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교/누가복음

누가복음 23장 43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가 있으리라

by Message.K 2022. 3. 13.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1)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우리는 수많은 십자가에 관한 설교와 영화, 글들을 대하면서 자주 떠올릴 수 단어는 아마도 '모순'이 아닐까 싶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유대인들에게서부터 그런 '모순'을 많이 대하기 때문이다.

 

 

 

▮모순 [矛盾] 네이버 백과사전 언어일반 > 어휘

말이나 행동의 앞뒤가 서로 맞지 않음. 矛 : 세모진창 모 盾 : 방패 순 논리학에서는, 두 개의 개념이나 명제(命題) 사이에 의미 내용이 서로 상반되는 관계를 말한다. 중국 전국시대의 초(楚)나라에서, 창과 방패를 파는 상인이 '이 창은 예리하기로 어떤 방패라도 꿰뚫을 수가 있다. 그리고 이 방패의 견고함은 어떤 창이나 칼로도 꿰뚫지 못한다.'고 자랑하였다. 어떤 사람이 '자네의 창으로써 자네의 방패를 찌르면 어떻게 되는가?' 하고 물었더니 상인은 대답하지 못하였다고 한다.《한비자(韓非子)》 난일(難一) 난세편(難世篇)에 있는 고사(故事)로, 법지상주의자(法至上主義者)인 한비(韓非)가 유가(儒家)의 덕치주의를 비판한 우화이다. [출처] 모순 [矛盾 ] | 네이버 백과사전

 

 

 

  이런 광경을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의 길에서 종종 볼 수 있다. 십자가에 달릴만큼 심각하고 엄청난 죄를 지은 범죄자인 바라바를 풀어주고, 대신 죄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상황인가? 당시 이스라엘 최고의 이슈메이커였던, 기적의 인물이었던, 자기들이 그토록 추종하면서 따랐던 예수님을 감옥살이나 감금형도 아니고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처형하라고 목에 핏대를 세워가면서 '바라바를 살리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친 대목은 정말 아이러니이다.

 

 

 

 

  또한 골고다 언덕 위에 십자가가 세워졌다. 어떤 이들은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보며 '어떻게 하다가 저렇게 되었나' 하고 한숨을 내쉬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더니 꼴좋다'고 하며 비웃음과 함께 경멸의 눈으로 쳐다보며 지나갔다. 아무 죄도 없는 분이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맞이하고 계시는데 사람들은 오히려 멸시하고 천대하며 예수님은 자기 자신의 죄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비난하고 정죄하고 있다. 정죄 받을 자가 정죄하는 삐뚤어진 세상의 모순된 이치가 드러나는 십자가이다.

  누구의 죄 때문에 십자가 상에서 예수님이 그렇게 처참하게 매달려 있는지, 사람들은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의 우화처럼 수치스럽고 무지하게 처신하고 있다. 거기에 또 하나의 어리석은 초상화가 우리 눈 안에 들어오는데 바로 오늘 이 대목이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십자가상에서의 장면, 예수님과 두 강도와의 대화의 기록이다.

  한 편 강도는 십자가의 죽음을 앞둔 그 현실 앞에서도 아주 교만하고 완고한 자세로, 능청스럽게 그러면서도 비아냥거리듯이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함께 우리를 구원하라!'고 말을 성의 없이 내뱉는다. 죽음을 앞 둔 이 강도가 어떻게 이렇게 성의 없는 말로 마지막을 마무리할 수 있단 말인가? 강도라는 범죄자의 길에 들어서면서 그의 인격이 그렇게 되었는지 아니면 원래부터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말에는 정말 정나미가 뚝 떨어지는 면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과연 그 친구의 무엇을 보고 구원하실까? 오히려 주님의 마음은 돌이키지 않는 그 강도의 완고함 때문에 마음 아파하셨을 것이다.

 

 

  

  또 다른 한편의 강도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한다. 다른 편의 강도를 오히려 꾸짖는다. 40-41절 다같이 읽어보자.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사람이 살아가면서 자신의 위치나 자리를 제대로 짚고 있어야 하지 않는가? 이 강도는 자신이 왜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가는지,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죄값으로 죽어가는 것임을 처절하게 책임을 느끼고 있었다. 죽음 앞에서 일말의 두려움과 자신의 죄에 대한 통한도 엿볼 수 있다.

