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마태복음 6장 9-13절의 본문은 예수님의 주기도문인데요. 오늘은 주기도문 강해 5번째 시간으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라는 문장을 살펴보면서 해석하고 설교한 내용을 포스팅해 보고자 합니다.
[마 6:9-마 6:13] 주기도문 본문
(9)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10)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11)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12)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13)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오늘 우리가 살펴볼 10절은 주기도문에서 상반부에 해당하는 대목으로써, 하늘을 향한, 하나님을 향한 기도의 마지막 대목이다. 주기도문의 앞부분 9-10절까지는 1. 하나님의 이름, 2.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3. 하나님의 뜻에 초점을 두고 있다.1)
오늘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위한 기도를 살펴보고자 한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은 그 나라(막 15:43) 즉 ‘이스라엘의 위로’(눅 2:25)를 기다리고 있었다. 회당에서 예배를 끝낼 때마다 그들은 고대 아람어 기도인 Qaddish(콰디쉬, 성화(聖化)를 암송했는데 현존하는 그것의 최고 기록은 다음과 같다.
“그의 뜻에 따라 그가 창조한 세계에서 그의 위대한 이름이 높임을 받고 거룩히 여김을 받을지어다. 그가 그의 나라를 너희의 평생에, 너희의 날에, 이스라엘 온 집의 평생에 속히 임하도록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 말에 너희는 아멘할찌어다”이다. 여기서 우리는 유대민족이 그 나라를 고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2)유대인들은 로마의 정치적 압제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거기서 독립하고 해방되기를 간절히 원했다. 이러한 정치적인, 주권적인 자유를 향한 염원이 기도에서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의 기도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뜻’은 그러한 정치적인 자유나 해방을 의미하진 않았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의 뜻’,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에서의 ‘뜻’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는 자주 ‘하나님의 뜻’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그래서 때때로는 우리는 구원의 문제에 ‘하나님의 뜻’이란 말을 쓴다. 이를테면, ‘나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따라 구원을 받았어. 지금부터 영원까지, 천국 갈 때까지 내 구원은 보장되어 있어’라는 식으로 말이다. 또 다른 경우의 예를 들자면, 어떤 사람은 지옥 가는 것이 너무나 두렵고 무섭기 때문에 예수를 믿었다고 치자. 그 사람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자신의 운명은 태어날 때부터 다 정해져 있고 예수를 믿는다고 바꾸어질 것도 아닌데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노력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하나님의 뜻은 불변의 법칙과 같은 것이 아닌가?’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의 문제들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불변의 운명론, 숙명론으로 착각하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미국의 한 사회학자가 마틴 캐리 커크스라는 주정뱅이 떠돌이의 자손에 대해 조사한 적이 있다. 커크스의 부인도 남편과 비슷한 여자였다. 그의 자손은 모두 480명에 이르렀는데, 그 중 143명이 정신박약아, 36명이 사생아, 24명이 알콜중독자, 3명이 간질환자였고, 82명이 어려서 죽었으며, 3명이 살인죄로 처형당했다고 한다.
우리가 이 마틴 캐리 커크스라는 사람을 살펴보면서 운명론적으로 접근해 보자. 운명론적으로 생각하면 마틴 캐리 커크스는 이미 그러한 운명으로 태어난 사람이며, 그의 후손들 역시 그러한 운명으로 규정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한 관점에소 본다면 “뜻이 이루어지이다”는, 그들의 운명을 이미 결정해 놓은 신의 뜻이 그대로 (기계적으로, 자동적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말이 된다. 또한 이러한 운명론의 입장과는 조금 다르게 하나님의 뜻을 운명론과 결부시키지는 않지만 하나님을 자신의 수호신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은, 현재 자신의 불행, 고난, 질병을 모두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데 대한 형벌로 생각한다. 따라서 그들은 그 형벌을 벗어나는 길은 하나님의 계명을 기계적으로 잘 지키는 것이고, 그렇게 하기만 하면 만사형통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주로 종교적 계명이나 도덕법, 엄격한 의식으로 믿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뜻이 이루어지이다”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운명론의 입장이나 하나님을 수호신으로 생각하는 두 가지 중 어떤 경우에도 해당되자 않는다. 하나님의 뜻은 각본처럼 짜여진 운명도 아니고 냉혹한 법도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사랑과 자비와 공의와 창조의 품성을 가지신 하나님 아버지와 인격적인 대화 가운데서 확인되고 발견되는 구원의 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기원은 하나님의 구원과 관련된 것이다.3)
그러므로 ‘뜻, 하나님의 뜻’은 유전적이거나 운명론적이어서 도저히 변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자진해서 받아들이면서 알게 되는 개방적인, 개척적인 하나님의 섭리이기도 하다. 도저히 변개치 못할 운명이 절대 아니라는 말이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로봇처럼 무조건 맹종하기를 원치 않으신다. 맹목적인 복종이 아닌 자율적이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면서 우리의 삶에 주어지는 여러 가지 모든 문제들과 난제들에 대해 진취적으로 생각하고 기도하고 헤쳐 나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과연 무언가?
