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7장 46절은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했던 마지막 발언, 가상칠언 중의 한 문장이기도 합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란 주제로 설교한 내용입니다.
You are not alone
얼마 전에 죽었던(이제는 시간이 좀 흘렀네요) 세계적인 팝스타, 마이클 잭슨의 히트곡 중에서 이런 곡이 있습니다. 다들 알 것입니다.
"You are not alone"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종종 이 곡을 들으면서 혼자 있거나 외로움과 고독을 느낄 때 감성적으로 위로받기도 합니다. 또 세계의 기아들을 돌보고 후원하는 광고영상이나 다큐멘터리의 배경음악으로도 종종 사용되었습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당신은 외롭지 않습니다.''
"언제나 나는 당신 곁에 있습니다.'
뭐 이런 가사들이 있습니다.
빌 하이벨스-내가 너의 아버지가 되어주마!
1978년 9월 28일 JFK고속도로를 운전하면서 한 청년이 큰 소리로 하나님께 질문했다고 합니다.
"아버지 없이 어떻게 해요?"
그 청년의 아버지는 그 청년이 20대 후반의 푸른 나이에 심장마비로 죽은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의 가장 유력한 후원자였고 가장 가까운 절친이었고 이제껏 알던 사람들 중의 최고의 인물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겐 위대했습니다.
"내 아버지 없이 하나님께서 제게 맡기신 일을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당시 그 청년이 맡고 있던 일은 이제 겨우 간신히 물 위에 떠 있었다고 합니다. 위기의 상황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 청년에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내가 너의 아버지가 되어 주마. 내가 약속한다. 너는 혼자가 아니다.'
이 청년은 누구일까요? 바로 빌 하이벨스 목사입니다. 빌 하이벨스의 아버지는 52세 되던 날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빌은 '너는 혼자가 아니다. 내가 너의 아버지가 되어줄게.'라는 말을 들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영혼에 들어오면서 무거운 짐이 내 가슴에서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즉시 성령님께서 시편 68편 4-5절의 말씀을 상기시켰습니다.
하나님께 노래하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하늘을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이를 위하여 대로를 수축하라
그 이름은 여호와시니 그 앞에서 뛰놀지어다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고아의 아버지시며"...그 한 마디 진리가 빌 하이벨스를 붙들었던 것입니다. 20대 후반에 갑작스럽게 아버지를 여윈 빌이었지만 하나님의 음성이 그를 다시금 견고하게 붙잡아 주었던 것입니다.1)
저의 학창시절 가운데 중2 시절, 담임선생님께서 가르치던 과목이 기술이었는데, 그 분의 책 표지 겉에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문장을 써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제 기억으론, 그 분이 신앙을 갖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숯기가 없었던 시절이라 물어보지도 못하고 기억 속에서만 자리하고 있습니다. 삶의 깊은 절망과 좌절을 경험하여 시험에 빠지신 것은 아닌지 문득 중2 담임선생님과의 관련된 기억을 떠올려봅니다.
가상칠언 ④번째 말씀
오늘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4번째 발언을 하고 계십니다. 그 발언은 바로 중2 담임선생님의 책표지에 적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입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버림받는 것은 굉장히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사소하게는 친구들로부터 잠깐 무시를 당하거나 무관심, 소년기나 청소년기를 지나면서 경험하게되는 '왕따'는 심지어 사람들을 자살로 이끌어가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연인이 상대방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차이는 경험도 씁쓸한 고통입니다. 배우자의 불신과 탈선으로 인해 버림을 당하는 경우, 동업을 하던 사람과의 관계에서 버림을 당하는 경우, 프로 운동선수들이 팀에서 열심히 활약을 하다가 주가가 떨어지면 어쩔 수 없이 다른 팀으로 이적을 추진하거나 트레이드를 시도합니다. 박지성이 또 다른 팀으로 가느냐 마느냐 늘 근거 없는 뉴스들이 돌고 있습니다. 다른 팀으로 이사가는 것은 그래도 낫습니다. 더 최악인 것은 성적이 별로 좋지 않거나 건강상의 이유로 팀의 도움이 되지 못하면 방출시킵니다. 팀은 손해를 보면서도 그 친구를 내보내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더 이상 너는 우리 팀에 필요가 없다는 이야깁니다". '나가라'는 말입니다.
