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교/누가복음

누가복음 23장 34절,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용서청원은 동시에 용서서약)

by Message.K 2022. 3. 13.

 사순절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특별한 기간이다.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은 사순절의 시작을 알리는 교회력 속의 절기를 말한다. 교회는 재를 이마에 바르고, 죄를 고백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고난을 40일간 묵상하는 사순절의 의미를 생각한다. 이때 사용한 재는 성지주일에 사용한 종려나무 가지를 태운 것이다. 로마 가톨릭과 성공회, 감리교 등에서 지키고 있다.

 

 

 

  성회수요일 혹은 재의 수요일부터 부활절 전날까지의 40일을 가리켜 사순절이라고 부른다. 주일까지 합하면 46일인데, 주일은 계산에서 제외된다. 성경에서 40일은 매우 의미 깊은 수이다. 모세가 40일 동안 시내 산에서 금식하며 기도했고, 예수님도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셨다.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유리방황하며 연단을 받고 나서야 약속의 땅에 들어갔다. 그러므로 40은,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위해 준비하고 단련하는 기간을 뜻한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는 이 40일을 정하여 특별하게 지켰다. 이 기간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묵상하면서 자신을 준비시켜 영광스러운 부활절을 맞이하기 위함이었다.

 

 

 

 저는 사순절을 맞이하여 수요일마다 기회가 되는대로 가상칠언의 말씀을 가지고 증거 하고자 한다. 부디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의 은혜를 맘껏 누리는 귀한 사순절이 되기를 바란다.

 

 

..."밀양...Secret Sunshine"

  몇 년 전에 ‘뜨거운 감자’역할을 했던 영화, ‘밀양’! 전도연에게 칸영화제의 여우주연상의 영예를 안겨준 그 영화의 내용을 잠시 나눠보고자 한다.

신애(전도연)는 밀양으로 내려온다. 아들 준과 함께 남편을 잃고 무언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밀양행을 선택한 것이다.

‘밀양...Secret Sunshine'

  하지만 신애는 뜻하지 아니한 유괴사건으로 하나의 희망의 씨앗과도 같은 아들 준을 잃어버린다. 어떻게 어떻게 전도로 인해 우연히 찾은 예배당...기독교에로의 회심...나는 무슨 간증영화를 보는 줄 알았다. 하지만 순간순간 이창동 감독의 영화이고, 전도연과 송강호가 출연하는 영화임을 늘 자각해야만 했다.

  나는 영화에 몰입하게 되면서 이게 무슨 기독교의 회심을 다루는 영화인가? 종교영화인가 하는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그런 착각을 후에 무색하게 만든 대목, 대사가 있다.

 

 

    “사람이 죽이고 미안하다고 하면 다야?”

 

 

  운전하다가 횡단보도에서 웬 중년부부를 치일 뻔하면서 이들이 신애에게 던진 말이었다.

 

 

  이 대사는 이 영화의 ‘용서’에 대한 이해도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어쨌든 영화는 ‘용서’의 테마로 흐른다. 기독교적인 사랑의 표시이기도 한 ‘용서’....

  신애는 마산교도소에 수감하고 있는 자신의 아들을 유괴하여 죽인 살인자에게 찾아간다. 그를 용서하려고, 당신의 죄를 내가, 아들의 어미인 내가 용서한다고...신애가 그 말을 끄집어내려고 한다. 웬걸? 살인범의 얼굴은 신애의 얼굴보다 더 좋았다.

 

  ‘얼굴이 좋으시네요?’

 

그러면서 신애는 자신이 하나님을 만났고 그래서, 굳은 결심으로 살인범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왔음을 이야기하려는 찰나에 그가 입을 열었다.

 

‘잘됐다고...나도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고...자신의 죄를 하나님께서 이미 용서해서 너무 감사하다고...’

 

  그러면서 살인범은 환한 얼굴을 보여준다.

 

  유괴살인범, 신애의 아들을 죽인, 자신의 아들을 죽인 흉악범이 눈앞에서 죄수이고 살인자임에도 불구하고 더 맘 평안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신애는 배신감을 느낀다. 그것은 절대자에 대한 배신감이었다.