 

 

 

 

■ 강도의 요청 (눅 23:42)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Mnh,sqhti,

  강도는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신 말씀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다.

 

 

  

  이 강도가 나를 기억해 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겠다고 말씀하신, 이렇게 반응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분명히 이 강도를 기억하겠다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이 한편 강도를 기억하겠다는 말씀? 그렇다면 무엇을 근거로 그를 기억하겠다는 말인가? 단지 강도는 이 죽어가는 마지막 최후의 장면에서 던진 한 마디, '자신을 기억해달라'는 말 한 마디만 던졌는데, 예수님은 너와 함께 천국에 가 있겠다고 말씀하신 것인가? 우리가 흔히 사람을 기억할 때 그 사람과 함께 한 추억이 서린 관계를 기억할 때가 많다. 그 사람과 어디에 가서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어떤 이야기를 나눴으며, 어떤 통화를 했는지, 그 사람과 어디에 가면 어떤 기쁜 추억이 있고, 어디에 가면 또 어떤 슬픈 추억이 있는지...그런 추억들이 모여 관계의 정을 쌓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강도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는 전혀 그런 추억꺼리가 존재하지 않았다. 강도는 인생의 모든 나날들을 예수님과 관계없이 살다가 지금 마지막에 예수님을 물에 빠진 자가 찌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겸허하게 이야기하는 그것뿐이었다.

 

 

 

강도는 예수께서 그의 나라에 들어갈 때 "나를 기억하소서" (Mnh,sqhti, mou(라고 말하였다. 이 말은 요셉이 감옥에서 꿈을 해석해 준 사람에게 말한 요청을 연상시킨다 (창 40:14).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바로의 잔을 맡은 관원은 직위를 회복하고 나서 요셉을 기억하였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나라인 낙원에서도 기억을 일으키는 인간의 정신활동이 가능하다.

 

 

 강도의 말에서 낙원은 공간적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당신이 들어갈 때" (o[tan e;lqh|j evn th| basilei,a| souÅ)라는 말에서 분명하게 표현된다. 일반적으로 누가는 "...로 들어가다" (e;rcesqai eivj)를 사용할 때 공간성을 지시한다. 이것은 낙원이 공간적인 의미에서 파악되는 것임을 보여준다. 공간으로서의 낙원은 예수께서 들어간 곳이다. 따라서 낙원은 예수의 장소이다.

  여기에서 낙원이 예수의 나라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그래서 강도는 "당신의 나라에" (evn th| basilei,a| sou)라고 말하였다. 강도가 예수의 나라 (왕국)에 관하여 알 수 있었던 것은 군병들이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눅 23:37)는 말을 들었거나 예수의 십자가에 위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기록된 명패 (눅 23:38)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의 나라는 낙원과 동일시된다. 낙원은 예수께서 들어가신 예수의 나라이다. 예수의 나라에서는 예수께서 왕으로 다스리신다. 그래서 예수의 나라에서는 왕이신 예수의 성품이 표현되고 실현된다.

 

 

 

2) 예수의 대답 (눅 23:43)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기억하겠다고 말씀하셨다.

 그의 낙원 입성을 허락하셨다.

 

   

 강도의 요청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확신 있게 대답을 하셨다: "내가 진실로 네게 말한다". 예수의 대답에서 두 가지 사실이 중요하다. 첫째로 강도는 예수와 함께 있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며, 둘째로 강도는 예수가 왕의 직분을 발휘하는 낙원에 있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즉, 예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는 것이 열려있다는 것이다.

  예수의 대답에서도 낙원에 관한 몇 가지 성격이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낙원입장은 사후에 즉시 일어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께서는 강도에게 "오늘" (sh,meron)이라고 말씀하셨다. "오늘"(sh,meron)이라는 표현은 누가가 즐겨 사용하는 단어이다. 누가에 의하여 사용된 "오늘"sh,meron의 용례2).

