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신약성경 마태복음 14장 13-21절의 본문을 가지고 <육의 양식과 영의 양식>이란 주제로 설교한 내용을 포스팅해 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예수님은 육의 양식이자 영의 양식의 공급자이심을 보여주시는 장면입니다.
세례요한의 죽음 소식은 어쩌면 그 당시에 많은 유대인들에게 큰 이슈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이 소식은 하나의 비보였고 슬픔의 분위기를 자아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난 세례 요한의 사역과 그에 대한 예수님의 묵상이 아마 이 13절에 나오는 '빈들'에서 이뤄졌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사역지 또한 '빈들', 즉 광야이지 않았습니까? 세례 요한이 사역했던 그 장소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선지자가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간 것,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순종의 삶을 살다가 유명을 달리한 것은 예수님에게 잠시나마 묵상의 시간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영적 거장이 죽는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한국교회의 양대 기둥과도 같았던 영적 거인, 옥한흠 목사님의 뒤를 이어 하용조 목사님께서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영적 거인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자아냅니다. 이러한 영적인 분위기 가운데 예수님은 빈들에서 요한의 삶과 자신의 사역과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묵상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한 시대가 가고 또 한 시대가 도래합니다. 세례 요한이 구약시대의 종결자라면, 이제 신약시대, 성령시대의 출현을 앞두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4절에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고 말씀합니다. 자기를 따라오는 무리들을 향한 이러한 동정과 긍휼은 예수님의 본질입니다. 병자도 고쳐주시고 말씀도 전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었는데 빈 들에서 식사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난감한 나머지 제자들은 자기들의 제안을 예수님께 말합니다.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먹게 하소서'
모인 무리가 5천명, 그것도 남자만 5천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여자와 어린아이를 포함하면 만명이 훨씬 넘는 숫자였을 것입니다(21절). 그 많은 무리가 늦은 시간에 편의점도 없고, 이마트, 홈플러스도 없는 당시에 과연 어떻게 주린 배를 채울 수 있단 말입니까? 게중에는 멀리서도 온 사람이 있을 것이고, 가까운데서 온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굶주렸다는 것이고, 먹을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무리들은 왜 예수님을 따라다녔을까요? 배도 곪으면서 늦은 시간까지 그 많은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따라다녔을까요? 정말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분명한 해석과 정의가 있었을까요? 아니면 단지 메시야를 대망하고 그 분이 아마 예수님일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가운데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일까요? 일시적인 감정의 충동에 의해 그 자리를 메우고 있는 것일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은 감정의 동물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따르던 그 무리들처럼 예수님이 진정 누구신지에 대한 분명한 개념이 없이 감정에 이끌려 행동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을 바로 깨달아 알고 있다면 우리가 따르는 분이 누구신지, 그 분은 우리의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명확하게 알고 있을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에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 사람들은 축복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은혜의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 축복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더 나아가 우리가 누구를 따르고 있으며 누구의 제자인 지 분명히 알 때 우리 삶의 진정한 변혁이, 제자됨의 영광이 있을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언에 뜬금없이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저는 이 예수님의 발언을 대할 때마다 찔립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그리고 우리 시대의 교회를 향하여 주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아서입니다. 세상의 불신자들과 죽어가는 영혼들, 잠재적 신자들, 병든 문화와 죄로 몰락해가는 사회의 총체적인 면들에게 대해서 주님은 우리 신자들을 향하여, 제자로 따라가고 있다고 자부하는 우리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발언에 충격을 받아 어리둥절해할 것입니다. 마치 17절의 제자들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이야기하면서도 때론 불신하기도 하고 반신반의하기도 하는 진리이지만, 누군가의 말처럼 '교회가 바로 이 시대의 대안입니다'. 그것밖에 없지 않습니까? 병든 교회를 보지 말고 건강한 교회를 바라봅시다. 그리고 우리를 이 땅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하나님의 대사로 부르심에 응답합시다. 우리가 가진 것은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개'지만 헌신할 때 하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능력을 베푸실 것입니다. 정작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말에 깊은 묵상과 도전과 응전이 필요할 줄 믿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이 말씀은 단순히 보리떡 5개, 물고기 2마리의 육적 양식만을 주라는, 주린 배를 채워주라는 명령을 의미하기 보다는 더 나아가 영적인 양식을 공급해주라는 메시지의 이중성을 띠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것이 바로 제자의 사명이 아닌가 합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소명이기도 합니다.
광야교회에서 모세를 통해 하늘의 만나를 양식으로 삼고 살았던 이스라엘처럼 빈들인 광야에서 신약시대 모세가 아닌 예수님을 통해 생명의 양식을 공급받고 있는 교회의 모습을 우리는 그려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원한 육적, 영적 양식임을 되새기면서 제자된 우리가 이 시대를 향해, 세상을 향해 '먹을 것을 주는'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은 신약성경 마태복음 14장 13-21절의 본문을 가지고 <육의 양식과 영의 양식>이란 주제로 설교한 내용인데인데요. 보잘 것 없는 제자들, 보잘 것 없는 오병이어이었지만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만들어내시며 영육간의 양식이심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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