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교/마가복음

마가복음 7장 24-30절, 본문 분석 보고서

by Message.K 2022. 5. 26.
반응형

마가복음 7:24-30을 가지고 본문분석을 해서 제출한 페이퍼인데요, 교수님이 워낙 카탈스러운(?) 스타일이라 보고서를 두 번씩 제출했다가 반려되었던 기억이 있습니다ㅋ그것도 우편으로 두번씩이나 반려되었다는. 지나고 나면 또 추억이 됩니다.

 

 

 

 

서론

  마가복음은 사복음서 중에 가장 짧다. 또한 마가복음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가르침보다는 그 분의 행동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마가복음에 기록된 사건들은 대부분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도 실려 있지만, 마가는 그 사건들을 훨씬 더 정교하고 생생하게 기술한다.1) 지금 살펴보고자 하는 마가복음 7:24-30의 본문은 행동지향적인, 동적(動的)인 복음의 중심부에 놓여 있는 본문이다. 이 본문을 가지고 본 보고서는 예수의 유대인을 향한 선교 계획과 아울러 이방세계의 영혼들을 향한, 온 인류를 향한 선교의 열정과 계획을 드러낸다는 것을 주안점으로 삼고자 한다.

 

 

 

 

 

본론

(1) 본문의 사역

24절: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공동번역과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알려지고 말았다’라는 결과적인 용법을 쓰고 있다. 하지만 개역성경과 KJV와 RSV, NKJV의 ‘숨길 수 없었다, 숨어 있을 수가 없었다(he could not be hid(hidden))’는 표현이 더 적합한 표현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니깐, 예수님의 몸이 그 지방에 도착하기 전에 벌써 그에 대한 소문은 그곳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25절:

 

더러운 귀신들린’에서 ‘더러운’(ἀκάθαρτον)은 23절에 나오는 ‘더럽게 하느니라’에서 사용된 ‘더럽히다’(koinovw)의 뜻과는 차이가 있는가? 23절의 ‘더럽히다’는 ‘품위 없게 만들다, 부정하게 하다, 더럽히다, 세속화시키다’의 의미이이다. 반면에 25절에 나오는 ‘더러운 귀신’은 'unclean spirit'(KJV, NASB, ASV, RSV)로 번역하고 있지만, NIV에서만 유일하게도 ‘evil spirit’로 번역하고 있다. 이 두 가지의 번역의 차이를 보면서 해석의 가능성 또한 두 가지로 펼쳐질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경우는, 둘 다 ‘unclean’으로 동일하게 해석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는 문맥상의 배치를 볼 때 전문맥에서 외적 정결과 율례 준수를 강조하면서도 정작 내적 정결은 도외시하는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의 모순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단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니깐 유대인들의 내적 정결의 부재 현상, 그러나 외적 정결의 지나친 강조 현상은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이 들린 귀신이 진정으로 ‘더러운unclean’ 귀신이 아니라 마음의 정결이 존재하지 않는 그들이 ‘더러운’ 귀신들린 자들이라고 재해석할 수 있겠다. 이방 여자의 어린 딸이 ‘더러운 귀신’에 들렸지만 그것은 어미의 간절한 사모함(acceptance)으로 치유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지만 유대사회의 고질적인 ‘더러운 귀신’은 유대인들의 변화되기를 거부하는 고집과 아집으로 말미암아 '여전히 귀신들려 있음'을 시사해주는 대목이 아닐까?

 

 

  두 번째의 경우는, 'unclean'과 'evil'로 차이를 두어 해석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는 ‘더러운 귀신들린’(25절)의 의미가 ‘악한 귀신, 악한 영에 사로잡힌’ 의미로 해석된다. 이것은 단순히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이 귀신에 들렸다는 단순한(simple) 의미일 뿐인 것이다.

  원어 상으로는 ajkavqarton와 koinovi는 동일한 의미로 취급되고 있다.2) 이를 두고 볼 때 전자의 해석이 옳다고 주장한다. 똑같은 ‘unclean’의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25절의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에서 ‘더러운’을 ‘evil'이 아닌 ‘unclean’의 의미로 보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굳이 ‘unclean’으로 보아야 하는가?

