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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디모데전.후서

디모데후서 4장7-8절, 데살로니가후서 2장15-17절, 나는 예수 따라가는

by Message.K 2023.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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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신약성경 디모데후서 4장 7-8절과 데살로니가후서 2장 15-17절의 본문을 가지고 <나는 예수 따라가는>이라는 주제로 설교한 내용을 포스팅해 보겠습니다. 

 

 

[딤후 4:7-딤후 4:8]
(7)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8)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디모데후서에서 바울은 이 땅의 삶이 곧 끝날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처럼 편지를 적고 있다. 막 자신의 무거운 짐들을 내려놓으려는 순간, 경건한 사도는 에베소에서 힘들게 사역하고 있는 신실하지만 약간은 소심한 동역자 디모데에게 도전하고 격려하기 원한다. 바울의 어두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 서신서는 거룩하게 부여받은 의무를 완수하면서 꿋꿋하도록 디모데를 강권하는 격려의 편지이다. 디모데후서 전체의 중심은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한 기초라는데 있다. 바울은 현재의 시험을 견디고(1,2장) 미래의 시험을 인내해야 할 필요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3,4장)

 

 

 

리더인 바울이 팔로워격인 제자, 디모데에게 자신의 삶, 자신의 사역, 자신의 인생이 어떠했는지를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선한 싸움’이었고, ‘내가 달려갈 길’이었고, ‘믿음을 지켰다’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로 바울처럼 인생의 황혼기에, 인생의 말년에 이렇게 자신 있게 고백했음 좋겠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말이다.

 

...마치고->빚을 청산하다. 결론짓다. 지불하다의 의미...바울은 ‘복음의 빚진자’(롬 1:14)로 자신을 고백했었다. 이제 바울의 복음의 빚은 다 지불되어진 것이다. 바울의 복음의 빚이 청산되어진 것이다. 그가 관제와 같이 부어 드려 하나님께 자신의 사명을 결론지우는 말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있는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있기라도 해야 달려갈 길을 마칠 것이 아닌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있기라도 해야 믿음을 지킬 것이 아닌가?

여러분들은 어떤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있는가? 우리는 가장 쉽게 ‘죄와의 싸움’을 선한 싸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난 후 허물로 죄로 죽었던 우리 삶 가운데 바울이 말했던 ‘옛 성품’과 ‘새 성품’이 갈등이 벌이게 된다. 두 성품은 끊임없이 서로를 자극하며 갈등을 빚고 싸우게 된다. 이러한 선한 싸움, 선한 갈등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선한 싸움?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침?

 -믿음을 지킴? 나는 믿음을 지켰는가? 모든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이심을 믿고 신뢰하며 나아가는가? 반신반의하면서 살아가는가? 교회와 가정과 나의 개인적인 생활을 비록 힘들지만 그래도 나의 자리를 지키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이다. 지금의 상황에서 누구를 비난하고 누구를 판단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단지 우리가 우리의 자리를 지키는 그것 하나만으로 나는 여러분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그러할 때 바울은 자신의 삶과 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바라보고 있다.

(8)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져 있다는 것이다. 일년 동안 수고했다고 주는 어떤 선물이나 티켓이나 상품권정도가 우리가 줄 수 있는 선물이다. 다주깝(다 주어도 아깝지 않아)을 하면 도서상품권을 준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의의 면류관’을 주신다고 했다. 우리는 그것이 과연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으며 얼마나 우리의 구미를 당기게 할 것인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믿는 좋으신 하나님이 주시는 정말 좋은 선물이라는 것이다. ‘의의 면류관’...받아 보아야 알 수 있는 선물일 것이다. 바울 같은 영적 대사도는 천국의 ‘삼층천’이라는 신비한 영적 체험까지 한 인물이기 때문에 우리와는 시각이나 관점 자체가 다를 것이다. 우리는 비록 아둔한 관점과 시선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대해서 분명히 상을 예비하셨을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잘 한 것은 없지만 그래도 믿음을 지키고 있다는 것으로 감사하며 생활하자!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지킨다!!!

 

 

살후 2:15-17 그러므로 형제들아 굳건하게 서서 말로나 우리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는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굳게 서서 지키라 V.15-17

  요즘 현대는 ‘굳게 섬’이라는 말을, ‘자기 독립’이나 ‘자기 성장’, ‘자아 초월’로 이해하는 듯하다. 자신을 잘 드러내고 자신을 잘 확립하여 자기 성공, 자수성가를 한 것을 ‘굳게 섬’이라고 확신하는 듯하다.

