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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마가복음

마가복음 8:1-10, 칠병이어의 기적

by Message.K 2023.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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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8장에 등장하는 칠병이어의 기적에 대한 감상, 해석, 적용점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칠병이어에 대한 개인적인 묵상입니다. 중고등학생들을 초대하는 축제를 위한 동기부여차원에서 가진 설교이기도 합니다.

마가복음 8장, 칠병이어의 기적
마가복음 8장, 칠병이어의 기적

 

 

 

 

 

v.1 해석:

큰 무리, 대중들의 배고픔, 먹을 것이 없는 상황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설교와 이야기를 듣기 위해 모인 4천명의 군중들이 심히 배고픈 상태였다. 사흘동안 굶었다면 그 허기가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배고픔은 정말 엄청난 고통이다. 인간의 일차적인 식욕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다. 주리고 배고픈 상황을 보시면서 예수님은 ‘불쌍히 여겼다’고 하셨다. 안스러워하셨다. I feel sorry for these people(NIV)...

 

 

 

V.2-3 해석:

예수님의 마음과 사흘 동안 굶은 상황(1절의 구체적인 경황) 내가 만약 사흘을 굶었다면 그건 정말 엄청난 고충이다. 배가 고파서 수도꼭지를 틀고 물을 벌컥벌컥 마셨던 기억이 난다. 그만큼 절박한 고통이 배고픔이다.

 

 

 

V.4 해석:

제자들의 대답, 『여기는 광야이다』. 그러나, 먹을 것을 구할 장소가 아님을 주목하자. 바로 ‘광야’라는 사실이다. wilderness..We are far away from any town(NIV). 척박한 땅, 먼지와 따가운 햇살의 기운만이 감도는 곳, 사막에는 먹을 것이 없다. 그 엄청난 4천명의 인원-여기에는 어쩌면 남자들만 수(數)에 넣었는지도 모른다-의 음식을 제공할 곳은 거대한 대형 식당이나 마트가 아니면 불가능한데 그 당시에 그러한 곳이 있을리 만무했다.

 

 

V.5-9해석:

칠병이어의 기적- 7 광주리가 남았고 4천명이 먹었다.So they did eat , and were filled

 

 

V. 10 해석:

다음 사역지로 이동...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반드시 배고픈 시절이 올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육적인 배고픔이기 보다 영적인, 정신적인, 경제적인, 공동체적인 모든 배고픔이 다 해당되겠다. 우리의 삶에 있어 그러한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새친구전도  페스티발, 이 축제는 어떤 면에서 교회문화의 하나의 축제이다. 교회에서 즐길 수 있는 문화가 참 부족하다. 세상에 나가보면 정말 다양한 문화들이 많다. 음주문화, 흡연문화, 음란문화, 인터넷문화, 음악문화, 비디오문화, 영화문화, 교통문화...등 엄청난 문화가 많다. 이 세상의 모든 문화들 가운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즐길만한 문화는 얼마나 될까? 또한 우리가 즐긴다고 해서, 좋아한다고 해서 주님이 다 기뻐하실지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 보아야한다. 우리 청소년들은 이런 점이 없지 않아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좋으면 무조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그렇지 않은가? 어른이나 여러분들이나 별반 차이는 없겠지만.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문화를 선택할 때도 너무 무비판적이라는 사실이다. 모든 것을 맘껏 수용하되 어느 정도 걸러주는, 여과작용이 필요하다.

 

 