 그에 대한 타당한 이유를 대자면, 솔직히 수로보니게 여인과 그의 딸은 유대인들의 민족적, 종교적 관점에서 볼 때 ‘evil’의 부류 보다는 ‘unclean’의 부류에 속하기 때문이다. 물론 귀신이라는 것 자체가 ‘evil’이지만 여기서는 이방인에 대한 유대인의 종교적인 세계관이 배여 있음을 강조해주는 뜻으로 ‘unclean’의 의미를 사용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하겠다. 이를테면, 구원받을 영혼, 구원받을 전인류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evil=unclean’이란 도식이 성립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26절의 ‘헬라인’, ‘수로보니게 족속’이라는 여인도 민족적 출신성분상 ‘unclean’의 의미이다. 25절-그녀의 딸은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과 26절-‘그녀는 더러운 민족 출신이다!’-의 이중적(doubled)인 두 여자의 외적인 불결함, 불순함이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더 이상 unclean의 부류에 속하지 않음을 말하는 예수님의 7:1-23의 “내적 정결함의 가르침”을 한층 더 부각시키기 위해 마가는 이 7:24-30의 본문을 기록하지 않았을까?

  그러기에 “더러운 귀신”(πνεῦμα ἀκάθαρτον)은 유대적 관점에서 묘사된 7:24-25에서 예수께서 처한 “부정한” 배경을 재차 강조하며, 7:1-23의 더러운 것에 대한 논의와의 연결점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마가는 이 칭호를 이 구절에서만 사용하고 있다3)는 것도 이러한 것을 지지해 주는 대목이다.

 

 

 

26절: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로 나아오기를 꺼려하고 오히려 그의 사역을 책잡고 비난하며 비판하기를 즐겨하였다. 반면에 이 여자는 예수께로 나왔다. 그리고서 ‘간구하’고 있다. 그녀의 간구는 단말마적인 것이 아니었다. she kept asking him to cast the demon out of her daughter(NKJV). 또한 다른 복음서인 마 15:23에서는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for she keeps shouting after us(NRSV).’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녀의 간청은 절박한 것이었고 계급과 문화와 지위와 인종의 장벽을 넘어선 처절한 갈급함이었다.

 

 

 

 

27-28절:

 

예수님은 그녀의 모습을 현실적으로 그대로 노출시키는 발언을 하셨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풍자적인 비유로 말씀하셨다. 이 여인이 아람어를 몰랐을 것이기에 예수님은 아마 헬라어로 말씀하셨을 것이다.4) 예수님은 애완 동물인 조그마한 개(puppy)를 가리키는 헬라어 단어 쿠나리온(kunarivon)을 사용하신다. 하지만 영어 번역본은 모두 다 '개들(dogs)'이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본문의 정확한 번역은 ‘강아지(puppy)’이다.5) 이 간단한 비유는 식탁에서 아이들이 애완 동물보다 먼저 음식을 먹는다는 뜻이다. 아이들이 먹을 음식을 가져다가 애완 동물에게 주는 것은 옳지 못할 것이다. 유대인의 전통에서 이방인들이 종종 경멸적으로 ‘개’로 불리기도 하지만,6) 그것은 아마 여기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 같다.

 

 

 

 29절:

 

예수님은 여자를 향하여 딸의 완벽한 치유를 선언하고 계신다. 여기서 ‘나갔느니라’ 는 ἐξελήλυθεν,즉 has gone(NKJV)의 완료형태로 쓰이고 있다. 확실하게 치유가 행하여졌음을 시시한다. 그것은 단순한 선언에 불과한 말(a word)이 아니라 전인격적인 치유의 능력을 동반한 선언인 것이다.

 

 

 

 

30절:

 

여자는 자신의 딸에 대한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겼다. 전적인 의탁과 신뢰로 출발한 그녀는 그에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을 받게 된다.