 

 

 

 대체적으로 이것은 24시간의 하루를 의미한다기보다는 "지금"이라는 시점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특히 여기에서는 이 단어가 "지체 없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의로운 자의 영혼이 낙원에 입장하는 것은 사후 오랜 시간이 지나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의로운 자의 영혼의 낙원 입장 (참여)은 사후에 즉시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은 누가의 두 작품에서 일관적으로 표현된다.3)

  

 

 

또한 예수께서 강도에게 약속하신 말씀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사실은 낙원이 의인들의 영혼을 사후에 받아들이는 장소라는 것이다. 사후의 세계에 대하여는 예수께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로 분명하게 설명하셨다 (눅 16:19-31). 이 비유에서는 나사로가 들어간 곳이 "아브라함의 품" (눅 16:22f.)이라고 묘사된다. 아마도 이것은 지극히 높으신 이가 계신 곳이며 (참조. 행 7:48),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거처로서의 "지극히 높은 곳" (눅 2:14; 19:38)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말씀에서 더욱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낙원이 죽은 의로운 자들이 예수와 함께 있는 장소라는 것이다. "네가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낙원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예수와 함께 있다는 예수의 동반성이다. 신자의 영혼이 사후에 예수와 함께 있게 된다는 것은 신약성경이 통일적으로 보여주는 사상이다 (참조. 고후 5:8; 빌 1:23; 살전 4:16; 계 7:9-17). 예수와 함께 있다는 것은 예의 모든 은혜를 누리게 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이것은 마치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와 함께 있다는 것이 아버지의 모든 재산을 누리는 영광을 가진 것을 의미하는 것과 같다 (참조. 눅 15: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렇게 볼 때 낙원사상에는 사후세계의 천상적 잔치의 즐거움에 대한 암시가 들어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강도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초청의 언어이다. 예수는 강도를 사후세계의 천상적인 잔치에 초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낙원은 예수의 초청을 받은 사람이 즐기는 향연(dei/pnon, Gastmahl)이다 (눅 13:29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14:15-24을 참조하라).4)

  예수님은 강도를 천국잔치에, 천국의 향연에 초대하고 있다. 죄 많은 강도를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주님께서 초청하고 계신다.

 

 

 

  무엇 때문인가? 바로 '그가 한 말' 때문이었다.

  그가 한 말이 무엇인가? 그가 예수님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는 당신이 필요하다는 간절한 호소를 내어드린 것을 예수님께서 받아들이신 것이다. 예수님께선 강도의 내미는 손을 결코 뿌리치지 않으셨다. 긍휼의 열정가이신 예수님이셨기에 강도의 내미는 손을 잡아주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강도를 보신 것은 바로 '믿음의 고백' 때문이었다. 강도는 '내가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고 싶다'고 하지 않았다. 다른 강도는 '우리와 함께 구원해보라'고 했지만, 이 친구는 '자신을 기억해달라'라는 겸허하고도 겸손한 발언을 한다. 우리가 여기서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순 없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구원받을 이유는 바로 다른 어떤 것이 아닌 '믿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은혜'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데, 정말 은혜다. 구원은 은혜가 아니면 우리가 어찌 받을 수 있단 말인가?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믿는 세상, 왼편 강도의 '네가 메시야라면 너 자신과 우리도 한 번 구원해 봐'라고 외치는 그 말처럼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믿으면서, 십자가에 달려서 같이 죽어가는 처지에 있는 자칭 메시야인 네가 과연 무엇을 하겠느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교회와 영적인 모든 것들을 도외시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는 마치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들릴 수 있다.

