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디모데후서를 본문으로 하여 강해를 한 내용을 포스팅해 봅니다. 1-2장을 텍스트로 하여 '사랑하는 아들들이여,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라는 제목으로 설교한 내용을 같이 공유해 봅니다.
주제가: 복음의 발걸음 땅끝까지(이유정 곡)
① 바울? v.1-2 ② 바울의 디모데를 향한 격려 v.3-7 ③ 바울의 명령-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v.8-18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v.8-10 -v.11-14 바울, 디모데-지키라 -v.15 실패한 이들 -v.16-18 성공한 이-오네시보로 ④ 복음을 부탁하라 v.1-13 -v.3-7 비유-복음의 고난을 받는 이는 어떠해야 하는가? -v.8-10 예수 그리스도는 어떠했는가? -v.11-13 복음을 함께 고난을 받으면 결국은? ⑤ 복음을 부탁받은 디모데야! 진리를 분변함으로, 깨끗케함으로 자신을 드리라 v.14-26 |
① 바울? v.1-2
바울은 자신의 프로필에 여러 가지의 문구로 화려하게 치장할 수 있을 만큼 배울 것을 충분히 배운 사람이었다. 학벌뿐만 아니라 가문, 배경, 인지도, 명성 등에 결코 남들에게 꿀릴 것이 없는 자였다. 바울은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고 할 만큼 자신에 대한 충만한 자신감과 혈통적으로나 지적으로 굉장한 자부심을 가진 자였다. 이런 그가 편지를 기록할 때 자신의 가장 파워풀한 이력 중에 한 가지, 이를테면 율법학자라든가, 가말리엘 문하의 제자, 힐렐 학파의 율법가 등의 프로필 중에서 자신을 소개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을 소개할 때 ‘사도 된 바울’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굉장히 신비한 구석이다.
사도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직접 목격한 사람, 증인witness을 가리켜하는 말이 바로 ‘사도’이다. 사도는 이러한 목격자의 자질이 없으면 사도라고 할 수 없다. 현대에는 사도가 존재하지 않는다. ‘사도교회’ 이런 간판을 달고 있는 교회는 일단 이단이 아닐까? 의심해봐야 한다. 바울은 만삭 되지 못한 자신의 사도적인 자격을 이야기했는데 그것은 바울이 다메섹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극적으로 만났기 때문인 것이다.
기독교 역사가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신약시대의 최고의 사건 다음으로 가장 놀라운 사건을 바로 ‘바울의 회심’을 들고 있다. 핍박자였던 바울이 복음 전도자로 다시 태어난 것은 굉장한 사건 중의 사건이요 이벤트인 것이다. 에르하르트(Ehrhardt)는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가장 귀중한 보물단지가 가운데 하나였다”는 지적은 참으로 타당하다’고 했다. 어거스틴의 회심도 독특하고 특이한 이벤트이지만 이 보다 이전에 하나님께서 바울을 변화시킨 것은 사건 중의 사건이다. 그런데 바울은 이러한 사도적인 자신의 직분에 굉장한 프라이드를 느끼고 있다. 이것은 당시의 최고의 특권과 권리로 여겨졌던 로마의 시민권(ex, 미국 시민권, 미국 영주권)을 바울은 이미 소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더 자신의 정체를 잘 표현해내는 호칭으로 ‘사도’를 택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종교서적이다. 바울도 종교인이다. 그러기에 이렇게 ‘사도 됨’에 의미를 부여하고 무게를 줄 수 있다는 당연한 생각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바울이 다메섹도상에서 어떻게 회심하게 되었는지를 안다면 이 ‘사도 된 바울’이란 말은 더 의미심장할 것이다.
사도행전 22장을 보라. 다 같이 한 번 찾아보기를 권한다.
6절이다.
V.6가는데 다메섹에 가까웠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취매
V.7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가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그러면서 사울이 예수님에게 물은 <두 가지 질문사항>이 있다. 무엇인가?
V.8주여 뉘시니이까
V.9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첫 번째 질문은 “당신이 누구냐?”라는 질문이고,
두 번째 질문은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이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 신령한 체험을 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하며 남은 인생을 살아야 할지 알게 되었던 것이다. 다메섹에서 보았던 그 빛의 광채로 인해서 그는 앞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성경 사도행전 9장 8절과 9절의 내용이다.
V.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V.9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그가 예수님을 만난 순간이다. 그는 늘 자신감과 자부심으로 의기양양한 학자였고 현장가였고 행동가였다. 데모를 했다면 그는 언제나 제일 앞에서 주동자, 주모자, 리더를 감당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고 그러한 자질이나 자격이나 스타일이 있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다메섹에서 만남으로 말미암아 생애 최초로 동시에 최고로 “자신의 무능함”을 깊게 체험한 순간이며 사건인 것이다. 그는 사흘이라는 72시간을 암흑 같은 그 어두움, 앞을 보지 못하는 그 답답함 속에서 자신의 인생의 불안감과 깊은 고민과 번뇌에 시달렸을 것이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라! 1시간 정도만 우리가 누군가를 만났는데 눈이 안 보이고 눈이 멀어졌다! 실명된 것이 아닐까? 왜 이럴까? 그러면서 자기가 만난 사람에 대해서 그 사람의 능력, 초능력에 대해서 한 번쯤 생각해 보지 않을까? 그런데 바울은 72시간이었다. 3일이란 시간 동안 바울은 소경인 채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생각했을지 모른다. 얼마나 어리석은 삶을 살았으며, 과거에 자신이 자랑했으며, 자신했던 그 삶이 다메섹도상에서 만난 환상적인 사건 가운데서 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생애 최고로 없어 보이는, 자기의 시야와 시각이 완전히 마비되는 경험 가운데서 자신의 인생과 삶이 허우적대고 있음을 절감했을 것이다. 예전의 핍박자요, 살인자요, 포행자인 그에게 이제는 주님 자신에게서 그리고 ‘아나니아’라는 경건한 제자로부터 자신의 사명을 듣게 된다.
9장
V.15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V.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22장
V.14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V.15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너의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V.16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본문에 나오는 1절의 그 “하나님의 뜻”이다(고전, 고후, 엡, 골). 바울은 그러한 하나님의 뜻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반열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오직 하나님이 원하였다는 그것뿐이다>. 바울에게는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그런 여지가 없었다. 그의 구원에 바울의 그 화려한 학력이 무슨 영향력을 행사하였는가? 그가 가진 종교적인 열성이 그를 구원받게 하였는가? 그렇지 않았다. 여러분 중에 혹시라도 자신이 구원받았는지에 대한 의심이나 의문이 드는 사람이 있는가? 그런 사람은 주님을 영접하라. 또한 자신이 신앙생활하면서 ‘내 같은 인간이 구원받았겠는가?’라고 의심하는 사람은 없는가? <구원은 그 사람의 행실과 행위에 관계없다.> 하나님이 그 사람, 여러분들을 원하셨기 때문에 여러분은 그 사실을 믿음으로써 구원받은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뜻, 그것뿐이라는 것이다.> Because that is what God wanted. 누가 나와서 하나님은 왜 그렇게 원하셨습니까?라고 항의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바울의 자기소개를 보라!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이제 그는 자신이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닌 사람인지를 자신에게 기초를 두고 삶을 영위하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은 무능하고도 가치 없는 사람, 한계 많은 인간인 것을 다메섹에서 뼈저리게 느낀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모든 인간적인 것들을 뒤로하고서 디모데에게 메시지를 띄우고 있다. <사도 된 바울은>이라고 말이다. 바울은 그렇게 자신을 소개한다. 좀 어려운 말로 자신의 ‘존재의 이유’를, 존재의 목적을 <하나님과의 관계>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 사도는 유일하기 때문에 연봉을 많이 받거나 인지도나 명성에 있어서, 세상의 모든 사람이 알아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과 개인, 바울 개인과의 1대 1의 관계’에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그것이 가장 중요했다.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했다. 바울은 자신의 판단과 생각대로 초대 교회의 기독교 신자들의 믿음을 해석했고 그로 말미암아 스데반을 죽이는 비극의 장본인이 되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2절에 디모데를 향한 ‘긍휼’-여기에서만 나오는 인사말-뿐만 아니라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히 얼마나 컸는지를 피부로 절감했던 인물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행적)대로 부르신 것이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바울은 하나님의 시나리오대로 부르심을 받은 인물이었다. 그것을 우리는 ‘예정’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TV에서 무슨 프로그램 방영 예정할 때 ‘예정’이란 말을 본다. 하지만 그 예정은 방송사의 사정에 따라 변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예정하심, 계획하심은 절대 오차가 없고 실수가 없고 후회가 없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모름으로 인해, 무지로 인해 초대교회의 신실하고도 충성된 집사인 스데반을 죽였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바울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하심, 예정하심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디모데후서를 쓸 당시, 아니 신약시대가 출범할 당시, 바울 당시에 지중해 지역은 정말 현대만큼 아니면 현대보다 더 부패한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한 윤리적인 혼돈과 부패, 사상적인 범람, 물질적인 풍요, 종교다원주의와 우상의 넘침... 이러한 모든 것들이 기독교를 도전하고 있었다. 기독교는 도전받고 있었다. 기독교는 이제 막 갓 태어난 햇병아리 같았다. 기독교는 원래 기원이 유대교에서 나왔다. 하지만 유대교에서도 기독교는 배척을 당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교로부터도 배척을 당했으니 다른 종교나 문화나 세계관과는 더하지 않겠는가? 그러한 혼돈과 혼란과 무질서의 시대에 바울의 개인적인 과거의 살인의 경험, 사람을 죽이기까지 한 그 경험은 자신이 믿고 있던 신앙에 엄청난 무게감을 더해주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다들 종교적인 박해와 종교적인 무시와 무관심으로 바울의 기독교에 대해 냉소적이었고 냉담하였지만 바울은 그렇지 않았다. 바울의 하나님의 예정하심 가운데 주어진 사도, 그는 구원과 동시에 사도가 된 것이다. 회심과 소명이 동시적으로 일어난 경우이다, 됨은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사건이기 때문에 주변의 상황과 환경이 변하더라도 그의 단단한 믿음은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디모데는 흔들릴 수 있었지만 바울은 흔들릴 수 없었다. 디모데는 살인자가 아니었지만 바울은 살인자였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했다!’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은 죄의 맛을 알지만 죄의 맛 이후에 오는 깊은 쓴 맛과 후유증에 더 고민하고 아파하는 것이 현실이다. 바울의 자신의 영적인-바울은 스데반을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사상적으로 죽인 것이 아니다!-, 육적인 부패-‘실제로 죽인 것이다!’-그런 바울이 자신에게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무언지를 가르쳐주신 하나님의 뜻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을 져 버릴 순 없는 것이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사도가 된 것이다. 이것이 그에겐 최고의 명함이요, 최고의 특권이요, 최고의 의무였다!