 

 

제가 중2때 일이다. 학교 2층에서 점심시간에 종이비행기를 창밖으로 날리고 있을 때였다. 누가 멀리 날리나 하는 그런 폼이었다. 창밖은 건물 뒤편이었고 건물 뒤편에는 산이 있었고 한참 공사중인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때 갑자기 1층 창문에 얼굴을 들이밀면서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있었다. 다들 놀라 당황한 순간이었다. 다름아닌 학생과장 선생님이셨다. 1학년 때 담임이었던 그 선생님은 윤리과목을 맡았는데 대학교를 10년만에 졸업했다고 한다. 당시 워낙 학생운동이다 데모다 해서 늦게 대학을 졸업하여 교편을 잡고 있던 분이셨다. 1학년 때 그 분에게서 발바닥을 하키채로 10대씩 맡았던 소름끼치는 기억이 살아나면서 종이비행기를 날리며 비행의 꿈을, 자유의 꿈을 꾸었던 내 친구와 나는 쳐진 어깨를 겨우 추스리며 그 분에게 찾아갔다. 하키채의 그 엄청난 고통을 생각했는데 처벌은 아주 관대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 ‘종이비행기를 날리려면 리차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을 읽어보고 날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우린 돌아왔는데 나중에 내 친구는 종이비행기를 접어 또 날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또 학과한테 불려갈려고 그러냐고 하자 그 친구는 대뜸 하는 말이 ‘갈매기의 꿈을 읽어봤다’고 대꾸하는 것이었다.

 

  

 1970년에 출판된 리처드 바크Richard Bach의 소설 ‘갈매기의 꿈’은 장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 책의 저자인 리차드 바크는 열광적인 비행 조종사였다. 그는 그 소설에서 갈매기들을 등장시키면서 물질주의에 대항하는 주인공 조나단 갈매기의 항거에 박수를 보낸다. 다른 갈매기들은 전부 물고기를 얼마나 더 많이 잡아 배불리느냐에 관심이 가 있었다. 그러나, 조나단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고기를 잡아 올린다든지, 싸우는 것이 아니라 비행하는 것이고 또 먹이 문제가 아니라 속도 문제라고 확신했다. 조나단 시걸의 야망은 끝이 없어서 소리보다도 빠르고 빛보다도 빨리 날고 싶어 한다. 나아가 생각의 속도만큼 날고 싶어한다.

 

 

“그는 자신이 뼈나 깃털이아니라 그 어느 것에도 제한을 받지 않는, 자유와 비행의 완전한 이념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 책은 우리가 자유로운 존재이기 때문에 원하는 대로 되고 가고 싶은 대로 갈 수 있으며,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자아실현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이야말로 ‘굳게 섬’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래서 리처드 바크는 부인과 여섯 자녀를 떠나면서, 자유만이 인생의 진정한 이슈이며, 결혼이나 가족, 그 어떤 것도 개인적 자유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런 리챠드 바크의 생각이 우리 시대에도 엄연히 배여 있다. 자유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에서의 자유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는 것은 바로 자아를 부인하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에 깊이 심취하여 그것에 몰입하여 어떤 업적이나 성취를 맛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주 안에서 걸러내어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바울은 리챠드 바크와 생각이 다르다. 그는 성경적인 입장에서 굳게 선다는 것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 후서를 다소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기술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 가운데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말하고 있는 재림을 잘못 이해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즉각적으로 오실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고, 이것이 바울의 가르침이라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일부 성도들은 세상의 종말, 끝 날이 벌써 왔다고 말하여(살후 2:2-‘주의 날이 이르렀다’), 일을 하지 않기도 했다 소위 ‘마시고 죽자, 먹고 죽자, 즐기고 죽자’는 부류가 있었던 것이다.

(살후 3:6-15: 그래서 바울은 ‘게으르게(규모 없이) 행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규모 없이’ ajtavktw" '불규칙하게'(도덕적으로), 무질서하게 <살후 3:6>부. irregularly;

  1)무질서한, 줄에서 이탈한 2)불규칙한, 극단적인 3)규정된 순서나 규칙에서 벗어-3번 등장한다).

