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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마태복음

마태복음 21장 12-22절, 예수님을 믿는가? 이용하는가?

by Message.K 2023. 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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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 마태복음 21장 12-22절의 본문을 토대로 <예수님을 믿는가? 예수님을 이용하는가?>란 주제로 설교한 내용을 포스팅 합니다. 과연 우리는 어느 자리에 있는지 한번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음 합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수차례에 걸쳐서 예루살렘을 방문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마태는 21장에 이르기까지 예수의 예루살렘 방문에 대해 기록하지 않았다. 이는 마태에게 21장 이하의 예루살렘 방문 기록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시사해준다. 21장에서 상징적인 행동들을 세 가지 보여준다.

 

 

  • 1)예루살렘 개선입성(1-11절),
  • 2)성전에서의 행동(12-17절),
  • 3)무화과나무 저주(18-22절).

 

 

  이들 중 처음 두 행동은 그곳에 몰려든 사람들에게 예수님 자신의 메시아 신분을 공개적으로 주장한 효과를 자아내었다. 그 결과 무리들은 메시아께 보내는 환호를 예수께 돌린 반면에, 이를 지켜보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께 더욱 확고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게 된다.

   한편 제자들에게만 보여주었던 셋째 행동은 바로 앞에 기록된 성전에서의 분노하시던 그 행동의 의미를 더 확고하게 드러내어 준다. 이처럼 이들 세 가지 상징적인 행동들은 앞으로(21:23이하) 예루살렘에서 전개될 유대교 지도자들과 메시야 예수님 사이의 피할 수 없는 충돌의 결정적인 배경을 제공해 준다.

 

 

 

 오늘 본문은 앞에서의 3가지 상징적인 행동 중, 두 번째, 세 번째를 다루고 있다. 마가복음 11:11-15은 예루살렘 입성과 오늘 성전에서의 행동 사이에 하루의 간격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마태는 이러한 시간적인 언급을 아예 제거해버림으로써 이들 두 사건의 긴밀한 연관성을 더욱 고조시킨다(11-12절). 그러니깐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 그 예수님은 온유하고 평화의 왕 메시야이심을 드러내셨다. 또한 이스라엘 신앙의 중심지인 성전에서 자신의 이러한 메시야적 권위를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방법으로 드러내 보이신 것, 이 두 가지는 긴밀하게 연관성이 있다는 것이다!

 

 

 

 

성전에서의 행동(21:12-17)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전에서 ‘파는 자들과 사는 자들’을 모두 내쫓으신다(12상 절). 이 사건이 일어난 장소는 성전 건물 안이 아니었다. 단지 그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이방인의 뜰’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분노하셨다!

  이 당시 희생 제물로 바쳐질 동물들을 성전 지도자들의 허락하에 이방인의 뜰에서 매매하는 일은 예수 당시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멀리서 여행해 온 순례자들이 동물을 데리고 와서 제사를 지낸다는 것만큼 번거로운 일은 없었다. 또한 희생 제물로서 적합한지 성전에 와서 다시 검증하는 복잡한 절차를 거치는 것보다, 이미 성전 당국에 의해 희생제물의 자격으로 검증된, 흠없는 동물을 현장에서 바로 구입하여 제사드리는 것이 훨씬 편리했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은 ‘환전상들의 상’을 뒤엎으신다(12하 절). 모든 유대인 성인 20세 이상 남자는 매년 니산월 1일까지 성전에 반 세겔(=두 드라크마)의 세금을 내도록 되어 있었다(참조. 출 30:14). 그런데 이 성전세는 두로 동전으로 내도록 되어 있었으며, 따라서 로마나 헬라 동전 및 그 밖의 지방 동전들을 가지고 온 유대인들에게는 돈 바꾸는 일이 필수적이었다. 이런 일에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서 성전에서는 니산월 1일(곧, 유월절 두 주 전) 직전 며칠 전에 걸쳐서 환전상들이 돈 바꾸는 일을 위해 상을 펼쳐 놓았다.

 

 예수님께선 이처럼 당대 사람들에겐 당연하고 일반화된 성전 관행에 충격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제기하셨다!

 

 

 

 

성전은 기도하는 집

성전은 이사야 56:7에서 밝힌 바와 같이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성전은 상업의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전 지도자들을 비롯한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거룩한 성전에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하는 데 실패했으며, 오히려 자신들의 사악함으로 성전을 더럽히고 있었던 것이다.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듦

