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디모데후서 2장 1-9절의 본문을 바탕으로 <바울의 다섯가지 권고>라는 주제로 설교한 내용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애제자 디모데에게 어떠한 충고를 했는지, 오늘은 5가지 동사를 주목하면서 그 내용에 대해 한번 살펴보았음 합니다.
바울은 오늘 이 본문에서 사랑하는 동역자 디모데에게 제안을 하고 있다. 그것은 선배가 후배에게 나누는 귀한 충고일 수도 있고 권고일 수도 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말씀을 바울이 디모데에게 5가지 정도의 동사로 메시지를 요약하고 있다고 보고 말씀을 준비하였다.
바울은 디모데를 부를 때 “내 아들아(V.1)"라고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 그만큼 디모데는 바울에게 참으로 자식같은 존재였다. 주 안에서 그들은 아비와 자식이 될만한 관계였던 것이다. 이 말 속에 디모데를 향한 바울의 지극한 사랑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 사랑은 그 아들에 대한 과보호적 사랑이 아니다. 도리어 그를 다시 강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복음 위해서 동고동락하면서 부대껴온 두 사람의 관계는 이러했다. 우리들에게도 이러한 주님 안에서의 동역관계가 있는가? 정말 아비와 자식같은 진뜩한 관계, 아니면 혈육을 방불케하는 그러한 성도들간의 관계가 있는가? 그 관계는 정말 소중한 것이고 오직 주 안에서만 가능한 관계이다. 세상에선 술 한잔 걸치고 사업계약을 하고 그러면서 동업도 하고 관계를 형성하지만 그러한 관계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관계이다. 옆에 앉아 있는 성도님을 돌아보라. 그 성도 한 사람과 한 사람이 관계를 형성하고 친숙함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시간이 흘러 정이 쌓였기 때문이 아니다. 인간적인 정은 쉽게 퇴색하고 메마르기 쉽다. 세상에선 돈이 있을때는 사람들이 주위로 모여들지만 돈이 없으면 사람들이 자기를 떠난다는 은근한 진리가 존재한다. 그게 약삭빠르고 영악한 세상의 진리이다. 왜 그러한가? 그것은 바로 세상의 모든 관계에는 방향이 없다. 목표가 없다는 것이다. 바울과 디모데처럼 ‘하나의 방향’, ‘하나의 관점’, ‘하나의 목표’가 없기 때문이다.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방향’이 있었기 때문에 영적인 아비와 자식간의 관계형성이 가능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성도와 성도들간의 오가는 끈끈한 그 무엇은 우리의 인간성이 탁월하거나 인격수양이 잘 되어서가 아니라 ‘한 방향’, 즉 ‘한 주인’을 섬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세계이다. 새삼스럽게 이러한 진리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상적으로 소유나 계급이나 기질이나 성격이나 삶의 방식이 이토록 차이가 나는 사람들이 한 우리안에 거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첫번째, 은혜 속에서 강하라
그래서인지 바울은 디모데에게 첫 번째로 권면하기를, 강하라-“은혜 속에서 강하라”(V.1)-고 말하고 있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디모데에게 있어 ‘강함의 동력’을 말하는데 그것은 은혜라고 말하고 있다. 사람들과의 관계의 윤택함이나 의존함이나 술 기운으로 차 오르는 흥분됨이나 다른 세상적인 기호를 취함에서 오는 일시적인 효과나 아니면 자신에 대한 자신만만함, 자신감 등에서 오는 강함의 효과가 아니라 바울은 ‘은혜 속에서’강하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은 몇 달전에 치러진 월드컵 국가 대표팀이 히딩크감독에게 체력강화프로그램을 하면서 엄청나게 체력이 강해진 그런 강함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이 은혜는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비천한 죄인이며 보잘 것 없는 인생인지를 자각하고 매일 매일 성령님에 의해 붙들려 살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그 겸허함과 겸손 속에서 주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강함”이다. 바울은 자신이 그토록 배우고 힘쓰고 노력하고 준수하기를 집착했던 율법 속에서 강하라가 아니라 은혜 속에서 강하라고 디모데에게 권고하고 있다. 바울은 율법이라면 넌더리가 났던 사람이 아닌가?
