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6장 34-44절의 본문을 분석하고 해석하면서 '주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말라'라는 주제로 한 설교입니다. 완벽한 설교문이라기 보다는 성경주해시간에 이 본문을 가지고 연구하면서 감명을 받았던 대목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 석의적 주제-예수님은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셨다.
- 설교적 주제-주님의 능력,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말라!
[막 6:34-막 6:44]
(34)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가지로 가르치시더라(35)때가 저물어 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저물어가니(36)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37)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38)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가로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39)제자들을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40)떼로 혹 백씩, 혹 오십씩 앉은지라(41)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 앞에 놓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매(42)다 배불리 먹고(43)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44)떡을 먹은 남자가 오천 명이었더라
상황이 어떤 상황이었는가?
-30~33절, 사역의 쉼이 없었다. 쉼과 안식이 필요했던 예수님과 제자들(육체적인 사역과 정신적인 피로+세례 요한의 죽음이 주는 그 어떤 것)
-예수의 제자 파송과 그 파송의 열매, 결과를 보고 받음.
-세례 요한의 사역의 마침표, 요한의 죽음 사건이 있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한 언급은 전혀 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시적인, 상징적인 ‘오병이어’의 기적의 사건을 보여주신다.
-제자들을 위한 기적이 아니라 군중들을 위한, 무리들을 위한 하나님의 기적이었다?
원문에서는 6:30-44로 분할하고 있다. 이 본문은 출애굽기 17장을 연상케 하며 (열왕기상 17:8-16:2 ; 열왕기하 4:1-7, 42-44) 엘리야와 엘리사의 기적사건을 연상케 한다.
본문개요
l 예수님, 종-사람들을 섬김(1-10장)
l 예수님, 종-십자가로(생명을 주심으로) 섬김(막 11-16장)
전문맥-
- 1-5장/ 계속되는 기적의 파노라마
- 1-6, 고향에서 배척 받는 예수님,
- 7-11, 파송 받은 제자들,
- 12-13, 제자들의 권세와영향력,
- 14-16, 예수에 대한 헤롯의 관심,
- 17-29, 세례 요한의 죽음,
- 30-33, 바쁜 사역 이후의 휴식과 또 다시 사역의 현장으로
후문맥-
- 45-46, 다시 기도하러 가시는 예수님
- 47-52, 물위로 걸어오시는 기적의사건(레테의 제자들)
- 53-56, 게네사렛의 기적
- 34-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다
- 35-시간적인 배경의상술
- 36-37, 제자들이 무리의배고픔을 예수께 이야기하다. 예수의 반응과 제자들의 반응(대조/'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돈이 필요하다')
- 38-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가 준비되어있다
- 39-40, 제자들을 통해 그룹을 짓게 만들다
- 41-기적의 주인공이신 예수님
- 42-44,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 남은 음식이 열 두 바구니였다.
예수님의 마음은 '스플랑크니조마이splagcnivzomai'
발음 : {splangkh-nid'-zom-ahee} : 스플랑크니조마이
어원(기원) : 4698의 중간태 TDNT : 7:548,1067 품사 : 동사 파생어: 없음
'간절히 열망하다', 즉(상징적으로)'동정을 느끼다', 열정을 갖다 <마 15:32>동. to feel pity, to sympathize with;
1)동정심으로 인해 움직이다, 동정심을 갖다
#.34절을 주목하라....“목자없는 양” 이라는 심상이 주목할만하다.
독립된 구절 34절이 다른 본문에는 없다. -“불쌍히 여기사, 동정으로 가득 차사”-내적으로 감동을 받아서 그것에 대해 무엇인가를 행한다는 의미이다. 1)
이것은 예수님의 마음이었다. 무리를 보시고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하는 백성들을 지극히 깊은 연민과 동정심으로 바라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대체로 인간은 사람을 볼 때 '외모'를 많이 본다.
