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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누가복음

누가복음 23장 26-32절, 십자가를 외면한 성을 위한 애곡

by Message.K 2022. 3. 13.

*신약성경 누가복음 23:26-32의 본문을 가지고 <십자가를 외면한 성을 위한 애곡>이란 제목으로 설교한 내용입니다.

 

 

기독교의 상징은 보편적으로 십자가로 구현됩니다. 그에 대해서 사람들은 불만을 터트리거나 불평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당연히 기독교를 표현하는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무십자가 악세사리, 차량용 목걸이, 네온등의 십자가는 기독교의 심볼로 당연히 받아들여집니다. 하지만 십자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밝고 아름답고 우아한 이미지가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는 한마디로 사형방법의 일종입니다. 그러기에, 혐오스럽고 마땅히 없어져야 할 형틀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시초가 야만인들에 의해 고안되어졌고 그것이 로마군대로 유입되었기 때문에 잔인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잔인하고 사람의 고통을 더 느슨하게 만든다는, 더 아픔과 고통을 딜레이시킨다는 명목하에 사라져야 할 사형방법어리고 생각했습니다. 말 그대로 악명높은 사형방법입니다. 우리가 사형수들을 미디어를 통해서 볼 때 '동아줄'을 연상시킵니다. 사람의 목을 졸라 죽이는 사형방법! 그것은 정말 몇 분안에 사람의 목숨을 앗아갑니다. 하지만 십자가는 몇 시간씩 더 사람의 목숨을 연장시키면서 사람의 고통을 연장시키고, 연장시킵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혀를 깨물어 죽는 사형수도 있었다고 합니다.

 

 

 

십자가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기독교의 심볼이기 이전에, 고통, 죽음, 상처, 아픔, 혐호, 소름돋는 처단방법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어릴적부터 이 십자가의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고통스럽고 성가시고 힘들고 어렵고 아픈 십자가의 과제는 늘 예수님을 따라다녔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삶의 목적이었으니깐요. 하지만 그 십자가의 끝이 죽음이 아닙니다. 죽임이 끝이라면 우리 주님은 그 십자가를 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죽음이라고 해도 주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끝이 죽음이 아니라 부활의 영광, 보장된 미래, 화려한 높임의 영광입니다. 십자가를 진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미래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지지 않은 제자, 백성들에겐 이러한 영광은 보장될 수 없습니다. 왜냐구요? 그들은 십자가를 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특별히 오늘 본문 26절에서는 십자가를 굉장히 어설프게 진, 자의로 진 것이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 십자가를 진 인물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거의 탈진된 예수님을 대신해서 구레네 출신의 시몬이라는 자가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무게도 무게이지만, 그 십자가를 지는 것만으로 엄청난 정신적인 압박감과 상처와 모멸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사형틀이었으니깐요.

 

 

 

 하지만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구레네 시몬은 억지로 십자가를 진 이유로 성경상에 그 이름이 올려져 있습니다. 수많은 성경 독자들이 세대와 세대를 지나가면서 구레네 시몬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는 죽어서 자신의 이름을 남겼습니다. 예수님을 대신해서 십자가를 진 인물이라고 말입니다. 그의 가족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지워진 십자가가 있습니까? 기쁨으로 자원하는 심령으로 지시길 바랍니다. 억지로라도 지시길 바랍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우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자의적으로, 자발적으로 자신에 생에 십자가를 지는 삶의 내용이 있었습니다. 동역자 여러분들에게 억지로라도 감사함으로 십자가를 지시는 역사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지지 않았던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치명적인 독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교만이었습니다. 자신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유일한 민족이라는 우월사상에 근거한 교만이 치를 떨게 했습니다. 유대선민사상에 도취되어 모든 것 다 자동적으로 주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구원도, 천국도, 영생도, 이 모든 것들이 자동적으로 주어진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No Cross, No Crown!

십자가 없으니, 영광의 면류관도 없습니다.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이 없다면, 부활의 화려한 영광도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기를 거부하는 시대, 십자가의 고통을 거절하는 세대! 그 시대와 그 세대는 멀지 않습니다. 바로 지금 현 세대, 현대가 바로 그 시대요, 그 세대입니다. 인스턴트적인 것에 익숙하며 온갖 미디어를 통해서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여 순간적이고도 충동적인, 감각적인 것에 익숙해진 추세입니다. 이런 현 트렌드 속에서 십자가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게 보이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진득하게 주를 따르는 가운데 수반되는 모든 고통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현대는 힘들고 어렵고 귀챦고 성가시는 것은 거절하는 시대입니다. 그런 것을 감당할 그릇이 못 됩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십자가는 그 모든 것을 요구합니다.

 

 

  백성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행로를 보면서 마음 아파하고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28절입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너희와 너희 다음세대를 위해 울라고 말합니다. 십자가를 거부하고, 거역하는 시대와 세대를 위해 통곡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표면적인 슬픔과 애통을 보이지 말고 눈물로 자손들을 위해 씨앗을 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의 목적지는 분명합니다. 부활의 영광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에 직면해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슬피 울며 회개하라고 촉구하십니다. 십자가를 거절하는 것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도 거절하는 그들의 교만과 우매함에 대해 예수님은 슬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여러분에게 있는 십자가를 즐거이 감당하시길 촉구합니다.

  내 몫에 태인 십자가를 믿음으로 감당할 때 더 큰 영광이 주어질 줄 믿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계십니까? 불신가정에서 답답하고 힘든 십자가를 감당하고 계십니까? 명절이 오면 두렵고 떨리는 십자가가 있습니까? 주님의 능력으로 온전히 감당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십자가의 끝은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부활의 영광이요, 소망이길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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