두번째, 부탁하라(제자를 삼으라)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바울은 자신도 복음사역하면서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지만 사역을 하면서 독불장군이 되어선 아니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디모데에게도 이러한 동역자를 세우는 것을 바울은 제시하고 있다. 충성된 사람들을 통하여 교회의 지도자들과 제자를 삼아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바울이 말하는 제자삼기였고 사람을 키우는 일을 말한다. 아무리 훌륭한 리더이고 지도자라 하더라도 혼자서 모든 일을 다 처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 주 예수님도 혼자서 일을 하시지 않았다. 부활승천후의 복음사역을 위해서 공생애 시작하시면서 제자들을 삼아 그들을 불렀다. 12제자들을 불러 3년동안 동고동락하면서 동역하셨고 가르치셨다. 이것은 모든 사역의 원리의 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역할분담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을 잘 세우고 사람을 잘 키우는 일은 쉬운 일만은 아니다. 우리 주님도 12제자중에 가룟유다를 잃지 않았는가? 하물며 주님도 그러하셨는데 우리들은 얼마나 더 그러할까? 실수와 모순과 연약함이 실로 점철된 우리가 제자삼기를 과연 할 수 있을까? 사람을 잘 키울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첫 번째 권면을 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은혜 속에서 강하고”...디모데 네가 강하지 않고선 절대 네 제자들을 강하게 세울 수 없다. 네가 은혜 안에서 강한 리더쉽을 가지지 못하면 교사들을 세우는 것도, 제자들을 키우는 것도, 평신도 사역자들을 세우는 것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말은 바울은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교회라는 공동체의 사역만을 가르키는 것은 아니다. 부모님이 자식을 키울때도 마찬가지이다. 엄마, 아빠가 은혜 안에서 강하지 못한데 어찌 강한 자녀를 키울 수 있겠는가? 어머니, 아버지가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지 않으면서 어찌 자녀에게 성경 읽으라고 기도하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것은 제자삼기의 사역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자녀들이 하루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한탄하기 전에 여러분들이 텔레비전 앞에 하루종일 앉아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라. 그 많은 시간들 가운데 부모님들은 얼마나 말씀을 읽으며 그 말씀을 묵상하는지 생각해 보라. 부모님이 ‘은혜 안에서’ 강해지지 않으면 자녀들도 연약해질 수 밖에 없다. 교사들이 은혜 안에 강해지지 않으면 가르침을 받는 학생들도 늘 넘어지고 깨어질 수 밖에 없다. 그렇지 않은가? 이런 부분에서 참으로 앞에선 전도사라고 불리는 저를 비롯하여 많은 부분에서 가르치는 직분을 가진 성도님들은 늘 깨어 있어야 할 것이다. 늘 은혜 안에서 깨어서 제자삼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잘 키우고 잘 성숙된 자를 제자로 만들어 놓으면 그 제자가 다시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다고 바울은 V.2말미에서 말하고 있다.
세번째, 받으라
그런데 무슨 선물이나 좋은 것을 받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받으라(V.3)'고 말하고 있다. 좀 싫은 말씀이다. 그렇지 않은가? 세상에 많고 많은 것들 중에 하필이면 고난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다니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주님은 우리에게 십자가의 사랑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주님이 십자가의 고통과 참혹한 죽음이 없이 그냥 우리에게 죄사함을 주셨다면 그 가치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생각하게 될까? No Cross, No Crown...주님께서 나무 십자가에서 십자가의 짐을 지시고 자신이 친히 화목제물이 되셨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우편에 앉을 수 있는 영광을 가지게 되신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너희는 이제 천국티켓을 따놓았으니깐 그냥 대충대충 신앙생활하고 등 따시고 배부르게 살면서 풍족하게 한 인생 살아라고 말하지 않고 과감하게 ‘고난을 받으라’고 ‘고난의 초대장’을 우리에게 건네주고 있다. 바울은 디모데 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세움을 받기를 원할 것이다. 그리고 바울 자신과 함께 고난을 같이 감당하기를 원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길은 십자가의 길이고, 순교자의 삶이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였고 그 생애의 가장 하이라이트는 ‘십자가’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를 믿는 목회자나 성직자들에게만 이 말씀이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늘 영적 전쟁에 참여하며 살아가야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생계나 살림살이에 너무 지나친 애착이나 얽매임이 있어신 아니된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한 집착과 애착은 이 땅만 바라보고 사는 불신자들의 삶이지 믿는 우리들의 삶은 하늘소망을 가진 자들이기 때문에 더 그러하다.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함이라”(V.4)
바울은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갖추어야할 자질을 V.4-6에서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첫 번째, 자기 생활에 얽매여선 아니되고 두 번째, 운동선수들처럼 법대로 경기해야 하며(절제를 의미할수도 있을 것이다), 세 번째,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다는 것이다(-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는 말씀이다).