여러분에게 있어 그리스도인이라는 명함은 어떻게 다가오는가? 여러분의 직분은 어떻게 다가오는가? 그것을 가지고 사람들을 온전히 섬기는가? 아니면 군림하려고 하는가? (ex, 담임목사님 식판수거 시 다른 이의 섬김을 거절하시는 모습 Vs 한국교회 교역자들의 섬김에 익숙한 모습).
그가 사도가 된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과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고 예정된 우연이었고 계획된 약속이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공동체의 사역자가 된 것, 우리 교회의 지체가 된 것, 마하나님의 한 멤버가 된 것은 하나님의 뜻과 생명의 약속으로 된 것이다! 이것은 놀라운 패러다임이다. 이것은 인터넷 카페에 멤버십으로 가입하여 쉽게 기분 내키면 탈퇴할 수 있는 그런 동호회나 회원의 개념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생명의 약속대로 되어진 것이다.
우리가 우연한 고향에서 우연한 부모를 만나 우연한 교육을 받고 우연한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연한 학교와 우연한 교회를 다니는 것이 절대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와 약속대로 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자유의지를 오히려 하나님의 깊고 넓고 큰 패러다임 가운데 귀속시킴과 동시에 우리의 자유의지가 단순히 수동적이고 부정적인 태도로 일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위한 자유’(존 스토트)로 나아가게끔 만드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자유(의지)는 예수의 생명의 약속과 하나님의 뜻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마하나님 지체 여러분!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교회 우연히 나와서 발을 디디게 되고 학습과 세례를 받음 되는 제도적인 문제가 아니다. 대학을 입학하면 등록금을 냄으로써 그 대학의 대학생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구원은 우리가 받은 놀라운 구원은 구원 등록금을 내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하심, 예정하심 하에 ‘은혜와 긍휼과 평강’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영원한 구원인 것이다. 이것은
(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복음으로 말미암아 생명과 썩지 아니함으로 우리 같은, 지금은 20대, 모든 것이 내 것 같고 내가 뭐든지 하면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과 열정과 힘과 에너지가 풍부한 젊음이지만 30대, 40대, 50대... 결국은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 썩어지는 육체로 인생을 마감할 우리에게 영원을 선물하시는 구원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바울은 죽었다. 바울의 시신도 썩어져 흙으로 돌아가버렸다. 하지만 바울은 영원한 하나님의 구원의 반열에 서 있는 위대한 사도였다는 것을 회심 이후에 늘 자각하였고 그것을 디모데에게 이야기하였고 지금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를 바울처럼 ‘죄인 중의 괴수’ 같은 우리를 불러 그의 백성 삼으신 구원의 하나님을 위해 감사하자! ❒바울의 사도직은 하나님의 뜻과 그리스도의 생명의 약속 가운데 주어진 것이다. -우리의 직분은 하나님의 철저한 예정과 섭리 가운데 주어진 것이다.
② 바울의 디모데를 향한 격려 v.3-7
당시 세계를 제패하고 있었던 제국은 바로 로마였다. 로마시대는 양자로 삼는 것이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어 둔 사람이 두 명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아우구스투스였고 한 사람은 바로 데키우스 브루투스였다. 브루투스는 카이사를 죽인 마르쿠스 브루투스였다. 둘 다 암살자 세력이었다. 동명이인! 결국 아우구스투스가 카이사르의 권력을 승계하면서 카이사르의 성을 따르게 되면서 자신의 양자로 입적되게 된다. 바울은 이러한 로마의 관행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관행을 알고 있건 알고 있지 않건 복음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사건이다.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바울은 격려하고 있다. 디모데의 나이가 20대가 아니라 40대라는 것이 다소 의아하기도 하지만 성격적으로나 기질적으로, 신체적으로 유약했던 디모데를 생각해 본다면 바울의 격려는 굉장히 파워풀했다. 그것도 바울이 이제 자신의 죽음이 다가왔다는 것을 알고 얼마 있지 않으면 네로 황제의 핍박 하에 자신이 순교의 제물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현실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딤후 4:6)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딤후는 바울의 유언장과도 같은 서신이다. 인생의 마지막에 자신의 하고픈 간절한 말 중에 자신을 향한 격려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디모데에게 있어 굉장히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감사하고... 지금 디모데는 굉장히 위축되어 있다. 시대의 풍조, 이단의 남발, 자신의 성격적인 유약함과 연소함, 경험 부족에서 오는 여러 가기 혼돈스러운 영적인 감정, 감정적인 힘듦... 그런데 바울의 인사말 이후에 나오는 말은 ‘감사’였다. 디모데의 상황에 대해서 언급하기 이전에 자신의 디모데를 향한,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를 향한 간절한 열정, 깊은 사랑을 기도하고 있다, 감사하고 있다는 것을 바울은 보여주고 있다. 너를(=에 관하여)... 한 사람을 위하여 이토록 간절히 간구하는 바울의 마음, 아버지가 아들을 향해 기도하는 기도는 이만큼 절실했다. 바울의 기도의 축은 ‘간구(생각)->생각(간구)->감사’. 이러하다. 중보기도는 사람을 기억하는데 가장 필수적인 요소인 것 같다. Ex> 휴대폰 주소록 들고 기도하는 습관!
혈육의 정보다 더 한 하나님 안에서의 영적인 부자관계의 깊음! 바울은 디모데를 가슴으로 격려하면서 디모데를 굉장히 보고 싶어 했다. 이제 천국 가서 보는 것을 제외하고는 시간이 없었다.
바울은 4장에서 ‘어서 내게 속히 오라’(9절)고 말하였다. 바울이 디모데를 보고자 하는 목적이 여기에 드러난다. 사람이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만남이 서로의 기쁨을 더하게 하는 것이다. 통신매체가 발달한 오늘날에는 다른 방편으로 사람과 사람이 대면할 수 있지만 바울 당시에는 이러한 대면함, 만남 face to face가 가장 좋은 만남이었다. 감옥에 갇힌 바울이 디모데를 오라고 하는 이유는 바로 ‘기쁨’때문이었다. 냉철하고 냉정하고 과격했던 사울의 이름을 썼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이후로 부드러운 목자의 마음을 가지게 된다. ‘마가’ 문제에서 물러서지 않았던 단호함과는 달리 하나님의 제자를 향한, ‘영적 아들’을 향한 그리움과 애절함은 참으로 부드럽다.
사랑하는 마하나님 여러분!
이제 신년도 2개월째로 접어들고 있다. 목사님의 설교 빛 시리즈 중에서 ‘격려’가 있었다. 우리는 얼마나 서로를 격려하고 있는가? 다들 임원, 부장, 직분자로 섬기면서 일에 치이고 있지는 않는가? 축구경기를 할 때 서로 이야기를 많이 해야 한다. 팀 경기는 서로 이야기를 많이 하면서 서로를 격려하고 서로에게 힘이 되는 말, 위로의 말을 해주어야 한다. 경기에서 지는 팀은 서로 커뮤니케이션이 없는 팀이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바울이 디모데를 마지막까지 격려하면서 대화를 시도하고, 편지를 쓴 것이다. 나는 군대 가기 전에 예비역들과 족구를 자주 했다. 축구공으로 놀았던 유년 시절보다 야구공으로 놀았던 시간이 더 많았던 나에게 축구, 족구는 쉽지 않았다. 예비역들은 족구를 못한다고 얼마나 핀잔과 스트레스를 많이 주었는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족구는 같이 하자는 것이다. 상처? 그래서 나는 운동신경이 좀 부족하고 그런 친구들의 마음을 잘 이해한다. 지금? 축구? 족구? 여러분이 판단하시길...
우리 서로서로가 격려하는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서 가지만 복음은 그냥 단순한 명령체계나 시스템이 아니다. 복음은 따뜻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기의 사랑을 보여주신 사랑이다. 그의 몸에서 흘러내린 핏방울은 뜨거운 것이었다. 우리 가슴에서 나오는 말과 격려와 사랑의 몸짓도 바울이 디모데를 향한 것처럼 따뜻한 것이었음 한다. 우리 옆의 지체에게 한 번 고백해보자.
“나 보다 네가 더 잘 생겼습니다! 나 보다 네가 더 괜찮으십니다! 너는 하나님의 최고의 유망주야!”