(삼상 16:7)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인간 세상은 외모지상주의, 외모를 보는 게 대세이다
인간의 세상은 '외모지향주의적'이다. 그리하여 그 사람이 어떤 스타일이고 어떻게 생겼고 어떤 차림으로 있으며 어떤 매무새를 가졌는지, 요즘 같으면 어떤 차를 몰고 다니는지, 집의 평수는 몇 평이고 직업은 무엇이며 자녀는 어느 대학에 다니고 어떤 직장에 다니는지에 관심이 많다. 여러분이 취하는 외모는 무엇인가? 돈? 명예? 매력? 권력? 무엇인가?
외모지상주의는 우리 개개인에게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세상, 더 좁게는 교회 안에도 너무나 팽배해 있음을 볼 수 있다. 여러분에게는 그러한 처사가 없는가?
골리앗이 다윗과 전쟁터에서 대면하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말 그대로 다윗의 외모를 보았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그랬다. 다윗의 키, 몸무게, 용모, 생김새, 소년다움, 아직 어린티가 나는 모습...다윗의 외모에 쏠린 사람들의 생각과 관점들은 명백하게 잘 못 되었음을 골리앗의 무너짐과 전사함을 통해 드러나게 되었다. ‘사람은 외모를 볼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대하도록 하자. 야고보서에서는 당시 교회 사람들이 얼마나 세상의 가치관과 세계관에 물들어 있는지를, 그들의 ‘외모지상주의’의 사상이 팽배한지를 보여준다.
[약 2:2-약 2:3]
(2)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3)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교회에서조차도 가난한 사람들과 죄인들과 약한 자들을 무시하고 배척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무시하고 배척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부한 자들, 부자와 세상에서 떵떵거리는 사람들과 친구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절대 아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들은 절대 부자가 되어선 아니 된다는 말이 아님을 아실 것이다. 예수님의 사역방향과 정신을 그대로 잘 보여주는 대목이이다.
(마 11:19)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여러분은 정말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라고 자신을 소개하시고 표현하시는 예수님을 사랑하는가? ‘세리와 죄인의 친구’인 예수님을 믿으시는가? 그렇다면 기독교내에 물든 ‘외모지상주의’를 벗어버리시기를 바란다. 우리가 외모에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우리 예수님의 마음과 정신과는 점점 더 멀어질 것이다.
예수님은 영혼중심주의적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각은 이런 외모주의를 초월하여 '영혼중심주의적'이다. 어떻게 사람을 볼 때 이런 마음이 생기는 것일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 마음에서 뿜어져 나오는 영혼사랑 때문이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며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더 나아가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를 따르는 제자들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의 마음을 본받아야 할 줄 믿는다. ‘영혼중심적인 삶과 삶의 방식’이 필요할 줄 믿는다. '스플랑크니조마이'의 마음이다. 너무나 불쌍해서 창자가 끊어질 것 같은 동정심과 연민이 발하는 게 스플랑크니조마이이다.
'스플랑크니조마이'
우리가 회복해야 할 마음은 바로 이런 영혼에 대한 민망히 여기는 마음이 아닐까 싶다. ‘영혼중심적인 사고방식’ 말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그 마음’을 본받아 우리 또한 영혼에 대한 마음, 구령의 열정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무슨 축제, 무슨 축제라서 회복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영원한 우리의 과제이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가르침에 순종하는 처사이기도 하다. 우리가 복음전도를 감행하는 그 이유는 ‘의무감’ 이나 ‘부담감’이라기 보다는 바로 ‘영혼에 대한 민망히 여김’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 복음 사역은 영혼을 다루는 일이다
하나님의 사람들과 사역자들에게 필요한 마음은 이러한 것이다. 영혼을 바라보며 가지는 연민과 동정과 사랑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그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역을 육신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다루는 사역이기 때문이다. 병원의 의사와 닥터는 육신(신체)을 다룬다면, 하나님의 그리스도인들은 영혼을 중히 여기는 마음, 영혼을 가치 있게,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 더 나아가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전도를 생각하면 늘 부담감과 짓눌리는 마음에 허우적대는 우리들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복음 그 자체였고 복음전도와 치유와 회복과 부흥과 영생을 위해, 한 평생 섬기셨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온 몸을 종으로 헌신하고 십자가로 최종적으로 섬기심으로 자신의 사역을 마무리하셨다. 그의 삶과 사역을 압축한 말씀이다.