 

 

 

 

(2) 본문의 역사적 배경

  ‘두로 지경으로 가서’에서 두로는 성경에서 종종 시돈과 함께 언급되곤 하는 두로(사 23:112; 렘 47:4; 욜 3:4-8; 슥 9:2; 참조. 7:31)는 이방인 지역이었으며, 요세푸스는 이곳의 주민들을 “악명 높은 가장 무서운 적들”로 묘사된다.7) 또한 그 곳은 자부심이 대단한 역사적인 가나안 도시이다. 다윗 시대에 두로는 이스라엘과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으나(삼하 5:11), 얼마 못 가서 악한 곳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두로의 왕은 신으로 자처하기까지 하였다(겔 26:1 이하). 두로는 예루살렘이 주전 586년에 멸망하였을 때 기뻐했는데, 이는 경쟁자 이스라엘이 없으면 교역량과 이득이 증가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수로보니게 족속(Syrophoenician)’이란 의미는 두로와 시돈 주변에 있는 베니게에 거주했던 족속이다. 베니게는 신약 시대에 로마의 길리기아와 수리아 지방의 한 부분이었다. 이들은 ‘가나안 사람’이라고도 불렸다(참고 마 15:22).8) 그녀는 혈통적으로 혼혈 민족 출신이었고 이스라엘 역사의 긴 줄기 속에서 원수로 자리매김했던 ‘가나안 사람’이었다. 그녀는 출신 상으로 완벽한 ‘더러운’(25절) 민족이었다.

 마가는 예수께 다가온 이 여자를 설명하기를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하고 있다. 이것은 헬라인이라는 설명은 국적보다는 종교적으로 이해해야 하고 그녀가 유대인이 아니라 이교도라는 점이 중요하다.

  마가가 마가복음의 독자를 아마도 로마에 있던 이방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썼다는 점,9) 그리고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심각하게 미워했다는 점10)은 예수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을 만난 대목에서 보여주는 그의 의도를 짐작케 한다. 그러니깐 유대인의 이러한 전통적인 세계관과 해묵은 감정을 타파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이 있음을 시사해 준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3) 본문의 전후 문맥

  예수께서 두로를 방문하시기 직전의 대목에서 내적 정결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것은 흥미롭다.11) 더럽고 추하기 짝이 없는 이방인이 주거하는 지역으로 들어가신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일까? 예수님은 7:24-30에서 게네사렛 혹은 집에 계시다가 그리고 본문에서는 그곳을 빠져 나와 두로로 가셨다. 그리고서 7:31-37에선 시돈을 지나 갈릴리 호수로 가셨다. 이런 지역적인 이동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한 사람을 향한 마음(One Man Vision)’이 담겨져 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12) 이방인 여자, 수로보니게 여인을 만나고자 했던 예수님의 심장이 그려진다.

 

  마가는 예수께 도움을 청하고 있는 수로보니게 여인에 관한 기사를 더러운 것에 관한 광범위한 논의의 문맥(7:1-23)에 배치하여,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의 모든 경계를 제거하는 예수의 사역의 본래 취지를 설명한다. 그는 예수께서 비유대인들과 동의어로 사용된 지역인 “두로 지경”에 가신 것을 언급함으로써 이러한 사실을 강조한다. 13) 예수님은 여기서 그 당시 존재했던 많은 경계선들-국적, 종교, 성, 전통을 넘어서고 더 나아가 31-37절에 나오는 사건을 연계선상에 놓으면서 ‘이방선교’ 더 나아가 ‘선교’ 즉 ‘그리스도의 메시야적 사역’14)에 대한 귀한 장(場)을 열어 놓고 있다.

 

 

 

 

  34절의 ‘에바다’(Ephphatha)라는 아람어는 ‘열라’의 의미로써 투쟁(이를테면, 그리스도인의 내적 투쟁, 영적 전쟁)이란 개념을 담고 있다. 그것은 귀가 열리고 혀가 풀리게 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으며 하나님의 왕적 통치와 관련해서 인류의 모든 경계선들이 허물어지고 그리스도의 메시야적 권세 아래 인간의 전인격이 열리고 해방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15)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특별히 7장의 마지막 구절인 37절의 ‘그가 다 잘 하였도다’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선언과 판단의 측면이 강하게 나타난다. 이것은 또한 창세기 1장과 대응되는데,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창조사역은 완전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그의 아들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도 완전한 것이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웠을 뿐 아니라(창 1:4), 이 경우에 있어서는 사람들이 보기에도 멋진 것이었다.16)

  7:24-30의 이 본문은 전문맥과 관련해서는 정결을 통한 선교적인 차원을 제시하며, 후문맥과 관련하여서는 메시야적 성취를 통한 방대한 선교적인 차원을 재차 강조하고 있다.

