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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찬양예배사역

넘치는 예배자 Overflowing Worshiper②

by Message.K 2022. 3. 31.

<넘치는 예배자Overflowing Worshiper>는 예배자를 위한 강의내용입니다. 지난 번 첫번째 포스팅에 이어 두번째 포스팅을 이어가고자 합니다. Chapter1은 '감동을 주는 예배자'란 주제로 글을 진행해 볼까 합니다. 예배자, 예배사역자에게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01. 감동을 주는 예배자

 헨델의 감동의 산물, 메시야

여러분은 헨델을 잘 알 것이다. 그는 

 

위대한 전능자의 거룩한 뜻에 그리스도인의 복종으로 나 자신을 드리는 것이 그분을 기쁘게 하였다.

 

고 확신했다. 헨델을 섬기던 하인은 자신의 주인의 입맛에 들기 위해 음식을 정성껏 준비하였다. 하지만 헨델은 일주일이 넘도록 독방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음식도 입에 대지 않은 채 말이다. 하인은 음식이 잔뜩 담긴 쟁반을 정리하면서 체념한 듯 음악가들이란 참 이상하리만큼 신경질을 잘 내는 사람들이라고 숨죽이면서 중얼거렸다. 다시 한번 하인은 그 하인은 마음을 강하게 먹고 전과 똑 같은 작업을 한다. 작곡가의 방문을 홱 열어 젖혔을 때 그는 그 자리에서 얼어 붙고 말았다.

  경이에 찬 얼굴을 한 작곡가는 뺨에 눈물이 철철 흐르는 채로 하인을 향하여 소릴 지른다.

 

나는 내 앞에 펼쳐지는 천국과 거기 계신 위대하신 하나님 그분을 뵈옵는 것 같았어.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헨델(Georg Friderich Handel)은 할렐루야 합창으로 역사에 자리 매김될 곡을 쓰는 일을 막 끝냈던 것이다.

헨델은 8월 22일에 런던의 브루크 가에 있는 그의 작은 집에서 작곡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는 점점 작업에 너무나도 깊이 몰두하여 좀처럼 자기의 방을 떠나지도, 음식을 먹으려고 멈추지도 않았다.

6일이 걸려서 제 1장이 완성되었다. 9일이 더 걸려서 제 2장을 완성하였고, 또 6일이 걸려서 제 3장을 완성하였다. 관현악곡 편곡 작업은 2일 만에 완성하였다. 모두 합쳐서 260페이지의 악보가 24일이라는 대단히 짧은 기간 안에 이루어진 것이다. 

 

 

 헨델은 메시야곡을 작곡한 기간이 30년도 아니었고, 3년도 아니었고, 3개월도 아니었다. 단지 3주 안에 작곡한 곡이었다. 하지만 그 곡이 그렇게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것은 그가 그 3주 동안 눈물을 흘리며, 눈물의 감동으로 작곡하였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감동이 있었기에 그 감동이 곡을 통하여 전이되는 것이다. 

 

 헨델의 전기를 쓴 많은 사람들 가운데 뉴먼 플라워 경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작업의 막대함과 그 작업에 든 짧은 시간을 고려할 때, 그것은 아마 음악 작곡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위업으로 영원히 남게 될 것이다.

 

 헨델은 죽기 며칠 전에 성 금요일(Good Friday)에 죽고 싶다는 소원을 말했다. 그는 좋으신 하나님이며 사랑의 주님이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절에 만나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1759년 4월 14일, 성 금요일 아침까지 살았다. 그의 죽음은 그의 마지막 공연이 있은 지 겨우 8일이 지난 후였다. 물론 그는 그 마지막 공연에서 자신의 걸작 메시야를 지휘하였다고 한다. 

  헨델은 감동이 있는, 감동적인 영감의 예배자였다. 그에 대한 평가는 분분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는 하나님을 향한 음악, 그것에 대한 깊은 갈망의 소유자였고 영감 어린(spiritual) 감동의 예배자였다는 것이다.

