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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마가복음

마가복음 1장 21-28절, 예수의 큰 권세 있는 가르침과 행동

by Message.K 2023.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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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 마가복음 1장 21-28절의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당시 종교지도자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권세있는 메시지와 행동을 보이셨습니다. 영적전쟁의 승리의 비결은 말이 아닌 십자가의 능력, 나사렛 예수의 이름에 있다는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마가복음 1장 21-28절, 예수의 큰 권세있는 가르침과 행동
마가복음 1장 21-28절, 예수의 큰 권세있는 가르침과 행동

 

[막 1:21-막 1:28] 본문
(21)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22)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23)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24)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25)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26)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27)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28)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우리의 싸움은 영적인 전쟁이다

오늘 본문은 ‘회당에서의 귀신을 쫓아낸 사건’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수님은 이제 세례와 시험을 받으신 후 자신의 공생애 사역의 소명을 다할 준비가 되었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서 4명의 제자들을 불러 제자삼기를 하였다. 그리고서 그가 한 첫 번째 일은 바로 ‘귀신 쫓기’였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탄에서 시험을 받으시면서 공격을 받으셨다면, 반대로 이제부터는 예수님께서 이 땅의 공중 권세를 잡은 사탄에게 공격하시는 것이다. 죄와 어두움과 사망의 권세로 얼룩진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본격적인 하나님의 나라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예수님의 영적 전쟁, 영적 전투가 시작되고 있다.

 

흔히 현대는 과학과 물질과 기술의 진보와 발전으로 말미암아 ‘귀신이 있는가? 없는가?’에 대해 질문을 던지기도 하지만 귀신은 괴기영화나 공포영화의 소재, ‘전설의 고향’에서나 등장하는 영적인 실체로 밖에 보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귀신 시나락 까먹는 소리하고 있네’라는 말처럼 귀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하지만 마가는 분명히 여기서 ‘귀신 들린 사람’을 등장시키고 있다. 하나님의 신이 존재한다면 귀신, 즉 사탄의 영, 신도 존재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권세있는 말씀과 메시지

예수님은 당시 회당에 상주하는 랍비 즉 교사가 없었기 때문에 자신이 방문한 도시,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순례설교자처럼 말씀하실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가버나움이란 동네는 갈릴리 바다 북서쪽에의 많은 어촌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다. 또한 엄청난 부로 번영을 구가하던 도시였고 죄와 퇴폐가 만연한 도시였다. 이곳은 많은 로마 군대들의 사령부였기 때문에, 로마 제국 전역에서 온 이방 문화의 영향이 깊게 배인 곳이기도 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먼저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으로 도전하셨다. 하지만 그의 가르침은 이전에 랍비들이나 종교지도자들에게 듣던 말씀과는 굉장한 차이가 있었다. 마가는 그 표현을 이렇게 쓰고 있다.

 

(22)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놀라니’ 이것은 단순한 충격이 아니라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의 충격이었다. 당시 유대인 교사들은 간혹 자신의 말에 힘이 없거나 호소력이 없으면 유명한 랍비들의 이야기를 인용했다. 누가 어떤 말을 했고, 누가 저떤 말을 했고. 하지만 예수님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 분은 앞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의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11절)였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왕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십자가의 고난을 철저하게 감당할 고난받는 종’이라는 이중적인 신분을 드러내주는 대목이었다고 전에 이야기하였다. 예수님의 비록 육신의 몸을 입고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마가복음의 주제- 지금 사역을 하고 계시지만 그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아들, 왕, 메시야였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에겐 절대적인 권세가 있었다. 율법선생들이 침범할 수 없는 영적 파워가 있었다.

  

 

 

 

우리의 메시지는 어떠한가?

우리는 때로 하나님의 사역을 한다하면서도 말씀을 전하는 저 같은 설교자나 교사나 소그룹 리더 등의 가르치는 위치에 있을 때 주의해야 한다. 때론 우리들도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 랍비들처럼 회당에 모인 사람들에게 너무나 식상하고 입에 발린 말로만 말씀을 전하여 사람들의 영적 사기를 떨어뜨리기가 쉽다는 것이다. 듣는 학생들이나 청중들과 성도들을 늘 고리타분한 말들로 주의를 떨어뜨린다면 우리들도 역시 예수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절대 예수님께서 가지신 그 권세를 소유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기에 우리는 더 연구하고 노력하고 주력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권세의 1%라도 닮도록, 담아내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권세의 말씀을 맛배기라도 보여줘야 하지 않겠는가?

  

 

 

능력의 근원: 나사렛 예수

예수님의 이러한 간담을 서늘케 하는 말씀은 곧바로 ‘한 사건’으로 이어졌는데 그것은 바로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낼 때였다. ‘더러운 영 안에 있는’ 귀신을 추방하는 것이었다. 어둠의 권세를 쫓아내는 것이었다.