바울은 디모데를 향해 격려하면서 그를 칭찬해주고 있다. 격려에 있어 칭찬은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디모데의 ‘청결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을 칭찬하고 있다.
조상 적부터 섬겨오는 하나님께,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던 믿음... 디모데가 모태신앙인이었음 알 수 있다. 그의 믿음은 ‘청결한 양심’이었고, ‘거짓이 없는 믿음’이었다. 모태신앙인들이여! 자신의 믿음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가? 바울은 ‘못해 신앙’으로 바뀌어버린 오늘날의 모태신앙인들에 대한 세태에 대해서 오히려 가슴 아파하지 않을까? 하지만 오늘날의 모태신앙들은 오히려 ‘못해 신앙’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큰 문제인 듯하다. 하지만 바울은 이러한 ‘믿음의 역사성’, ‘믿음의 뿌리’를 감사하고 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혀 목숨이 언제 달아날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칭찬하고 있다. 과연 이러한 여유가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과 생명의 약속’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죽음, 사망으로 인생이 끝날지 모르지만 그에겐 ‘하나님의 뜻과 생명의 약속-죽음의 약속 후의-’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울이 앞에서 ‘나의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라고 한 것이 더욱 의미가 확장된다고 본다. 외조모 로이스, 어머니 유니게 그리고 친아버지의 이름 대신에 자신의 이름, 바울을 ‘아버지’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외조모의 믿음과 어머니의 믿음의 가르침 가운데 성장한 디모데가 ‘영적 아버지’인 바울로부터 믿음의 가르침을 받은 것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동역자들도 언제나 격려가 필요하다?(디모데도 격려가 필요했다)
믿음의 동역자의 회복은?
가슴의 격려, 은사의 회복, 하나님의 마음 알기(두려움 X, 사랑, 능력, 근신하는 마음)
여러분 주위에 힘들어하고 있는 지체가 있는가? 마음 상해 아파하는 지체는 없는가? 그 사람을 칭찬해주라!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지 않는가? 우리들은 다 약점도 많고 결점도 많고 부족한 점이 많다. ‘이유정 목사님의 곡’....‘채우소서’의 가사를 알지 않는가?
우리의 공동체가 서로를 칭찬하고 격려하는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다. 옆 사람 바라보면서 ‘당신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실패작이 아니라 ‘당신은 하나님의 명품입니다’.
그렇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명품 됨, 명품 된 정체성, 명품된 신분을 꼭 기억하자!
바울은 디모데가 심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그는 몸이 좋지 않아서 바울이 약으로 포도주를 쓰라고 딤전에서 언급했다-힘들어하고 있기에 하나님의 은사를 새롭게 소생시키기를 권면하고 있다.
(6)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바울의 안수기도는 굉장한 힘이 있어 병든 자들의 치유와 귀신의 떠나감 등과 같은 놀라운 능력이 나타났다. 안수는 이처럼 능력이 있다. 우리도 이러한 능력을 조심스럽게 사용했으면 좋겠다. 우리가 기도할 때, 중보 기도할 때 머리에 손을 얹는 것은 못 하지만 서로의 손과 신체부위에 손을 얹고 기도했으면 좋겠다. 여기서의 은사는 단순히 ‘하나님의 은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아우를 수 있는 말씀이다. 컴퓨터는 우리를 안수할 수 없다. 기계는 우리를 안수할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람들끼리 안수할 수 있다. 머리에 손 얹기만 제외하고.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의 능력, 각자에게 있는 성령님의 권세로 서로서로 축복하며 기도하는 공동체! 바로 마하나님이길 소망한다. 왜냐하면 마하나임은 바로 하나님의 군대, 하나님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③ 바울의 명령-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v.8-18
보통 부모님들의 마음이 이렇다. 자기가 공부를 잘 못했으면 자식은 꼭 공부를 많이 시키고 싶어 하는 것이 부모님이다. 우리 할아버지께서는 굉장한 구두쇠셨다. 그래서 우리 부모님께서 이런 부분에 굉장히 할아버지의 이러한 스타일로 인해 많이 힘들어하셨다. 그래서 우리 부모님은 우리들을 키울 때 인색하게 베풀지 않으셨다. 그것이 부모님의 마음이다. 바울은 지금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다. 자기는 복음 때문에, 이 복음 때문에 갇혀 있다. 그런 상황에서 인간적으로, 보편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반응은 너는 복음 때문에 감옥에 갇혀선 안 된다. 감옥에 갇히지 않으려면 당시 지중해의 지도 중에서 특별히 종교적인 핍박이 심한 지역들을 주의하고 항상 도망칠 준비를 해야 한다. 뭐 이런 식으로 자기의 비참한 처지-바울은 상상 속이나 사상 속에서 감옥에 갇힌 것이 아니었다. 실제 감옥이었다!-를 피할 수 있으면 피하라는 것이 보통 부모나 스승의 마음인데 바울은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이야기해 놓고는 ‘너도 복음 때문에 고생 좀 해봐야 한다’ 이런 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굉장히 엉뚱하고 생경한 풍경이다. 머라고 말하고 있는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v.8-10
(8)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바울 사도는 너무 한 것이 아닌가? 지금 디모데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얼마나 힘겨워하고 있는지 뻔히 알기에 편지를 쓴 사람이 몇 마디 툭툭 던지더니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하는 것은 진짜 너무 한 것이 아니냐? 고 생각할 수 있다. 디모데는 자기가 당하는 고난, 에베소에서 당하는 고난이 자기가 잘못 살아서, 이를테면 카드를 너무 오버해서 썼다든가 아니면 빚을 너무 많이 졌다던가 디모데가 실수를 너무 많이 해서 교인들이 디모에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던가 그러면 그 모든 어려움이 디모데 탓이기 때문에 덜 힘들 수도 있다. 원인이 자기에게 있으니깐. 하지만 지금 디모데의 고난은 자기가 복음을 위한답시고 하는 일로 인해, 사역으로 인해 당하는 고난이었다. 그런데 바울은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난다’고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고 있다.
왜 바울이 이렇게 다급하게 몰아치는가?
그것은 첫째, 바울이 죽음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인생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인생의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둘째, 비록 바울도, 디모데도 힘들지만 복음과 함께 고난 받으라고 또 이야기하는 것은 복음이 그만큼 가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생순’ 영화를 보면 핸드볼 선수들이 피나는 훈련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운동선수들이 힘들게 훈련받는 것을 보면서 옆에서 지켜보던 관계자가 선수들이 너무 힘들어하니깐 이젠 훈련 그만 받고 집으로 돌아가 편하게 쉬어라고 이야기하는가? 올림픽 금메달을 앞두고 준비하는 선수들에게 그들의 훈련이 힘들다고 해서 그만하라고 명령하는 사람은 없다. 그들에겐 분명한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바울의 심정이 이러한 심정일 것이다. 바울과 디모데, 복음 전도자에겐 분명한 목표가 있기 때문에 힘들어도 그만두라고 할 수 없다. 분명한 비전과 지향점과 방향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바울은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라고 말한다. 부끄러움의 원인은, ①복음 그 자체, ②복음의 상황,③ 복음 전도자이다. 아마도 디모데는 복음이 당시의 에베소와 이방 사회에서 미칠 영향력과 파급효과가 어떤 것인지를 피부로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복음을 전할 때 많은 반대가 있었는데 그것은 이방사회에서 신전 중심으로 장사를 하던 사람들이 바울의 복음으로 인해 더 이상 우상들과 기념품들을 팔아먹을 수 없기 때문에 폭동까지도 일어날 수 있는 위기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것으로 인해 디모데는 복음 자체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을까? 더 나아가서 바울이 복음 때문에 감옥에 갇힌 것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느꼈다?
바울은 ‘두려움’이란 단어가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곳에 ‘부끄러움’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네로는 신자들을 이상한 방법으로 핍박했다. 보통 친한 친구가 공판에 참석하여 피고를 옹호하면서 기껏해야 공정성을 신봉하는 로마법의 전통에 따라 선처해줄 것을 요청하게 했다.
바울은 로마 문화에서 ‘권력’이 크게 가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부끄러움’이란 말을 사용했을 것이다. 당시 겸손은 덕이 아니라 악이었다. 따라서 종교적인 경험을 주장하는 사람은 권력 있는 사람이 되리라고 기대되었다. 그러나 투옥은 ‘무력하다’(powerless)는 증거였다. 권력이 중요시되는 곳에서 고난과 연약함은 부끄러움의 원인이었다. 어떤 성도들은 바울의 투옥이 그가 더 이상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한다는 증거, 심지어 그의 메시지가 잘못된 것이라는 증거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바울이 ‘두려움 ’ 대신에 ‘부끄러움’이란 단어를 쓴 것은 그 말이 문제의 핵심에 더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연약하고 쓸모없게 보이는 것을 두려워한다. ‘두려움’이란 ‘무엇으로 인한 두려움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에 대해 바울은 아마도 연약하고 쓸모없는 사람으로 비치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바울의 시대나 우리의 시대나 예수님께 충성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에 의해 이와 같이 평가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러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디모데에게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도전하면서 바울 자신도 부끄러워하기를 거부한다.
➊, ➋, ➌의 모든 것들을 부끄러워할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고 부분적으로 부끄러워할 수도 있다.
