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그리스도인의 형제사랑은 먼저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행해져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가족의 경계를 넘어서야 한다. 자기들끼리만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고 누구나가 다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의 능력은 모든 인간관계를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쉽다. 물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끼리 싸우고 지지고 뽂기도 한다. 하지만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권면은 원수사랑이 중심을 이룬다. 바울과 초기 선교사들과 그리스도인들은 끊임없이 박해에 노출되어 있었다. 이 악한 세상에서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은 세상을 본받지 않고, 예수님을 본받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표지이다.
사실 313년, 기독교가 로마 제국에서 공인되기 전에 실천되었던 원수사랑은, 비기독교적인 세계에서 드러난 그리스도인들의 주요한 특징 중의 하나였다.
12:14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이 이야기를 하는 바울에게 다가온 충격적인 과거의 기억, 영상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을때였다. 스데반은 오히려 그들을 축복하고 죽는다.
행 7:59-60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이 원수사랑, 예수님의 원수사랑이 기독교인의 표지였다.
17절에는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했다. 모든 사람이 인정할 만한 선행을 위해서는 계획을 세울 필요가 있다. 의도로만 충분치 않다. 목표달성을 위해선 효과적이고 전략적인 무엇을 세워야 한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1)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화평케해야 할 새로운 사명을 부여받았다. 샬롬의 통로, 축복의 통로가 된 것이다.
12: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그래서 주도권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화목케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피스메이커가 되어야 한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로서는’두 개의 한정구는 모든 사람과의 화평이 항상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상대방이 우리와의 화평을 진심으로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로서도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있다.
2)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의 전유권이다.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하나님은 인간의 복수 행위를 금한다(잠 20:22; 24:29; 대하 28:9-15). 하나님만이 홀로 의로우시기 때문에 하나님만 홀로 진노하실 수 있다. 인간의 복수심은 정말 원초적인 것 같다. 가인이 아벨을 시기심에서 쳐 죽인 분노부터 시작해서,
복수의 전형적인 예를 보여주는 영화, ‘테이큰’이다. 인간의 복수심을 잘 드러내어, 잘 이용하여 관객의 흥행몰이를 한 리암 니슨의 영화, <테이큰3>는 더 전형적인 구도로 복수심을 드러내주었다. 하지만 성경은 영화제목처럼‘복수는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말해준다. 영화 같은거 보면, 끝에서 가면 복수를 해서 그 사람이 죽거나 사라져야 속이 시원하지 만약에 용서를 했다? 그러면 관객들은 그런 영화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다고 할 것이다.
복수를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복수를 맡긴 전형적인 의인의 예는 바로 다윗이다. 다윗은 자신의 죽이려는 수많은 위협과 살기에도 굴하지 않았다. 더군다가 사울을 개인적인 분노에 의해 죽일 수 있는 찬스가 두 번이나 있었지만, 그 찬스를 살리지 않고 하나님께 맡겼다. 그것이 다윗의 위대한 점이었다. 사울은 결국 길보아전투에서 패배함으로 자살하지 않았던가!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고 하셨다.
3) 원수에게 선을 베풀면, 원수의 머리 위에 불타는 숯을 쌓는 것과 같다.
12:20은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고대 이집트에서는 회개의 공적인 증거로서 불타는 숯불을 담은 그릇을 머리에 이고 다니는 의식이 있었다. 바울은 여기서 그런 의식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아무튼 원수사랑은 원수를 부끄럽게 하여 참된 회개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
4)악에게 보복한다는 것은 자기 마음에서 솟아난 악에게 정복당하는 것이다. 우리는 악을 선으로 이겨야 한다.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만일 우리가 악을 악으로 갚는다면, 불화는 증폭되고, 전쟁은 그치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 하나님은 인간의 반역과 불순종을 사랑으로 정복하셨다. 우리도 하나님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해야 한다.
안젤리나 졸리가 주연한 영화 ‘언브로큰’에서 감독이 일본인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바로 용서의 마음이었다. 주인공 잠펠리니가 일본인 장교 와타나베를 용서하려고 손을 내밀지만, 끝내 와타나베는 마음을 열지 않았다고 한다. 그 ‘부러지지 않는’ 그 마음이 바로 일본인의 마음인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주인공 와타나베가 잠펠리니를 고문하는 장면!
우리에게는 용서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용서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처럼, 다른 이에게도, 원수에게 예수그리스도의 용서가 필요하다.