  세상은 끊임없는 보상과 대가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공짜가 없는 세상이다. 공짜라고 이야기해놓고선 오히려 뒷통수를 치는 것이 요즘 세상이 아닌가? 일본 열도에 내린 쓰나미와 지진과 핵발전소의 방사능 누출로 인해 많은 유명인들이 기부에 참여하고 있다. 비참한 현장 가운데 10억을 기부한 욘사마! 천재지변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이런 기부는 어찌 보면 인간사의 인지상정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범죄한 자를 위해, 흉악한 범죄의 이력이 있는 자를 위해 구원을 베푼다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은혜'인 것이다. 세상의 논리와는 정반대인 것이다.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은 인간의 관점과는 물론 다르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흉악한 죄를 지은 흉악범에 대해서 멸시와 비난과 조롱의 시선을 보낸다. 그러면서 서로 대적하고 갈등하고 분노한다. 그런 사람을 옆에 두는 것조차 꺼릴 때가 있다. 그게 인간의 심리이다. 하지만 우리가 63빌딩이나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서 아래인 땅을 쳐다보면 다 그게 그거다. 얼굴에 점이 얼마나 많은지, 피부색이 어떤지, 어떤 옷을 입고 다니는지, 어떤 자가용을 타고 어떤 집에서 사는지 그건 다 한 점에 불과할 뿐이다. 더 나아가서 누가 죄를 더 많이 짓고 누가 죄를 덜 짓고 표시가 안 난다. 죄는 죄이지, 모가 나고 흠이 가득한 흠집투성이 그 자체일 뿐이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죄는 양이나 크기로 따질 수 없는 것이다. 죄인이면 큰 죄인이 있고, 작은 죄인이 있고 그렇지 않다. 큰 죄를 지어서 지옥가고, 작은 죄를 지어서 등급자체가 아예 다르게 구분되거나 보류나 대기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죄를 지으면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이다. 하지만 이 죄를 넘을 수 있는, 초월할 수 있는 유일한 One Way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은 가상칠언의 두 번째 말씀 '오늘 네가 너와 함께 낙원에 가 있으리라'라는 약속의 말씀을 강도에게 말씀해주셨다. 강도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낙원이다. 자신이 평생 지은 죄에 대한 죄값이나 형벌 때문에 도저히 받을 수 없는 상급이다. 그러나, 이것은 강도에게 한 말인 동시에 온 인류를 향해 말씀하시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이것은 약속이다. 하나님께선 우리에게 '약속의 말씀'으로 다가오신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수많은 문제와 아픔과 상처와 죄악이 있다손 치더라도 하나님께서 보시고 '낙원에 가 있겠다'고 하시면 '하나님의 권속이 된 것이며, 낙원에 입성한 것'이다. 그 잔치에, 그 향연에 초청되었으므로 그 잔치를 즐기면 되는 것이다. 이 약속의 말씀을 믿고 붙드는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것이다.

 

 

 

  

  자신을 기억해달라는 강도에게 예수님은 '네가 잘못을 회개해야 한다'라고 말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강도의 '때 늦은 회개'에도 민감하게 반응하셨다. 너무 늦기 전에 '한 타이밍 늦은 회개'라도 주님 앞에 내려놓자. 우리 주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가 죄를 자백하기만 하면 용서해주신다고 선언'하셨다. 주님은 십자가의 마지막 최후를 앞둔 한 강도의 '때 늦은 회개'에도 불구하고, 그냥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용서하시는 일에 관대하신 주님이시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혀 온 여인을 향해 주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요 8:11)이라고 말씀하셨던 주님의 모습과 너무도 일맥상통한다. 우리 인간은 용서하기 위해 갖가지 조건을 요구하지만, 용서의 주님은 아무것도 묻지 않으시고 자신을 찾는 자에게 조건 없이 은혜를 베푸시고 용서하시는 주님이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 용서의 주님이심을 믿는가? 중요한 것은 세상에는 이 두 강도와 같은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주님을 알아보는 사람과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기에 예수님의 조롱하고 비방하고 욕하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성도 여러분, 주님을 먼저 알아보시기를 바란다. 그리고 주님께 먼저 손을 내미시길 바란다.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는 섬세하신 주님이시다. 주님께 먼저 겸손하게 겸허히 도움을 간구하기를 소원한다. 천국소망, 하늘소망에 대한 약속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있는가? 그렇다면 감사하자. 벌레만도 못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나아가자!

 

하나님의 은혜 F

 

 

 

 


1) para,deisoj, ou, o` paradise, a place of blessedness above the earth Lk 23:43 2 Cor 12:4 Rv 2:7.* [pg 148]

 

2) 예를 들면,

눅 2:11 예수의 탄생,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눅 4:21 예수의 나사렛 설교,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눅 5:26 예수의 중풍병자 치료,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

눅 19:5,9 예수의 삭개오 유숙;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눅 23:43 예수의 십자가 처형,

행 20:26 바울의 밀레도 설교,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행 24:21 바울의 베스도 앞에서의 설교, 오직 내가 그들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만 있을 따름이니이다 하니

행 26:2,29 바울의 아그립바 앞에서의 설교,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고발하는 모든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나이다

 

3) -부자와 나사로의 경우 눅 16:22f,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예수의 경우 눅 23:46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스데반의 경우 행 7:59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4) http://kr.blog.yahoo.com/yydeokk196/7337.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