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학창시절에 아주 감명깊게 본 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는 베토벤의 사랑과 생애를 다룬 영화였습니다. 제목은 ‘불멸의 연인’이었습니다. 프랑스의 게리 올드만 배우가 등장한 영화였는데, 베토벤의 인생에 사랑이 있었다는 소재입니다.
루드비히 반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게리 올드만 분)은 1827년에 사망했다. 비엔나 전체는 슬픔의 도가니에 빠지고, 수천명의 군중들이 베토벤의 장례 행렬을 지켜보기 위해서 몰려들었다. 그의 생이 끝나는 순간이었고 전설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베토벤의 오랜 친구인 안톤 쉰들러(Anton Felix Schindler: 제로엔 크래브 분)는 의문점을 풀기 위한 조사를 시작한다. 그 이유는, 베토벤의 말년에 그를 돌보았던 막내 동생 요한(Nikolaus Johann van Beethoven: 제라드 호란 분)에게 모든 베토벤의 유산이 상속될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베토벤의 유언장은 모든 것을 '영원한 연인' 앞으로 남긴다고 했다. 그녀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쉰들러는 친구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서, 그녀를 찾아 나선다. 그가 가진 유일한 실마리는 이름모를 여인에게 베토벤이 보낸 편지가 전부였다. 그는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몇년 전에 베토벤이 이 숙녀를 만나자고 했었던 칼스버드 호텔로 간다. 호텔 주인 여자는 그녀를 기억했다. 그녀는 두꺼운 망토와 베일을 쓰고 있었고, 이틀동안 방에서 머물렀으며, 베토벤이 도착하기 전에 떠났다고 했다. 베토벤은 도착하자 그녀가 떠나버렸음을 알고, 너무나 화가 나서 방을 거의 부숴버렸다고 했다. 그 여인의 정체에 대한 유일한 실마리는 호텔 숙박부에 기재되어있던 서명으로 풀리기 시작한다.
마침내 쉰들러는 카스퍼의 미망인이자 베토벤의 옛 연인이었던 조안나를 찾아가서 그녀에게 호텔 숙박 기록을 보여주며 어떤 대답을 기대한다. 처음에 조안나는 그녀가 베토벤의 연인이었음을 부인하지만, 바덴에서 함께 지냈던 여름을 회상하고는 진실을 인정한다. 조안나는 카스퍼가 자기에게 접근하는 동안 베토벤과 사랑에 빠지고, 그들은 호텔에서 만나 함께 사랑의 도피를 약속했었다. 그러나 베토벤은 폭풍 속에서 마차가 고장나는 바람에 약속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하고, 임신하여 굴욕스러워하는 그녀를 홀로 남겨둔다. 그녀는 베토벤이 서둘러 보낸 전보를 받지 못한 채로 카스퍼에게 돌아가고, 칼이 카스퍼의 자식으로 믿게 놔둔다.
부숴진 마차, 잃어버린 편지, 그리고 상한 자존심.
이것이 베토벤을 그의 영원한 연인 조안나와 결별하게 한 비극의 원인이었다.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을 듣고 난 후 조안나는 자신을 모욕한 베토벤을 다 용서했다고도 한다.
이 영화의 압도적인 장면은 교향곡 9번이 나올 때이다. 아버지가 술에 취해 또 다시 베토벤을 두들겨 패기 위해 올라온다. 베토벤은 아버지를 피해 도망친다. 지붕에서 내려와 숲을 향해 달려가고 호수위에 눕는다. 그때 음악이 ‘합창’이 울린다. 감동이 북받쳐온다.
더 깊은 슬픔과 아쉬움은 베토벤은 이러한 놀라운 음악, 엄청난 음악을 작곡한 베토벤을 그 연주를 귀로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영혼에게 터져 나온 악보를 귀로 들을 순 없지만, 그런 한계를 뛰어넘어 사람들의 영혼을 움직이는 음악을 만들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베토벤의 <불멸의 연인>, <불멸의 사랑>이 있듯이,
오늘 본문에선 불멸의 빚, 불멸의 채무가 나온다.