 

 

세상의 끝이 왔기 때문에 이젠 막 살아도 된다는 무질서한 그룹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세상의 종말이 왔기에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느슨해졌고, 해이해 졌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바울은 그릇된 재림관을 바로잡아 주고, 재림 전 어떤 징조가 있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자 이 편지를 쓴 것이다(살후 2:3-‘재림 전에 반드시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일컫는 징조가 나타날 것이다’). 또 어떤 부류는 이미 재림이 벌써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부류들도 있었다. ‘더 이상의 재림은 없다’고 오해하는 무리들도 있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왜 이렇게 재림에 대해서 성급하게 생각하였나?

그것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볼 수 있듯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이미 죽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성도들의 걱정이 많았던 것’이다. 교회마다 지역적인 특색과 색깔이 있고 그 나름대로의 문제점과 이슈가 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최대 관심사는 ‘죽은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였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살전 4:13)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죽은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로 많이 걱정하고 슬퍼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죽음은 ‘잠자는 것’이라고 하였고, 주님이 재림하실 때, 죽은 자들이 먼저 부활하고, 살아남은 자들은 그 뒤를 따를 것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 재림은 갑작스럽게 닥칠 것이라고 분명히 이야기를 했지만 데살로니가 성도들 가운데 잘못된 종말관, 재림신앙을 소유하여 ‘그 날과 그 때’를 오해하는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세상의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다는 것이 기독교의 역사관이며, 그것을 우리는 ‘직선적인 역사관’이라고 부른다. 주님이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셨고 다시 오실 재림시에는 심판의 검과 부활의 선물을 갖고 오실 것이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이 재림에 대한 생각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지극히 분주하고 바쁘고 ‘먹고 살기 위해’ 분주한 이 현 세상에서 ‘땅 중심적인, 세상중심적인’ 가치관이 아닌 ‘종말중심적인, 재림중심적인’ 가치관을 곱씹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기대는 언제나 세상중심적이다. 우리는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살기 때문에 세상에 속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구원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소속은 마귀(사탄)이 주관하고 주인인 세상이 아니다. 우리의 소속은 이제 하나님이다. 주님을 우리의 구세주와 주인으로 받아들임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이 오시기까지 ‘세상-교회, 세상-하나님’ 두 가지의 영역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토록 미약하고 연약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지극히 변덕스럽고, 한없이 안일해질려고하며, 틈만 나면 부도덕하고, 자꾸만 게으르고, 자주 불순종하며, 매번 짜증과 울화와 스트레스가 가득 차며, 늘 감사보다는 불평과 원망을 더 줄기차게 하며, 날마다 어떤것이 주어지든 만족할 줄 모르며, 기회만되면 자기만의 울타리에 자신을가둬 역행하는 등이 모든것들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그래서 바울은 지금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권면하고 있다.

 

 

 

V. 15, 형제들아 굳건하게 서서…전통을 지키라

본문에서의 전통(유전)은 예수님에 의해 선포되고 사도들에 의해 계승된 복음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말하는 복음을 대변해주는 말이기도 하다.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 전통이라는 말로 바울은 표현하는데 이것은 복음서에 나오는 장로들의 유전이나 바리새인들이 가르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가르치심과 부활하신 후에 성령을 통해서 사도들을 세우신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서 말씀하신, 바울을 통해 말씀하신 것들을 지칭한다. 이 말을 현대적으로 풀이하자면 바로 ‘복음’이다. 더 확대한다면 우리가 펼쳐 놓고 있는 이 성경 말씀을 이야기한다.

 

 

굳게 서라!!!-종말에 대한 심각한 혼돈이 있는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외친다. 굳게 서라. 마음을 다 잡아라.

Stand firm and hold…굳게 서는 일은 언제나 주님이 인도하시는 궁극적인 목표이자 골인지점이다. 혼탁한 세상의 가치관들로 인해 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하는 그들, 재림에 대한 불건전한 가르침으로 신앙에 대한 회의와 흔들림이 있는 그들에게 바울은 ‘굳게 서라’고 이야기한다. ‘굳게 서서…지키라.’

 

 

굳게 섬-지킴/ 이 두 가지는 긴밀하게 유대관계를 맺고 있는 듯하다. 말씀을 지키는 것과 말씀을 준수하는 것, 그리고 굳게 서는 일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인 듯 하다. 그래서 말씀은 이토록 중요한 것이다. 그 당시의 말씀은 ‘입술의 말과 서신으로’ 전해졌다. 이것은 단순한 교훈이나 충고나 여담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왜냐하면 바울은 철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서 사역하고 그의 사역은 철저한 성경적인 가르침에 기초했으며, 그의 설교는 그 성경에 근거하여 선포되어졌기 때문이다. 만약 바울의 가르침과 사역과 그의 삶이 성경-구약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근거되지 않았다면 그가 신약성경의 물고를 틀 수 있었을까?