여러분은 주님의 군사로서 고난을 받고 있는가? 주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여러분의 삶이 불편하고 어렵고 힘든 부분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이 바로 ‘고난’이다. 주님 때문에 내가 싫지만 당하는 환란이나 어려움이 있다면 그것은 ‘고난받는 것’이다. 그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상급이 있을 것이다. No Cross, No Crown!!!
오늘날은 무지하게 편하게 살려고만 하지 사서 고생할려고 하는 세상도 아니고 그러한 시대도 아니다. 모든 것들이 편안함을 추구하고 안락함을 추구하지 ‘고난의 메시지’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는 시대이다. 좀 더 자극적이고 좀 더더 자극적인 쾌락을 추구하는게 오늘날의 시대의 추세이다. 하지만 그런 시대의 경향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은 우리들이 그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오기를 원하신다. ‘오직 군대의 명령체계에 복종하지 결코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 군인처럼, 마치 운동선수가 법대로 순종하며 경기하는 것처럼 우리들도 말씀의 법대로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처럼 하나님께선 자신의 백성들을 방관치 않으시고 끝까지 책임지실 것이다.’ 이것은 마땅한 도리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복음을 위해 내가 사서 고생할 것이 있다면 감당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기 위함 이기 때문이다.
네 번째 권면은, 생각하라이다(V.7).
...내 말하는 것을 생각하라...
바울의 가르침을 생각하라. 사람이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바울의 권면과 충고를 디모데는 귀기울이고 다시 되새기며 삶속에 적용해야 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계속 묵상해야 한다. 말씀이 풍성한 사람은 총명을 주께서 허락하신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지속적인 경건의 훈련을, 지속적인 경건의 연습을 하라고 가르치는지도 모른다. 말씀을 지속적으로 꾸준하게 보는 것과 읽는 것과 묵상하는 것, 기도생활을 쉬지 않고 하나님께 아뢰는 것, 찬양생활을 하루중에 일부러라도 시간을 내어 하는 것...이 모든 것들이 경건의 훈련이요. 연습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이것들을 생각하라고 말하고 있다.
다섯 번째 권면은, 기억하라(V.8)
바울의 마지막 권면은 십자가로 끝맺고 있다.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기독교의 복음의 핵심이다. 죽음 없이 부활이 있을 수 없고, 부활 없는 죽음 또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바울은 이것을 ‘나의 복음’이라고 밝히고 있다. 바울에게 있어 이 복음은 온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엄청난 복음이었지만 그것이 단지 공중에 떠 다니는 그런 신기루같은 복음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체험하고 영적으로 거듭난 자신의 삶을 반추하면서 ‘나의 복음’이라고 지극히 개인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러분에게 복음은 ‘나의 복음화’되어졌는가? 아니면 아직도 ‘목사님의 복음’, ‘신기루같은 뜬금없는 복음’인가? 그 복음 체험한 자는 모두 다 그 복음이 ‘나의 복음’이다. 바울은 디모데가 기질과 성격상으로 소심하고 두려움이 많고 움츠러드는 면을 가졌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바울은 ‘은혜 속에서 강하고’(V.1)라는 말과 아울러 ‘십자가와 부활을 기억하라’(V.8)는 말을 아울러서 하고 있다. 움츠러져 있는 디모데의 영혼을 소생케하는데는 다른 어떤 것보다 가장 원초적이고도 근본적인 ‘복음의 핵심’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디모데가 이 사실을 다시 밝히 인식하기 시작한다면, 복음으로 인한 고난과 죽음 뒤에 부활의 영광이 있을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바울 사도가 지금 옥중에 갇혀 고난 당하면서도 담대한 것 역시 이 진리를 견고히 붙잡고 있기 때문이요 이 진리는 결단코 갇히지 않고 땅끝까지 전파될 것을 믿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V.9 바울은 복음으로 인해 사람은 매이지만 복음은 결코 매이지 않는다
는 것을 말한다. 온 세상을 향해 흘러넘쳐야 할 하나님의 복음을 장엄하게 바울은 선포하고 있다.
오늘은 신약성경 디모데후서 2장 1-9절의 본문을 가지고 <바울의 다섯가지 권고>라는 주제로 설교한 내용인데요. 바울은 디모데에게 5가지 동사, 은혜속에 강하라, 부탁하라, 받으라, 생각하라, 기억하라는 메시지로 권면하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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