 

 

 

 

 

 

(4) 본문 분석

24 δὲ Ἐκεῖθεν ἀναστὰς ἀπῆλθεν εἰς τὰ ὅρια Τύρου. καὶ εἰσελθὼν εἰς οἰκίαν οὐδένα γνῶναι, ἤθελεν καὶ οὐκ ἠδυνήθη λαθεῖν·

  24절: ‘거기를(!ekei'qen)''' 떠나’ 라는 이 말은 출발장소를 말한다. 비록 이 말이 게네사렛(6:53)을 가리킨다고 여겨지기도 하지만, 마가가 줄곧 에케이덴(Ἐκεῖθεν)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7:17의 “집”을 출발 장소로 생각할 수 있다.17)

  

 

 

 

25 ἀλλ εὐθὺς ἀκούσασα περὶ αὐτοῦ, γυνὴ ἧς τὸ θυγάτριον αὐτῆς εἶχεν πνεῦμα ἀκάθαρτον, ἐλθοῦσα προσέπεσεν πρὸς τοὺς πόδας αὐτοῦ·

   25절: 예수님은 예수님께 나아오는 자들 안에 살아 숨쉬는 강렬한 개방성(openness)을 보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그러한 자들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시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유대인에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질식할 정도의 심각한 폐쇄성(closeness)뿐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요 3:16)’ 그 마음을 배반하는 것이요 먹칠하는 것이다. 주님은 그런 자들과 함께 하시기를 거부하셨다. 그러한 자들과는 대조적으로 자기를 진정으로 초정하며 환대하는 이 이방여인은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렸던 것이다.

 

 

 

 

26 δὲ  γυνὴ ἦν Ἑλληνίς, Συροφοινίκισσα τῷ γένει· καὶ ἠρώτα αὐτὸν ἵνα τὸ δαιμόνιον ἐκβάλῃ ἐκ τῆς θυγατρὸς αὐτῆς.

  26절: 유대의 전통적 관행과 관련해서, 그녀는 모든 규칙을 다 범하고 있다.18) 그 철저함은 ‘발아래 엎드리니’(25절)라는 행동으로 묘사된다. 이 간청의 자세에는 상대방의 처분에 모든 것을 맡긴다는 뜻이 담겨 있다(참조 1:40; 5:23).19)

 열왕기상 17장에 있는 사렙다의 과부처럼 이 여인은 헬라인이었거나 혹은 이방인이었다. 이 여인이 과부인지 알 수 없으나 남편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을 미루어 볼 때 아마 과부인 것 같다. 사렙다의 과부처럼 그녀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한 것은 그의 사랑하는 어린 아기의 혹독한 고통이었다.

  나인성 과부도 이와 유사한 범주에 속한다(눅 7:11-15). 그들 모두는 과부와 고아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았다(신 10:18; 시 146: 9).20) 구약의 이러한 하나님의 인류적인 관심은 신약의 이 본문에서도 드러난다.

 

 

 

 

27 καὶ ἔλεγεν αὐτῇ· Ἄφες πρῶτον χορτασθῆναι τὰ τέκνα, γάρ οὐ καλόν ἐστιν λαβεῖν τὸν ἄρτον τῶν τέκνων καὶ τοῖς κυναρίοις βαλεῖν.

 27절: 예수께서는 “자녀들”(유대인)과만 관련 있는 자신의 구속적인 도움(to;n a[rton, “떡”)을 청하는 여인(“개” 혹은 “이방인”)의 부탁을 단호하게 거절한다. 하지만 이것은 이방인들도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한다.21) 주의 상황의 관점에서 볼 때 구원의 때가 아직 종료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말은 이 여인에게 희망이나 위안을 주지 않았다. 그녀 자신이 인정하고 있듯이(7:28) 이방인인 그녀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예컨대, 예수께서 그 여인의 부탁을 거절하신 것은 그녀가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22) 또한 예수님은 이교도 마술사처럼 병을 고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23) 즉 예수님은 그녀가 믿음, 특히 참되신 하나님의 우월성에 대한 믿음을 보이기를 원하신다.24) 주님은 어쩌면 여기서 그녀의 믿음을 시험하고 계신지도 모른다.