이것 또한 버려지는 기분이 들 것이고 실제로 버려지는 이야기입니다. 누군가로부터 차이거나 버림당하는 것, 따돌림에서 나중에는 무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곤욕이며 아픔이며 상처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자기가 애착을 가지고 있었던 어떤 관계로부터의 떨어져나가는 것은, 마치 심하게 표현하자면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느낌일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이러한 느낌인데, 오늘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에서 버림당하는 체험을 십자가의 현장에서 당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일 삶의 현장체험'이나 몇 시간동안 당하는 아찔한 쇼나 체험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현실이고 리얼입니다. 십자가 상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처절하고 몸이 대못으로 꼭꼭 박힌 채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지금 절규하고 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2)
나무 십자가, 결코 볼품없는 처절하고 고통스럽고 치욕스럽기 짝이 없는, 당시에 야만인들에 의해 고안된 사형틀인 그 십자가, 당대 엘리트 지식인들이 십자가형틀은 너무나 잔인하여 십자가는 그들의 기억 속에서조차 사라져야 한다고 할 정도로 잔인한 살인방법이었는데, 그 현장에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종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없습니까? 내가 정말 지옥 같은 체험이나 경험을 했던 적이 없습니까? 어떤 문제나 위기로 인해서 자기가 그 자리, 지금 내가 서 있는 장소와 시간, 거기에 내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 싫고 너무나 저주스럽기까지 한 적이 있었습니까? 정말 살고 싶지 않다고 할 정도의 깊은 상처나 아픔의 현장이 있었습니까? 지옥같은 느낌!
하지만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 지금 그 현장에 계십니다. 지옥같은 느낌이 아니고 말 그대로 지옥이었습니다. 머리는 두통으로 짓누르고 있고, 몸은 체중으로 인해 점점 밑으로 쳐집니다. 하지만 내 몸은 나무십자가에 기대어 서 있습니다. 손과 발은 찢어지는 아픔과 함께 온 몸이 뒤틀리기 시작합니다. 그걸 구경하려고 사람들이 모여서 머라고 머라고 이야기합니다. 너무나 고통스럽기에 그런 이야기조차 신경 쓸 겨를이 없습니다. 내가 지금 죽어가는데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 그 골고다 언덕위에서 두 강도와 함께 못 박혀 죽어 가는데 태양은 여전히 빛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저 태양!
예수님은 지금 자신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였는지 이 절규에서 드러납니다.
"엘리...엘리...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상의 고난과 고통의 현장에서 주님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올리고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예수님은 지금 어떤 육체적인 고통 속에서 신음하면서 절망하여 외치는 소리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은밀한 관계는 삼위일체의 신비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창조-타락-구속 이 구도는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창조사역을 친히 감당하셨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죄를 지어 타락함으로 인해 친히 구원의 길을 계획하셨습니다. 그 구원을 계획하신 성부 하나님, 그 구원자의 길을 자처하신 성자 예수님, 그리고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내주하실 성령 하나님! 예수님은 삼위 하나님과의 영원한 하나됨과 연합을 통해서 누려왔던 교제의 끈이 십자가 상에서의 고난과 그리고 신으로선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었던 죽음, 사망의 지점으로 나아감으로 말미암아 끊어지게 됩니다. 성육신하셔서 목수의 아들로 자라실 때도 끊임없이 하나님과 교제했던 예수님이셨는데,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진리 앞에 그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끈이 끊기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큐티 한 번 빼먹고, 기도 한 번 빼 먹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과의 사귐이 십자가와 죽음에서 끊기게 됩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영원한 하나됨의 친밀한 연합을 의미합니다. 1+1+1=1, 신비한 삼위일체의 교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만들지 않았다면 굉장히 심심하고 지루하셨을까요? 천만에요. 굳이 인간을 만드시지 않아도 결코 외롭지 않으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왜냐하면 3위가 1분이셨기 때문에 그 안에 충분한 사랑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그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공동체적인 교제가 너무나 놀라웠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에게 교회라는 공동체를 통해 교제를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그 친밀한 교제와 영원한 사귐, 그래서 요한은 하나님에 대한 최고의 정의를 요한일서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쩌면 하나님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기도 합니다.
요한1서 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바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랑이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온다는 것을 믿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의 연인간의 사랑, 부모자식간의 사랑, 손자손녀를 향한 할아버지할머니의 사랑, 친구와 친구간의 사랑, 선후배간의 사랑과 정, 이웃사랑, 물건에 대한 사랑, 애착 등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바로 하나님에서 시작합니다.