 

 

 

여기서 충격을 받는 신애...내가 용서를 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벌써 용서를 했다고?

  나는 이 대목을 보면서 하나님과 사람, 절대자와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용서(수직적인 용서)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용서(수평적인 용서)의 큰 거리감의 간격을 느꼈다. 이것은 주기도문에 나오는 마 6:12의

 

 

  (마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의 대목과 연결된다.

  주기도문에서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용서가 있어야(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하나님과 인간의 용서가 가능하다(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영화에서 신애가 느끼는 심각한 딜레마-아들을 잃은 어미가 용서해주지 않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유괴살인자를 용서할 수가 있는가?-로 연계시켜 보면 우리가 흔히 용서를 이야기할 때 하나님, 즉 절대자와 자신과의 관계에서 청산할 것이 청산되어지면 용서받았다고 느끼면서 평안을 누린다.

 

 

  하지만 영화는 어쩌면 인간과 인간 사이의 청산해야 할 무게의 빚은 하나님과의 용서가 있었다 하더라도 인간적인 차원에서 청산해야하고, 용서의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은연중에 말하는 것이 아닐까? 이것은 용서가 반드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식의 심판과 형벌의 법칙을 적용해야 한다는 전제를 까는 것은 아닐까?

  영화는 그런 의문점을 던진다.

 

 

 

  필립 얀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라는 저서에서 오늘날의 시대가 ‘은혜가 없는 시대(세상)’ 라고 했다.

시인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는

 

“인간에게서 은혜를 빼면 얼마나 초라한 존재가 되는가.”

 

라고 탄식했다.

 

 

 

 

  저는 용서는 은혜가 바탕이 되어야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유괴살인범도 신애가 받은 상처만큼 똑같이 그렇게 한다고 해서 신애의 마음이 위안과 위로가 되지 않는다. 죽어간 아들의 생명이 다시 돌아올 수 없다. 신애의 찢겨진 상처와 영혼은 복수나 보복의 원리에 의해 꿰맬 수 없는 부위이다. 우리들은 언제나 받은 만큼 돌려주고 싶은 그런 강한 reaction의 반응response이 존재한다.

  용서...결코 쉬운 것이 아님을 영화는 보여준다. 용서는 인간적인 선행이나 미덕이나 자기도취와 자기최면으로 되어지는 것이 절대 아니다. 용서는 신적인 은혜가 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용서는 은혜를 필요로 한다...

  자신의 가슴을 완전히 찢어놓는, 자신의 인생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미안하다? 라는 식의 말 한 마디? 그것이 용서는 아닐 것이다.

 

 

 

 

  용서라는 것은 ‘은혜’, ‘신적인 그 무엇’이다.

  영화의 원작, 이청준의 ‘벌레이야기’에서 나는 문득 벌레를 ‘벌레보다 못한 내가 용서받을 수 있나요?’라는 가사가 있는 찬송가가 생각난다. 그 책을 읽어보지 못한 단순한 내 생각이다. ‘벌레보다 못한 나’라고 유괴살인범은 자신을 표현했다. 용서...그것은 신적인 은총이다. 은혜이다. 인간의 어떤 것으로 그 공백을 메울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적인 용서의 권리조차 하나님에게 빼앗긴 신애의 극도의 배신감은 그녀를 더 허무하고 절망케 한다.

 

  영화 ‘밀양’은 용서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많은 생각과 사색을 하게끔 한다. 하지만 여전히 용서에 대한 부분은 시원하지 못한 게 아쉽다.

  세상은 은혜에 굶주려 있다. 신적인 은혜, 신적인 용서에 굶주려 있는 현실이다.

 

오늘 본문 23:34

‘아버지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에서 예수님은 용서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이 대목은 그 당시 예수님을 직접적으로 못박았던 로마병정들로부터 시작해서 본디오 빌라도, 대제사장, 서기관들, 민중들, 백성들, 직간접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동참했던 수많은 사람들,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음모에 동참한 사람들, 방관한 사람들, 배신한 제자들, 무관심한 인물들! 예수님의 가상칠언 가운데 첫 번째 말씀은 원수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다. 주님, 어떻게 이렇게 원수들을, 자기를 친히 해코지하고 음모하고 욕하고 비방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원수들의 용서를 기도하고 있는가이다.