솔로몬의 일천 번제-제사를 일천 번 드렸다. 대단하지 않은가?

그것이 하나의 종교적인 의무나 규례로 생각하고 했다면 얼마나 고역이겠는가? 하지만 그에겐 분명 감동이 있었을 것이다. 감동이 없이는 그런 번제를 드릴 수 있겠는가?

 

 

 

 

 

주와 함께 날아 오르리I Will Soar with You above the Storm

2000년대  2월의 사건이다. 

정말 있어서는 안 될 사건이었는데, 국외 여행을 한 번도 하지 못한 나로서는 참으로 당혹스런 사건이었다. 당시 나는 신대원 임원의 특권으로 일본 K신학교를 방문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거머쥐게 되었다. 더군다나 찬양세미나를 일본 신학생들에게 발제하고 토론하는 프로그램을 가질 계획이었고 나는 그것을 위해 충분히 강의안을 준비하고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강의안과 마음과 모든 것이 다 준비되었다 하더라도 나는 팀과 함께 갈 수가 없었다.

같은 동기인 동생이 전화가 왔다.

 

"행님, 여권이랑 비자는 잘 챙기셨죠?"

"응, 여권은 챙겼지. 근데 비자? 비자, 무슨 비자? 여권이 비자 아니냐?"

 

생판 처음 외국여행을 가는 나에겐 비자가 낯설었다. 지금은 일본여행에 비자가 없어도 가는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에는 비자가 필요했다. 너무 충격적이었다. 여권만 있으면 되는 줄 알았던 나의 생각도 너무 부끄러웠다. 그런데, 나이 든 교직원 중에서도 한 분이 계셨다. 그분도 외국여행이 처음이라고 하셨다. 황당한 케이스이다.

비자가 없으니 일본을 들어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완전히 톰 행크스의 영화 터미널을 방불케 했다. 이를테면 여권을 준비하고는 비자를 준비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 비자는 없으면 안 되는 비자였다. 진짜 황당했고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소위 말하지면 '쪽 팔렸다'.  교회 측에서는 이미 여비까지 받아서 인사까지 다 하고 온 상황이었다.

 

숨고 싶었다.

하나님 정말, 당신의 날개 아래 나를 숨겨주소서

 

 

Still

Hide me now under your wings

Cover me with in your mighty hand

 

When the oceans rise and thunders roar,

I will soar with You above the storm.

Father, You are King over the flood.

I will be still and know You are God.

 

Find Rest my soul in Christ alone.

Know his power in quietness and trust.

 

When the oceans rise and thunders roar,

I will soar with You above the storm.

Father, You are King over the flood.

I will be still and know You are God.

 

 

오 먼데의 하나님이 아닌 가까운 데 하나님이시다(렘 23:23).

(23)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가까운데 하나님이요 먼데 하나님은 아니냐

 

거친 파도 날 향해와도 주와 함께 날아오르리

폭풍가운데 나의 영혼 잠잠하게 주 보리리라

 

 

'주님, 제가 일본을 가느냐? 안 가느냐? 그것보다 이 여행이 하나님의 일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면, 하나님의 사역의 일환이라면, 하나님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나를 보내소서, 나를 사용하소서, 나를 사용하여 일본인에게 기쁨의 소식을 전케 하시고 찬양의 나팔을 불게 하소서, 제가 당신의 도구가 되겠나이다. '

 

 

솔직히 하나님께 협박하기도 하고 윽박지르기도 했다. 방법이 없었으니 말이다. 나는 밤에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찬양하고 기타를 치면서 Still 곡에 흠뻑 취해 있다가 잠들었다. 

