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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마태복음

마태복음 27장 27-44절 설교, 십자가로 이루시는 승리

by Message.K 2023.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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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 마태복음 27장 27-44절의 본문을 가지고 <십자가로 이루시는 승리>라는 주제로 설교한 포스팅입니다. 군병들과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희롱하고 조롱하면서 십자가에 못박았지만 결코 깎아내릴 수 없는 그리스도의 성취와 승리를 보여줍니다.

 

 

 

군병들의 희롱(27-31절)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모욕하는 이방군인들의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이것은 비록 모욕적이긴 하지만, 예수께서 ‘유대인들의 왕’이신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드러내준다. 이 군인들은 유대주변(페니키아, 시리아) 이방인들 중에서 선발된 보조 군인들이었다. 대개는 유대인들에게 호감이 없거나 반감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런데 유대인의 왕이라 불리는 예수께서 자신들의 손에 넘어오자, 그들은 잘됐다싶어 예수님께 자신들의 반유대적인 감정을 분출할 수 있는 절회의 기회로 삼았다. 이 일을 위해 ‘온 보병대’가 모였다고 한다(27절). 보병대는 600명으로 구성된 부대 단위로서, 이 특별한 일을 보기 위해서라면 그 모든 인원이 모여들었다는 것은 특별하다.

 

 

  군인들은 예수의 옷을 벗기고 ‘주홍색 옷’을 입혔다(28절). 이는 아마도 황제의 자주색 복장을 빗댄 행동으로 보인다. 그들은 또한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서 예수의 머리에 씌웠다. 그리고 갈대를 오른손에 들게 했다(29절). 이는 아마도 왕관과 왕의 홀을 염두에 두고서 한 행동들로 보인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서 ‘유대인의 왕, 만세’를 외침으로써 황제께 돌리는 환호를 예수께 돌리고 있다(29절). 비록 군인들은 그 사실을 스스로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대제사장 가야뱌(26:63)나 총독 빌라도(27:11)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진정한 의사와 상관없이 예수의 진정한 신분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로마 군인들의 손에 의해 왕으로 등극하신다. 하지만 그분은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으시는 왕이 아니라 모욕과 수치를 당하시는 왕으로 등극하신 것이다.

 

 

  끝으로 그들은 예수께서 침을 뱉고 머리를 때리는데(30절),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유대교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26:67) 또 다시 이사야 50:6(‘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다’)의 예언을 성취하고 있다. 예수를 희롱한 군인들은 예수의 옷을 다시 입히는데(31절), 이는 십자가형에 처하는 자의 옷을 벗긴 채로 끌고 가는 일반적인 관례를 벗어나는 것이다. 이는 유월절에 모여든 유대인들의 감정을 건들지 않기 위한 현실적인 조치로 보이지만, 35절에 언급될 옷에 대한 예언의 성취와도 무관해보이지 않는다. 말씀의 일점일획이 다 이뤄지기 위해서 하나님은 당시의 일반적인 관습과 행동들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계획한 대로 일이 진행되게 하신다. 사람이 일을 계획하지만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배후에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붙잡으라! 그분을 믿고 신뢰하라!

 

 

 예수님은 진정한 왕이시다. 하지만 그 드러나시는 모습이 너무나 가슴이 미어진다. 무식하고 용감한 로마군인들에 의해 모욕적으로 왕으로 등극하신 그리스도! 그분이 왜 그 자리에 서 계신가? 그것은 바로 우리들의 허물과 죄 때문임을 기억하라! 그리고 또 하나, 그분은 만왕의 왕이심을 기억하라! 로마군인들이 그렇게 조롱하면서 왕으로 추대하지 않더라도 그분은 진정한 왕이시다! 할렐루야! 그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자!

 

 

 

 

십자가에 달리심(32-38절)

  두 차례의 심문과 두 차례의 모욕적인 행동에 뒤이어, 이제 유대인들이 그처럼 집요하게 요청한 대로,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 진행된다. 십자가형은 주전 1세기부터 팔레스타인 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처형 방식이었다. 로마는 정치적 반역자, 심각한 범죄자들을 십자가형에 처했는데, 대개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에서 처형을 시행함으로써 범죄 예방과 범죄 억제의 효과를 기대했다. 하지만 마태는 그러한 처참한 상황은 극도로 자제한다. 그는 그 십자가 죽음의 참혹함과 비참함보다는, 그 사건이 갖는 의미에 더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다.

 

 

마태는 십자가 사건을 기술해가면서, 기독론적인 호칭, 예수님의 호칭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 37절: 유대인의 왕,
  • 40절: 성전 건축자,
  • 40절: 하나님의 아들,
  • 42절: 이스라엘의 왕,
  • 43절: 하나님의 아들.