신학자 벵겔이 쓴 말이다.
그 불멸의 채무는 바로 사랑의 빚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빚>이다.
바울은 12:9-21에서 취급한 사랑이라는 주제로 되돌아왔습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이 권면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채무임을 보여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청산되지 않은 빚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사람에게 줄 것을 주되’모든 빚을 다 갚아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갚아도 항상 남아 있는 빚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빚입니다. 불멸의 부채!
사랑은 다른 부채와는 달리 결코 다 갚을 수 없는 ‘불멸의 부채’(immortal debt-벵겔의 표현)입니다. 불멸의 부채는 불멸의 사랑이기도 합니다. 부모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 조부모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 위에서 내려오는 아래로 내려오는 사랑은 다 갚을 수 없는 사랑입니다. 갚을 수 없는 사랑의 빚입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갚을 수 없는 빚입니다. 주님은 그리고서 우리에게 이웃을 사랑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예수님도 자비를 받은 자는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은혜와 사랑, 불멸의 사랑을 받았기에, 사랑하는데 전심전력해야 한다. 우리가 아무리 이웃을 사랑해도 충분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끝이 없는 사랑입니다. 사람의 사랑은, 베토벤이 보여준 가슴아픈 사랑도 우리의 마음을 저미게 만들긴 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은 우리를 영원히 살리는 능력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놀라운 사랑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사랑은 빚은 계속해서 새롭게 청구됩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채무자의 심정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면 율법은 완성됩니다.
8절에서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남’은 특정한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이웃으로 다가오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9절에서 바울은 이 모든 계명들 속에서는 이웃 사랑의 계명 속에 요약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이웃 사랑은 자신에 대한 사랑과 동일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실질적이고 정성스럽게 사랑합니다. 마찬가지로 이웃도 실질적이고 정성스럽게 사랑해야 합니다. 참된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지 아니하고’ 이웃의 유익을 진심으로 추구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이 말은 율법의 기본 의도와 정신과 목적이 사랑 안에서 다 충족된다는 말입니다. 율법은 결국 사랑의 표현이고 수단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이 화려한 자기 고립에서 떠나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현대는 사람을 자꾸 고립시키고 은밀하고도 고독한 존재로 몰아갑니다. 거기서 행복을 찾고 자신의 마음의 문을 잠그고 혼자서 이기적으로,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빚은 그러한 자기중심적 세상에서 나와 밖을 향해 손짓하고 미소짓게 하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교회에 그냥 교인으로 있길 좋아합니다. 선데이 크리스천으로 살아가길 좋아합니다. 무헌신, 무섬김, 무큐티, 무책임, 무관심, 무반응...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를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자로 세워지길 원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아무에게도 종속되어 있지 않은 자유인이면서도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은 모든 율법을 다 이룬 자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은 율법을 완성시키셨습니다. 고난주간에 이 본문이 공교롭게도 맞다뜨리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은 모든 것을 완성시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용서하십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 모든 남녀노소의 모든 죄악을 용서하십니다. 모든 세대, 모든 세기의 불의와 죄악을 도말하시는 사랑이 바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그 사랑의 증거로 그리스도, 독생자를 십자가 위에 못박으심으로 자신의 공의를 만족시켜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도 나올 수가 없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절대 갚을 수 없고, 절대 메울 수 없는 죄라는 구멍을 아버지의 계획 가운데 아들이 직접 메꾸어가신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의 빚이 우리 형제자매들 사이에도 드러나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어떤 빚을 지고 있습니까? 집안에 얽히고 설킨 빚이나 채무가 있습니까? 주님께서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주심으로 모두 청산하시는 은혜가 있길 바랍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청산할 수 없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불멸의 빚을 졌습니다. 그 불멸의 빚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평생 갚아가야 할 빚입니다. 그 불멸의 사랑이 불멸의 빚을 낳게 되었습니다.