오늘 4천명이 배고파하는 사건은 어떤 측면에서 예수를 믿고 그를 따르고자하는 무리들이었고 그들이 배고팠다는 것을 좀 더 나아가서 우리 시대에는 그리스도인이 문화적으로 대단히 고갈되어져간다는 사실이다. 물론 요즈음은 인터넷 사이트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문화공간이 적쟎게 생겨나고 있지만. 우리 청소년들이 거할 문화적 공간이 많이 부족하다. 제일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 ‘인터넷, 네트워크 게임이고 좀 더 나아가면 '채팅’ 뭐 이러한 것들이지 않는가?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4천명이 광야에서 사흘동안 먹을 것이 없다는 것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이라는 광야에서 문화적으로 기갈현상, 고갈현상에 부딪힌 것이라고 적용해도 좋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문화, 그리스도인의 문화를 만들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 될지 몰랐고 인간은 ‘문화적인 동물’인데 그 문화의 영역에서 무언가 해갈함을 얻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그 때 주님께서 ‘칠병이어’ , 그리 맛나지도 않은 도시락용 칠병이어-사흘동안 광야에 있었기에 냉장시설이나 냉동시설도 없었던 당시로서는 아마도 빵은 대단히 딱딱하게 굳었을 것이고 생선은 비린내가 날 것이며 상하지 않았던 것이 신기할 정도이다-를 축복하셨고 그 음식을 다 나누게 되었다. 그런데 칠병이어로 4천명을 먹이는 것이 가능한가? 4천명 중에 예수님이랑 그 도시락 주인이랑 제자들 중에 한 명 정도만 먹으면 없어질 소량의 식사였다. 사람들은 사흘동안 굶었기에 4천명중에 3천999명은 냄새 맡고 구경하고 한 명만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그런 도시락이었다. 그런데, 어떤 이적이 일어났는가? 사람들이 다 냄새맡았고 라고 하는가? 아니다.

 

사람들이 다 배불리 먹고 filled 일곱 광주리가 남았다고 했다. 이것은 주님의 신비스러운 기적이었다.

 

 

21세기는 과학과 합리성과 인터넷과 정보의 시대이다. 그런데 웬 이런 말도 안 되는 기적? 믿지 않는 친구들도 있겠지만 난 믿는다. 인간에게는 믿기지 않는 것에 대한 경외감과 믿고파 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나는 생각한다.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이라는 그 마법영화에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 책을 사고 읽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점점 테크닉화되어가는 사회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점점 더 원시적인 그 무언가를 갈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 예수님은 마법이 아닌 기적을 보이셨다. 해리포터는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마법사이지만, 우리 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지금도 살아계신 분이시다. 우리에게 있어 칠병이어는 무엇인가? 여러분에게 있어 칠병이어는 무엇인가? 저는 오늘 우리 새친구초청 페스티발이 ‘칠병이어’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게 맵시 좋고 폼나고 멋지고 세련되고 화려하고 그렇지는 않은 ‘칠병이어’...하지만 그걸 예수님이 축복하시고 나누었을 때 4천명이 먹고도 남았다는 사실...우리 교회 중고등부가 가진 ‘칠병이어’를 여러분에게 수줍어하며 내놓는다. 같이 나눌 때 사흘동안 허기진 군중들이 배불리 먹었듯이 우리도 나눌 때 세상에서 많이 기죽고 문화적으로 기진해 있는 여러분들에게 자그마한 힘이라도 쥐어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학생회의 ‘칠병이어’을 볼 준비가 되었는가?

 

 

 

개인적인 적용:

나에게도 ‘칠병이어’가 있다면 기꺼이 하나님께 드리기를 원하는가? 모든 사람을 다 먹일 수 있다고 수학적인 수치가 나온 것도 아닌데 단지 주님이 먹을 것이 있느냐라고 물었는데 ‘소박하고 수치스런 칠병이어’를 내놓을 수 있겠는가? 나의 도시락을 주님 앞에 내놓을 수 있겠는가? 그 당시에 무리들과 예수님의 관계는 ‘친구’처럼 친밀하였다고 할 수 없는 것이 예수님은 제자들을 중심으로 사역의 준거점을 삼으셨지, 무리들, 군중들은 언제나 설교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개인적인 친밀도는 없었다. 그러했기에 주님과 대중들과의 관계는 대단히 경이적이고 거리감이 있을 것이다. 백성들이 주님을 가까이하고는 싶지만 자신들의 죄와 허물과 환경들로 인해서 나아가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는 그런 모습은 아닌지 모르겠다.

 

마가복음 8장 1-10절의 본문을 토대로 '칠병이어의 기적'에 대해 이야기해 보았는데, 각 구절을 해석하면서 청소년들의 문화적인 기갈과 고갈현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에 대한 교회 새친구전도축제에 맞춘 동기부여 설교의 내용을 공유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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