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8장 31-42절의 본문을 가지고 <메시야의 길, 구원의 길>이란 주제로 새벽기도에 설교한 내용이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단순히 우리의 의지와 감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금 상기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점점 더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의 길로 가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이야기하셨지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어떤 생각과 어떤 길로 가시는지 모르고 딴청만 피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기의 길, 고난의 길에 대해서 32-33절에 말씀하시지만, 34절의 제자들은 어떠하다고 말합니까? 다같이 읽습니다.
말씀이 감취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유치원이나 초등학생들에게 아무리 대학생활, 캠퍼스생활, 그리고 거기에 따른 학점과 교수와 과목, 레포트 같은 것을 이야기해도 감을 잡을 수가 없다는 것과 비교가 될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이러한 삶의 행적들을 보여주시지만 아직 제자들은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34절에서는 이것은 단순히 말씀이 감취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도 우리의 자발적인 의지와 마음의 동기에서 믿게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우리가 어떤 감동이나 강력한 끌림에 의해 믿게 되었고, 영접하였다고 하더라도 훗날 돌아보면 그 순간, 그 때에 과연 내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 순종할 만한 여력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구나!’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의 문을 열어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제대로 예수님을 알지도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어 주시고 복음을 받아들이게 한 것을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한국의 최초 선교사로 알려진 언더우드는 1882년에서 1883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한 선교보고서를 읽게 되는데, 그 때 1200만~1300만의 사람들이 복음 없어 살고 있는 ‘은둔국’인 한국에 대해 접했다고 합니다. 당시 언더우드 선교사는 인도선교사를 지망하여 일년간 의학공부를 하면서 특별히 준비하고 있던 중이었다고 합니다. 한국은 아직 선교사가 가기엔 시기상조라는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교회도 없고...선교지도자도 없고...’ 그때 성령께서 선교사의 마음을 강하게 때렸던 한 마디,
“왜 너 자신이 가지 않느냐?”
그 후 언더우드 선교사는 한국으로 오려고 후원금을 마련하려고 이곳 저곳을 찾던 중에 런던선교회의 총무로 있던 삼촌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거기서 언더우드가 선교지로 가는 곳이 한국이라는 소식을 들은 누군가가가 “한국, 한국이라...거의 20년 전 우리도 한 사람을 거기에 보냈는데, 그 후에 아무 소식을 못 들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1866년에 제너럴 셔면호에서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였습니다.1)
그런 소식을 들었는데, 언더우드선교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그대로 순종했고 그가 한국 최초의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언더우드에게 감동을 주었기 때문에 한국 최초의 선교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로 인한, 희생으로 인한 그 바탕 가운데 한국땅의 구원의 길을 놓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 모든 것이 가능할 줄 믿습니다. ‘허물로 죄로 죽었던 우리’를 구원케 하신 은혜, 우리를 그분의 제자로 삼아주신 은혜, 그리고 우리를 충성되이 여기 직분을 맡겨주신 은혜에 더욱 감사합시다. 하나님을 하나님되게 합시다!
35-43절에서는 한 맹인을 우리는 만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만한 말은 39절에 저는 집중하고 싶습니다. 다같이 39절을 읽습니다.
그렇습니다. 맹인은 38절에 먼저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처음 불렀는데 별 반응이 없고 오히려 39절에는 맹인을 꾸짖는 소리가 더 있었습니다. 그러자 맹인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더욱 크게 소리 질러”ἔκραζεν kept crying out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에 방해요소가 있을 수 없습니다. 방해요소가 있다면 치워야 할 것입니다. 맹인은 자신의 절실한 소원, 보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41)으로 인해 더욱 크게 소리질렀다고 나옵니다. 간절한 갈급함이 맹인을 더욱 절실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들은 언제 가장 절실합니까? 언제 가장 간절합니까? 아기가 젖달라고 울다가 젖을 물리면 얼마나 절실하게 젖을 빱니까? 지난 런던 올림픽 경기때 한국선수가 금메달을 앞두고 각축전을 벌일 때, 축구선수들이 골을 넣지 못할 때 긴장되고 초조할 때, 경기가 이기고 있으면 빨리 경기가 끝내주기를 바랄 때 우리는 그러한 간절함과 목마름을 느끼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막을 횡단하던 여행객이 물이 다 떨어져서 기력이 쇠하여져 갈 때 그는 정말 목마름이 간절할 것입니다. 맹인에겐 이러한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성경에서는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다’고 했습니다.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하나님께 절실하게 만나주실 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소경에게 물으셨습니다. 41절입니다. 성경은 읽는 것만으로도 복이 됩니다. 다같이 읽습니다.
소경이 대답합니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우리가 구원은 하나님께서 문을 열어주셔야만이 가능한 일이긴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또 다르게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은 구원은 자동문이라고 생각했지만, 구원은 좁은 문이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또 한편으로 구원은 우리가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가야 할 현재진행형의 믿음생활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의 간절함을 회복합시다. 목마름을 추구합시다. 오늘 월요일 아침에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하나님되게 하며, 갈급함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나아가는 귀한 시간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양낙흥, 한국장로교회사(서울: 생명의 말씀사, 2008),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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