  

 

 

마치 이 예수님의 발언은 어린 아기들은 자기가 칼을 만지더라도 그게 위험한 것인지 날카로운 것인지 아프게 하는 것인지 모르고 무조건 호기심에 만지고 싶어한다. 마치 주님은 ‘자기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것이 이런 느낌이다. 부모가 자녀를 바라볼 때 느끼는 안타까움과 애절함 그 이상의 그리스도의 느낌인 것이다. 사람들은 종종 사소한 잘못으로 인해서도 독을 품고 복수를 음모하곤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용서를 거쳐 축복으로 나아가고 있다.

 

 

 

  다시 주기도문 본문으로 돌아오면,

  여기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를 누가판과 마태판을 비교해 보면,

마태판에는 “우리의 빚들을 사하여 주시옵소서”,

누가는 “우리의 죄들을 사하여 주시옵소서”

누가가 이렇게 복수를 써서 ‘죄들’이라고 한 것은 단순히 크게 ‘죄의식을 제거해 주시옵소서’ 또는 ‘죄의 권세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옵소서’라는 것을 의미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구체적인 죄의 행위들을 사하여 주시옵소서’라고 말하기 위함이다.

 

 

 

  누가가 ‘빚’이라는 단어를 의미상 ‘죄’라는 단어로 바꾼 것은 의도적이라고 볼 수 있다. 유대인들은 죄를 ‘하나님에 대한 빚’으로 보았고 또 ‘이웃에 대한 빚’으로 본 것을 반영하고 있다. 특히 죄를 ‘하나님에 대한 빚’으로 보았다.1)

  다시 마태복음으로 돌아오면,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용서해 주었듯이 하나님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라고 할 때, 우리 어감으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모범으로 내세운다는 것이다.2)

  

 

 

그렇게 되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한 것 같이 하나님도 우리의 죄의 빚을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의미가 된다.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모범으로 내세우는 것 같이 되어 있다. 누가판에서도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모두를 용서해 주니깐 하나님도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뜻으로 되어 있다. 우리 이웃에 대한 우리의 용서를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듯한 어감을 준다.

 

 

 

 죄 용서 청원은 동시에 용서의 서약이다.

 

  요아킴 예레미아스는 마태복음의 용서에 대한 본문에 사용된 시제가 ‘동시성의 완료형(perfectum coincidentiae)’ 즉 동시적인 것의 완료형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의미로 해석하면 “하나님,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와 동시에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자들(죄들)을 용서하겠나이다”라는 의미이다. 이 죄 용서 청원의 두 번째 부분은 죄 용서를 청원함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부수적인 서약이라고 볼 수 있다.

 

  죄 용서를 빌고자 한다면 ‘자기의 죄를 버릴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의 용서가 나에게 구체적으로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면,

  나의 이웃에 대한 용서의 태도를 동반하지 않는 죄 용서 청원은 하나님은 나의 죄를 용서하는데, “나는 죄 용서 받지 않겠습니다”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저 놈에게 원수를 갚겠다’는 그 죄만은 빼놓고 용서해 달라는 것은 가당찮은 것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곧 내가 용서할 수 없는 그 놈에 대하여 저지르는 그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용서조차 받지 않겠다는 태도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용서 없는 용서 청원은 헛되다

마태복음 18:23-35의 본문은 우리의 용서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주기도문의 용서정신이 어떠한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예화. 비유이기도 하다.

 

[마 18:23-마 18:35]

(23)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24)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25)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한대(26)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27)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28)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29)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30)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31)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32)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33)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34)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35)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이 비유의 마지막 말은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로 되어 있다.