(24)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귀신은 예수님의 접근을 경계하였고 이길 수 없는 게임인 줄 알지만 일단 기선을 잡기 위해 예수님의 비천한 신분인 ‘나사렛 예수여’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이 당시에 사람들은 어떤 사람의 감춰진 이름을 정확히 알면 그 사람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사단은 이것에 실패했다. 사단은 예수님께서 ‘이 땅의 어두움의 권세를 멸하러 온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25)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꾸짖다’로 번역된 단어는 ‘책망하거나 수치를 준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주문이나 마술적인 말을 사용하지 않으셨다. 간단히 그리고 엄하게 잠잠하라고 명하였을 뿐이다. 헬라어로는 ‘입을 막다’는 뜻의 아주 강력한 단어, ‘소를 재갈먹인다’고 할 때도 사용되었다. 마가는 또한 폭풍을 잠잠케하시는 예수님의 명령을 하실 때도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4:39). 우리 시대로 쓰는 말로 바꾸면 ‘입닥쳐!’ 정도가 될 수 있다. 귀신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약자에게 쨉을 날리는 권투선수와 같다면 예수님은 그를 단 한 방-‘잠잠하라!’-에 날려버리는 챔피언과 같은 분이다.

 

 

 

예수님께서 귀신들, 사단에게 침묵을 명령하신 이유

 예수님께서는 왜 귀신들에게 잠잠하라고 하셨는가? 마치 ‘아무 말도 하지말고 입 다물어!’, ‘듣기 싫어’라는 말을 사용한다. 사단에게 침묵을 명하셨던 것이다. 왜 이렇게 침묵을 강요하셨는가?

 

첫째,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군중들에 의해 정치적인 메시야로 이해될까봐 주의하셨던 것이다. 그는 무리들이 바라는 정치적, 민족적 왕이 되거나 군사적인 영웅, 지도자가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의 민중들은 로마의 압제 하에서 해방시킬 그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 예수님은 자신이 장차 질 십자가에 대한 적절한 이해 없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 그리스도,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라고 신성에 대해 떠벌리는 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자신이 고난 받는 종으로서 장차 그 참혹한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한다는 정확한 사실을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의 아들이니, 메시야니 하는 고백을 달가워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도마가 고백한 것처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긴 하지만 정작 예수님을 이해할 때, 성공을 위한 조력자, 복 받기 위한 하나의 구실, 대리자, 질병과 문제들을 치유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 의지할 것는 인생에 최후의 보루 같은 정도로 생각한다면 우리도 당시의 유대 민족들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신 참되신 사랑이시며 은혜 그자체이다. 하지만 예수님 영접하고 믿었으니 나의 모든 구원문제는 땡! 이라는 식으로 접어버린다면 복음을 잘 못 이해한 것이다.

 

 

 

우리의 복음의 목적, 신앙의 이유는 기복신앙이 아니라 십자가이다

‘모든 사람들의 종으로 오신 예수님’의 마음을 안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과 동시에 그 분의 제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자는 운동은 새마을 운동보다 더 이기적인 운동이다. 새마을 운동은 그래도 다같이 잘 먹고 잘 사자의 운동 아니었는가? 오늘날 기독교가 ‘축복신앙, 기복신앙’으로 전락하는 것도 바로 ‘잘 먹고 잘 사는, 편하게 사는 시대’의 흐름에 편승한 결과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구원을 선물로 받았고 또 다른 특권을 부여받았는데 그것은 바로 ‘제자의 특권’이다. 제자는 무엇인가? 바로 ‘자기 십자가’를 바로 알고 바로 쳐다보며 스스로 지고 가는 것이 필요하다.

 

 

여러분이 이해한 예수님의 복음에 ‘십자가’가 빠졌다면 내가 잃어버린, 망각하고 있는 십자가는 무엇인지 한 번 살펴보라!

26-28절

  더러운 귀신은 예수님의 명령에 의해 경련을 일으키며 큰 소리를 지르면서 추방되어졌다. 사람들은 이 대목을 더러

(27)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라고 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그러한 능력과 파워는 없다 하더라도 우리의 일상 가운데서 권세 있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예수의 이름의 권세와 능력을 믿고 선포하며 나아가는 일이 필요하다.

 

 

 

Epilogue...

우리는 권세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을 통해 진정한 복음을 능력을 본문을 통해서 확인하였다. 우리들도 예수님의 제자로서 가르치는 것에 주력할 뿐만 아니라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잘 이해하고 그것을 짊으로써 참된 예수님의 제자로서 열매를 확연하게 맺는 ‘권세 있는 자’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바란다.

 

 

오늘은 마가복음 1장 21-28절의 구절을 가지고 '예수님의 큰 권세있는 가르침과 행동'이란 주제로 아주 오래 전에 설교했던 내용을 포스팅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자기만의 십자가를 지고 그 분의 이름을 의지할때 우리에게도 능력이 나타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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