왜냐구요? 바로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제조물이 아닙니다. 사랑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에 그는 자기 죄가 아닌 수많은 사람들의 죄를 위해 친히 십자가에서 하나님과의 사랑과 연합을 포기하시고 희생의 사랑을 보이신 것입니다. 성부, 성령 하나님과의 교제와 사랑이 가치가 없거나 의미가 없어서 십자가의 사랑을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그 대진리 앞에 주님은 모든 것을 내려놓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혹시나 십자가상에서 달리시기 전에 갈등하시다가 자신은 삼위하나님과의 연합의 그 교제에서 도저히 떨어질 수 없기 때문에 십자가를 못 지겠다고 하시면서 하늘의 천군천사를 대동하여 멋지게 로마군인들로부터 구원받았을 수 있었습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멋지게 그 당시 상상도 할 수 없는 무기들을 동원해서 승리를 장식하시고 자기에게 지워지게 하려고 했던 십자가를 치워버릴 수 있었습니다. 몇일 전에 갑자기 인터넷을 달군 5분짜리 쓰나미 영상을 보셨습니까? 5분만에 도시 전체가 쓰나미로 초토화되는 장면을 옥상에서 찍은 장면이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최고의 경제력과 자긍심으로 똘똘 뭉쳐진 일본이 그렇게 쓰나미 앞에 무너질지, 강진으로 쑥대밭이 될 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장면에서도 분명 어쩔 줄 몰라 하면서 표현을 하고 싶은 표현하지 못하는 말 못하는 벙어리처럼, 힘없어서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알지만 무기력하게 뒷짐지고 있어야만 하는 항복한 패잔병의 병사처럼 하늘에서 쳐다보고만 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독생자가 순종하지 않았다면, 독생자 예수님이 순종하지 않았다면 한 순간이라도 쓰나미로, 폭풍우로, 지진으로 골고다 언덕을 뒤흔들어놓을 수 있었던 대목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도저히 구속의 사역은 못하겠다고 하면 한 순간 모든 전세가 뒤바뀔 수 있었다고 저는 상상해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예수님은 힘이 없어 아무것도 못하고 상황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비천하고 무기력한 죄수로 비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고통의 현장에서 자신의 모든 의지를 내려놓고 구원의 계획 속에 자신의 고난에 순종하고 계셨습니다. 그가 만약 자기를 먼저 사랑하셨다면 십자가 사건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를 사랑하시기 보다 먼저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빌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러기에 도살장에 끌려가는 짐승처럼 십자가의 길로 끌려가셔서 그 분은 사람들의 손에, 죄인들의 손에 죽으셨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은 자기를 죽인 사람들, 더 나아가 과거, 현재, 미래에 자기를 거역하고 죽이고 해롭게 한 모든 인류의 죄인들을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에 대한 정확한 해석과 의미를 부여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한 정확한 인식과 해석이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사는 것이 저주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바로 그런 저주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한 번도 떨어져 본 적이 없고 한 번도 끊어져 본 적이 없는 그 교제의 충만함을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누리는 명절 때 누리는 가족들과의 교제와 해후, 부부간의 누리는 하나됨, 가족끼리, 이성끼리, 친구나 동료끼리 누리는 그 어떤 교제, 전도회에서 나누는 그 어떤 fellowship의 그 무엇과 결코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정말 추측과 상상만 할 수 있지 그 이상은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 많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죄 많은 신도 아니고, 죄 많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개미같은 벌레가 인간이 사는 세상의 모든 것, 인간에 대해서 알 리가 만무하듯이 인간은 하나님의 모든 것에 대해 정확하게 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런 우리들을 위해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의 교제의 끈을 자르셨습니다. 그리고 최고의 육체적인 고통을 다 당하셨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왈가왈부 할 수 없습니다. '거지와 왕자'의 이야기에서 왕자가 거지가 되어보았기 때문에 왕자가 거지의 입장을 어느정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입장과 역할을 바꾼 것이지만 예수님은 인간의 최저, 저질의, 최악의, 저주의 사형틀에서 고통 가운데 죽으셨기 때문에 이제 사람들은 그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거지가 되어보니 어때, 왕자?, 너도 거지가 되니 별수 없구나!'
