 천당 불신 지옥(예수 믿고 천당 가자)’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전도 구호는 매우 현세적인 동시에 내세적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나라이 임하옵시며’를 ‘이 세상에 병 없이 장수하며 경제적으로 풍요하게 살다가, 죽은 후에 천당 가게 하옵소서’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고 그 천당은 이 땅에서 선행의 정도에 따라서 사람이 있을 곳이 기와집, 초가집, 황금집 등으로 구분되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나라이 임하옵시며’는 그러한 뜻으로 이해하는 것은 너무나 잘못된 이해이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내세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그의 통치와 관련된 것이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이 세상의 ‘나라’라는 개념에는 반드시 영토(땅, 공간)와 정치 체계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그것과는 다르다.
하나님 나라는 이 현실의 어느 한 지역에 세워지는 국가가 아니다. 이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시간과 공간의 세계 속에 있지 아니하고 영원 가운데 있다. 영원이란 시간은 현실의 시간이 지향해 가고 있는 목적지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드릴 때, 그 영원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의 현실에 임하게 해 달라는 의미가 있다.4)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할 때 솔직히 ‘하나님’보다는 ‘나라’에 관심이 더 쏠려 있다. 우리가 죽으면 가는 그 ‘나라’이기에 ‘그 나라’가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다. ‘나라’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늘 공간개념으로서의 ‘나라’에 신경을 쏟지 ‘하나님’에 대해서 별로 생각이 없다. 이것은 굉장히 이기적인 발상이다. 우리의 관점을 바꾸자. ‘하나님의 나라’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계시고 거하시고 임재하시는 그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중요한 것은 ‘통치, 다스림(sovereign)’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임할 때 나타나는 현상은 매우 다양하다. 정치적 억압에서 해방되고, 어둠의 권세가 궤멸되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기도 하고, 병든 자들이 치유되며, 귀신들이 항복한다.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서 이러한 경험과 체험이 있다면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을 찬양하자. 또한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 이러한 수많은 기적적인 치유사건들을 이미 목도하였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길면 100년의 인생을 사는 우리들의 인생 가운데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접붙임을 당하는 것이라고 표현하면 될까? 우리는 공상과학SF영화나 소설에 자신의 불행과 비극을 목도할 수 없어서 미래에 있는 사람이 과거로 타임머신을 타고 가서 자신의 운명을 바꾸고자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이 이야기는 말 그대로 미래에서 과거로 온 사람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영원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 순간적이고 찰나적인 인생에 찾아오심으로 시작된 것이다.5)
우리가 이 땅에서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며 그 나라를 고대하는 것은 이 문제 많은 현실을 떠나고 싶어서가 아니어야 한다. 이 죄악된 세상이 너무나 지겹고 희망이 없기 때문에 황급히 도피하고 싶어서가 아니어야 한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각종 질병, 기아, 공해, 죽음 같은 문제들을 일시적으로 치유하기 위해서만도 아니다. 이 기도에는 그 보다 더 깊은 뜻이 담겨져 있다. 그것은 창조의 목적지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며, 우리의 삶의 목적과 의미가 바로 그 나라, 천국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는 먼저, 우리의 개인적인 생활과 삶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 ‘나라이 임하옵시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둘째,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사회적 현실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이다.
우리는 이 문제들을 분명히 이해하고 나서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를 드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기도는 한낱 주문에 지나지 않게 된다.
먼저 우리 개인적인 삶의 현실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될 때 삶의 변화, 삶의 전환이 요구된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시면서 제일 먼저 요구하신 것은 무엇인가? 바로 ‘회개’이다.6)
‘회개하라’이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 거머쥐고 있는 세속적인 삶의 방식과 세상적인 욕심들에서 돌이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용납될 수 없는 것들에서 돌아서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에 임할 때, 이 사회에 임할 때 이 어둠의 권세들과 충돌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이 어둠의 권세를 상징하는 헤롯은 두 살 이하의 어린 생명을 모두 학살하는 잔인한 행동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항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헤롯은 자신의 왕국을 지켜 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그러한 저항은 하나님의 나라를 막지 못했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에 의해 임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힘으로는 막지 못한다.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시기부터 여러분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 여러분이 누리는 삶의 환경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주권이 여러분의 삶에 개입하게 된 것이다.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는 것은 다른 말로 ‘영적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시사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나 지극히 개인적인 삶 안에서 갈등이나 고뇌, 눈물로 시작된다. 그리고 그것이 점차 사회적인 차원으로 확대된다. 하나님의 나라가 사회적인 규모로 확대될 때 거기에는 십자가의 고통이 수반되지만 동시에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영적인 갈등과 고통과 영적 전쟁은 사도 바울은 이렇게 엡 6:12에서 이렇게 표현하였다.
