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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마태복음

마태복음 6장 9절-13절, 주기도문강해②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by Message.K 2023. 4. 14.

오늘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문 강해 2번째 포스팅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모범인 주기도문, 첫 번째 문구-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마 6:9-마 6:13] 
(9)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10)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11)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12)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13)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주기도문강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주기도문강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늘에 계신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에서 먼저 ‘하늘에 계신’이란 문구를 살펴보자.

여러분의 아버지는 어디에 계시는가? 제가 저희 아버지를 이 문구에 넣어본다면 <경상북도 **에 계신 나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하나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시다. 우리가 도저히 이를 수 없는 그 우주의, 그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시다. 이 말은 단순히 물리적인 우주, 저 은하계의 한 구석에 숨어서 계신 아버지라는 의미가 아니다. 일차적인 땅과 반대되는 개념인 하늘이란 공간적 의미도 있지만 더 나아가 ‘하늘’이라는 의미는 우리 인간이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고매한 하늘, 죄와 벗하며 사는 땅의 인간들, 자연인들과는 반대되는 하늘에 계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우리의 육신의 아버지는 한 지역에 계시면 다른 곳에서는 도저히 계실 수 없다. 경북의 한 도시에 저희 아버지가 계시면 대구는 계실 수 없다. 대전에도, 부산에도, 서울에도 계실 수 없는 분이 바로 우리 친아버지, 육신의 아버지이시다. 왜냐하면 우리의 친아버지들은 육신이라는 아주 제한된 ‘몸’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가진 몸, 육신을 가지신 분이 아니시라는 것을 대변해주기도 한다. 육신을 가지신 아버지는 하늘에 계실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모든 육신적인 제한을 초월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는 특성이기도 하다. 고로 하나님은 영이시다.

 

(요 4:24)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하나님은 분명히 영이시기 때문에 예배하는 자들은 영적인 것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함을, 영적인 것이 교통해야 함을, 영적인 것이 우선순위에 놓여 져야 함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영적인 존재이시기에 이 세상의 모든 사건들과 모든 사람들을 꿰뚫어 보시고 내다보시고 계신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한 치의 실수도 없이 그 분은 하늘에 계셔서 인간사를 감찰하시는 전능하신 분이시다. 하늘에 계시기에 그 분은 전능하실 수밖에 없고 전지하실 수밖에 없다. 범신론자들은 자연 안에, 우주 안에 하나님이 편재해 있다고 본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범신론자들이 이야기하는 그런 하나님은 아니시다. 범신론자의 대표적인 철학자 스피노자는 ‘모든 것이 신이다, 자연은 신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것은 이 세계와 세상을 초월하여 뛰어넘는 하나님을 부분적으로 이야기해주기도 하지만 우리 하나님에 대해서는 온전하게 이해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또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가 도저히 하나님을 알 수 없음을 명백히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하늘의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 우리는 땅을 버티고 사는 사람들이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땅과 하늘은 우리가 흔히 쓰는 표현대로 ‘천지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초월하여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육신을 입고 사는, 매일 일용할 양식을 먹지 않으면 허기가 져서 살아갈 수 없고, 조금만 피곤하면 지친 기색이 역력하고 감기가 들면 콜록거리고 열이 나고 오장육부가 탈이 나면 병원에 드러누울 수밖에 없는 연약한 육신, 흙으로 왔던 육신은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는 육신의 인간...이 인간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도저히 만날 수 없다. 누군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이 세상에 제일 높은 산인 에베레스트 산에서 사상 최대의 길이의 사다리를 만들거나 최고의 기중기를 이용하여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더라도 에베레스트 산 위의 하늘에 하나님이 계실지도 의문이다. 또한 에베레스트의 산 위의 하늘이 우리가 바라보는 동일한 하늘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그 하늘을 정복하고 하늘을 점거하기에는 너무나 광대한 하늘이다. 더 나아가 중요한 것은 하늘의 하나님을 이야기할 때 하늘이 공간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그러한 기계의 도움이나 인력의 노력으로 만날 수 없는 분이시다. 영이시기에.

 

  그러기에 모든 사람, 온 인류에게 하나님은 숨겨진 분이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이 섬겨야 할 참신, 참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몰라 산이나 바다를 향해 절을 하기도 하고, 사람이나 동물의 상을 만들어 놓고 복을 내려 달라고 빈다. 옛날 그리스 사람들은 신들과 관련된 많은 신화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리스 신화의 신들은 우리 인간의 사랑과 신뢰 가운데서 예배할 수 있는 신이 아니라, 단지 인간이 만들어 낸 신화의 세계에 등장하는 신들에 지나지 않는다.1)

 

 

 

우리 아버지여

  아무리 하나님을 만나려고 해도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역사에서, 히브리의 역사에서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일찍이 알게 되었다. 드디어 그 분을 예배하고 신뢰하게 되었다. 특별히 이스라엘의 구속 역사 과정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구원의 능력으로 그들을 구속하시는 아버지로 알려 주셨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자신이 아버지이심을 드러내셨다.