뭐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고통을, 이 모든 십자가를 자발적으로 껴안았기에 사람들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총체적인 죄를 걸머쥐고 대신 죽으신 희생제물(hilasterion)이 되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자발성에 의한 섬김이었지만,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 오신 예수님의 자원하는 마음이었지만 거기에는 깊은 비극이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과는 정반대되는 원수의 편에 서게 되신 것입니다. 원수가 되어 죄의 댓가로 죽어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버리셨습니까?'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영어성경에서는 '포기하셨습니까?'로 나오기도 합니다. 이것은 이런 풍경으로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쟁터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는 가운데 승리를 눈 앞에 둔 한 편의 왕은 다른 쪽의 모든 병사들을 죽이기로 작정했습니다. 자신의 왕국에 대한 정면도전은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그 죽어 마땅한 왕국의 군사들, 백성들을 대신해서 자기를 죽이고 백성은 살려달라고 등장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왕국의 왕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왕자는 죽어 마땅한 왕국의 왕자가 아니라 바로 승리한 나라의 왕의 아들이었습니다. 그 왕자가 죽어 마땅한 왕국에 무슨 밑보일 것이 있었나요? 승리를 앞둔 왕은 하나님이시라면, 그에 대적한 왕국은 사단이 지배하는 세상이고, 그 군사들과 백성들은 죄로 하나님께 정면도전하는 우리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자신이 순종한 그 십자가의 죽음 앞에 최종적으로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하나님의 원수가 된 편에서 인간들이 만든 사형틀에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에겐 순간적으로 너무나 견디기 힘들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되는 것, 육체적으로 심각하게 고통당하는 것보다 더 견딜 수 없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 버려지는 그 상태'였습니다. 한 번도 그런 자리, 그런 상태에 있었던 적이 없으신 순결하신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렇게 표현했다. 여기서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불지 않는 유일한 때였습니다. 이것은 잠시 동안이라 할지라도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친밀한 관계(11:27)3)가 단절되었음을 시사합니다.4) 이 말씀은 시편 22:1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5) 예수님의 이 부르짖음 속에는 세상의 죄악에 대한 증오와 우리의 구원에 위한 대가가 내포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엘리자베스드 브라우닝(Elizabeth Browning)은 말한다.
보라 버림받은 임마누엘의 부르짖음이 온 우주를 흔들었도다
그것은 고독의 부르짖음이요 메아리도 없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세상 한 복판에서 거룩한 입술을 통하여 나온 외침이었다.
오! 바로 그가 버림을 받으셨기에 그 누구도 이제는 버림받지 않는다.
브라우닝의 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력과 효과에 대해서 잘 말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모든 버림받은 처절하게 경험하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그 누구도 버림받지 않아도 됩니다. 죄로 인해 버림받는 모든 것을 예수님께서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시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13:5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버림받는 것이 얼마나 처절한 아픔인 것을 주님은 익히 아셨기에 우리를 홀로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으로 인해 한 주를 사셨습니까? 어떠한 고통이 여러분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까? 어떠한 문제로 인해 여러분이 자유하지 못하고 버림받은 것처럼 살게 만들고 있습니까? 히브리서 기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물질입니까? 히 13:5은 마치 그 말씀을 읽는 독자들이 돈 때문에 버림받고 멸시받고 천대받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대가 돈이 없으면 그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버리지도 않고 떠나지도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히 13:6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이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그리고 빌 하이벨스 목사님에게 들린 하나님의 음성이 동일하게도 여러분의 메시지이길 소망합니다. 누가 여러분을 배신하고 떠나갔습니까? 누가 여러분을 버렸습니까? 어느 누구와의 관계로 인해 여러분이 좌절과 낙망에 빠졌습니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의 아버지가 되어 주마. 내가 약속한다. 너는 혼자가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고통 가운데 나를 왜 버리셨습니까? 라고 했던 그 현장은 바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현장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오! 바로 그가 버림을 받으셨기에 그 누구도 이제는 버림받지 않는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고난과 부활, 이 모든 사순절의 놀라운 메시지로 인해 절망의 벼랑으로 달려가던 우리의 영혼이, 낙망의 낭떠러지로 떨어지려고 하던 우리의 심령이 회복되길 소망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능력이요, 우리의 희망이요, 우리의 소망입니다! 주님의 아픔과 주님의 상처와 주님의 십자가로 인해 우리가 나음을 입었음을 기억하고 그 십자가 앞에 다 내려놓으시길, 그 십자가를 더욱 의지하는 사순절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빌 하이벨스,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서울: 국제제자훈련원, 2010),189-191.
2)
3)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4) IVP성경주석, 신약.
5)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아주 오래전에 설교했던 사순절설교중에 마태복음 27장 46절의 본문을 바탕으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주제의 포스팅이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버리받으심을 우리는 온전히 다 이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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