... 누구 때문에 당하는 일인가? 이러한 ‘의식’,‘인식’이 필요하겠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한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하지만, 자세히 들추어보면 나는 복음 자체를 부끄러워하진 않지만 때때론 전도의 현장이나 선교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아이러니칼 한, 혹은 스타일과 별로 맞지 않는 현상들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Ex/ 분당샘물교회의 선교팀의 국내외적인 피랍사건으로 기독교에 대한 맹공격이 드러나는 것으로 인해 그들의 용기를 칭찬하고 격려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부끄러워했다! 하지만 바울은 오늘 디모데에게 말한다. 부끄러워하지 말라!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벌어지는 모든 경우에 대해서 부끄러워해선 아니 된다. 인간이 저지른 실수와 연약함이 분명히 있을 수 있지만 복음 자체, 복음 전도자, 복음의 상황에 대해서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바울은 디모데에게 명하고 있다.
사랑하는 마하나임 지체 여러분, 무엇을 부끄러워하고 있는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한 적은 없는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라!-복음 자체, 복음 전도자, 복음의 상황
우리는 복음 자체를 부끄러워하진 않는다. 그러나 때론 길거리에서 너무 요란스럽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눈살을 찌푸릴 때가 종종 있다. 나는 그런 전도방법을 싫어한다. 하지만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이기에. 우리는 복음 전도자를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가장 부끄러워하는 것은 바로 복음으로 인해 빚어진, 복음의 상황일 것이다.
복음 사역자의 신분... 낮은 연봉, 보험도 안 되고, 카드 신청도 안 되는 사역자, 대출도 안 돼서 차 보증으로 카드 만든 사연. 내가 과연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한 적은 있던가? 교회 안에서 자랑하는 것은 누구나가 다 하는 사실! 과연 나는 세상 가운데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하는가? 바울처럼 모든 도전과 응전을 무릅쓰고 반대와 핍박과 억압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고난을 달게 받는 모습이 있는가?
... 아내의 힘들어함! 경제적, 신체적, 정신적 스트레스들! 나는 몇 번쯤 사역을 때려치우고자 한 적은 없는가? 가정을 위해 복음사역을 내려놓고자 하지 않았던가? 그것이 '복음과 함께 받는 고난‘이었던가?
바울은 무려 8년을 길리기아 다소에서 보냈다. 회심하고서 복음 전하기에 급급했던 바울이 과연 여기서 무엇을 했을까? 그것이 의문이다. 고후 11:24-자신이 당한 고난을 죽 열거하고 있다. ‘유대인에게서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다’(39대 × 5=195대?). 39대/ 40대(신 25: 1-5, 2-3)…40대 이상을 때리면 그 사람의 인격을 모독하는 것이고 인간 이하의 취급을 하는 것이다. ‘개 취급’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Mishynah-유대인의 법전, 6개의 법전 중에 4번째 법전에 보면 ‘Makkoth’(strip)-거짓 증거 하는 자에게 40대의 매를 맞게 하라(유대인들은 송아지 가죽으로 만든, 세 겹으로 된 ‘채찍’으로 때린다. 엉덩이에 때린 것으로 대부분 생각하지만 엉덩이가 아니다). 3번의 태장(나무 몽둥이) -40에 가까운 숫자를 때려라는 말로 해석했다. 13대는 가슴, 26대는 등을 때린다(1/3, 2/3). With all my heart!!! 사실 이거 맞고 죽는 사람이 있었다. 만약 39대를 때렸는데 죽었으면 아무 책임이 없다. 40대 이상 때려서 만약에 죽으면 그 사람은 처벌을 받는다.
–
바울은 고난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인가?
고난은 ’ 복음이 주는 악한 것을 받는 것‘
sugkakopaqevw= paqevw+kako"+sug(받다+나쁜+함께)... |
‘더불어 부당한 대우를 받다, 냉대를 분담하다’ 의미이다. 하나님이라는 그 이름만으로 감사하자. 우리에겐 하나님의 이름의 명예가 있지 않은가?
이 모든
①복음,
②복음 전도자,
③복음으로 인해 벌어지는 상황(환경)에 대해서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주를 위하여’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명분은 분명한 것이다. 바로 ‘주를 위하여’...‘주를 위하여’당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는 우리는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위대한 명분, 대의명분! 바로‘ 주를 위하여’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이익과 이득과 이윤과 입장과 의견을 위해서 헌신하다가 당하는 고난과는 차원이 다른, 인간적이지 않는, 신적인 명분, 목적이기 때문이다.
(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은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아우를 수 있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절대적으로 ‘두려움’이 아니라는 것이다. 솔직히 인간은 원래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아담의 타락 이후 죄가 세상에 들어온 이후로부터 인간은 ‘두려움’과 ‘불안’-그것이 이유가 있든, 없든-으로 감싸인 존재이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떨리고 두렵고 불안한 마음이 없을 순 없다. 하지만 거룩한 ‘떨림’을 제외하고는 그 외의 인간적인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에 노출될 때 우리 자신의 하나님의 긍정으로 무장할 수 있어야 한다. 여러분에게 두려운 마음이 있는가? 그 부정적인 두려움을 던져 버려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마음은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다. self control의 마음이다. 자기 훈련, 자기를 절제하는 마음이다.
[NIV] 딤후 1:7
For God did not give us a spirit of timidity, but a spirit of power, of love and of self-discipline.
하나님께서 디모데를 통하여 주신 마음은 세상의 가치관과 문화적인 도전과 응전 가운데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근신하는 마음이다. 사랑의 힘의 스피릿과 자기 훈련의 스피릿이다.
여러분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복음을 전할 때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이며, 복음을 전하지 않을 때조차도 나가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내가 부끄러워하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위축되고 내가 의기소침해지고 내 스스로 열등하게 느껴지는 그 부끄러움이 그 대상, 상대방에 대한 두려움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대학생이 입학하면 제일 먼저 부딪히는 것은 대학의 문화이다. 현진건의 ‘술 권하는 사회’처럼 대학 사회 속에서 세상의 문화와 가치관이 이제 비닐하우스와 같은 고등학교를 나온 새내기들에게 두려움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요즈음은 워낙 다들 조숙해서 중. 고등학교 때 다 떼지는 않는가? 여러분이 두려워하는 것이 열등감, 콤플렉스인가? 자아상인가? 사람을 두려워하는가? -권위 있는 사람 앞에 가면 말을 잘 못하는 콤플렉스!-. 집안의 경제적 상황-요즘 들어서 돈 없는 것에 대한 열등감을 느끼는 지체들이 많은 것 같다. 초등학생들도 받고 싶은 게 머냐고 물으면 ‘돈’이라고 할 정도니 말이다-, 외모 콤플렉스-요즘 연예인들은 얼굴이 거의 비슷하다, 성형미인 천지, 왜 우리나라의 문화의 흐름이 이렇게 흘러가는지 모르겠다. 외모 지상주의가 빚어낸 비극이 아닐지-. 여러분이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하는 것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 믿음으로 정리해 둘 필요가 있다. 대학시절, 20대 초중반에 가치관이 완전히 주조되기 전에 여러분의 약점에 대해서 믿음으로 바라보는 시각과 관점을 형성해 둘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대학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세상의 가치관 속에 함몰되는 경우가 많다.
바울은 소극적으로 부끄러워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고 말한다.
8절... 복음은 본질적으로 좋은 것이다. 그래서 Good News이다. 하지만 복음은 바울에게 늘 좋은 것만 아니었다. 복음은 언제나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고난’을 가지고 왔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복음이 좋지 않은 ‘부복음’이라 할 수 있는가? 복음은 복음이다. 복음은 최종적으로 복음이다. 하지만 복음의 행로 가운데서는 언제나 나쁜 것(kako")이 동반된다.
왜 그럴까? 그것의 기원을 우리의 죄에서 찾을 수 있을까? 그렇다.
복음은 하나님의 복음이고 좋은 것이며 굿뉴스이다. 하지만 그 복음, 좋은 소식이 죄 많은 세상에 등장했을 때 세상과 충돌하게 된다. 세상의 사람들과, 사람들의 세계관과 패러다임과 가치관과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우리 주님께서 제일 먼저 그러한 충돌을 경험하셨고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으로 이어진 것이다. 복음은 언제나 좋은 소식으로 들려져서 긍정적이고 힘들지 않은 수순을 밟는다면 복음을 마다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복음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해도, 우리의 영혼의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함과 안식으로의 길을 보장한다고 하지만 지금 현재의 고난과 아픔과 상처를 생각하면서 사람들은 복음을 거절한다. 왜냐하면 좋은 것임을 지금 현재 here and now에서 느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원의 시제 가운데 영혼의 놀라운 승천과 변화를 기대하면서도 사람들은 복음을 거절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복음은 ‘나쁜’ 것들을 함께 동반하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복음에는 고난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 한 때 유행하는 은혜와 물질주의, 복음과 물질주의는 사람들에게 굉장한 호감을 불러일으켰다. 그 복음에는 고난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복음은 고난을 동반한다는 사실, 십자가는 고난을 동반한다는 사실이다. 십자가가 그냥 화려한 목걸이에서 나타나는 사치스러운, 럭셔리한, 기분 좋고 탁월하기만 한 것이라면 누가 십자가를 마다하겠는가? 하지만 십자가는 야만인들이 고안해 낸 사형 틀이었고 그것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고통의 정점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복음을 거절하고 복음을 거부한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는 분명하고도 간단한 믿음이 필요하다. 복음에는 믿음이 필요하다. 고난을 동반하는 복음, 그러나 영원한 선물이 보장된 복음, 이 아이러니한 복음을 영접하는 데는 ‘믿음’이 필요하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나와 함께 복음의 고난에 동참하라’고 초청한다. 고난이 있긴 하지만 그 복음은 너무나 값진 것이기에 자신의 고난에 아랑곳하지 않고 복음을 위해 ‘이 복음을 위해’ 희생할 수 있다는 것을 바울은 디모데에게 시청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내가 당하는 복음의 고난은 있는가? 십자가는 있는가? 복음의 고난당하고 있음으로 인해 감사하자!