 

 

 

바울은 굳게 서서 지키라고 권면하고 있다. 이 ‘굳게 섬’은 어떤 정신적인 훈련이나 심신 단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굳게 선다는 것은 ‘말씀에 굳게 선다’는 것이다. ‘말씀을 지킴’으로 ‘굳게 섬’을 말한다. 성경적인 가르침과 성경적인 원리들에 입각하여 날마다 살아가고 있는가? 그렇다면 나는 굳게 서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특별한 도덕적인 죄악이나 윤리적인 일탈 행위가 없다. 도덕적인 하자도 없다. 난 법 없이도 살 사람이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굳게 서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바울의 굳게 섬은 ‘말씀에 의거한 지킴’이 수반된다. 말씀을 지킴은 어떤 강제적이고 강압적인 율법준수 행위가 아니다. 구약시대에는 어쩌면 그런 모습이 드러났을지 모르나 성령 시대로 들어선 지금 우리의 모든 행위는 ‘은혜로’ 이뤄져야 한다. 말씀이 충만한 사람은 말씀을 지키는 것도 쉬울 것이다. 그러나, 말씀이 빈약하고 기근에 시달리는 사람은 말씀을 지키는 것이 곤욕일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그 분 앞에서 굳게 설려면 말씀이 우리 안에 흘러 넘쳐야 한다. 말 그대로 흘러 넘쳐야 한다. 밑바닥에 훤히 드러난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퍼올리면 갈증을 채울 물이 없다. 부족하다. 그러나, 깊은 우물에서 퍼 올린 물은 갈증 뿐만 아니라 온 몸을 충분히 적시고도 남을 여분의 물이 충분하다. 말씀도 마찬가지이다. 말씀이 충분하면 그 말씀이 나를 지배하고 그 말씀으로 인해 굳게 서는 역사가 있다. 여러분들 중에 흔들리는 자가 있는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심성과 영혼이 있는가? 무엇보다도 말씀으로 돌아가길 바란다. 세상은 우릴 ‘바람에 나는 겨’처럼 흔들리게 만들지만 말씀은 우리를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게 만들 것이다.

 

 

여러분은 철새들의‘귀소본능’을 잘 알 것이다. 새들은 비상하리만치 규칙적이고 정확하게 ‘이동해야 하는 때’를 잘 안다. 봄이 되면 왔다가 가을이 되면 더 안전하고 따뜻한 지방, 먼 곳으로 이동하는 그 철새들 말이다. 맹크스슴새라는 새가 있다. 1952년에 유럽에 있는 웨일즈 지방 스코크홀름 섬에서 한 마리를 잡아 약 386km 떨어진 켐브리지 내에서 그 새를 풀어 주었다. 근데 그 새는 7시간 후에 자신의 고향인 스코크홀름 섬의 굴 속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또 다른 경우는, 스코크홀름 섬에서 잡힌 맹크스슴새 한 마리가 대서양 건너 4,800km 이상 떨어진 보스턴의 로간 국제 공항에서 풀려난 적이 있다. 그러나, 12일 반나절이 지난 후에 이 새는 자기 굴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렇게 돌아오기 위해 하루에 약 400km를 난 셈이다.주님은 ‘공중 나는 새를 보라’고 했다. 그들의 육적인 강한 귀소 본능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너는 또 그들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이 엎드러지면 어찌 일어나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떠나갔으면어찌돌아오지아니하겠느냐? 이 예루살렘 백성이 항상나를떠나물러감은어찌함이냐? 그들이 거짓을 고집하고 돌아오기를 거절하도다’”(렘 8:4-5)

 

 

 

‘공중 나는 철새’들도 자신이 고향이 어디며 소속이 어딘지 알고 돌아가거늘 ‘만물의 영장인 우리들’은 어떠한가? 내가 바로 서 있지 못한가? 내가 흔들리는가? 맹크스슴새가 그 먼 거리를 날아 돌아간 것처럼 우리도 말씀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굳게 섬과 말씀을 지킴은 당연한 것이며, 말씀을 지킴과 굳게 섬은 필연적이다. 진정한 자유 또한 ‘말씀을 지킴’과 맞물려 있다. 한없는 자유를 우리는 뭐든지 할 수 있는 무제한성에 비중을 두어 강조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을 위한 자유’(John Stott)를 강조한다.

