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마태복음 6장 9-13절에 나타난 예수님의 주기도문강해 3번째 시간으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부터 생각해보면서 이 문구의 의미를 한번 생각해 볼까요?
[마 6:9-마 6:13]
(9)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10)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11)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12)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13)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별명을 불러줌과 이름을 불러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름이 불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우리가 학창시절에는 ‘별명(애칭)’이 불리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그 별명은 상대방을 높이는 의미보다는 상대방을 격하시키고 모욕감을 주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제 경우는 워낙 제가 깡말라서 ‘빼짝꾸리우스’라든가 엉덩이에 워낙 살이 없어서 ‘칼엉덩이(궁디)’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별명은 참 사람과 사람 사이를 친근하게 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다소 그 사람의 존재를 온전히 드러내는 데 있어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되신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실 때 ‘별명’을 부르시지 않았다. 친히 그 이름을 불러 주셨다. 이것은 그만큼 하나님께서 우리를 존중하시고 인격적으로 대우하신다는 의미이다.1)
우리의 이름을 친히 불러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자. 주님은 목자가 양의 이름을 부르듯이 친히 우리의 이름을 호명하여 불러주셨다. 그 좋으신 분, 주님께 감사하자.
이름은 이름을 지은 사람이 있기 마련
또한 세상의 많은 이름들은 누군가 만들어준 사람이 있다. 사랑하는 부모님이나 아니면 조부모님, 심지어 이름 짓는 집에 가서 이름을 사오기도 한다. 이름은 이름을 짓는 사람이 분명히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하나님이란 이름은 누가 지어 준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이름-스스로 있는 자(존재)
구약시대 모세는 하나님을 대면하였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라고 질문하였다. 그 때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출 3:14)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2) 이 하나님의 존재를 대변해주는 대목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전도할 때 마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하나님...’이라고 말할 때의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은 그 분의 존재 자체를 의미한다. 일찍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십계명에서, 하나님과 관련된 계명 가운데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무겁고 준엄한 계명이 있다.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그 분의 존재 자체를 모독하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3)
그 옛날 랍비들이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을 번역할 때 하나님이란 단어가 나오면 목욕을 하거나 옷을 정돈하고 정결하게 해서 다시 그 자리에 앉아 그 단어를 읽으며 엎드려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표현했다고 한다. 요즘 우리가 쉽게 쉽게 이야기하는 하나님에 대한 호칭과는 참으로 대조적인 부분이다. 그래서 영국의 찬양인도자인 Matt Redman이란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이란 단어를 사용할 때는 영어로 대문자로 꼭 구별하여 쓴다고 한 것을 본 적이 있다.4)
우리는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가볍게 처리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름은 그 존재를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이름도 그러한데 하나님의 이름은 말 그대로 그 분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 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우리의 언어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격하시킨다고 해서 하나님의 위엄이 훼손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거룩은 원래 하나님께 속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 가운데 자신을 보여 주셨다(출 3:14).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 이름은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인간세계를 뛰어넘는 초월성이 인정되고, 하나님의 초월성을 인정하는 자들은 곧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김세윤 교수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면, 즉 거룩하신 하나님의 ‘거룩’은 원래 윤리적 개념이 아니라 ‘물리적 개념’이라고 말한다. 우리 같은 피조물과는 다른 초월적인 분이라는 것을 나타낼 때 ‘거룩’이라는 단어를 쓴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게 한다는 의미는 ‘우리가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가 거룩하지 않고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타락하고 배은망덕하고 방탕하게 산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실 수가 절대 없을 것이다. 그럼으로 우리가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은 첫째로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께 바쳐진 존재로서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가령 성전이 거룩하다는 말은 성전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에 거룩하다 라는 말이다. 우리가 거룩해진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께 바쳐진 존재가 된다는 뜻이다.
둘째로, 우리가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의미는 하나님께 바쳐진 존재로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거룩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하나님의 초월자되심을 나타내는 것이고, 하나님의 거룩을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을 뜻한다.