나는 이 다음날 새벽부터 일어나 부지런하게 움직여서 하루 만에 비자를 받고 비행기표도 겨우 구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붙여주셨다. 한 타이밍이 끝나면 한 사람을 붙여 주시고, 또 한 타이밍을 넘기면 또 다른 사람을 붙여 주셨다. 생애 처음 나가는 외국여행의 경험이 이렇게 혹독했다. 하지만 그 혹독한 경험 가운데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었고, Still이란 찬양을 몸소 느꼈다. 혼자서(물론 옆에 교직원이 동행했지만)

 

'비행기를 타고 주와 함께 날아오른다'

 

는 생각을 하면 할수록 가슴이 벅찼던 순간이었다. 두려웠지만 감정적으론 대단히 고무 되어졌던 시간이었다. 그 때 하나님은 나의 광장공포증을 없애기 위해 그 사건의 배후에 계셨고 일본여행을 갈 때도 학교 간부 과장님을 같이 붙여주셨다. 그 분은 나의 심리적인 위로자였다 .하지만 그 분이 곁에 있었기에 외국여행을 처음 하는 나지만 책에서 본대로 척척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우리만의 여행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첫 외국여행을 통해 나의 또 다른 면을 발견하던 계기가 되었다. 새로운 문화와 도시에서 내가 보이는 반응이 내가 알지 못하던 부분을 일깨웠다. 하루 늦게 출발한 여행이었지만, 굉장히 즐거웠다. 물론 하나님께서 도우셨기 때문에 가능했다. 

  나의 이러한 찬양에 대한 감동은 지워질 수가 없다. 이 찬양을 할 때 마다 그 때의 감격이 살아나 나를 도전하고 고무시킨다.

 

 

 

 

 

 

귀한 시간 비a Royal Waste of Time 

-완전한 시간 낭비 그러나 가장 고귀한 낭비, 그것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예배는 그야말로 시간 낭비다. 하나님께 점수를 따는데 도움이 되지도 않으며, 우리의 존재 가치를 드높여 주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고귀한 시간 낭비가 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기 때문이다.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의 고귀한 광휘에 잠길 수 있는 기회, 하나님의 임재를 다른 사람과 함께 누릴 수 있는 기회, 우리의 시간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목적에 들어가게 하는 기회, 우리가 그분의 계시하심으로 변화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에 비록 낭비되는 시간이지만 고귀한 시간이다. 

예배 드리는 백성은 소망이 있다!!!

마리아의 유-거룩한 낭비

 

 

(마 26:7)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지금까지 들어본 예배 중에서 가장 전심으로 드린 능력 있는 예배의 예를 하나 들으라면 바로 이 장면일 것이다. 이 여인의 예배 행위는 우리가 항상 하나님을 예배하는 마음으로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예배를 섬기는 사람들은 각자 예배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은사와 사역들을 받았다. 그들은 또한 일상 생활 속에서도 삶의 예배를 드려야 한다. 

 

 

마리아의 삶에 있어서 이 향유는 가보와도 같은 무게를 가진 보물이었을 것이다. 여러분들도 잘 알다싶이 이 향유는 가격으로 따진다면 삼백 데나리온, 노동자의 거의 1년치 임금에 해당하는 값비싼 것이었다. 일당 5만원  365하면 1천 8백 2십 5만원이다. 이런 엄청난 향유를 소모해 버린 것이다. 그것도 예수님의 옷이 아닌 머리(cf. 발; 요 12:3)에다 부었다는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마리아가 부어드린 나드는 인도에서 자라는 나무 뿌리와 줄기에서 채취하는 향유였고 돌로 만들어진 병이나 상자에 밀봉되어 수입되었다. 특별한 경우에만 사용되는 것이었다. <나드>라는 이 향유는 다른 불순물이 전혀 섟이지 않은 순수 용액이었고 양도 상당히 많아서 한 근쯤 되는 것이었다. 이런 상품은 시장에서 흔히 나오는 것도 아니고 미래를 위한 투자의 의미로 사 놓은 것 같다. 마리아가 나사로 오빠를 살리신 예수님이 자기 집에 오시자 그녀가 가진 가장 값진 향유를 아까워하지 않고 예수님께 부어드렸다. 마리아는 왜 이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을까? 마리아는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막상 나사로가 죽었을때 그녀의 신앙은 흔들렸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 한 마디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것을 보고, 그녀는 이 분이 참으로 찬양을 받아야 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더욱 믿게 되었다. 마리가 부은 향유는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였고 감격이었고, 마리아의 찬양이요 주님께 대한 경배였다. 예수님은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행위가 예수님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예비한 예배적인 행위라고 말씀하셨다