(12)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또한 우리는 영적 전쟁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 군사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을 위해 참고, 인내하며, 기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자기 포기와 자기 단념, 자기희생이 요구된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표현이 여러분에게 다소 생소할지 모르겠다. 쉽게 말하자면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했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여러분의 삶 가운데 임하였고 시작된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 뿐만 아니라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로 가정에서 핍박을 받거나 불신 사회에서 무시를 당하거나 조롱을 당한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어떤가?
지금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고 예수님을 믿고 그 분을 따른 것을 후회하거나 돌이키고 싶으신 분이 있는가? 예수님은 자신의 추종자 중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눅 9:62)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악으로 인해 발생되는 모든 문제들을 치료하거나 뒷감당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더 나아가 하나님 나라의 주된 목표는 바로 악을 발생시키는 모든 악의 뿌리를 근절시키고 훼파시키는 데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님의 나라의 영적 전쟁이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를 보여 준다.
우리는 때때로 교회의 사명이 단지 복음전도나 선교를 통하여 잃어버린 영혼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맞다. 그것도 진리이다. 그러나 그 복음전도 안에는 하나님의 나라의 목표도 포함이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은 ‘만물을 새롭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 나라와 관련된 약속을 믿고, 그 실현의 때를 고대하면서 지속적으로 문제가 있는 우리의 매일 매일의 환경에 직면해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거짓과 속임수와 사기와 컨닝과 로비와 뇌물수수와 수많은 부정과 부패, 잘못된 정치제도, 잘못된 사회시스템에 대해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임하기를 기도하며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악과 어두움과 부정적인 삶의 방식은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체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를 상황과 환경과 현실의 노예가 되게 하지 않고 거기서 풀려나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어쩔 수 없다!’, ‘이것이 내 팔자다!’, ‘도저히 바꿀 수 없는 숙명이다’
라고 하는 운명론에 대항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단순히 체념과 절망과 아픔과 상처 가운데 있는 우리들을 위로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들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도록 일으켜 세운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해 다시 한 번 새로운 시작을 하게 한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은총이자 선물이다.7)
Epilogue...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우리 삶에 영적인 갈등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것은 또한 영적 전쟁을 수반한다. 하지만 영적 전쟁의 승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보장되어 있음을 기억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는가? 하나님의 통치를 즐거워하는가? 우리 인간은 원래부터 죄인이다. 교만하다. 그리하여 최초의 인간 아담은 스스로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사단의 꾀임에 빠져 선악과를 따먹는 범죄를 저질렀다. 우리는 늘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고, 하나님의 판단 없이 자기 자신이 인생의 주인, 운명의 주인이 되라는 유혹을 끊임없이 받고 있다. 아파트를 분양하거나 자식을 대학에 보내거나 은행에 융자를 받거나 자녀를 시집, 장가 보내거나 기타 등등의 모든 문제들에 대해서 혼자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라는 유혹을 끊임없이 받는다. 바로 자기 자신이 자신을 통치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가 필요 없다고 선언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가 필요 없다는 것은 뿌리가 뽑힌 나무가 다시 땅에 심겨질 필요가 없다고 외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나무는 뿌리가 뽑힌 순간부터 자신의 생명을 위해 필요한 양식과 수분을 더 이상 공급받을 수 없는 운명 가운데 처하게 된다. 아직은 나무 자체에 남은 수분 때문에 푸른 것 같지만 사실은 죽음을 향해 가는 나무일뿐이다. 잎이 마르고 가지가 시들고 죽을 갈 수 밖에 없다. 그 나무는 죽음의 권세 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생명의 근원에서 분리되어 죽음의 권세 아래 놓여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나무는 죽었다고 할 수 있다. 죽음이라는 병에 걸린 것이다. 죽음이 그 힘을 서서히 발휘한다. 이것이 인생이다. 이것이 아담적 인생의 실존이다. 이 아담적 인생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 우리 모든 성도들에겐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고 임하였다.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 분이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에 개입하시도록 마음 문을 열자.
우리는 이제 죽음을 향해 가는 나무가 아니라 영생을 향해 나가는 나무들이 되었음을 찬양하자.
오늘 하루 여러분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가 가득 가득 임하기를 소망하며 영적 전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으로 승리하기를 소망한다.
주)
1)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2) 김세윤, 주기도문강해(서울: 두란노, 2003), 99.
3) 김세윤, 100-101.
4) 임영수, 주기도문학교(서울: 홍성사, 2003), 41-42.
5) 스티븐 호킹 <시간의 역사>, “우리는 아직도 미래에서 온 사람을 보지 못했다.”
임영수, 43. 참고.
6) 임영수, 43-45.
7) 임영수, 45-49.
신약성경 마태복음 6장 9-13절의 본문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문 내용인데요. 오늘은 그 네번째 강해시간으로 '나라이 임하옵시며'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 주권이 임한다는 이야기도 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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