 

 예수님께서 유대 여인을 고칠 때에는 그것이 합당한 줄로 여기고 별 다른 말씀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무리 누추하다 하더라도 그녀는 “아브라함의 딸”이기 때문이다(눅 13:16). 비록 가장 어린 유대의 아기들이라도 그를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르며 영접할 수 있었지만(마 21:9) 수로보니게 여인이 주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부르는 것은(마 15:22) 불법이었다.25) 그녀는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유일한 소망은 언약에 근거하지 않는 하나님의 자비에 있다고 생각했었다. 만약 그녀가 자신이 이방인이며, 옛 언약(구약) 밖의 사람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유대 메시야에게 접근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그녀가 병 고침을 받는 은총은 먼 훗날의 것이 되었을 것이다.

 

 

 

 

 

28 δὲ  ἀπεκρίθη καὶ λέγει αὐτῷ· Κύριε, καὶ τὰ κυνάρια ὑποκάτω τῆς τραπέζης ἐσθίουσιν ἀπὸ τῶν ψιχίων τῶν παιδίων.

  28절: “주”( Κύριε)는 이방인들이 사용하는 정중한 “존칭어”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문맥이 암시하는 바처럼, 여자는 이방인 기독교 특유의 표현으로 예수를 “주”로 인정하고 있다. 마태복음에서 한결같이 “신자들”의 입으로 표현되는 “주”라는 칭호는 마가복음에서는 단 한 번 이곳에서만 사용되고 있으며, 예수의 결론적 말씀과 그 여인에게 베푼 도움의 배경이 된다.26)

  그녀는 딱한 처지에 있는 한 아이의 어머니이다. 그녀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모든 것을 참된 것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예수님이 자녀를 먹이는 것에 대해 말씀하신 눈에 익은 묘사에다가 그녀는 한 가지를 더 덧붙여 마무리한다. 어린 개들은 부스러기를 먹는다는 것이다! 자녀와 개 중 반드시 하나만 먹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또 예수님은 그녀의 딸에게 무엇인가를 베풀어 주기 위해 유대인들을 향한 자신의 주된 사명에서 벗어나실 필요도 없다. 그 여자는 예수님의 대답에서 그녀에게 부여된 굴욕적인 위치를 받아들일 것이다.27) 그녀는 딸의 치유를 위해 모든 것을 던진 것이다. 그녀의 자존심까지도 내던진 것이다.

 

 

 

 

 

29 καὶ εἶπεν αὐτῇ· Διὰ τοῦτον τὸν λόγον ὕπαγεἐξελήλυθεν ἐκ τῆς θυγατρός σου τὸ δαιμόνιον.

  29절: 예수님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고 하셨다. 집으로 돌아가라 하신 명령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마가복음에 의하면 치유를 요구하여 온 자에게서 확신을 목격하실 때마다 매양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다(2:11, 5:34, 7:29, 10:52).28) 치유와 상관된 구체적 말씀이 없다. 그러나 이 여인은 자기 딸에게서 귀신이 추방되었음을 확인받았다.

 

 

 

 

 

30 καὶ ἀπελθοῦσα εἰς τὸν οἶκον αὐτῆς εὗρεν τὸ παιδίον βεβλημένον ἐπὶ τὴν κλίνην καὶ τὸ δαιμόνιον ἐξεληλυθός.

  29-30절: 구약에서 믿음은 종종 믿음의 여인들(왕하 4:14-28), 선지자들(출 33:12-34:9; 왕상 18:2:2,4,6,9) 그리고 다른 영웅들(창 32:26-30)의 담대한 열정, 거룩한 뻔뻔함 속에서 표현되었다.29) 이러한 예들은 모두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겸손하게 존중하면서도 담대하게 긴급한 탄원을 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기도에 응답하심을 보여준다.

 

 

 

 

(5)저자의 의도

첫째, 복음의 범위는 온 인류, 전(全)우주를 향하고 있다.

둘째, 복음의 영향력은 전인격적이다.