  초월적인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여’에서 ‘우리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을 주기도문은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은 이방인들처럼 알지도 못하는 내용의 주문을 반복하여 여러 번 외우는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그 하나님은 ‘인격적인 교제를 원하시는 아버지’라는 것이다.2)

  

 

여러분의 아버지 앞에 여러분이 나아갔다고 치자. 아버지 앞에 가서는 자기가 열심히 외운 주문을 계속 외워보라. 아버지가 좋아하시겠는가? 아버지는 자녀와 대화를 하기를 원하신다. 아버지는 인격을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아버지’, 즉 ‘아바’(Abba)로 말씀하신 데에는 깊은 뜻이 있다. 이 ‘아바’라는 아람어가 아랍 사람들 가정에서 어린아이들이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이라는 것을 요하킴 예레미아스라는 독일 신학자가 밝혀냈다. 가정에서 어린아이들에게 가장 친밀하면서도 사랑과 신뢰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바로 ‘아바’이다.3)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은 비록 ‘하늘에 계시지만’ 가정에서 어린 아들이 깊이 신뢰하는 아버지 같은 분이시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탕자의 비유’(눅 15:11-32)에서 그 아버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고 있다. 이 비유에 묘사되는 아버지는 다음과 같은 분이시다.

 

  • -우리가 그 분과 거리를 두고 그 분 아닌 다른 것에 몰두하는 것을 가슴아파하시는 분
  • -우리가 그분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않는 것을 슬퍼하시는 분
  • -우리가 그분을 잊어버리고 무조건 많고 큰 것만을 요구하는 것을 슬퍼하시는 분
  •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와 교제하며 함께 모험하기를 원하시는 분
  • -우리를 집으로 돌아오라고 초대하고 계시는 분
  • -우리의 본향이자 창조적인 목적지에 계신 분
  • -우리를 맞아들이기 위해 마음 문을 활짝 열어 놓고 기다리시는 분

 

이 아버지는 나만이 독점할 수 있는 아버지가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된 ‘우리 아버지’이신 것이다.4)

  그 분 아버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나타내 보여주셨다. 또한 그 아버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당신과 교제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셨다. 그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아버지와 함께하는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이 어떠한지를 보여 주셨다.5)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표현(이것은 누가복음에는 나오지 않으며 마태복음에는 20번, 마가복음에는 한 번(11:25) 나오는데, 마태복음에 나오는 것들 중 어떤 것들은 마태가 만들어 넣은 것인지도 모른다)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주권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 말이다. 동시에 10절 하반절의 내용-...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을 위한 준비이기도 하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말은 신성(神性)의 문제를 다루기 위한 적절한 원안(原案)에 관심을 갖기 보다는 그가 누구(Who)인가 라는 진리에 더 관심을 갖는데, 이것은 신자의 마음 자세를 올바로 갖추어 주기 위한 것이다.6)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되신 하나님! 주기도문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을 살펴보았는데 우리가 맘껏 기도할 때 호칭(칭호)으로 사용하였음 한다. 왜냐하면 주님이 가르쳐주신 호칭이기 때문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보이셨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가 되셨다! 할렐루야!

우리는 그 분의 자녀로서 누려야 할 특권들을 오늘 하루도 온전히 누리며,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의 뜻과 계획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 위해 기도를 통해 그 분의 인격에 더 가까이 나아가기를 소망한다. 

 

 

 


1)임영수, 열흘동안 배우는 주기도문 학교(서울: 홍성사, 2003), 20-21.

2) 임영수, 22.

3) F. 게벨라인 편, 엑지포지터스 성경연구주해(서울: 기독지혜사, 2002), 210.

...예수 이전에 명백히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이교도들도 경우에 따라서는 그들의 신들을 아버지로 부르기도 했다(예, “아버지 제우스시여!”Zeus, Father). 그러나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예수에게서였다(Jeremias, Prayer, 11). 여기서 우리는 예수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 것이 하나님을 부르는 당시의 습관적인 방식과 대조를 이루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4) F. 게벨라인 편, 22.

이 모범적인 기도의 시작 부분에 나오는 “우리 아버지”라는 말의 “우리”는 복수이지만, 그 “우리” 안에 예수 자신이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우리 아버지”라는 말은 그의 제자들이 마땅히 드려야 할 기도에 관한 그의 가르침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유일한 아들됨(sonship)과 권위를 말할 때 그는 ‘나의 아버지’(예, 11:27)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이러한 아들됨과 권위를 다른 이들이 주장할 수 없음을 밝히고 있다.

5) 임영수, 22-24.

6) F. 게벨라인 편, 210-211.

 

 

 

오늘은 예수님의 주기도문이 담겨진, '마태복음 6장 9절-13절, 주기도문강해②'에 대한 포스팅인데요. 특별히 오늘은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문구에 대해서 영적인 의미와 해석을 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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