영화 <오직 그대만을>
-전직 복서출신의 주차장관리인으로 생활하는 소지섭에게 시각장애인인 한효주가 나타나게 됩니다. 주차장 박스안에서 드라마는 보는게 전부였지만, 그러면서 소지섭은 한효주에게, 한효주는 소지섭에게 매력과 애정을 갖게 됩니다. 한효주는 텔레마케팅을 하지만, 그 직장에서도 앞을 보지 못한다는 이유로 상사로부터 모욕을 당하고서 그 직장을 그만두게 됩니다. 소지섭은 한효주가 직장을 그만둔것에 대해 자신이 책임지겠다면서 다시 복서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승승장구하는 그의 복서의 길!
왜 소지섭이 복서의 길을 그만두게 된 것인가?
거기에는 비밀이 있었습니다. 한효주와 연결된 비밀이 있었습니다. 소지섭은 복서를 그만두고 돈을 받아주는 하청업자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 돈받으러 갔을 때 웬 아저씨는 자신을 비관하면 분신자살을 하려고 고층건물에 뛰어내리게 되는데, 그때 떨어지는 그 남자의 불길로 둘러싸인 시체로 인해 한효주와 부모가 탄 차가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고 부모는 죽고 한효주는 실명을 하게 됩니다. 그 모든 사건 현장을 보고 있었던 사람은 바로 소지섭! 이 사실을 안 소지섭은 다급해집니다.
그런데, 한효주의 눈을 이제 더 이상 놔두면 완전 실명하게 되는 상황이라는 의사의 진단을 병원에서 듣게 됩니다. 당장 수술비 3천만원이 필요합니다. 소지섭은 결국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한 태국의 격투기 무대에 출전하게 됩니다. 죽거나 기절해야 링에서 나올 수 있는, 아니면 오로지 이겨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그 경기같지 않은 경기에 출전합니다. 수많은 도박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소지섭은? 그 상대방 파트너를 죽입니다. 그리고서 살아남아 인천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그 싸움의 브로커역할을 옛동료는 소지섭이 운반하게 된 다이아몬드를 낚아채면서 소지섭을 등을 칼로 두서번 찌릅니다. 그 당시 한효주는 그토록 보고자 했던 소지섭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되는 수술이 성공합니다!
하지만 소지섭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2년후, 소지섭에게 마사지를 가르쳐주겠다며 배운 그 기술로 한효주는 무료봉사자로 병원에서 섬길때였습니다. 소지섭을 거기서 만난 것입니다. 하지만 소지섭은 얼굴에 화상을 입었고, 다리를 절고 예전의 건강한 소지섭이 아니었습니다. 한효주에겐 별로 상관이 없겠죠. 눈이 안 보였습니다. 한효주는 그 사람이 소지섭인지 알아보지 못합니다. 느낌이 묘하게 다가오긴 했지만, 이미 소지섭의 신분이 ‘김학선’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을 향한 사랑, 그 사랑이 자신의 목숨을 걸게 하고, 그 한효주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자신의 건강을 버리고, 생명을 버리고 달려든 소지섭! 아마도 한효주의 실명과 부모의 죽음에 책임감도 한 몫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사랑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 사랑이 우리 안에 고여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의 우리에게 ‘사랑의 빚’으로 남아있습니다. 우리가 VIP축제에, 아니 그 언젠가 데리고 와야 할 영혼들을 생각하면서 찬양하고 기도하고 그랬음 좋겠습니다.
불멸의 사랑, 불멸의 빚!
그 사랑 얼마나G
모든 민족과 방언들 가운데G
모든 능력과 모든 권세A
나눔시트지
1. 당신의 일주일은 어떠했는가?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한 가지 사건(사안)을 가지고 나눠보라.
2.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불멸의 빚을 지고 있다. 새가족축제에 여러분이 사랑의 빚을 나눠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그 사람(들)VIP을 나눠보고 함께 기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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