(막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렇다.
예수님의 목표와 목적은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이었다. 그리고 세상을 위한 헌신과 세상을 향한 자기의 내어줌이었다. 자기 목숨을 인류를 위한 대속물로 주기 위함이었다. 모든 것을 내어주기로 작정하시고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이시기에 모든 사람, 모든 백성, 모든 무리를 대할 때마다 가슴에 미어지는 그 무엇, 가슴을 저미는 그 무엇, 바로 ‘스플랑크니조마이’가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주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하고 계신다. 진정한 사랑, 영혼을 위한 진정한 이타적인 사랑-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의 마음이었다. 그것은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기도 하다. 나도 그 마음을 늘 배우고 획득하고 습득하고 터득하며 섬겨야 할 것이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이고, 예수님은 여러가지로 가르치셨다
또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이 무리들의 영적인 상황을 진단하시고 처방을 내리시는데 그것은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는 것이었다. 주님의 말씀은 생명 그 자체였고 영혼의 주려가는 상황을 만족케하는 생명의 말씀이었던 것이다. 생명의 양식이었던 것이다. 이 놀라운 주의 말씀이 백성들의 기갈과 유리하는 모습과 방황하고 정처 없는 떠도는 영혼을 안돈케하기에 충분한 말씀이었던 것이다. 말의 세계, 말씀의 세계는 이처럼 중요하다. 주의 말씀이 백성들을 위로하고 힘을 주기에 적절했던 것이다. 말씀은 이처럼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 우리가 힘들고 긴 끝이 보이지 않는 인생의 터널을 지나갈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진단하기를 과연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붙들었는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에 시간을 할애했는가? 얼마나 많이 혹은 자주 투자했는가?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 신대원에서 공부할 때 전도사님들이 기도를 할 때면 자주 ‘‘말씀사역자로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는 기도를 한다. 그렇다. 우리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이다. 말씀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말씀의 가르침이 없는 기독교는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니다. 언어의 깊은 금광에서 캐어 낸 말도 그러하려니와 말씀의 깊은 심연에서 우러나온 메시지는 사람을 충분히 살리고도 남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다시금 하나님의 사역은 '말씀의 사역'임을 곱씹을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으로 사람들을 가르치심으로 뭍백성들의 방황을 지적하셨고 그들의 영적인 방랑에 대해서도 가르치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 그 원대하고도 지대한 말씀으로 이 시대를 살리고 이 백성들과 열방을 살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소망한다.
우리의 무기는 다른 것이 아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의 무기는 우리의 재치나 감각이나 은사나 건강이나 탁월함이나 잔재주가 아니다. 우리의 무기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씀의 검’이다. 이것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생활은 ‘목적을 잃고 항해로에서 이탈한 표류선’에 불과하다. 무엇보다도 학생들의 영혼을 독려하고 가르치는 교사분들은 ‘말씀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러한 확신이 없이 없다는 것은 정말 우리의 문제이며 위기이다. 가르치기를 기뻐하라. 영적인 진리를 깨달고 깨달은 것, 곱씹고 곱씹은 것, 체험하고 또 체험한 것을 가르치기를 기뻐하라!
(막 6:35)때가 저물어 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저물어가니
V. 35- 날도 저물었고 먹을 것이 찾기가 힘든 시간이었다. '빈들'이라는 공간적 배경과 '때도 저물어 가니'라는 시간적 배경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마을과 거리가 먼 장소였다. Remote place교통도 불편하고 날씨에 많은 영향을 받는 그 당시로서는 도저히 쉽게 음식을 구할 수가 없었다.
출 16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있을 때 하늘의 만나를 먹이신 사건이 나온다.
(12)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15)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36)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V. 36- 그래서 제자들은 '무리를 보내어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라고 실질적인 제안을 예수님께 한다...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자들은 쉬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가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V.36)-예수님은 민망히 여기셨지만 제자들은 쉬고 싶었고 주님과의 개인적인 시간을 가지고 싶어 했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고 민망히 여겼지만 제자들은 핑계꺼리를 늘어놓고 변명하고 있다.
