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전서 1:1-2의 본문을 바탕으로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라는 주제로 오래전에 중고등부 학생들에게 설교한 내용을 포스팅합니다. 바울의 목회서신이기도 한 디모데전서에서 애제자 디모데를 향한 바울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본문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 1-2절의 본문입니다.
1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2 믿음 안에서 참 아들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편지 쓰기가 어려운 시대
요즘 인터넷 시대, 스마트폰 시대에는 편지보다 문자나 카톡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하지만 여전히 편지는 이메일이 주는 감동을 뛰어넘는 그 무언가가 있다. 그렇지 않은가? 아주 오래전에 ‘자기얼굴을 우표에 넣어준다’는 우체국의 광고를 보았는데 그것도 아마 편지를 서로에게 쓰게끔 할려는 어떤 노력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요즘 누가 편지를 쓰는가? DM이 있고 카톡이 있고 스마트폰이 있으니 편지쓴다는 것은 진짜 어려운 시대임에는 틀림없다.
오늘 이 말씀중 1:1-2의 본문은 3가지로 나뉘어 질 수 있다.
- 하나는, 편지를 띄우는 바울,
- 둘은, 편지를 받는 디모데,
- 셋은, 받는 이에 대한 인사
이다.
그럼 차근차근히 말씀을 풀어보고자 한다.
1.바울의 소개
바울은 자신을 편지를 받는 디모데에게 어떻게 소개하는가?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라고 말하고 있다. 사도라는 직분은 여러분들도 익히 알다 싶이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목격한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 제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아넘긴 가룟 유다를 사도라고 하진 않는다. 복음의 편에 서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섬겼던 사람들을 사도라고 한다. 아무리 예수님을 잘 섬겼다고 하더라도 그가 예수님을 목격하지 못했더라면 그는 사도가 아니다. 디모데를 사도라고 하는가? 디모데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지 못했기에 사도가 될 수 가 없다.
그 사도라는 말 앞에 수식하는 말이 무언가?
그 사도의 직분이 어디에서부터 왔는지 설명하고 있다.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하나님과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우리의 소망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바울은 예수님이 우리의 소망이라고 이야기한다. 바울은 과거의 탁월한 지성과 학적 성과를 가진 지적인 엘리트였다. 그의 소망은 자신의 지식과 지혜였다. 그의 소망은 자신의 앎과 그 앎에 대한 확신이었다. 그것은 그의 소망이었다. 그는 배울 만큼 배웠다. 살만큼 살았던 지식인이었다. 그런데 그는 부활의 주님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고서는 그의 소망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그 소망의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자리를 잡았다.
왜 그랬는가? 자신을 이제껏 버티게 했던 그 모든 가문의 탁월함과 지성의 특출함은 자신의 생명에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는 것들이었다. 여러분, 그렇지 않은가? 여러분이 중. 고등학교에서 열심히 배우고, 대학 들어가서 전공수업을 잘 받고 나름대로 지식을 아무리 많이 쌓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여러분을 흐뭇하게 하는 만족감은 있겠지만, 절대로 여러분의 생명이나 영생에 관계할 순 없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 사실을 몸소 체험하였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말하고 있다.
여러분들의 소망은 무엇인가?
이렇게 생각하는가? 바울의 소망은 예수님일지 몰라도 나의 소망은 그게 아니야. 나에게 그러한 것은 강요하지 마!..그런가? 물론 강요할 수 없다. 하지만 세상에는 소망이 없음을 여러분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대학을 가기 위해 준비하는 그 모든 학교수업은 우리를 좋은 대학을 가게 만들어 줄 진 모른다. 우리가 만나는 친구들의 따스한 대화와 달콤한 이성친구들의 속삭임은 여러분을 들뜨게 만들진 모른다. 그러나 그 누구도 여러분의 죽음을 대신해서 죽어줄 순 없다는 것이 현실이다. 그게 우리 인간의 비극이다. 아무리 유명한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모두들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여러분은 기억할 것이다. 그는 뛰어난 외모를 지녔으며, 강하고 다재다능하고, 자신감 넘치고, 야심에 찬 사람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 플로렌스에 살 때 공책에 다음과 같은 문구를 옮겨 적었다.
“할 수 없는 것은 포기하고 할 수 있는 것을 하려 하라.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을 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할 수 없는 것을 꿈꾸지 않는 자는 지혜로운 사람이다.”
그러나, 다빈치 얼마 지나지 않아 그와 같은 신중함을 잃어버리고 플로렌스, 밀라노, 로마, 프랑스 등 어디에서든지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넘어 일에 열중했다. 여러분도 알 다 싶이 다빈치는 수많은 명작-“모나리자”, “최후의 만찬”을 남겼고 또한 많은 발명품을 고안해 냈다. 그러나, 후세의 사람들은 미켈란젤로는 그림 하나만을 붙잡았기 때문에 그는 생산적인 삶을 살았고 보지만, 다빈치의 경우는 너무 재능이 많아 초점을 잃어버려 ‘미적거리는’ 인생을 살았다고 평가했다. 바사리도 다빈치가 수십 년 혹은 수세기나 앞선 수많은 발명품들을 연구하느라 그림 그리기에 집중하지 못했다고 유감을 표했다.