셋째, 복음의 효력은 갈급하는 자에게 나타난다.

 

 

 

 

(6) 본문의 핵심 내용과 주제

본문의 핵심 내용 및 주제를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정결에 대한 패러다임 전환paradigm shift이다. 본문은 외면적으로 정결한-내면적으로 부정한-유대인들과는 대조적인 외면적으로 부정한-내면적으로 정결한-수로보니게 여인을 보여주면서 정결함이 더 이상 ritual한 ‘의식들ceremonies’에 국한되지 않고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순전하고도 겸손한 ‘마음’으로 모아진다는 것이다.

 

  둘째, 복음은 모든 장벽을 뛰어넘고 초월한다. 위에서 말한 ‘정결에 대한 가치의 전환’이 선교적인 맥락으로 확장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모든 인종, 혈통, 언어, 문화, 편견, 세계관, 권세, 질병 등을 초월한다. 여기서 초월한다는 말은 포용하고 아우르고 얼싸 안고 치유하고 정복하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복음의 영향력은 온 인류를 대상으로 하며 그의 능력은 제한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셋째, 복음의 능력은 받아들이는 개인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교만과 편견에 사로잡힌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완강하게 거부하고픈 존재였지만, 간절한 마음의 소원을 가지고 주 앞으로 나온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예수는 구세주였던 것이다. 개인의 믿음에 따라 삶의 결과가 달라진 것이다.

 

 

 

 

(7) 본문의 핵심 메시지

  a) 본문이 본래의 독자들에게 주는 메시지

 복음은 유대인의 전통과 고정관념에 제한을 받지 않았다. 심지어 이방인들 조차도 그러했을 것이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사사로운 생각에 매이지 않았고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하에 오히려 그들에게 도전하셨다. 복음은 삶과 세계관에 도전한다.

 

 

  b) 오늘의 독자와 청중들에게 주는 메시지

그리스도의 복음은 전인류적-수로보니게여인조차 품으시는-이며 전인격적-여인의 딸에게서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고 인간성을 회복하는-인 능력이다. 복음은 초월적인 하나님의 사랑이며 동시에 총체적인 삶의 능력이다.

 

 

  c) 본인에게 주는 메시지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 앞에 무릎꿇고 전심으로 나아가는 자에게 재생과 회복과 치유를 주신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나아갔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복음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이다.

 

 

 

 

  결론

  막 7:24-30의 이 본문은 1-23절까지의 정결의 개념과 맞물리고, 31-37절의 사건의 선교적 개념과도 맞물린다. 마치 이것은 희곡이나 시나리오 용어로 사용하는 overlap(O.L)과도 같은 것이다. 하나의 다리bridge와도 같은 심상을 제공하는 이 본문은 모든 종교적, 이념적, 계급적, 인종적, 시대적, 세대적인 장벽을 넘어서는 그리스도의 위대한 메시야적 사역의 성취와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원대한 선교적인 비전을 제공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세속적인 편견과 차별과 선입견으로 얼룩진 우리들을 새롭게 포용하시는 그리스도의 진면목을 이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본문은 당대의 이방세계의 그리스도인 독자들에게 ‘갈구하는 자에게 응답하시고 반응하시는 그리스도’를 보게 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위로와 위안을 얻었을 것이다. 또한 오늘의 청중들에게 그의 복음 안으로 들어가려면 거룩한 뻔뻔함이 필수적임을 도전하고 있다. 수로보니게 여인을 넘어(beyond) ‘죄인 중의 괴수’인 우리에게도 진정한 갈급함(thirsty)에 반응하시는 구세주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스도가 주인 되시는 그 공동체는 지금도 항상 개방되어 있으며 마음이 진정으로 열려진 자들이 쟁취할 수 있는 공동체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온 인류, 전(全)우주를 향하고 있다.

 그 복음은 전인격적이다.

그리고, 그 복음은 갈급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참고 문헌

아란 콜, 『마가복음』, 김정우 역(틴델;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4).

D. A. 카슨, 더글라스 J. 무, 레온 모리스, 『신약 개론』, 노진준 역(서울: 은성, 1994).

데릭 윌리암스(편), 『IVP 성경사전』, 이정석 외 역(서울: IVP, 1992).