우리가 고난당하는 이유는 웬만하면 인간적인 이유와 원인이 많다. 인간의 죄성과 부족함과 연약함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우리가 자기 자신 때문에, 자기 자신의 죄와 부족함과 환경 때문에 당하는 경우가 아닌 보다 차원 높은, 차원이 다른 하나님의 이름으로 당하는 고난이라면 그것에 대한 감격이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당하는 고난의 이유를 잘 알 필요가 있다. 우리의 죄로 인해 당하는 고난이라면 빨리 청산하고 회개하고 돌아서서 환경을 복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반면에 우리가 하나님으로 인해, 복음으로 인해 당하는 고난이라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상황을 즐기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것은 말 그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나의 사택, 좁음, 추움, 답답한 사적 공간의 어려움이 복음의 고난이라면 달게 감사하자!
고향에서 창원이란 도시로 처음 사역지를 옮겼을 때, 그날 밤, 잠이 오질 않았다. 그래서 울면서 기도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행한 것에 대해선 반드시 더 큰 은혜를 주셨다.
여러분은 복음과 함께 당하는 고난이 있는가? 이것은 9절에 나오는 거룩한 부르심이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리스도인으로 초청하시고 그와 함께 고난 받게 하시는 것은 ‘거룩한 부르심’이다. 여러분이 임원, 부장, 리더로서 아니면 각종 직분자로서 섬기는 것 때문에 힘들고 바빠고 지치는가? 잠 좀 못 자고, 교회 일이나 기타 복음의 일로 인해 kakos 한 것을 받을 수 있다. 그때 우리는 당황해하지 말고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감사하자. 힘든 일이지만 그것이 우리의 행위돼 로 부르신 것이 아니고 그분의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그 부르심‘이기에 말이다.
만약 우리의 행위대로, 행실대로 불렀다면, 우리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에 따라, 우리의 손에 의해 생산된 인생의 제조품에 따랐다면, 우리는 그 반열에 서 있을 자격조차 없는 죄인들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deed에 따라 부르시지 않았다. 바울의 행실은 어떠했나? 동기가 어떠했던지 간에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수없이 핍박하고 박해하고 심지어 스데반 집사까지 살인하는 살인자였고 방조자였고 선동자였다. 그의 행위대로라면 그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인 것이다. 하지만 관점의 차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고의 차이가 이처럼 심각한 차이를 빚어낸다.
오직 뜻과 은혜대로(=을 따라) (하심이라)... 이것이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이다. 인간은 행위대로 한다. 행적대로, 행위의 결과대로 움직인다. 하지만 하나님께선 자신의 목적에 따라 움직이신다. 그 목적은 단순히 임시적인, 임기응변적인 방편이 아니고 영원 전부터 계획된 목적이다. 하나님의 패러다임 속에는 이미 사울의 스데반 살인도, 바울의 선교도 그리고 심지어 바울의 순교까지도 계획된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바울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행해진 것이지만 하나님의 뜻이 그 속에 개입되었고 그것은 바울의 은혜였다. 이것은 굉장한 교리이며 심오한 진리이다. 신학적인 ‘예정’의 뜻을 한 번 살펴보라!
여러분은 복음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폴리갑의 일화를 알 것이다. 1)
‘내 삶을 취하시어 감춘 당신을 드러내는 십자군이 되게 하소서’ 영국 소식 / 세계선교를 위한 헌신과 희생 - C.T. 스터드
“복음화되지 않은 세계를 위해 나의 목숨을 포기하겠습니다.”
‘케임브리지 7인’ 중 한 명인 C T 스터드(1860∼1931)는 부와 명예를 버리고 전 생애를 중국 미국 인도 중앙아프리카 등 세계선교운동에 바쳤다. 미국의 대학생 선교자원 운동(SVM)에 깊은 영향을 미친 그는 복음주의 선교단체 WEC(Worldwide Evangelization Crusade)의 전신인 HAM(Heart of Africa Mission)을 설립한 선교동원가이자 현장 선교사였다. 이는 오직 ‘내 삶을 취하시어 감춘 당신을 드러내는 십자군이 되게 하소서’란 이유 한 가지뿐이었다.
심한 천식을 앓았지만 인도 북부 우타카문드 유니언 교회에서 목회했다.
그러던 중 리버풀에서 그는 ‘식인종은 선교사를 원한다’는 벽보를 보고 아프리카로 떠났다.
1931년 7월 콩고 이밤비에서 숨을 거두기까지 ‘자기 부인’의 삶을 살았다. ‘질병 박물관’이라고 표현할 만큼 많은 병에 허덕였지만 그의 선교 열정에는 아무런 장애도 되지 못했다.
스터드는 원래 잘 나가는 옥스퍼드 출신의 유명하고도 인기 있는 스포츠 선수였고 만능 엔터테이너이자 엘리트였다. 요즘으로 치면 잘 나가는 MLB player였다. 알렉스 로드리게즈와 같은 인물이었다. 그는 그 당시 잘 나가는 크로켓 선수였다. 최고의 MVP였다.
미국의 MLB 소식에서 알렉스 로드리게즈의 뉴스가 나왔다.
‘내년이 되면 1위의 주인은 바뀐다. 역대 2위에 올라있는 알렉스 로드리게스(32)는 본즈를 넘어 2억 달러에 근접하게 된다. 2017년까지 손에 쥐게 될 2억 7500만 달러를 더하면, 24년 동안의 연봉 총액은 약 4억 4500만 달러에 달한다. NBA 1위 샤킬 오닐(34)도 제칠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그는 이런 말을 남기고 중국 선교사로 떠났다.
“If Jesus Christ be God and died for me, then no sacrifice can be too great for me to make for Him.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하나님이시고 나를 위해 죽으셨다면, 그분을 위한 나의 어떠한 희생도 결코 크다 할 수 없다.”
-Anything, Any Time, Anywhere
-무엇이든지, 언제든지, 어느 곳에서든지.
24세의 처녀의 몸으로 대한민국 땅에 선교사로 왔지만 언어훈련 도중 풍토병에 걸려 8개월 만에 죽은 선교사, 루비 켄드릭…. 그렇게 죽으면서도 그분은 이렇게 유언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말은 그녀의 묘비명에 적혀 있는 말이기도 하다.
‘내게 천 번의 삶이 있다면, 그 삶을 조선(한국)을 위해 바치겠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라!-복음 자체, 복음 전도자, 복음의 상황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내가 복음과 함께 받는 고난은 있는가? 이 대목을 통해 나는 복음의 고난에 대한 태도가 바뀌어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10절... 현> 그분은 죽음을 없애 버리시고 기쁜 소식으로써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길을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 인간이 나약할 수밖에 없고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인간은 죽는다는 것이다. 죽으면 모든 육체가 썩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라진다는 것이다. 멸절성의 존재라는 것이 인간의 가장 큰 핸디캡이다. 그런데 복음은 이러한 인간의 성질에 반기를 드는데, 바로 생명과 썩지 아니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100년 안에 모든 것이 종결되는 인생 가운데 복음은 인간은 영원한 존재로 만들어주고 있다. 이것은 새롭게 창출된 그 어떤 신제품이나 기발한 아이디어가 아니고 원래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셨던 생각과 뜻이 죄로 인해 굴절되다가 다시 회복된 것이다. 이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마스터플랜이었다. 그 마스터플랜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으로 인해 성취되고 있는 것이다.
-v.11-12 바울
바울은 바로 이 복음을 위하여 스터드나 루비 켄드릭 보다 1천 몇 백 년 이전에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다고 말한다.... 케뤽스(케루소에서 파생).
복음 전파자, 전도자. 원래는 전시(戰時)에 소리를 질러 사람을 모집하는 공무원을 말한다. 당시 전쟁이 나면 로마군들은 예전에는 의무병이었지만 후에는 자원자들 중심의 자원병으로 바뀌었다. 지원자들에게는 세금이 면제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쟁 시에는 신분의 차이를 막론하고 지원을 하였고 특히, 없는 자들은 군대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때 군대의 군사들을 모으기 위해 소집 소식을 전하는 공무원이 바로 케뤽스였던 것이다.
바울은 고난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오히려 자랑스러워한다.
이 복음을 위하여 세움을 받은 바울! 이 복음을 위하여 세움을 입은 우리들!
군대를 지원한 병사가 목적이 분명하지 못하면 전쟁에 임할 수 없듯이 바울은 12절에서 자기가 고난을 왜 받는지, 왜 부끄러워하지 않는지 고백하고 있다.
(12)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우리가 누군가를 믿고 일을 맡길 때 그 사람이 정말로 믿을만한 사람이라면 끝까지 신뢰하고 믿어준다. 사람과 사람 사이도 그러한데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이런 감정은 더할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비록 감옥에 갇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의 인격과 하나님의 사역을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감당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바울이 복음으로 인해 감옥에 갇힌 상황을 부끄러워했고 그것으로 인해 복음 전도자인 바울도 부끄러워했다. 더 나아가서 바울이 전하는 그 복음, 주의 증거조차도 부끄러워했던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그들의 대세와 분위기를 거절했다. 그는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기 때문에 거절한다! ’,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바울이 이렇게 지켜가는 것처럼 디모데 또한 영적인 아버지의 바울의 본을 따라 복음을 지속적으로 온전하게 지켜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피력하고 있다. 이 동사는 ‘잃어버리거나 손상되지 않도록 어떤 것을 지키다’의 의미. 그 단어는 약탈자들에게서 궁전을 지키고 도둑들에게서 재산을 지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눅 11:21; 행 22:20). 복음을 부패시키고 교회에 맡겨진 무한히 고귀한 보물을 교회에서 강탈하려고 혈안이 된 이단들이 사방팔방에 있었다. 그러므로 디모데에게 바울은 경계를 해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다. 왜 지켜야 하는가? 복음은 바로 보물이기 때문이다.