 

 

 

  이 비유에 의하면 만 달란트 빚진 자에 대하여 왕이 그 빚을 탕감해 준다. 즉 용서해 준다. 만 달란트는 예수 당시 갈릴리와 베뢰아 주민 전체가 로마 정부에 내는 1년 세금이 이백 달란트 밖에 되지 않는 것에 견주어 본다면 그것이 얼마나 큰 돈인지 알 수 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금액이다. 이에 비해 백 데나리온(한 데나리온은 장정의 하루 품삯)은 장정이 100일 일한 것에 불과하다. 어마어마한 빚인 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사람이 그 이웃에게 빌려 준 조그만 빚을 탕감하지 않으면 자신의 죄에 대한 탕감이 무효라는 것이다.

 

 

 

  영화 ‘밀양’에서 전도연은 확실히 용서의 사람이 되지 못했다. 그녀가 용서의 은혜를 체험하기 위해선 세월의 무게감이 좀 더 필요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용서는 하나님의 신적인 은혜이다. 일만 달란트의 은혜의 무게를 체감하지 못한 자는 이백 데나리온의 빚에 신경이 곤두설 것이다. 밀양의 ‘신애’는 은혜 받은 척한 것은 아니지만 일만 달란트에 견줄만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 영화를 통해 불신자들과 불신 세상에 너무나 값싸게 보일까봐 나는 ‘밀양’이 우려된다.

 

 

 

  주기도문의 청원들은 모두 서약이다

  주기도문의 청원들은 청원인 동시에 모두 다 서약이다.

  ‘용서받으려고 한다면 먼저 용서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해 준다.

 

 

 

  ERNEST HEMINGWAY의 단편소설 중 “The Capitol of the world”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스페인 아버지가 집을 나가 마드리드로 간 아들과 화해하기로 다짐한다. 아버지는 뒤늦게 양심에 가책을 느끼며 “엘리베랄” 신문에 이런 광고를 낸다.

 

“파코, 화요일 정오에 몬타나 호텔에서 만나자. 다 용서했다. 아빠.”

 

 

  파코는 스페인에서 흔한 이름이다. 아버지가 그 곳에 나가자 파코라는 이름의 젊은 남자가 무려 800명이나 나와서 저마다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헤밍웨이는 용서에 굶주린 소설가였다.3)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에 굶주려 있다. 하나님의 용서에 굶주려 있다. 우리가 먼저 용서의 사람이 되기 위해선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가 필요하다.

  우리는 용서의 사람이 되기로 서약, 맹세를 함과 동시에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받은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원수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자신에게 모든 상처와 아픔과 더 나아가 죽음의 고통을 선사한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신 그 사랑이 우리에게 은혜로 부어질 때 우리도 용서의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순절 기간 동안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맘껏 묵상하고 감사하자.

 

 


 

1)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음을 간략하에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2) 마태복음은 ‘완료형’으로 사용되었고, 누가복음은 ‘현재형’으로 사용되었다. 즉 동사의 시제가 서로 다르다.

김세윤, 주기도문강해(서울: 두란노, 2003), 168.

 

3) 그의 가정은 독실한 신앙가문이었다. 헤밍웨이의 조부모는 복음주의적인 휘튼 대학 출신이었다. 그런 가문이기에 아들의 방종한 삶이 싫었다. 나중에 어머니는 아들이 자기 눈에 띄는 것조차 그냥 두지 않았다. 아들에 생일에, 케익과 함께 아버지가 자살할 때 쓴 권총을 보낸 일도 있다. 한번은 그녀는 편지에 어머니의 인생은 은행과도 같다는 내용을 써 보냈다.

 

“자식은 누구나 세상에 태어날 때 크고 아무리 써도 바닥나지 않을 것 같은 통장을 받고 나온다.” 자라는 동안 아이는 예금은 전혀 하지 않고 인출만 한다. 그러나 나중에 다 자라면 지금껏 찾아 썼던 구자를 다시 채워 놓는 것이 자식의 도리다. 헤밍웨이의 어머니는 이어 아들에게 “구좌의 잔고 유지를 위해 예금할 수 있는 길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써 놓았다. 꽃, 과일이나 사탕, 어머니 이름으로 나온 청구서를 몰래 지불해 주는 것,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의무 불이행을 청산하겠다는 결단, 그러나 헤밍웨이는 어머니나 어머니의 구주에 대한 미움을 끝내 떨쳐내지 못했다. 필립 얀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윤종석 역(서울: IVP, 2001), 40.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