 

 

 

진정으로 자유하기를 원하는가? 그것은 리챠드 바크식의 자유가 아니다. 세상은 리챠드 바크식의 자유를 강조한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 사람과 세상과 물질과 세속성과 이 땅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 심지어 영혼의 자유, 죄와 죄책감과 상처와 모든 심리적이고 정신적이고 어두운 흑암 권세에 대한 자유는 바로 ‘말씀’으로 인한 굳게 섬으로만이 가능하다. 요한은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고 했다. 여러분들이여, 하나님으로 굳게 서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굳게 서기를 간구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V.16

 

 

 

우리를 사랑하시고-사랑…언제나 우리 인생에 있어 없어지지 않는, 결코 퇴색되지 않는 영원한 삶의 테마요 주제인 것은 바로 사랑이다. 우리가 왜 뻔한 스토리의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가? 바로 ‘사랑’, ‘러브 스토리’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소설에서 ‘사랑으로 산다’고 고백하였다. 그렇다. 사랑이 없으면 이 세상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진공 같은 세상이 될 것이다. 드라마나 영화 같은 미디어 매체들도 사랑이란 영원한 소재가 없다면 결코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사랑은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이다. 그 사랑은 에로스의 사랑이나, 필레오의 사랑(우정)이 아니라 divine love,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이다. 이 사랑은 최고의 이타적 사랑이요, 최고의 희생적인 사랑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사랑을 우리에게 전수해 주셨다

그리고, 몸소 보이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임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자기 성취와 자기 업적과 자기 영광을 다 버렸다. 리챠드 바크는 자신의 모든 직무와 의무와 책임을 던져버리고 무한 비행을 위해 자신의 길, 자유라는 이름으로 행방불명되었지만 그리스도는 달랐다. 자신의 자유를 위해 죄인들을 거부하시지 않았다. 자신의 자유를 위해 죄인들을 껴안으셨다. 그 껴안음은 자신의 가슴에 엄청난 상처와 아픔과 가시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였다. 바울은 이 사랑을 기억하고 있다. 영원히 사라지지 아니 할, 영원히 변색치 않고, 퇴색되지 아니 할 그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 하나님…이런 사랑을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의 사랑은 한 자락의 감동이나 심금을 울리는 자그마한 충격으로 우리 안에 자리잡는다. 그러나 그 사랑은 일시적으로 우리의 감성코드와 감정을 자극하고 때로는 도전까지 준다. 하지만 그 이상은 없다. 그 사랑이 사람의 생명을 구원할 수 없고 그 사랑이 우리의 삶을 인도할 수도 없다. 물론 사랑이 잠시나마 우리의 인생의 이정표는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랑의 대상, 인간적인 사랑의 대상은 언제 사라지지 모를, 없어질, 흙에서 와서 흙으로 가는 멸절성의 존재이다. 불멸성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언제 없어질지 모를, 그리하여 언제 우리의 기억의 추억 저편에 머무를지 모를 사랑, 에로스…. 아무도 내 곁에 없을 때 내게 다가와 나를 만지시고 얼싸하시고 사랑하시던 주님, 나와 교제하셨던 주님. 하나님 아버지….

 

나를 지으신 주님. 내 안에 계셔. 처음부터 내 삶은 그의 손에 있었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내 흐르는 눈물 그가 닦아 주셨죠.-<내 이름 아시죠>노래 가사 중에서

 

 

 