[NASB] 딤후 1:14
Guard, through the Holy Spirit who dwells in us, the treasure which has been entrusted to [you.]
[NIV] 딤후 1:14
Guard the good deposit that was entrusted to you--guard it with the help of the Holy Spirit who lives in us.
사도적 신앙은 ‘바른말의 본’이 될 뿐만 아니라 ‘부탁한 아름다운 것’도 된다. 이것들이 AV'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개역과 동일), RSV'네게 맡긴 진리’, 그리고 NEB'너의 책임으로 맡긴 보물‘로 번역하고 있다. 왜냐하면 복음은 안전하게 지키도록 교회에 맡겨진 보물-아름답고, 고상하고, 그리고 고귀한 보물-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바울에게 맡기셨고, 그리고 지금은 바울이 그것을 디모데에게 맡기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그러했던 것처럼 디모데가 주의 복음, 소중하고 가치 있는 보물과도 같은 진리를 고수하기를 기대하고 있고 부탁하고 있다. 바울이 받은 복음을 디모데 또한 잘 지키기를 간구하고 있다.
여러분은 어떤가? 여러분이 받은 복음을 제대로 잘 지켜가고 있는가? 아니면 복음은 없이 일과 직분과 허드레 일들로 여러분의 믿음의 빈 여백이 채워지고 있지는 않는가? 아무리 좋은 보물상 자라 하더라도 그 안에 보물이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 여러분의 믿음의 보물 상자 안에 보물은 잘 지켜지고 있는가? 일과 의무와 직분과 바쁜 모든 스케줄로 인해 여러분의 보물과 같은 복음은 잘 지켜지고 있는가? 아니면 복음이 보물 인지도 모르는가?
복음을 지키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을 지키는 사명이 주어졌다.
나는 복음을 지키는 사명을 어떻게, 어떤 식으로 감당하고 있는가?
-직분 별, 태도와 자세, 열심도, 열정, 말씀과 기도의 밀도는?
... 복음 때문에 하는가? 아니면 먹고살기 위해서 하는가? 아니면 나의 성공과 번영과 인정받음과 인기를 위해서 하는가? 사역자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지키기 위한 그리스도인의 소명 때문에 하는 것이어야 한다.
-v.15 실패한 이들
15절을 보라. 아름다운 것, 이 보물을 지키지 못한 이들이 많았다.
(15)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느니라
바울의 상황이 얼마나 괴롭고 외로웠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상황을 디모데는 알고 있었다. 영적인 아들인 디모데는 영적인 아비의 바울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었기에 바울은 ‘네가 아나니’라고 말하고 있다. 상상해보라!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나를 배신했다. 그토록 믿었던 네가! 마치 카이사르가 죽을 때 자신이 그토록 인정해주고 선처해주고 뒤를 봐주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에게 칼에 찔리면서 결정적인 치명타를 입었다. 그때
‘브루투스, 너마저!!!’
그랬다고 한다. 바울도 그런 상황!
허모게네:Hermogenes(인명) ( JErmogevnh", Hermogenes)「허매(신)에게서 난 자」
바울의 만년에 그를 버리고 떠나간 소아시아 사람이다. 바울은 배반자로서 부겔로와 같이 그의 이름을 연명했다(딤후 1:15). 그들이 특별히 기록되어 있는 것은, 그 운동의 지도자였음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들이 바울을 떠난 것은 교리상의 문제 때문이든가, 아니면 장래의 운명을 두려워했었을 것이다.
부겔로:Phygelus(인명) (Fuvgello", Phygelus) 「망명객」
교회 안팎에서는 바울에 대한 반대가 거세어졌고 이전에 그를 도왔던 많은 동역자들은 그를 버렸다. 바울은 외로웠고 그로 인해 디모데를 간절히 보고 싶어 했다. 게다가 네로 황제의 박해 아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받을 것인지 아니면 신앙을 버릴 것인지 선택해야 할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바울이 세운 것들이 무너질 위험에 직면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울은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마지막 권면을 하고 있다.
-v.16-18 성공한 이-오네시보로
하지만 바울의 위로가 되는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오네시보로였다. 그는
(16) 원컨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저가 나를 자주 유쾌케 하고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여
(17)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 만났느니라
---요즘 세상에는 ‘너무 바빠서’, ‘너무 시간이 없어서’, ‘너무 분주해서’라는 핑계로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을 꺼리는 경우가 있다. 로마제국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지만 오네시보로는 자신의 동역자이자 복음 전도자인 바울, 바울의 복음, 바울의 갇힌 상황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고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껏 바울을 찾아주었던 것을 바울은 기억하고 있다. 복음 사역자에게, 아무리 위대한 영적 거장이라 하더라도 격려와 care는 필요한 것이다. 돌아보는 것은 꼭 필요한 것이다. 여러분들 주위에 여러분의 조원들을, 마하나 님의 지체들을 부지런히 찾아 만나고 연락하고 안부 묻고 격려하고 위로했으면 좋겠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이길 힘을 마하나 님이라는 공동체를 통해 부여하시기를 기뻐하시고, 그러한 사명을 위해 교회라는 공동체를 허락하신 것이다.
[공동번역] 딤후 1:18 내가 에페소에 있을 때에 그가 얼마나 많은 봉사를 하였는지 그대는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오네시보로:Onesiphorus(인명) ('jOnhsivforo", Onesiphorus)「이익을 취함」
에베소 시민이며 바울의 친구이다. 디모데후서 1:16-18에 의하면 그는 로마에 자주 바울을 방문하여 고소에 연좌(連坐)될 위험을 무릅쓰고 그의 신변을 돌보고 위로했다. 디모데후서 1:16,4:19에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 인사를 한 것으로 보아 이 서신을 쓸 때는 이미 그가 이 세상에 없었던 것 같이 생각된다. 오네시보로의 부재에 대해 더 애석해하며 바울은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풀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긍휼히 필요한 것은 디모데(1:2)뿐만 아니라 주의 복음으로 인해 고난당하는 자들 모두에 게이다.
많은 사람들이 바울이 감옥에 갇힌 것에 대해 좋게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복음이 좋은 소식이라면서 어찌 감옥살이를 할 수 있느냐며 바울의 감옥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선, 부끄러운 시선을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들은 어떤가? 복음으로 인해 환경과 상황이 악화되고 힘들어진다고 해서 그 복음마저, 그 복음 전도자마저 부끄러워하는 적은 없던가? 하나님의 능력의 복음이라고 외치면서도 막상 고난이 우리 앞에 닥칠 때 우리는 그 상황에 대한 반응을 복음에 대한 반응으로 대치시키지는 않는가?
바울이 감옥에 있을 때 로마 교회가 바울을 변호해 주지 않았다는 것은 놀랍지만 사실이다. 오직 한 사람만이 찾아왔다. 다른 사람들은 두려워서 숨어 있거나 바울의 투옥을 부끄러운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바울은 다른 사람들에게 거절당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복음을 지키지 못한 자와 복음을 잘 지킨 자
복음을 부끄러워 한 자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한 자
사랑하는 지체 여러분들이여, 여러분들은 바울에게 오네시보로와 같은 존재이길 바란다. 친구는 ‘아무도 찾아 주지 않을 때 찾아 주는 이’가 바로 친구이다. 우리 주님께도 마찬가지이다. 끝까지, 최후까지 하나님을 찾고 예수님을 찾고 성령님을 갈구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주님의 오네시보로가 되길 바란다.
④ 복음을 부탁하라 2장, v.1-13
-V.1 은혜 속에서 강하고
디모데의 유약한 성품, 연약한 육신, 약한 기질을 반영! 우리들도 그렇지 않은가?
딤전 5:23... 디모데의 병이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포도주’를 약으로 쓰라고 했다. 디모데는 신경이 예민한 친구?... 은사, 기술, 의지 속에서 강하고라고 하지 않고 ‘은혜 속에서 강하고’라고 했다. 바울 자신을 은혜로 거룩한 부르심의 주인공이신 하나님께서 디모데를 은혜의 거룩한 부르심으로 초대하시고 은혜 속에서 강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V.2 복음을 부탁하라
이 말은 바울이 디모데 개인에게 한 것이기도 하지만 디모데의 제자훈련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지금 바울 곁에는 누가만 남았고, 에베소에 디모데, 그리고 지금은 유명을 달리한(?) 오네시보로가 있다. 그 외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보이지 않는다. 바울은 복음사역의 심각성과 중대함을 알았기에 그것에 매진했고 이제 자신의 인생의 종말에 다다랐다는 것을 더 알기에 그는 제자 삼기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고 있다. 바울이 디모데를 제자 삼았고, 디모데가 또 다른... 오네시보로와 같은?... 사람을 제자 삼음을 통해 복음은 열방을 향해 나아갈 것이라는 바울의 반석과 같은 믿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학자 바바라 보이드(Barbara Boyd)는 ‘바울의 제자들은 결코 끊이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오네시보로와 같은 충성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수할 것을 기대했다. 왜냐하면 복음은 사람과 사람을 통해 움직이는, 역사하는 강력한 파워인 것이다.