 

이 모든 호칭들은 조롱 가운데 언급되어진 것들이지만 결국 예수의 메시야 신분을 역설적으로 확증해주는 기능을 한다. 사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처형당하시는 가운데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진정한 메시야로서의 선교를 완수하시게 된다.

 

 

  밤새도록 모진 고통과 고문으로 힘겨워진 예수님에게 나무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로마 군인들은 아무에게나 그 나무십자가 기둥을 강제로 지고 가게끔 하는 특권이 있었기에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십자가를 지고 가도록 한다(32절).

 

아마도 시몬과 그의 가족은 이 사건을 계기로 예수의 제자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참조ㅡ

막 15:21--->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십자가를 지우고

롬 16:13....>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자기몫에 태인 십자가를 충성스럽게 감당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줄 믿는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밖에 위치한 넓은 처형 장소로 보이는 골고다에서 처형당하신다. 골고다에 도착한 예수님에게 ‘쓸게 탄 포도주’를 마시게 하도록 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거절하셨다. ‘쓸개 탄 포두주’는 일종의 마취제로, 죄수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기능을 했다.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모든 고통을 온전한 정신으로 겪으시겠다는 의지적인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은 또한 시편 69:12‘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의 성취이다.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제비를 뽑아 나누는 행위(35절)를 한다. 이것 또한, 시편 22:18(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의 성취적 요소를 갖는다.

  예수님은 두 명의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38절). 그들은 노상강도라기보단 로마에 저항하던 폭도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가복음 15:7에서 소요 중에 살인한 폭도라고 기술된 바라바를 요한복음 18:40은 ‘강도’라고 표현하고 있다. 사실 ‘무저항’과 ‘원수사랑’의 원리의 예수님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도 예수께서 이러한 정치적 폭도들과 함께 처형당하신 것은 매우 역설적이다. 아마도 이러한 상황은 이사야 53:12(‘이는 자기 영혼을 버려 죽음을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기 때문이다’)을 성취하는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당해야할 수치와 저주, 그 더러운 죄인들과 같이 되어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께 감사하자!

 

 

 

유대인들의 희롱 39-44절

  예수께서 처형당하신 현장을 지나가던 자들이 예수의 모습을 보고서 ‘머리를 흔들며’그분을 ‘모욕하였다’(39절). 그들의 이러한 모습은 22:7(‘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머리를 흔들며 말하되’)을 인상적으로 성취하는 모습이다(참조. 애 2:15). 지나가는 자들이 예수를 비웃는 초점은 성전에 대한 예수의 입장 때문이었다. ‘성전을 허물고 삼일 만에 지으려는 자야’(40절. 상반절). 그들은 이어서 흥미로운 제안을 한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네 자신을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40절).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이라는 그들의 빈정거림은 예수께서 사역을 시작하는 상황에서 있었던 사탄의 시험을 회상케한다(4:3,6). 사실 예수는 그들이 제안한 대로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있는 능력이 없으신 것이 아니다(참조, 26:53...열 두 군단12x 로마는6,000). 하지만 예수는 이미 겟세마네 기도에서 이 십자가 죽음을 감당하시기로 결정하셨다(26:35,42,44). 따라서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의 진정한 아들이시기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히려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신다. 결국 지나가는 자들은 자신들의 빈정거림을 통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인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 즉 이스라엘의 모든 지도자들, 공식 유대교는 그 리더십들을 통해 예수를 철저히 모욕하고 거절하게 된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모욕을 통해 또다시 예수의 메시야 신분을 다각적으로 입증하게 된다. ‘이스라엘 왕’(42), ‘하나님의 아들’(43).흥미롭게도 정작 하나님의 백성인 지나가는 자들과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공히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였지만, 그들은 진정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깨닫지 못한 반면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던 이방인 ‘백부장과 군인들’은 역설적으로 예수께서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셨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54). 한편 43절의 빈정거림은 시편 22:8(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을 성취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빈정거림을 실제로 시행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조롱하는 대로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하심으로써가 아니라 예수를 죽음에서 건져 내어 다시 살리심으로써 시행하실 것이다(28:1-2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놀라운 구원을 이루신 줄 믿는다.

더 높고 큰 권세를 가진 이는 작은 권세를 가진 이 앞에서 우쭐하거나 빈정거리지 않는다. 자신의 능력과 권세가 이미 모든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신 것을 기억하라!

 

 

 

 

오늘은 마태복음 27장 27-44절의 본문을 가지고 <십자가로 이루시는 승리>라는 주제의 설교를 포스팅했는데요.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시지만 십자가에 순종하심으로 궁극적인 승리를 이루셨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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