 

 

(요 12:7)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탐욕이 가득했던 유다는 구제를 들먹이며 질책했지만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위를 고귀한 신앙적 행위로 인정하셨다. 더 나아가 그녀의 행위가 복음과 함께 칭송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막14:9). 제자들조차 인식치 못했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그녀가 어떻게 예지했을까? 그녀의 마음속에 성령께서 지시하셨음에 틀림없다. 

 

 

  마리아는 자신이 받은 은혜를 몸소 갚을 줄 아는 믿음의 여자였다. 자신의 아끼는 엄청난 재산을 예수님께 바쳤다. 마리만이 할 수 있는 마리아의 헌신이었다. 마르다같으면 못할 것이지만 마리아는 내어주었다. 그리고서 예수님께 그의 전부를 드렸다. 다 부어 드렸다. 자신의 가정의 절망을, 희망과 소망으로 변화케하신 그리스도 앞에 환희와 감격의 표현으로 예배하는 마리아를 보라. 

향유를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발을 친히 감쌌다. 이것은 사랑을 뛰어넘는 경배요, 존경의 표시였다. 마리아가 주께 드릴 때 향유 옥합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아까워하기엔 주님이 베풀어주신 사랑이 너무나 컸다. 

 

 

 

여러분들은 주님의 사랑을 얼만큼 받았는가? 받은 만큼 헌신한다. 받은 만큼 내어놓을 수 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연인이 생겼다면 그 연인을 위해 무엇을 못 주겠는가? 무엇을 못 선물하겠는가? 마리아의 마음이 바로 그러했다. 여러분이 주님께 드릴 것은 무언가? 주님께 헌신할 것은 무언가?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로마서 12:1은 바로 그러한 삶이 살아 계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요, 제사라고 말한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언젠가 인터넷에서 본 글인데, 벌써 시간이 많이 흘렀다. 그래도 말하고자는 요지는 분명하니 이야기를 해보겠다.

 

 

브래드 피트의 미소, 왕(王)자가 선명한 베컴의 복부 근육, 팝가수 어셔의 군살없는 몸매의 조합이 영국 10대 청소년들이 가장 선망하는 ‘이상적 외모’라는 보도가 나왔다. 타임즈 온라인 등 언론이 영국 청소년 잡지 ‘스니크’가 평균 나이 15세의 청소년 2,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를 인용 보도한 바에 따르면, 소년들이 생각하는 완벽한 몸매 순위는 어셔, 브래드 피트, 데이비드 베컴의 순으로 나타났다. 또 얼굴에서는 브래드 피트가 1위를 차지했고, 패션 분야에서는 베컴이 청소년들이 가장 선망하는 패션 리더인 것으로 나타났다고 언론은 전했다. 외모, 몸매, 스타일 등 종합 순위에서는 브래드 피트, 베컴, 어셔가 상위권 그룹을 형성했고 올란도 블룸, 에미넴, 50센트, 저스틴 팀버레이크, 조니 뎁 등이 그 뒤를 이었다.  또 이 같은 연예인, 스포츠 스타 등의 영향으로 인해 영국 10대 청소년 10명 중 9명은 자신의 외모에 불만을 가진 것으로 드러나, 청소년들 사이에 외모 지상주의가 만연해있는 형편이라고 언론은 전했다. 