도널드 잉글리쉬, 『마가복음 강해』, 정옥배 역(BST; 서울: IVP, 2001).

그랜트 오스본(편), 『마가복음(상)』, 박대영 역(LAB주석; 서울: 성서유니온선교회, 2002).

제프리 W. 브라밀리(편), 『킷텔 단권 신약성서 신학사전』, 번역위원회 역(서울: 요단 출판사, 2001).

Joel B. Green, Scot McKnight & I. Howard Marshall, Dictionary of Jesus and the Gospels(Downers Grove: IVP, 1992).

존 드레인, 『예수와 4복음서』, 이중수 역(서울: 두란노, 1995).

크레이그 키너, 『IVP 성경배경주석; 신약』, 정옥배 외 역(서울: IVP, 1999).

로버트 귤리히, 『마가복음1:8-26』, 김철 역(WBC; 서울: 솔로몬, 2001).

토마스 넬슨, 『손에 잡히는 넬슨 성경개관』, 김창환 역(서울: 죠이선교회출판부, 2003).

Walter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3rd(Chicago and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0).

W. 바클레이, 『바울 신학 개론』, 박문재 역(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3).

윌리암 레인, 『마가복음, 상』, 이상훈 역(뉴인터내셔널;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7).

 


 

 

1) 토마스 넬슨, 『손에 잡히는 넬슨 성경개관』, 김창환 역(서울: 죠이선교회출판부, 2003), 342.

2) Walter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3rd(Chicago and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0), 34.

3) 로버트 귤리히, 『마가복음1:8-26』, 김철 역(WBC; 서울: 솔로몬, 2001), 610.

4) 윌리암 레인, 『마가복음, 상』, 이상훈 역(뉴인터내셔널;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7), 321: 그녀는 헬라어를 사용하여 말할 뿐 아니라 문화적 배경이 헬라적이다.

5) Walter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575: 거리나 농장에서 지내는 개들과는 대조적인 집에서 기르는 개 혹은 애완견을 말한다.

6) 윌리암 레인, 『마가복음, 상』, 325: 유대인 전통에 따르면 이방인들을 개라고 부른 때가 있다.

7) 로버트 귤리히, 『마가복음1:8-26』, 609.

   윌리암 레인, 『마가복음, 상』, 321: 구약에 보면 두로와 시돈을 결속어로 사용하여 이방세계를 표시한다. 참조, 막 3:8.

8) 데릭 윌리암스(편), 『IVP 성경사전』, 이정석 외 역(서울: IVP, 1992), 287.

   로버트 귤리히, 『마가복음1:8-26』, 611: 라틴어 원전에서는 로마의 빈민가로 이주한 사람과 무시당하던 창녀를 뜻하는 말로 두 번 사용되었다고 주장하는 스탠다에르트(Sandaert, Marc, 475-76)는, 이 말의 어감이 이 여인이 도덕적으로 부정함을 암시한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날 때부터(tw'/ gevnei)”라는 말은 그녀의 도덕적 특성보다는 그녀가 이방인 출신임을 강조하는 말이다.

   크레이그 키너, 『IVP 성경배경주석; 신약』, 정옥배 외 역(서울: IVP, 1999), 177: 구약에 나오는 가장 유명한 보니게(베니게) 여인은 악한 이세벨이었다.

9) D. A. 카슨, 더글라스 J. 무, 레온 모리스, 『신약 개론』, 노진준 역(서울: 은성, 1994), 104-105.

   존 드레인, 『예수와 4복음서』, 이중수 역(서울: 두란노, 1995), 156-157: 존 드레인은 마가복음이 비유태인들의 독자층을 위해 쓴 것은 분명하다고 한다. 헬라어 번역과 라틴어로 된 전문어들이 그 증거이며 이는 마가복음이 라틴어를 쓰던 로마제국의 어느 지역에서 시발되었음을 시사한다고 말한다.

   Joel B. Green, Scot McKnight & I. Howard Marshall, Dictionary of Jesus and the Gospels(Downers Grove: IVP, 1992), 515: 여기에는 다소 포괄적으로 독자층을 지시해준다. ‘유대법들과 관습들과 마찬가지로 자주 설명되는 아람어 표현들은 마가복음의 독자층이 유대주의의 어떤 형식들과는 친숙하지 못한 청중들일 것이다.’