[표준새번역]막 6:36
“이 사람들을 흩어, 제각기 먹을 것을 사 먹게 근방에 있는 농가나 마을로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Send the people away so they can go to the surrounding countryside and villages and buy themselves something to eat."
[KJV]막 6:36
Send them away, that they may go into the country round about, and into the villages, and buy themselves bread: for they have nothing to eat.->이유 제시함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37)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였다
V. 37-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이 말씀은 예수님의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제자들은 6장 전반부에 예수님에게 보냄을 받으면서 많은 능력과 권세를 가지게 되었고 그것을 귀신을 쫓아내는 일과 병을 치유하는 일로 확인하게 되었다. 입증되었다(V.13-기름을 발라 고쳤다/이 대목이 시사하는 바가 있을까? 별 의미가 없는 듯 -.-; -, 30-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예수님뿐만 아니라 제자들도 그러한 능력을 소유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주님은 지금 제자들을 믿음을 테스트하는 맥락에서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가? 너희가 기도함으로 무언가 색다른 기적, 귀신 쫓고 병을 낫게 하는 그런 차원dimension과는 다른,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먹일 수 있는 또 다른 차원에서 믿음을 발휘해 보라는 이야기인가? 그런데 솔직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생각을 해 보면 귀신 쫓고 병을 낫게 하는 것이나
먹을 것이 없는 가운데 음식을 만들어내라는 것은 다른 차원이라고 볼 수도 있다. 구도적으로 접근해 보자면,
(30)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l- 귀신 들린 몸, 병든 몸, 30절을 비추어 볼 때 더 한 사건들도 있었을 것이고, 덜 한 사건도 있었을 것이다
-> 유에서 회복과 치유와 새롭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무에서 유를 창조'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재창조의 작업이다.
l- 먹을 것이 없는 무의 상태-> 유 를 만들어내라. 이것은 완전한 창조인가? 완전한 창조이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이 말씀을 던지신 예수님의 진정한 의도는 무엇일까? 이것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더 큰 세계로, 더 넓은 믿음의 경지로 초대하고 계신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주님이 보시기에는 전자의 일이나 후자의 일이 동일하게 감당할 수 있는-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만물의 주인이시고 창조자이시기에-일이며 더 나아가 그의 추종자인 제자들도 주의 능력을 맛보고 몇 일 아니면 몇 시간 동안 체험한 제자들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듯하다.
그러나, 제자들은 어떠한가?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데나리온:Coin [그] dhnavrion(denarion) [영] Coin, Denarius라틴어 [데나리우스 deanrius]에서 온 말.
뜻은 [10(deni)]. 청동[아스]화(as)의 10매(후에는17매)의 상당액이었기 때문에 이 이름으로 불리었다. 신약시대의 로마제국의 은화로, 그리스어의 드라크마 은화와 거의 동액. 중량 3.88g, 당시 가장 널리 유통된 은화로서(마 20:2,22:19,막 6:37기타), 그리스의 드라크마 은화를 압도했다. 유대인은 티베리우스제(-帝 Tiberius)의 데나리온 은화를 납세에 썼다(마 22:18-21). 농원자유노동자의 1일의 노임(마 20:2), 또한 로마의 병졸의 거의 하루의 급여에 해당되는 액수였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여관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고 있다. 예레미아는(J.Jeremias 1900-독일의 루터파 성서학자)는 당시의 숙박비는 1박이 1/12데나리온이었다고 지적하고 있어 이 사마리아 사람의 자상했던 친절이 더욱더 두드러져 보인다.예수의 제자 빌립은 5000명의 음식대를 200데나리온으로 예상하고 있다(막 6:3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떠한가? 주님의 능력을 여러분 값싸고 얄팍한 한계와 지식 속에 제한시키지는 않는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의 효력과 약발은 얼마나 오래 가는가? 제자들이 그러했다. 그들은 복음전도를 통해, 사역을 통해 기적과 이적을 체험하였지만 그들의 마음은 닫혀 있었고 마음이 열려지지 못한 듯 했다.
