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의 본문을 가지고 <깨어 정신을 차리라>라는 주제로 설교한 내용입니다. 바울은 영적 긴장과 각성의 바탕을 신학적 교리에서 찾으면서 빛의 자녀들인 성도들에게 재림의 소망, 예수님의 구원목적을 이야기합니다.
바울의 가르침은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려고 애쓴 후에 이제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기' 시작합니다(5:14-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며...). 전후 문맥을 보면 그들의 염려는,
- 첫째로, 사별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습니다(그들은 죽은 그리스도인 친구들에 대해 근심하고 있었다고 어제 본문에서 4:13-18 말했습니다).
- 둘째로는, 심판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습니다(그들은 그들 자신과 심판 날에 그들 자신이 준비되어 있는가에 대해 근심하고 있었다 5:1-11).
바울은 교회의 문제에 대한 해답은 복음 안에서 찾아야만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분명히 합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인들 중에 마음이 약한 자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하여 그는 그리스도인의 소망의 기초가 되는 신학을 전개함으로써 그들의 소망을 북돋우려고 하였습니다. 이 소망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확신에 찬 기대이며, 이 신학은 다시 오실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와 동일한 분-그들이 신뢰하고 있는 분-이라는 진리입니다. 바울은 이 교리를 그들의 문제 둘 다에 적용시킵니다.
4:13~5:11까지 재림에 대한 소망을 이야기하는데, 무엇보다 우리는 영적인 거룩한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과 영적인 무장을 하라는 말씀으로 핵심을 짚을 수 있습니다. 재림에 대한 소망은 그리스도인의 삶과 행위에 대한 자극제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우리가 주님이 다시 오셔서 심판하실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일말의 두려움과 떨림으로 우리가 불안해할 수 있는데, 여기서 우리의 위치를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참고로 4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간의 특별한 관계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날이 도둑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도둑같이 임하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는 빛의 아들인가? 어두움의 아들인가?
낮의 아들인가? 밤의 아들인가? 에 대한 여부입니다(5절).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분은 낮의 아들이며 빛의 아들이심을 믿습니까?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서 계심을 확신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빛의 아들, 낮의 아들로 스스로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극적으로 위축되거나 재림, 심판을 생각하면서 신앙심이 흔들릴 수 있는데, 바울은 이런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하여 그들에게 '영적 긴장과 영적 무장'에 대한 말씀을 전해줍니다.
8절..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한다고, 믿는 지체들에게 영적 무장을 권합니다!
이 이야기 이후에 '연합과 동행'라는 주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재림, 분노의 심판, 불안 등...이러한 주제는 신자라 하더라도 부정적인 정서와 감정을 유발할 수 있는데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의 계획은 분노나 노하심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목적, 최종 목적은 바로 구원임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그런데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서 바울은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10절을 다같이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여기서 하나님은 우리와 무엇을 원하시는가? 심판, 순종, 굴복, 순복? 하나님의 원초적인 소망과 뜻은 구원입니다. 그리고 또한 바로 '동행', '거룩한 동행'으로 명명하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이유는 바로 우리가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신과 함께 살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항상 주님과 동행하기 위함입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지 간에! 왜 그러한가? 주님께서 자신의 존재 중에 일부를 우리를 위해 드리신 것이 아닙니다. 이를테면, 80%, 50%, 20% 정도로 자신을 주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자신의 전부인 100%를 우리 죄인들을 위해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그 분은 우리에게 전부를, 바로 깨어 있든지 자든지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 속에서 '거룩한 동행'을 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정말 너무 사랑하지 않는다면 매순간, 매시간 동행하고 싶은 마음이 없을 것입니다. 이성간의 사랑도, 아니 이 세상의 어떤 사랑도 '깨어 있든지 자든지' 항시 같이 있고 싶고 동행하고 싶어하는 사랑의 경지에 이르진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를 향한 사랑은
바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에 드러나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 가운데 주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으로 말미암아 더욱 풍성해진 믿음의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또한 우리가 깨어 있든지 자든지 늘 주님과 함께 거룩한 동행으로 나아가시길 소망합니다!
신약성경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의 본문을 바탕으로 <깨어 정신을 차리라>란 주제로 설교한 내용을 오늘은 포스팅해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삶의 여러가지 근심과 염려가 있더라도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어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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