10) W. 바클레이, 『바울 신학 개론』, 박문재 역(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3), 9-11:

   여기에는 ‘세상이 유대인들을 미워했고, 유대인들이 세상을 미워했다’고 말한다. 그러니깐 유대인들은 ‘이중적인 미움’에 얽혀 있었다. ‘이방인들은 지옥의 불을 태우는데 쓸 땔감’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또 ‘뱀들에 대한 최상의 조치는 짓밟아 으깨는 것이요, 이방인들에 대한 최상의 방책은 죽여 버리는 것이다’고 기술하고 있다.

11) 그랜트 오스본(편), 『마가복음(상)』, 박대영 역(LAB주석; 서울: 성서유니온선교회, 2002), 335.

12) 아란 콜, 『마가복음』, 146: 예수께서 이곳으로 이동하신 직접적인 이유는 ‘아마 휴식과 준비를 위해서 떠나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온 것을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고 했기 때문이다.’

13) 로버트 귤리히, 『마가복음1:8-26』, 615.

14) 도널드 잉글리쉬, 『마가복음 강해』, 정옥배 역(BST 시리즈; 서울: IVP, 2001), 206: 이사야 35:5-6의 메시야적 사역이 예수를 통해 성취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15) 도널드 잉글리쉬, 『마가복음 강해』, 207.

16) 아란 콜, 『마가복음』, 150.

17) 로버트 귤리히, 『마가복음1:8-26』, 608.

   윌리암 레인, 『마가복음, 상』, 323: 마가의 이 집에 관한 언급은 이중적 목적을 성취한다. 첫째는 선교행위에 종사하는 자들에게는 쉴 곳이 필요하다는 것(참조, 6:31)과 둘째는 그와 함께, 이 집에 계신 주를 찾아온 사람들은 주께 온전히 신임을 두고 있으며 이 복음서에서 동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것(2:1-5, 3:20, 7:24-30)이다.

   아란 콜, 『마가복음』, 146: 아마 주님께서 남몰래 머무르셨던 곳은 이 지역에 살고 있던 유대인 제자의 가정이었을 것이다.

18) 도널드 잉글리쉬, 『마가복음 강해』, 202.

19) 로버트 귤리히, 『마가복음1:8-26』, 610.

20) 아란 콜, 『마가복음』, 147.

21) 제프리 W. 브라밀리(편), 『킷텔 단권 신약성서 신학사전』, 번역위원회 역(서울: 요단 출판사, 2001), 419: ‘집에서 기르는 개’를 뜻하며, 이 단어를 택한 것은 아마도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구별이 있지만, 이방인을 위한 자리도 집 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방 여인은 대답을 할 때 이 구별을 받아들였고, 그러므로 자기에게 주어진 구석 자리를 차지 할 수 있었고 바라던 도움을 얻었던 것이다.

22) 로버트 귤리히, 『마가복음1:8-26』, 611-613.

23) 윌리암 레인, 『마가복음, 상』, 326: 예수께서 즉각 여인을 도와주는 일을 실행하시지 않고 주저한 까닭은 짐작컨대 1세기의 헬라 세계에서는 대중을 매료하여 추종하게 하기 위하여 서슴치 않고 요구에 응하는 많은 “이적 행위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란 콜, 『마가복음』, 150: 왜냐하면 그와 같은 기적은 흥미꺼리는 있을지 몰라도 도덕성이 없기 때문이다.

24) 크레이그 키너, 『IVP 성경배경주석; 신약』, 178.

25) 아란 콜, 『마가복음』, 147-148.

26) 로버트 귤리히, 『마가복음1:8-26』, 614.

27) 도널드 잉글리쉬, 『마가복음 강해』, 203.

    그랜트 오스본(편), 『마가복음(상)』, 340: 예수님은 여인을 시험하셨지만 그녀는 무사히 통과했다...그녀는 유대인들에게 우선순위가 있다는 그분의 상황을 받아들였다.

28) 윌리암 레인, 『마가복음, 상』, 327.

29) 크레이그 키너, 『IVP 성경배경주석; 신약』, 178.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