 이는 예레미야 7:11에서 온 것으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성전을 원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자신들의 이익과 편의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성전지도자들과 상인들, 그리고 그들의 행동에 편승하는 모든 사람들의 행위를 정죄한다. 예수의 이러한 선언은 특히 당시 성전의 책임자들인 ‘대제사장들’의 권위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었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은 ‘서기관들’과 함께 예수의 권위에 정면도전하게 된다(15-16절).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이러한 행동을 취하신 이유는 상인들이 특혜를 받으며 부당이득을 취했기 때문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께서 내쫓으신 대상은 파는 자들 뿐만 아니라 사는 자들까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문제를 제기하시는 것은 그 때 당시 상업화 되어 있던 희생 제사 제도 전반에 대한 것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특히 그처럼 성전 경내에서 상업 행위가 행해지도록 허용한 성전 지도자들에게 대한 것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예수의 이러한 행동은 예수 자신의 권위가 성전 지도자들의 권위보다 더 크심을 드러내 보여준다. 예수님은 메시야가 임하면 성전을 새롭게 하고 회복하실 것이라는 구약의 다양한 예언들을 염두해 두고, 그 예언들을 성취하려고 이러한 행동을 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배드리는 성전은 온전한 기능을 다하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의 성전이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 강도의 소굴, 도둑의 소굴이 되고 있진 않는가? 우리의 성전은 예배의 본질적인 기능을 다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줄 믿는다. 교회가 교회답지 않고, 교회가 교회의 본질을 상실하여 상업적인 이득과 가치에 몰두한다면 예수님께선 또 다시 성전청결, 성전개혁, 성전심판운동을 하실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의도에 벗어난, 눈에 보이는 성전과 그 안에서 행해지는 제사 제도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파괴될 것이고, 그 대신 성전의 진정한 기능의 회복을 의미하는 새로운 성전이신 예수님 자신 안에서 성전의 궁극적 목표가 성취될 것임을 내다보게 하는, 곧 성전 제도에 대한 심판과 성전의 진정한 회복에 대한 소망을 예고하는 유아적 행동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한편 예수께서 성전에서 ‘맹인들과 절름발이들’을 치유해주신 것은 의미심장하다. 삼하 5:8에서는 맹인들과 절름발이들이 하나님의 집에서 배척당하게 해주었는데, 다윗의 아들 예수는 ‘성전 안에서’ 그들을 영접하실 뿐 아니라 고쳐주기까지 하시는 것이다. 이는 회복된 성전이 누구에게나 제공하게 될 메시야적 축복의 성격을 시사해준다.

 

 

 

   예수의 이러한 충격적인 행동을 지켜본 아이들이 예수께,“호산나, 다윗의 자손께”라고 환호한 것은 매우 인상적.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을 주관하는 대제사자앙들과 율법을 가르치는 ‘서기관들’은 메시아를 눈앞에 두고서도 인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께 화를 내며 따진다. 하지만 오히려 어린아이들이 그분을 알아보고 그분을 칭송하며 환호하는 모습은 너무도 역설적이다.

“이것을 지혜롭고 똑똑한 자들에게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계시하시니 아버지께 감사합니다.”


     

 

                                                 

무화과나무 저주(21:18-22)

  예수의 유일한 파괴적 기적이다. 이 이야기를 대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성품과 인격이 이토록 괴팍하고 충동적이셨는가?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행동은 무모한 충동적인 저주가 아닌 지극히 의도적이면서도 예언적 성격을 띤 행동이다. 열매없는 무화과나무는 예루살렘의 공허한 성전 제사 제도를 의미하고, 나무에 대한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19절)는 예수의 저주는 머지 않아 있을 예루살렘 성전 제사 제도 자체의 종말을 비유적으로 예시한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무화과나무는 구약의 몇 몇 구절들에서 하나님 앞에서의 이스라엘의 지위, 특히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언급하는 데 자주 사용됩니다. 그러하면 ‘무화과나무의 말라짐’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무화과나무 이야기는 예수의 성전에서의 행동이 성전의 개혁이 아니라 성전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는 상징적 행동이라는 측면을 좀 더 확고하게 해 준다. 이렇게 볼 때, 성전 이야기와 무화과나무 이야기는 공동으로 하나된 분명한 메시지를 강력하게 선포해준다. 그 진정한 역할은 상실한 채, 무늬만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은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말라죽듯이 파멸의 운명을 맞을 수밖에 없다(참조 3:38; 24:2)는 것을 보여준다.

 

 

 

  21절부터 22절까지에서 산이 바다에 던져지는 것으로 표현했는데, 여기서 언급된 산이 구체적으로 성전 산을 지칭한다고 볼 때, 바다에 던져진다는 표현은 곧바로 성전이 심판당하는 모습을 연상케 해준다. 22절 결론적 교훈 역시 성전의 운명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옛 성전은 기도하는 집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여 파괴될 것이지만(13절), 진정한 성전이신 예수 안에 있는 제자들은 무엇을 구하든지 그 분의 뜻대로 다 받을 것이다. 기도의 집이 심판을 받아 사라져 버리는 교훈과 더불어 새로운 성전에서의 기도에 대한 교훈이 주어지는 것은 매우 적절해 보인다.

 

 

 

 성도 여러분, 진정한 성전이신 예수님께 우리의 마음을 다해 아뢸 때 그분은 우리의 소원을 만족케하실 줄 믿는다. 예수님을 이용하여 득을 보려고 했던 역사적인 오류를 반복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의 열매를 맺는 믿음의 대장부들 되시길 바란다!

 

 

 

 

오늘은 신약성경 마태복음 21장 12-22절을 토대로 <예수님을 믿는가? 이용하는가?>란 주제로 설교한 내용이었는데요, 당시 종교와 종교지도자들이 신심이 아니라 종교를 이용한 빛바랜 제사제도와 성전에 대한 심판을 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보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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