그것은 우리의 영적, 육적인 모든 것을 아우르고 만물을 총망라하여 아우르는 ‘총체적인 구원’을 의미한다. 우리가 고난 가운데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임하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의 뜻을 포기하는 것이다.
우리만의 생각과 사고방식, 뜻과 계획-‘내가 하나님 없이도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 넘치는 모든 삶의 방식-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해야 만이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삶에 성취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의 총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할 수 있는지를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배울 수 있다.
예수님의 고난은 그 분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그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도 아니다. 그 시대 사회적 환경이 주는 억울한 모함에서, 불이익에서 생겨난 것도 아니다. 그 고난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 과정에서 예수님이 마셔야 할 쓴 잔이었다. 예수님은 그 잔을 앞에 놓고 심히 고통스러워하시면서, 할 수만 있다면 그 잔을 마시지 않고 지나가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심판을 통한 구원’이 불가피함을 아시고, 결국 하나님의 죄를 향한 진노의 심판의 잔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셨다.
예수님은 수동적으로 체념하시면서 운명론자들이 그러한 것처럼 그 잔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수님은 자유 가운데 능동적으로, 자발적으로 그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배신한 자를 직접 대면하셨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길이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벌어지는 모든 상황과 사건 앞에서 수동적으로 무릎을 꿇지 않았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쾌씸하고 주먹으로 한 번 후려치고 싶고 십자가를 내동댕이치고 싶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십자가’는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스스로 일어나셔서 그 현장으로 가셨다.
(마 26:46)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예수님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뜻은 고난의 면제나 기권이나 행복이나 성공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고난의 쓴 잔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의 끈질긴 대화에서 얻은 해답은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였다.
이 세상 어둠의 권세와 하나님 나라의 싸움은 예수님의 투쟁과 결단으로 끝이 났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심으로 하나님의 뜻이 승리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가 검을 사용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혈기와 검으로는 어둠의 권세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아셨다.
참으로 어두움의 권세를 이기는 것은, 자신을 포기하고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일 때이다. 그렇게 할 때 세상적으로는 패배하고 실패하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그것이 하나님의 승리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승리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는 부활의 체험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도록 새로운 사명을 주셨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자녀인 동시에 그 아버지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사명의 백성’(a people of mission)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를 드리게 된다. 그러한 기도를 드릴 때 우리 것을 포기하고 단념하는 것은 불가피한 것이다.4)
윌리암 틴데일은 그의 저서 ‘Romans’의 머리말 끝 부분에서 특유의 생생한 용어로 이렇게 표현했다.
‘기억하라...그리스도께서는 그대들이 다시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도록 하시기 위해 이 속죄 사역을 행하신 것이 아니다. 또한 그는 그대들의 죄를 위해, 그대들이 여전히 죄 가운데 살도록 하기 위해 죽으신 것도 아니다. 아울러, 그는 그대들이 돼지처럼 다시 그대들의 진흙 구덩이로 돌아가도록 하기 위해 그대들을 깨끗하게 하신 것도 아니다. 오직 그대들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도록, 그래서 육체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뜻’의 본질과 핵심은 무엇인가?
바로 ‘우리의 뜻, 나의 뜻’을 내려놓고 그 분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러할 때 ‘뜻이 하늘에서도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 가운데 우리가 포기해야 할 우리의 뜻과 우리의 욕심과 계획이 있다면 그 분 앞에 겸손히 내려놓자. 그리고 하나님의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구하며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자. 때때로 우리는 해답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질문을 계속적으로 해대는 경우도 더러 있다. 나의 개인적인 인생 여정 가운데, 나의 가족 가운데, 나의 직장과 교회와 사람들과의 관계 가운데, 모든 인생살이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늘 간구하며 사는 우리교회의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한다.
1) F. 게벨라인 편, 엑스포지터스 성경원어주해(서울: 기독지혜사, 2002), 212.
2) F. 게벨라인 편, 211.
3) 임영수, 주기도문학교(서울: 홍성사, 2002), 54-56.
4) 임영수, 58-60.
5) William Tyndale,, Doctrinal Treatises, 510.
죤 스토트, 그리스도의 십자가(서울: IVP, 1993), 346에서 재인용.
마태복음 6장 9-13절에 나타난 예수님의 주기도문 속에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주제로 설교한 주기도문강해 5번째 내용을 함께 공유해 보았는데요. 하나님의 뜻의 총체는 예수님의 십자가였다는 이야기도 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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