다빈치에겐 끝없는 지식욕과 더불어 인생무상을 절감하면서 산 열정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아무리 창의적인 재능과 강한 지적 욕구가 있었지만 인생은 덧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항상 그는
“시간은 너무나 적고, 할 일은 너무나 많다”
고 말했다. 1591년 죽기 몇 개월 전에야 그는 밀라노에 있던 산타마리아 교회에 돌아가서 벽화 ‘최후의 만찬’이 습기 때문에 손상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대가의 최고의 걸작들은 미완성인 채 당대에 파괴되거나 부패되고 말았다. 애석하게도 그가 가진 방대한 지식과 발명품들과 자신의 엄청난 저작들이 출판되지도 못하고 사장되고 말았다. 그는 죽기 얼마 전 이상할 정도의 작은 글씨로 수줍은 듯 공책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불가능한 것을 원해서는 안 된다.”
그 화려한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인생무상을 느꼈고 인간의 한계를 피부로 절감한 위인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부족함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대신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자신의 소망인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다. 적어도 오늘 이 대은 교회에 찾아오는 모든 형제, 자매들은 자신의 소망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고백하는 자이리라.
또한 바울은 자신의 소명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 교회에 출석하게 된 것, 그리고 임원이 되고 뭐 이러한 모든 것들이 우리의 의지로, 뜻으로 되었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아니면 ‘애들이 뽑아줬으니깐 어쩔 수 없이 한다’ 이런 생각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소명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이다. 적어도 오늘 이 말씀은 듣는 친구들은 나의 직분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 나의 신앙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된 것임을 기억해야만 한다. 우리가 바울의 이야기나 바울의 성경을 읽으면 바울의 힘을 느낀다. 왜 그런가? 그것은 바로 ‘바울의 소명’이 바울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났다는 것을 바울은 알았기 때문이다. 만약 그게 바울에게서 났다면 바울은 좀 사역하다가 힘들고 동역자들도 말 안 듣고 짜증나면 때려치우면 그만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바로 하나님과 예수님의 명령으로 자신의 직분이 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2.디모데의 소개
바울은 디모데를 소개할 때에 무어라 하는가?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
<아들>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다. 아들이 무언가? 제가 요즘 운동을 하는데 그 체육관에서 40-50대 되는 아저씨와 20대 초반의 청년이 같이 역기를 들고 운동을 하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생김새나 모양새를 볼 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인 것 같았다. 틀림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두 사람이 닮았기 때문이다.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니깐 말이다.
바로 그렇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는다. 바울은 ‘믿음 안에서’ 디모데를 참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믿음에 있어 디모데가 바울을 많이 닮았을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복음전파하기를 쉬지 않고, 늘 기도하고...기타의 바울의 특징들을 많이 닮았을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디모데를 자신의 ‘수제자’라는 말을 쓰지 않고 자신의 ‘참 아들’이란 말을 쓰고 있다. 그만큼 디모데에게 어떤 복음전도의 테크닉이나 기술을 전수한 수제자로 상대한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아버지와 아들로서 상대했다는 것이다.
디모데는 바울처럼 아주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그는 젊었으나 좀 소심하였고(딤후 1:6-7) 위장병까지 앓고 있었다(딤전 5:23). 그러나, 이런 디모데를 바울은 친아버지처럼 깊은 애정으로 상대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믿음 안에서 디모데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3년 동안 가르치는 동안 디모데는 바울을 도와 일했다. 여러분들도 나중에 커서 교회 일을 해 보면 알겠지만 참 애정이 가는 친구나 동료가 있을 것이다. 웬지 더 챙겨주고 싶고 웬지 더 기도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실수도 많이 하고, 부족한 것도 많은 사람이지만 웬지 함께 일을 하면 기쁘고 즐거운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을 위해 더욱더 기도해 보라. 그 사람이 바로 바울이 말한 ‘믿음 안에서 참 아들(형제, 자매, 가족)된’ 누구누구 라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 서로를 부를 때 부를 호칭이 없어서 남학생더러 형제, 여학생더러 자매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한 가족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모든 가족이라는 것이다. 우리 교회 중. 고등부 모든 학생들이 정말 바울이 말한 것처럼 ‘믿음 안에서 참 아들과 딸 된’ 여러분들이 되었음 좋겠다.
3. 받는 이에 대한 인사
2절 말미에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라고 인사하고 있는 바울이다. 사람이 주는 위로와 편안함도 힐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바울은 인사말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성자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디모데에게 빌고 있다. 우리에게는 날마다 그분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필요하다.
오늘은 디모데전서 1장 1-2절을 본문을 가지고 <믿음 안에서 참 아들된 디모데>라는 주제로 중고등부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설교를 포스팅해 보았습니다. 우리 안에 영적으로 얼키고 설킨 '믿음 안에서 참 아들되는' 이런 관계, 파트너십이 많아졌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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