이것은 제자들의 관점이었다. 제자들은 36절에 '무리를 보내어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라고 했고 지금은 빠른 수학적인 계산과 측정으로 돈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철저하게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접근이다. '돈이 필요하고', '그 돈으로 빵을 사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백 데나리온의 돈이었다는 말인가?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그러한 돈이 있었단 말인가? 하루 일당 5만원×200 이면 1000만원이다. 최소한 1000만원 이상 이었을 것이다. 제자들은 여기서 민중들에게 빵값을 거두자는 말이었을까? 그것도 힘든 것이 제자들이 고작 12명인데 어찌 5천명이 먹을 빵을 운반하며 나른단 말인가? 그리고 거기에 모인 많은 무리들이 각각 다른 지방이나 다른 처소에서 왔기 때문에 한꺼번에 5천명이 먹을 수 있는 빵을 구한다는 것이 실질적으로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불가능한 현실이었다.
주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말라-35-37절은 기적을 수행하기 위한 분명하고도 단순한 배경
- 출 16장-광야에서 먹은 만나 사건
- 막 14:22-26, 최후의 만찬과의 유사점
--->우선 예수님은 무리의 육체적 필요를 채우기에 충분할 만큼 공급해 주셨다.
V. 38-'너희에게 떡 몇 개가 있느냐 가서 보라'-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방법으로 접근해 가시는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창조적인 행동은 인간의 아들로 오신 그 분에게 행할 수 없는 영역임을 스스로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물 위를 걸으셨던, 파도를 잔잔케 하셨던 행동을 생각해 본다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또 한 가지 생각은 민중들의 마음이나 민심을 요동시키지 않기 위해 마법처럼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행동을 통해 소란해지고 백성들에게 하나의 슈퍼스타나 마술사나 마법사로 인식되기를 피하셨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무리들은 로마의 정치적인 억압과 폭정 하에 있었고 육신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심각하게 피폐해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백성들은 더 갈급해져 있었고 무언가 소망과 기대와 희망을 걸만한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주님은 자신이 그 자리를 대신하기 보다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의 소임을 다하는 것이, 이 땅에서의 소명을 다하는 것이 더 급선무라고 생각했기에 오히려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행위를 참으신 것 같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5천 명 중에 음식, 도시락 사가지고 나온 사람이 없었을까? 남은 음식이 고작 물고기 2마리와 떡 5개였을까?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배고픈 것도 잊은 채 백성들은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허기를 잊었을 것이다. 물론 개중에는 도시락을 까먹으면서 말씀을 들었던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너무나 열정적이고 영적인 가르침을 받고 있는, 설교를 받고 있을 때는 허기가 잘 느껴지지 않는다. 거기에 몰입하면 육신적인 필요도 잊을 때가 잊지 않은가? 아마도 이때의 상황이 이러한 상황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봄직하다. 5천명에게서 나온 것은 고작 '물고기 2 마리와 떡 5개'가 전부였다.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계신다. 예수님마저도 새로운 발전들에 순응해 나가셔야 한다. 그 결과 신적 공급을 나타내는 주요 기적이 베풀어지는데, 이것은 광야에서의 만나가 주는 통찰을 상기시키며, 헌신된 사람들에게는 최후의 만찬을 통과해 나가는 앞으로의 여정을 준비하도록 해준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예정에 없던 한 사건 때문이다! 이 결정적인 요소는 예수님의 계획이 아니었다. 이 사건은 예정된 여행 일정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이 같이 가르치고 먹이는 두 가지 행동을 하신 이유는 그들의 필요를 인식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궁핍한 사람들에게 반응해야 한다.
1. 은혜의 융통성
2.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사랑이 우리의 모든 행동을 결정해야 한다.
세례 요한이 죽고 난 후 처음으로 기술된 사건으로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오병이어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대별되는 점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이 정말 풍성하게 넘치는 사역과 은혜임을 보여주는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1) 도날드 잉글리쉬, 『마가복음 강해』, 정옥배 역(서울: Ivp, 2001), 182.
마가복음 6장 34-44절의 오병이어 기적사건은 '주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말라'는 설교로 예수님의 스플랑크니조마이의 마음이 바탕이 되어 창조된 이벤트이며, 이는 출애굽기 16장 광야의 만나의 기적과 최후의 만찬을 연상케하는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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