주기도문의 기도를 항상 기억하라!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가 먼저 다른 이를 용서할 때 그리스도의 용서가 우리에게 임하는 법칙이 있다는 것! 용서의 법칙, 화해의 법칙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필립 얀시의 책에 보면 "용서가 필요한 세상"이라고 나온다.
스페인의 한 아버지가 집을 나가 방황하면서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는지도 모르는 아들을 찾는 광고를 싣게 된다.
"파코야 아버지는 너를 다 용서했다. 집으로 돌아오렴!"
신문기사가 나왔다. 파코를 찾는 신문광고 말이다. 그런데, 약속장소와 약속시간에 거기에 아버지의 아들, 파코가 나왔을까? 스페인에는 파코라는 이름이 굉장히 흔한 이름이라고 한다. 그 광장에는 수많은 아들들이, 수많은 파코들이 아버지의 용서의 기사를 읽고 그 광장에 나왔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어네스트 헤밍웨이의 <The Capitol>에서 나온 내용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그런데, 작가 어네스트 헤밍웨이도 용서에 굶주린 사람이었다. 관용과 사랑에 굶주린 사람이었다.
헤밍웨이를 떠올리면 <노인과 바다>의 노인의 이미지가 떠오르지만, 그의 젊은 시절의 사진을 보면 굉장히 훤칠한 미남이다. 20대부터 기자생활을 하면서 전쟁터에서 부상을 당하기도 하고 여러가지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그였지만, 그는 어머니의 사랑에 그리운 아들에 불과했다. 필립 얀시는 헤밍웨이가 노벨문학상 작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권총인가? 엽총인가? 자살을 할 수 밖에 없었던 배경에 대해서 설명해준다. 그의 어머니는 청교도적인 기독교 신자였다. 하지만, 그 청교도적인 신앙이 헤밍웨이는 더 하나님을부터 도망치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의 어머니는 항상 그에게 은혜를 강조하면서도 부모와 자식의 도리를 가르쳤고 그에 따른 보상을 바랬다. 마치 부모가 이만큼 베풀었으니 아들은 헤밍웨이는 부모의 비어진 은행잔고를 채워줘야 한다는 식으로 선물과 돈과 아들의 보상을 바랬던 것이다. 그것은 은혜가 아니고 비은혜다.
기독교 신앙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자주 비은혜의 응달로 기어들어갈 때가 있다. 내가 받은 은혜만 생각하고 타인이 받을 은혜는 안중에도 없는 것이다. 나는 헤밍웨이를 생각하면 늘 비극적인 모자간의 관계를 떠올리게 된다. 그런 작가인 헤밍웨이가 파코 이야기를 썼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이 아픈가? 더군다나 헤밍웨이 가문에는 대를 이어 자살하는 인물들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어떻게 청교도적인 집안의 가정에서 그런 비극적인 저주가 계속 반복된단 말인가? 물론 우린 쉽게 판단하고 단죄해선 안된다. 하지만, 생각해볼 여지가 많은 대목이다.
당신의 원수는 누구인가?
나눔시트지-롬 12:14-21<원수를 사랑하십시오>
1.당신은 언제 화를 참지 못하고 언제 분노하는가? 그 분노는 정당한가?
당신은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복수가 얼마나 통쾌한지, 아니면 복수가 얼마나 허무한지를 언제 느껴보았는가?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눠보라.
2.복수는 나의 것이 아니라 복수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배웠다. 당신이 그토록 미워하는 한 사람을 떠올려보라, 주님은 그 원수같은 그 한 사람도 사랑하시길 원하신다. 주기도문의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의 문장을 기억하라! 당신의 용서가 필요한 그 사람이 누구인가? 함께 나누고 그 한 사람을 용서하기로 작정하고 하나님께 당신의 복수욕구와 상처를 의탁하라! 주님께 원수갚음을 맡기는 기도를 하라!
3.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우리는 용서하지 못한다. 우리의 콤플렉스이고, 트라우마이기도 하다.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에서 우리는 가장 큰 상처가 있을 수 있다. 거기에 용서의 니즈가 요구된다. 시간이 필요하지도 모른다. 눈물의 시간이 필요하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니즈needs가 생겼다면 지금부터 기도하라. 하나님의 치유가 우리 가문에, 우리 가정에 임하도록! 비극이 희극이 되도록! 십자가가 영광이 되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부활의 영광으로 우리에게 드러났던 것처럼!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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