 

 

이 밖에도 총 조사 대상자 중 26%의 소년이 성형수술을 계획하고 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는데, 청소년들이 주로 원하는 수술은 지방흡입, 코 성형 등이었다. 또 84%의 청소년이 외모, 체중 등의 신체 조건이 인생의 성공과 행복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응답했다. 조사를 실시한 잡지사 관계자는 소녀들만큼이나 소년들 또한 외모로 인해 고민하고 있다면서, 자신들과 유명 연예인들의 외모를 직접 비교하는 사회 분위기가 그 이유라고 전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떤가? 우리는 우리의 외모에 대해 만족하는가? 왕만족(대만족)하는 사람? 그래도 만족하는 편? 웬만하면 거의 크게는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 작게는 어느 정도의 불만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 누구에게나 다들 외모에 대해 불만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외모, 오늘 본문 12장 1절에 나오는 말 그대로의 , 그 몸에 대해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서 아주 굉장하게까지 불만을 갖고 있을 것이다. 키가 좀 더 컸음 좋겠다든지, 코가 좀 더 튀어나왔음 좋겠다든지, 얼굴의 피부가 좀 더 부드러웠으면 좋겠다든지, 다리가 너무 짧다던지, 살이 너무 많이 쪄서 고민이라든지외모에 대해선 모든 사람들이 고민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에 대해 성형수술이나 볼톡스, 코수술, 쌍거풀 수술, 지방흡입수술 등에 대해서 언급이 없다. 왜 언급이 없나?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외모를 보시지 않기 때문이다.

 

 

(삼상 16:7)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여기서 하나님은 분명히 자신이 어떠한 존재이며 신이며 특징을 가진 분인지를 보여주시고 있다. 여기서 마음이라는 것은 속사람, 마음, 의지, 가슴, 영혼, 이해력 을 이야기한다.

 

 

다시 강조하여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사람들의 중심, 마음, 속사람, 영혼을 보신다. 그래서 우리는 외모에 대해 크게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더 잘 나면 좋겠지만, 더 멋지면 금상첨화겠지만, 더 쭉쭉빵빵하면 좋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독특하고 특별하게 창조하신 외모에 대해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어쩌겠는가? 지우개로 지울 수도 없는 형편 아닌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와 계획에 의해 창조되었음을 감사하며 살기를 바란다.

 

 

그런데 오늘 바울 사도는 로마서 12장에서 무어라고 이야기하는가몸을 어떻게 하라고 말하는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고 하였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오늘날의 예배를 으로 드리라는 것이다. 우리의 보잘 것 없고 연약한 육신적인 몸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를 드리라는 말이다. 근데 이 몸으로 드리는 예배를 무엇이라고 설명하는가?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우리는 흔히 몸을 흙으로부터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참으로 허무한 그 무엇이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인생무상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성경은 우리의 불만 많고 불평 많고 불만족스러운 외모인 몸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이다. 신기하지 않은가? 육은 육이고, 영은 영인데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가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 몸은 움직이지 않고 머리만 굴리고 있다면 그 사람은 예배에 대한 생각 속에서만 맴도는 것이지, 예배드리는 것은 아니다. 정작 그 사람이 진짜 예배 드리는 것은 그 사람의 몸이 예배의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이고, 예배의 장소에, 예배의 자세와 태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주일날 교회, 예배당에 왜 가야 하는가? 집에서 기독교 TV보면서 좋은 설교 들으면서 예배드리면 되지 않는가? 더 자유스럽게 예배드릴 수 있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제외하고는 우리가 몸을 일으켜 성전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몸이 있는 곳에 영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몸을 동반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는 바로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 하루 하루를 살아가면서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릴 영적 예배로 드리길 바란다. 생각 속에서만 맴도는 공허한 메아리는 예배가 아니다. 그렇다면 예배는 무엇인가?

 

 

 

 

예배는 자기의 가진 전부를 드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드려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는 어떤 것일까?

 

첫째, 예배는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몸을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죽은 예배가 아니라 산 예배이다. 나의 몸을 드리는 예배이다.

하나님은 나의 입술만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과 나의 온 몸 전체를 원하신다. 그렇다면, 우리가 손을 들고 찬양하는 것에 인색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무릎을 꿇는 것에 인색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있는 모든 것을 원하시는 것이 바로 예배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예배는 우리의 찬양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히 13:15)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우리가 찬양을 할 때,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되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때, 하나님이 찬양을 받으시는 것이다.

