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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마태복음

마태복음 17장 14-27절, 쓰임 받는 믿음

by Message.K 2023.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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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 마태복음 17장 14-27절의 본문을 가지고 <쓰임 받는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설교한 내용입니다. 믿음은 크거나 작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소유하느냐? 소유하고 있지 못하느냐?가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세 단락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  14-21절: 귀신 들린 소년을 고치심
  •  22-23절: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두 번째 예고
  •  24-27절: 성전세에 관한 질문

 

먼저, 첫단락을 살펴봅시다. 14-21절: 귀신 들린 소년을 고치심

마가복음에도, 누가복음에도 이 내용이 있습니다. 특별히 마가복음의 단락에 비해 오늘 본문은 짧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단순한 사건으로 대하자면, 귀신들린 아들을 고친 한 이벤트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 사건이 변화산의 영광을 체험한 후 내려오면서 부딪힌 첫 번째 사건이기에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어제도 권목사님의 메시지 가운데 드러났지만, 변화산에서의 놀라운 영광은 구약의 시내산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영광과 연관됩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아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후광으로 시내산을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무슨일이 벌어졌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광경이었습니까? 출 32장에서는 산 밑의 상황은 완전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아론을 필두로 해서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그것이 자기들을 출애굽시킨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춤을 추고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난리가 났습니다. 이 대목은 오늘 본문의 상황과 비슷합니다.

 

 

 귀신들린 아이의 상태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15절을 읽겠습니다.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문제의 소년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간질병 같은 병에 시달렸던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이 질병은 고의적인 파괴성을 보였음을 알 수 있는데, 단순히 환자가 경련을 일으키는 것에 그치지 않고, 물이나 불로 뛰어든다는 것입니다. 소위 물불을 안 가리는 친구였습니다. 막 9:18-20에선 그 친구가 어떤 증상을 보이는지 더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그가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리더라


상태가 심각한 이 소년과 금송아지를 만들고 완전히 아수라장이 된 산 밑에서의 이 두 상황은 비슷합니다. 그러나, 변화산의 영광과는 대조적인 광경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돌비를 깨뜨리면서 분노를 폭발시켰습니다. 여기서는 예수님은 간질병환자를 고치지 못한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귀신을 내쫓고 아이가 낫게 됩니다. 이 치유의 과정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꾸짖는 내용은 17절에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시공간적으로 제자들과 함께 있는데 왜 너희는 그 모양이냐?고 하시는 일차적인 의미를 넘어, 예수의 제자는 언제 어디서나 살아계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분께 실제로 의존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을 보여줘야 하는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언제나 어디서나, 주님을 신뢰하고 의뢰하시길 바랍니다.

 

 

 

 

출32장에서 모세는 시내산에, 백성들은 산 밑에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모세를 기다리다가 참지 못하고, 믿지 못하고 영.육간에 간음을 행했습니다. 제자들이 지금 이 귀신들린 간질병환자를 고치지 못한 것은,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영적 간음과 음란을 행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실제상황에서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데 실패한 제자들은 악하고 음란한 ‘이 세대’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판단입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12:39 cf. 악하고 음란한 세대

 

 

또한 믿음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마 10장에서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쫒아내는 권위를 부여하셨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그 아이를 고쳐 주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아이를 고쳐주는 데 실패했던 것입니다. 그 실패의 이유는 20절에 ‘믿음이 작은 까닭’이라고 말합니다.

He replied, "Because you have so little faith. I tell you the truth, if you have faith as small as a mustard seed ... Nothing will be impossible for you."

 

 

  그런데 여기서 믿음이 크고 작고의 차원이 아니라 믿음의 소유여부가 더 관건인 것으로 해석해야합니다. 왜냐하면 겨자씨만한 믿음, 아주 작은 믿음도 역사하는 힘은 크기 때문입니다. 불가능을 가능케하는 것은 믿음의 양이 아니라 그 믿음의 소유하기만 하면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 하나님의 능력은 지극히 작은 믿음에도 반응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시면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가 못할 것이 없느니라!”(20절)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겐 믿음이 있습니까? 변화산의 영광을 경험하고서도 눈 앞에 현실에 압도되어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무기력한 제자들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주일예배시 말씀을 통한 도전, 찬양을 통한 회복과 열정, 기도의 뜨거움, 교제를 통한 깊은 즐거움을 맛보고서 성전 문을 나서지만 정작 우리의 삶 가운데 그 믿음이 생생하게 살아 숨쉬고 있습니까? 믿음을 소유하십시오! 그리고,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그 믿음의 능력을 발휘하십시오!