바울은 오네시보로와 같은 충성된 사람에게 복음을 부탁하여 이 복음이 다음 세대로 전수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자신의 최후의 죽음이 다가오는 시점에서 바울은 약 30개의 명령문으로 디모데에게 이렇게 부탁하는 것은 바울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사랑하는 지체 여러분, 복음은 우리 수련회 주제가처럼‘열방에 넘치는 저 복음의 파도, 복음의 발걸음 땅끝까지’ 퍼져나가야 한다. 바울은 그 복음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려놓았고 그 바울의 복음은 지금 2000여 년이 지난 지금 한국에서도 흥왕하고 있는 것이다. 100여 년 전에 우리에게 복음은 낯선 것이었고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이질적인 서양문물에 불과했지만 이제 그 복음이 사람과 사람, 복음 전도자와 또 다른 복음을 받는 이들을 통해 이제껏 내려온 것이다. 복음은 이처럼 전파력과 전가력이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 복음의 능력을 신뢰하는가?
우리가 GBS와 PBS를 통해 마음껏 나누고 공부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바울의 이러한 제자훈련의 바탕 위에서이다. 우리가 또 다른 충성된 사람들에게 복음을 가르침으로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가르치고 그리하여 복음의 발걸음은 땅 끝까지 퍼져 나가는 것이리라.
여러분이 교회에서나 학교에서나 교사로, 리더로, 직분자로, 봉사직으로 섬기며 가르치는 것은 제도적으로 여러분이 어느 정도 나이가 차고 대충 짐작해 보니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져서 복음의 반포자가 된 것이 아니다. 전적인 예수님의 제자 훈련, 바울의 제자 훈련의 기초의 바탕 위에 주어진 것임을 명심하라! 여러분에게 이러한 직분이 맡겨졌는가? 그렇다면 최선을 다해 복음을 부탁하길 바란다. 그 복음은 시대와 시대를 거쳐, 세대와 세대를 거쳐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영원하신 주의 말씀’은 우릴 새롭게 고무시키시고 일으킬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복음을 잘 지키기 위해선 끊임없이 제자를 만들어가야 한다. 여러분의 영역 속에서 여러분의 제자가 아닌 그리스도의 제자, 복음의 제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만들어가시기를 바란다.
-v.3-7 비유-복음의 고난을 받는 이는 어떠해야 하는가?
바울은 여기서 세 가지 비유를 들고 있다.
군사, 운동선수, 농부... 이 세 가지 비유는 나름대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복음을 부탁하라는 2절의 말씀에 연계해서 볼 때 복음 전도자, 복음을 부탁받은 자는 군사처럼, 운동선수처럼, 농부처럼 주의 복음사역을 감당해야 함을 가르쳐준다.
3절... ejmplevkw ‘얽매인다’는 말은 ‘엉클어지게 하다, 얽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어떤 학자는 이 말은 ‘군인의 무기가 옷자락에 방해를 받는 모습’이라고
자기 생활에 [의]... bivo"
'생명', 즉 (문자적으로) 존재하는 현상태, 함축적으로 '생계의 수단', 선, 생활 <막 12:44 요일 3:17> 남명. life possessions;
1) 생명, 인생, 삶, 생명을 유지시키는 것, 부, 재산
3절에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로 구분되는 부분은
V.5... 고대 세계의 어떤 운동 경기에 있어서도 경기자나 힘이나 기술을 제멋대로 고시하는 경기는 하나도 없었다. 모든 스포츠는 경기 자체를 위해서는 물론이고 때로는 예비 훈련을 위해서도 그 자체의 경기규칙을 가졌다. 또한 모든 종목에 상이 있었으며, 그리고 헬라 경기들에게 수여된 상들은 금메달이나 은으로 된 트로피가 아닌 월계관이었다(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자신의 집정관으로 있을 때 원로원들로 하여금 계속적으로 명예의 상징인 ‘월계관’을 쓰고 있을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냈다). 스페타노스(면류관)은 당시 운동경기에서 우승한 자에게 수여하는 월계수관. 성도가 장차 천국에서 누리게 될 지극한 존귀와 영광을 상징한다. 그러나 경기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않았다면 어떤 경기자도, 아무리 우수하다 할지라도 ‘면류관’을 받지 못했다. ‘규칙 없이는 월계관도 없다’는 것이 당대의 규범이었다...> 우리가 아무리 주님을 위해 수고해도 우리 스스로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우리는 말씀의 법대로 살아가야 한다고 적용할 수도 있겠다.
육상선수들은 몇 달 동안 훈련한다. 도날드 거스리는 당시의 육상 선수들은 시합에 나가기 위해 적어도 10개월 동안 훈련받았음을 증명해야 했다고 말한다.
이 말씀은 농부가 곡식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수고할 때 제일 먼저 그 소작 물을, 열매를 받는 제일 순위가 된다는 것을 말한다.
(최선을 다한 농부의 태도를 이야기해준다!... 당연하다는 것!)
◉복음을 잘 지키기 위한 복음 사역자의 3가지 자질!
... 나와 함께 복음을 고난을 받으라!(당연하다`~)
-군사
-경기자
-운동선수
-v.8-10 예수 그리스도는 어떠했는가?
내가 고난을 받았으나
/복음을 인하여
/매이는 데까지.... 더 나아가 순교의 제물? 관제?
/죄인과 같이... 바울은 분명히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며 범죄자이다. 또한 스데반을 살해한 살인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회개와 용서를 경험하였다. 그리하여 이제는 ‘죄인적 의인’이 된 것이다. 그런 그가 죄가 없지만, 감옥에 갇힐만한 죄를 지은 죄목은 없지만 그가 감옥에 갇힌 것이 마치 그가 범죄자인 것처럼, 죄인인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복음 전도자는 매일 수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매일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하나님을 어찌 매이게 하겠는가? 사망의 권세가, 사단의 권세가 예수님을 묶어 놓으려고 했지만 우리 하나님은 주님을 3일 만에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놀라우신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 성령님이시다. 바울은 자신의 아들 디모데에게 부활하신 이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바울이 장차 자신의 죽음 앞에서 죽음 너머의 영원의 세계, 장차 부활하실 것을 기대하는 복음의 진면목을 확신하며 고백하고 있다.
(롬 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바울의 이러한 원대한 비전과 소망을 품고 사역하였다. 이 소망, 이 비전을 디모데에게 전수하고 싶어 한 것이다. 디모데가 지금 여러 가지로, 다각도로, 다차원적으로 영적인 공격을 받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 지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기를 즐겨하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은 단순한 말이 아니지만 바울은 그것으로 이 디모데를 초청하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복음을 위하여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 군인, 말씀의 법대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는 진정한 영적 경기에 임하는 운동선수, 그러할 때 수고하는 kopiavw
발음 : {kop-ee-ah'-o} : 코 피아오, '피로를 느끼다', 함축적으로 '열심히 일하다', (부여된) 노동, 수고, 쇠약해지다 <마 11:28>동. to feel fatigue;
1) 약해지다, 피곤해지다, 소진하다, 2) 지치도록 힘들게 일하다, 힘써 일하다 , 코피 나게 일한 농부가 곡식을 제일 먼저 받듯이, 우리가-바울과 디모데가 그리고 그 이후의 모든 제자들조차도-힘써 복음을 위해 일할 때 상을 제일 먼저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바울은 지금 디모데가 힘들어하고 있지만 더욱 그를 격려하고 우리의 목적이 분명하기에 더욱 사역에 박차를 가하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자신이 지금 힘들다는 것을 친히 알고 있으면서도 참고 있다고 말한다.
(10) 그러므로 내가 택하신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저희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 함이로라
바울은 힘에 부치는 감옥 속에서 육체적, 심리적, 정신적, 영적인 외로움과 괴로움 가운데 있지만 참고 있다. 그 참음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은 것이므로,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원한 구원, 영원한 영광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여기서 자신이 예전에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죄인 중의 괴수’가 구원받았던 것처럼 하나님의 ‘택하신 자를 위하여’ 참는다고 말한다. 자기가 은혜로 구원받은 것처럼, 자기가 어찌 기독교인이 될 것이라고 생각이나 했겠는가? 하지만 바울은 사도로 거룩한 부르심을 입었듯이 자신의 뒤를 이어 복음의 또 다른 주자들과 또 다른 구원의 백성들을 위해 바울은 감옥 속에서 최후까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그 구원’을 위해 말이다.
오늘날의 시대는 고난 받기를 너무나 싫어하는 시대가 되었다. 불편한 것 싫고, 느린 것 싫고, 인터넷 무조건 빨라야 하고, 더욱이 우리는 ‘빨리빨리’의 민족, 냄비근성의 민족 대한민국이 아닌가? 무언가를 지긋하게 참고 인내하는 것은 우리 현대인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감옥을 그것도 두 번씩 들어가는 고난!
복음 전도자는 매일 수 있으나 복음은 절대도 매일 수 없다!
-v.11-13 복음을 함께 고난을 받으면 결국은?
본문을 같이 읽고 의미를 파악하자! 함께 죽는 것도, 참는 것도 다 바울의 자유의지에 달렸다! 바울뿐만 아니라 디모데조차도!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라! 바울은 감옥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초조한 사형수에 불과하다. 인간적으로 그렇다. 그런데 바울은 ‘주와 함께 죽었으면’이라고 말하고, ‘참으면’, 주를 부인하면 ‘이라고 말하는 그 심장을 상상해보라! 마지막에 배신하고 자살했던 예수의 제자, 가룟 유다의 최후를 우리가 알고 있다. 하지만 바울은 끝까지 참고 있다. 그것은 자신을 어떤 상태에서 구원하셔서 거룩한 부르심으로, 하나님의 뜻으로, 생명의 약속대로 사도 된 바울을 불러주신 하나님의 인격을 신뢰하는 바울의 진정한 믿음인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은 반영하는 13절의 말씀, 주님은 미쁘시다는 것이다.