사람에 대한 존중은 하나님 경외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또한 이 하나님을 경외함이 생명에 대한 경외함의 근본이다.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에 대한 경외심, 즉 생명에 대한 경외심은 궁극적으로 바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떨림, 경외심에서 나온다.
창 20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가나안의 도시 그랄에 갔을 때, 그 곳에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 생명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다. 결국 아비멜렉 왕이 자신을 죽일까봐 아내 사라를 동생으로 속였다. 무엇을 시사하는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는 곳에는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창세기 42장에서도 야곱의 아들들이 요셉 앞에 가서 벌벌 떤다. 요셉이 무어라고 하는가?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이기 때문에그들의 생명을 보전하리라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곧 생명에 대한 경외심으로 나타나는 것을 본다. 거꾸로 말하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는 곳에는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 없고 사람을 죽이고 살리고 함부로 대하고 만다.
출애굽기 1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히브리 아들들이 태어나면 다 죽이라는 명령을 산파 십브라와 부아가 왜 거역하는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때문이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생명을 죽일 수가 없어 갓 태어난 히브리 남자 아이들의 생명을 살리게 된다.
이와 같이 구약은 항상 생명에 대한 경외를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연결시킨다. 이점은 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없음으로 인해 결국 생명에 대한 경외가 없어지고, 사람들이 서로를 함부로 대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삶이 아주 살벌해진다.5)
그러기에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의 삶은 내 옆에 있는 생명에 대한 존중과 따뜻한 자세가 수반된다. 그것은 내 안에 이웃사랑이 넘쳐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고 떠는 순수한 믿음, 하나님에 대한 똑바른 생각(하나님 사랑)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주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의 삶을 요구한다
우리는 주기도문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바’, 즉 ‘아빠’라고 부르는 동시에 ‘하늘에 계신’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이전에 생각해 보았다. 이것은 친근감과 동시에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한 경외심이 함께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라는 이 찬양의 말은 하나님의 초월적인, 창조주, 통치자, 의로우시고 거룩하신, 전지전능하신, 무소부재하신 모든 위엄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말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아빠’라고 ‘친근하게’ 대할 수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함부로’ 대하거나 하나님을 경망스럽게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하나님과 굉장히 친근하게 동행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나는 수시로 하나님과 이야기한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하고, 하나님을 마치 옆에 있는 친구같이 대한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기도 가운데서 하나님을 경망스럽게 대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 기도의 첫 마디에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강조하는 이 말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간직한 채 그에게 친근함을 느껴야 한다는 것을 잘 가르쳐 준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는 친근감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여기는 경망스러운 처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떨어지면 인간은 어떻게 되는가에 대해 바울은 롬 1:18-32에 잘 설명한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떨어지면 인간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우상 숭배의 어리석음에 빠지게 된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라고 지적한다. 이 세상의 모든 죄악과 혼돈이 결국 인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하나님을 창조주로 경외하지 않고, 자신을 우상화한 끝에 피조물을 우상화하는 데서 기인한다고 한다.6)
고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지 않으면’ 그 자리에 언제나 인간이 그 자리를 차지하여 우상숭배를 하고 죄를 저지른다는 것이다.
여러분, 여러분이 알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떠올려보라.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않는 사람들의 끝은 언제나 자기야망과 자기욕망과 자기권력과 명예와 사리사욕에 어두운 나머지 끝이 좋지 않다. 역사가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히틀러의 이름을 예를 들어보자. 그의 이름이 남긴 흔적은 어떠한가? 피바다와 살육과 상처의 얼룩, 아우슈비츠의 잔혹한 기억뿐이지 않는가? 인간의 자기영광에 대한 심각한 애정과 집착은 언제나 냄새나는 쓰레기에 집착하는 도둑고양이와 같은 모양새이다. 인간의 자기 사랑은 언제나 다른 사람을 못살게 굴고 살인하고 저주하고 잔인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기사랑은 다르다. 하나님의 자기사랑, 자기영광은 세상을 살리는, 구원하는 역사를 만들지 않았는가?