그 사랑

그것이 모든 인류의 사랑을 대변하고 대표하고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온 인류는 그의 사랑 앞에 굴복할 수 밖에 없다. 전쟁과 힘과 이데올로기와 자본주의와 돈과 섹스와 권력과 그 외의 모든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뒤범벅된 세상에서 그리스도는 자신을 생명까지 아끼지 않고 내려놓으심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사랑의 힘으로 세상을 정복하셨다. 이것은 삼류소설에서나 찾아 볼 수 있는 그런 저질의 사랑이 아니다. 이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성경에서 나오는 생명의 복음이다. 물어 뜯고, 시기하고, 분쟁하며, 힘겨루기를 시도하고, 자행하며, 돈으로 사람의 가치를 확인하며, 외모로 사람의 모든 것을 추구하며,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쉽게 대치하며, 대박을 꿈꾸기를 일상화하고, 영혼에 대한 무관심과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이고 추악한 세상, 죄를 심리적인 이유와 원인으로 치부해버리는 인간적인 세계관과 생각들이 팽배하고, 그리스도를 믿는다 하면서도 성경에 자신의 손을 얹고 맹세하는 나라에서조차도 국가적 이익과 개인집단 이기주의에 매몰되어 전쟁을 스스럼없이 자행하는, 사랑이 도저히 나타나지 않는 이런 세상, 아직 어두움의 권세, 사탄의 지배 아래 있는 세상. 그 세상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 주님, 주님은 우리의 전부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사랑이시며,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이십니다 라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에 동의하는가?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우리가 위로 받을 수 있는 것, 우리 맘이 위로 받을 수 있는 것은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주께서 ‘은혜로’ 주셨기 때문이다. 이 위로는 일시적이고 단회적인 위로가 아니라 ‘영원한’ 위로이다. 옆에 있다가도 없어지는 위로가 아니라 언제나 내 옆에 있는 위로, 언제나 변함없이, 굴곡 없이 나를 위로하시고 권고하시고 권면하시고 나를 붙드시는 위로. 그 이름은 기묘라 모사라 전능한 하나님이시라….그는 영원한 모사가, 상담자가, 카운셀러가 되신다. 나의 영원한 모사가 되신 하나님. 감사. 그 영원한 위로자 되신 주님과 늘 동행하는가? 그 영원하신 소망과 함께 더불어 교제하는가?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V.17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권면하기를 ‘마음’과 ‘일’과 ‘말’을 굳게 하시기를 기뻐하셨다. 바울은 여기서 세 가지 영역에서 성도들을 강하게 하고 있다. Encourage와 Strengthen!!!

 

 

1. 마음을 위로하시고

Sweeter than the Air-나의 호흡보다 나의 생명보다 더 귀하신 주님. 주께서 내 마음을 위로하심을 본다. 여러분 그게 보이는가? 허우적대는 내 마음을 위로하시는 주님을 보는가?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언제나 내 마음을, 우리들의 마음을 위로하심을 믿습니다.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굳이 위로하시지 않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굴절되고 왜곡되고 변질된 세상 속에 커다란 위로와 소망이 될 수 밖에 없다. 바울은 여기서 이런 3가지의 영역에서의 동작과 사역이 바울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성부 하나님의 역사임을 그 두 주어를 사용함으로 강조하고 있다. 바울은 아무 것도 아니다. 바울도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사랑한 것은 진실이지만 그 사랑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가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사랑하신 것이고 바울은 그것을 대행하는 agent일 뿐이다.

 

 

 

2. 모든 선한 일과(굳게 하시기를)

성도들이 행하는 모든 선한 사업과 사역과 일과 행위들이 굳게 되어지기를 기도한다. 이것은 기독교적 세계관 속에서 나타나는 모든 일을 지칭할 수 있다. 악덕기업이나 사기 집단이나 횡령집단이나 부도덕하고 반윤리적인, 비윤리적인 모든 직업을 제외한 모든 삶의 행위들, 그것은 선한 일인 것이다. 여러분이 하고 있는 그 직업이 주 안에서 행해지고 정직하고 공평하게 행하여진다면 그것은 ‘선한 일’인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추구하는 모든 행위들은 선한 일인 것이다.

 

 

 

3. (모든) 말에 굳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또한 바울은 입술의 말을 굳게 하기를 기도하고 있다. 말이 뭐 그렇게 중요한가? 중요하다. 말은 엄청나게 중요하다. 바울이 여기서 말을 이야기한 이유를 묵상해보면 많은 영적 유익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의 입술을 주장케 해달라고 늘 기도해야 할 것이다. 혀의 권세를 통해 얼마나 사탄은 지독하게 역사하는지 모른다. 오늘날도 우리 주위에 우리의 말로, 입술로 인해 상처입고 실족하여 낙담한 지체가 있다면 우리는 서로 돌아보아 주님의 기쁨을 충만케 해야 할 것이다.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원하네’-이런 찬양도 있지 않은가?

 

마음과 일과 말…바울이 굳이 다른 많은 요소들 가운데 이 세 가지를 이야기한 이유는 생각해 봄직하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주의 말씀에 굳라, 그의 말씀을 지킴으로 굳게 서라, 주 안에서 굳게 서라!!!

 

"나는 예수 따라가는 십자가 군사라"

 

 

신약성경 디모데후서 4장7-8절과 데살로니가후서 2장15-17절을 바탕으로 해서 <나는 예수 따라가는>라는 주제로 한 설교인데, 바울이 말한 굳게 선다는 것은 리차드 바크식의 해방과 자유가 아니라 성경적인 의미에서의 자기독립과 자립이 무엇인지 알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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