미쁘다 이 말이여! 이후에 나오는 미쁘신 하나님의 인격!
여러분이 당하는 고난이 있는가?
여러분이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참고 인내하는 것이 있는가?
주와 함께 죽으면 함께 살 것이다.
참으면 영원토록 왕 노릇 할 것이다.
주를 부인하면 주께서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다.
-미쁘신 하나님을 붙들라! 여러분이 교회 나오는 것이 불신 집안인 관계로 어렵고 힘들 때가 있는가? 복음 때문에 당하는 여러분의 손해와 시간 낭비처럼 보이는 소모 감과 여러분의 자존심 상함이 있는가? 주는 미쁘시는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느니라(ex, 십일조 사건).
하나님을 위해 여러분의 젊음을, 시간을, 열정을, 물질을, 마음을, 땀과 수고를 참고드려보라! 하나님을 위해 투자해보라! 하나님께서 절대 여러분을 가만히 놔두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여러분의 삶을 새롭게, 여러분에게 총체적인 은혜와 복을 내려주실 것이다.
⑤ 복음을 부탁받은 디모데야! 진리를 분변함으로, 깨끗게 함으로 자신을 드리라 v.14-26
힘쓰라... 계속적인 헌신!
힘쓰다(study)는 교사나 책과는 관계가 없다. 그것은 ‘부지런하다. 열심을 내다’의 뜻이다. 딤후 4:9,21, 딛 3:12에서는 그렇게 표기되었다(개역 성경에선 ‘어서’, ‘급히’로 표기됨). 이 본문의 강조점은 일꾼은 그의 일을 회계할 때 부끄럽지 않도록 그의 일에 부지런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데 있다.
/드리기를(부정사)
/자신을
/인정된 (자로)...‘시험 후 합격된, 입증된’의 의미.
/하나님 (앞)에(=게)
/일꾼으로(=을)
/부끄러울 것이 없는 2)
/옳게 분변 하여(=분별하기를, 현재분사)
‘오르도’(올바른)+‘템노’(자르다)의 합성어. 진리의 말씀과 거짓을 명쾌하게 가려낸다는 뜻. 밭고랑을 똑바로 일군다, 판자를 똑바로 자른다, 솔기를 똑바로 꿰맨다 등.
/말씀을... 1:15와 연계?-복음을 버린, 바울(복음 전도자)을 자의 분위기
/진리의
[NIV] 딤후 2:15
Do your best to present yourself to God as one approved, a workman who does not need to be ashamed and who correctly handles the word of truth.
V.21... 그러면 어떤 점에서 우리는 이런 것들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될 것인가? 그것은 우리가 가짜라고 의심되는 모든 명목상의 교인들과의 관계를 끊고, 그리고 가시적 교회에서 탈피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의 비유를 통하여 곡식 가운데 가라지가 뿌려졌으며 추수 때까지는 곡식 가운데서 가라지를 뽑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더욱이 우리는 두 종류의 그릇들에 의해 지시된 사람들이 교인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선생들이라는 사실을 앞서 고찰했다. 그러므로 이 사실과 본문은 후메내오와 빌레도처럼 복음의 어떤 기본적인 것을 부인하고, 그들의 양심을 버리고 불의에 빠져 버렸던 나쁜 선생들에게서 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야 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의 조건은 이것보다 더 근본적이다. 우리가 피해야 되는 것은 그러한 사람들과의 접촉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잘못과 악행이다. ‘이런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정신에서 그들의 거짓을 제거하고 우리의 마음과 생활에서 그들의 사악 성을 제거하는 것이 절대 필요하다. 그러므로 순결-교리의 순결과 생활의 순결-은 그리스도인에게 쓸모 있게 될 수 있는 필수적인 조건이다.
V.22... 바울은 디모데의 청년시절의 혈기왕성함을 잊지 않았다. 영적으로 일하는 사람에게도 반드시 육적인 본능과 욕망은 있을 수 있으므로 바울은 디모데가 영적 순결과 아울러 육체적인 순결을 강조하였다. 디모데가 사역했던 에베소는 아데미 여신을 신봉하는 우상숭배가 성행했다. 에페소스 (라틴어: Ephesus, 그리스어: Έφεσος, 터키어: Efes,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에페소, 한글개역판에서는 에베소로 표기) 하지만
서부 소아시아의 에게 해 연안에 (현재의 터키) 위치한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 의해 기원전 7-6세기에 건립된 식민도시다. 에페소스는 주변 도시 혹은 국가, 스파르타, 페르시아, 페르가몬, 로마 등의 흥망성쇠에 따라 식민지화되는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식민지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에페소스는 상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기원전 6세기에 건조된 웅대한 아르테미스 신전과 로마 제국시대에 건조된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로마식 건축 도미티아누스 신전 (기원후 1세기)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아르테미스는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 에페소인들에게 풍요와 생명의 여신으로 숭배받던 대상이어서, 루가에 따르면 사도 바울로가 선교를 할 때 은으로 만든 신전 모형을 팔던 상인들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사도 바울로가 우상을 숭배하지 말자고 설교하여, 사람들이 신전모형을 더 이상 사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페소스는 기독교 초기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도시이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사도 성 바울로가 전도와 사목을 한 교회 중 하나가 에페소 교회였다. 또한 요한묵시록에 등장하는 소아시아의 7개의 교회중 하나가 에페 소교회일 정도로 1세기 기독교 역사에서 비중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영국 성공회의 폭스 신부가 쓴 《순교자》에 따르면 사도 성 바울로의 제자인 디모테오가 주교로 사 목 한 교회가 에페소 교회라고 한다.
1) 폴리갑:A.D 70~156
분야: 기독교 감독으로 순교당함
장소: 서머나(지금의 터어키 이즈미르 지방)
폴리갑은 현대 기독교사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결한 순교사로 기록되고 있다. 그는 [사도 요한]의 수하에서 [ 예수]를 영접하였고 그의 영향을 받아서 예수를 증거하고 전파했으며 직접 [예수]님과 대면한 세대와 그 후의 세대를 연결하는 매우 중요한 이치에 있는 한 사람이다
그는 2세기경에 [서머나](Smyrna)에서 헌신적이고도 열렬한 선교 활동을 한 사람이었다
그뿐이 아니고 어떠한 경우와도 타협하지 않고 온전한 정도를 걸어간 목회자이기도 한 폴리갑은 주의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받는 주의 종이 었다. 어느 지방에서도 그러하였듯이 서머나에도 기독교의 박해가 시작되었다. 서기 155년에 서머나에 아주 심한 [기독교] 박해가 집요하고도 갑작스럽게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기독교인들에게는 박해를 당하는 것은 신앙의 용기와 복음 전파의 활기를 부여하는 계기가 되곤 하였을 만큼 그들은 박해를 두려워하지도 피하지도 않았다.
폴리갑도 결국에는 체포되는 몸이 되었으며 회유와 협박을 받는 몸이 되었다. 당시의 서머나 지방의 법으로는 기독교를 믿는 자는 화형에 처하는 법률이 있었으므로 그 법을 피할 수는 없었다. [서머나] 지방의 통치자는 평소 폴리갑의 성품과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존경하 든 터라. 그를 살리고 싶은 마음으로 회유하기로 하였다. 단 한 번만 그저 딱 한번만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라 그러면 살려 주겠다. 그 후에는 무슨 일이든 하여도 상관 않겠다고 회유를 하였으나 폴리갑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으며 그 유명한 명언을 남겼다.
“86년간 예수님은 나를 단 한 번도 나를 모른다고 하지 않으셨는데 내가 어떻게 그분을 모른다고 할 수 있겠느냐 “
고 담담하게 기도를 하는 가운데 장작더미 위에 앉아서 장렬한 화형을 당하였다
그의 순 교서인 [폴리갑의 순교 The Martyrdom Polycarp]는 성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된 기독교 문서로 전해온다고 한다. 이와 같이 그는 살 수 있는 기회를 찾을 수 있었으나 그 길을 택하지 않고 아름답고 고귀한 순교의 길을 택한 것이다. 그는 피하라는 주위의 권고도 듣지 않았으며 오히려 주위의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로
용서를 구하고 동료들을 위해서도 역시 기도로 용기를 북돋아주며 그 기도 중에 자기가 화형을 당할 환상을 보았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폴리갑의 순교를 통하여 서머나에서의 기독교는 쇠퇴하기보다는 더욱더 용기백배한 주의 종들을 배출해내었던 것이고 보면 박해나 죽음으로는 참다운 신앙을 꺽지 못하는 것이 진리인가 한다
2) ajnepaivscunto"
발음 : {an-ep-ah'-ee-skhoon-tos} : 아네파이스퀸토스 '부끄럽지 않은' 즉(함축적으로)'비난할 수 없는', 부끄러울 것이 없는 <딤후 2:15> 형. not to put to shame; 1) 부끄러워할 만한 이유가 없는
이 말은 자신이 사람들 앞에 부끄워할 만한 이유가 없도록 이란 뜻뿐만 아니라 (복음, 복음 전도자, 복음의 상황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라는 의미도 있지 않은가?
오늘은 신약성경 디모데후서 1장과 2장을 가지고 <사랑하는 아들들이여!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십시오>라는 제목으로 설교한 내용을 포스팅해 봅니다. 미완성된 부분이 있지만, 설교, 설교문에 완성, 완결이란 말이 있을까요? 제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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