 

 

 

 

 

22-23절: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두 번째 예고

 본 단락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예고를 두 번째로 제시해줍니다. 첫 번째가 십자가의 시발점인 빌립의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주어졌는데(16:21), 두 번째 예고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주어지고 있다. 두 번째 예고의 내용은 첫 번째 예고의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다만 ‘넘겨질 것이다’(수동형 동사: 하나님 자신이 의도된 것/예수의 죽음의 신적 필연성을 표현)라는 단어가 새로이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가룟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는 사실을 기술하는데 반복적으로 사용된다. 특히 신약의 다른 곳에서도 이 단어는 예수님의 선교적 고난과 죽음을 지칭하는데 자주 사용된다. 특히 롬 8:32에선 하나님 자신께서 그분의 아들을 넘겨주셨다고 언급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에 대한 반복적인 예고를 들은 제자들의 반응-‘근심하더라’-이 그들의 기대를 얼마나 벗어난 것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기대와 기대치는 하나님의 기대치와 분명 다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관점이 다를 때, 실망치 마시고 믿음으로 반응하시길 바랍니다.

 

 

 

 

 

24-27절: 성전세에 관한 질문

마태복음에만 나타나는 이 단락은 매년마다 유대인 성인 남자가 반 세겔씩 내는 성전세와 관련된 예수의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성전세는 팔레스타인 거주 여부를 떠나 대부분의 유대인 남자들이 아마도 민족적 자부심의 표현으로 자발적으로 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주후 70년 이후에는 이 세금이 로마의 쥬피터 신전을 위한 세금으로 전환되었고, 따라서 그 때 이후로 이 세금은 민족적 자존심이 아닌 민족적 수치심으로 대변하게 되었습니다.

 

 

 

 

 

성전세는 성전을 관리, 유지하는 비용으로 충당됩니다. 사소하지만 짜증나는 것이었고, 여러 사람들이 성전세 납부를 싫어했습니다. 그 성전은 이제 곧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으로 인해 무너질 물리적인 건물이었습니다. 그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은, 그 성전유지를 위해 돈을 낸다는 것이 예수님 자신도 마땅치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아바 아버지에게 세금을 내는 것은 우스운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선 자리나 위신보다 십자가의 길, 그사명이 더 다급한 우선순위였습니다. 물리적인 성전이 곧 있으면 예수님의 육체로 바뀔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금은 때가 아니었습니다. 21장에서 예수님은 성전에서 매매상과 환전상에 대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분노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그 위에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머물고 있었던 성전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변화산의 영광을 지나 십자가의 길로 나아가는 중에 지극히 사소한 납세의 문제로 인해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 십자가의 뜻이 흐트러지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 하나님 나라를 성취하기 위해선 예수님의 십자가는 필수적인 것이라고 2번째 예고를 하신 22-23절에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성전세의 사소한 문제에서도 예수님은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게 처신하신 것입니다. 27절처럼 괜히 관세문제로 ‘그들이 실족하’게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에 방해받기 때문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관심은 지금 온통 십자가에 쏠려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그 목적을 향해 가는데 그 어떤 방해물도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을 본받아 달려가야 할 십자가의 현장은 어디입니까? 여러분의 혼돈과 혼란한 우리의 삶의 현장 가운데서 믿음을 발휘하시길 바랍니다. 그 믿음으로 우리 몫의 태인 십자가를 지시길 소망합니다.

 

 

오늘은 신약성경에 기록된 마태복음 17장 14-27절을 바탕으로 하여 <쓰임 받는 믿음>이란 주제로 설교한 내용을 포스팅해 보았는데요. 구약과 신약의 연계선상에서 해석해 보았고, 예수님에게 십자가는 모든 것의 중심이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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