(요 3: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것은 우리 피조물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하는 지를 심각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Epilogue...
한창 때의 무하마드 알리Muhammed Ali가 링 위에서 “나는 가장 위대하다! 나는 가장 위대하다!”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자신의 이름과 선수권을 스스로 선전했다고 한다. 물론 그는 당시 챔피언이었지만 다른 모든 인간들과는 마찬가지로 그 왕관을 놓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인간의 자랑은 자부심과 순전한 거만에서 일어난다. 그것들은 공허하고 일시적이고 얄팍하다.
반면에 하나님의 주장,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자랑은 영광과 순전한 거룩에서 흘러나온다. 그것들은 강력하고 영원하고 진실하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기 위하여 그분은 당연히 그분 자신의 영광에 신경을 쓰셔야 한다. 하나님은 그 무엇보다도 그분 자신을 고귀하게 하셔야 한다. 누구든 무엇이든 그 분 자신보다 더 고귀하게 여겨진다는 것은 그분의 가치를 위협하는 것이다.7)
이 세상에 하나님보다 더 위대하고 가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에 우리는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 한 분 뿐이신 그 하나님, 고귀하시고 거룩하신 그 하나님이시기에, 그 하나님은 스스로 하나님되셔서 독생자를 세상에 아낌없이 베풀어주신 사랑, 그대로의 사랑이시기에 우리가 그 분의 이름에 목매는 것은 더욱 당연한 처사이다. 우리 모두 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살아가자.
오늘 하루,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존중하고 그들에게 무례히 행치 않고 관대하며 포용하며 부드럽고 친절하자.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은 자기영광, 자기영달에 분주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에 분주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삶의 작은 현장에 이루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망한다.
- 각주
1) 임영수, 주기도문학교(서울: 홍성사, 2003), 33.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우리의 인격을 그의 앞에 드러나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2) 하나님의 이름은 ‘엘’, ‘엘로힘’, ‘엘룐’, ‘아도나이’, ‘샤다이(엘 샤다이)’, ‘야웨’, ‘테오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주’, ‘주 하나님’, ‘주재’ 로 나타나며 새로운 이름이 ‘아버지’이다.
유해무, 개혁교의학(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2000), 151-152.
3) 임영수, 32.
4) 야웨에 대한 경외의 표현으로, 유대인들은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적어 넣을 때 모음을 표기하지 않았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기록물에서조차 하나님의 타자성의 어떠함을 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얼마 전부터 나는 하나님을 언급하는 단어-God, He, Him, His 등-를 쓸 때마다 대문자를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이것은 내가 하나님의 타자성을 반영할 수 있는 아주 작은 방법에 불과하지만, 이것을 함으로써 나는 찬양곡을 쓰려고 할 때나 혹은 하나님에 대하여 글을 쓰려고 할 때마다 그분의 거룩한 타자성을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 하나님께 경의를 표하는 것은 우리의 삶의 가장 작고 사소한 일에서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지금은, 주님을 찬양하는 교회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아름다운 타자성을 대면해야 할 때이다. 그러나 본 적도 없는 것을 노래할 수는 없다. 여기서 토저의 현명한 말을 들어보자. “오늘날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지존하신 하나님의 비전을 회복하는 것이다.”
매트 레드맨, 홍순원 역, 엎드림(서울: 죠이선교회, 2006), 51-52.
5) 김세윤, 주기도문강해(서울: 두란노, 2003), 80-83.
6) 김세윤, 85-86.
7) 매트 레드맨, 45-46.
신약성경 마태복음 6장 9-13절의 나타나는 주기도문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에서 인간의 이름 VS 하나님의 이름, 그리고 그 이름이 가진 거룩함, 그리고 주기도가 하나님을 경외함과 동시에 인간에게도 존중감을 가져야 한다는 해석도 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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