 

셋째, 예배는 우리의 물질을 드리는 것이다. 

 

(히 13:16)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선을 행하는 것과 서로 나눠주는 것이다. 예배의 범위가 점점 넓어져 간다. 서로 물질을 나눠주는 것, 즉 선을 행하는 것이 예배이다. 여기서 선을 행하는 것과 물질을 나누는 것은 동일한 의미. 교회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서로 나눠 주는 것이다.

 

넷째, 예배는 전도 및 선교하는 것이다. 

 

(롬 15:16)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전도해서 잃어버린 영혼을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이끌어 오는 것을 하나님은 예배라고 말씀하신다. 제사장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어떻게 나아가는가? 예물을 가지고 나아간다. 이방인을 하나님 앞에 데리고 나아가는 것이 이와 같다. 하나님, 이 사람을 하나님께 예물로 드립니다. 하는 것이다.

 

 

 

 

 

 

예배가 무엇인가?

입술로 드리는 예배(히 13:15)

몸으로 드리는 예배(롬 12:1-2)

물질을 나누는 것(히 13:16)

전도(롬 15:16)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 

우리 모두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 살아있는 예배의 주인공이 되길 바란다. 

 

 

 

다시 마태복음으로 돌아오면, 마태복음 26장에 나오는 여인이 비싼 향유를 주님께 드린 이야기는 지금도 전세계에 널리 잘 알려져 있다. 이 행동이 왜 기릴만 한가? 그녀는 자신의 삶과 사랑의 제일 중심 되는 분에게 가장 좋은 것, 가장 귀한 소유물을 드린 것이다. 

 

가룟 유다의 시선-이해할 수 없는 낭비의 관점

-왜 이렇게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비싼 값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었다!

 

 

 

세 가지 중요한 Point

1-여인은 예배를 위해 엄청난 대가를 치렀다.

여러분의 연봉을 계산해 보고 그것을 헌금으로 드릴 수 있겠는가?

중요한 것은 성경을 통해 예배에 대한 심오한 진리들을 배운 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알고 있던 J집사님의 이야기이다. J집사님은 남편 모르게 먼 곳에서 복음을 위해 선교하시는 선교사님을 위해 조금씩 조금씩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것은 몇 달 동안 모았다고 한다. 그런데 교회에서 후원하시던 선교사님께서 귀국하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신이 모아놓았던 그 돈을 고스란히 얼마인지 세어 보지도 않고 그 선교사님의 손에 쥐어드렸다고 한다. 그리고서 그 해 말에 자신의 남편이 보너스를 받아 왔는데 글쎄 이제껏 받아보지도 못했던 1억 원이라는 돈을 받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감동의 여운을 쥐어준 자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감동의 충만함을 선물해 주신다. 대가를 지불했기에 예배가 빛날 수 있고 대가를 지불했기에 그 헌신이 더 아름다울 수 있지 않겠는가?

 

 

 

2-그것들을 지켜보던 제자들의 태도다.

그들은 자신들이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했기에, 예수님이 이 땅에서 받으셨던 가장 능력 있는 예배를 오히려 놓칠 뻔했다. 하나님은 구경꾼이 아니라 참여하는 사람을 원하신다. 

향유를 낭비한 여인의 행위에 대해서 제자들은 화를 냈지만, 예수님은 감동 받으셨고 그녀를 축복하셨다. 이것을 기억하라. 예배하지 않는 사람들(아니면 구경꾼들)은 항상 다른 주파수에서 살아간다. 그들의 마음이 변화되지 않는 한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는 예배 행위는 과장된 행동 또는 겉만 번지르르한 사랑과 감정의 표현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제자들의 태도는 옳지 않았고 심지어 부끄러운 것이었다. 자기 자신을 드리는 예배야말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부끄러움 없이 예배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좋은 모범이 된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억제하지 않고 정직하게 마음을 다하며 예배 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 준다. 

 

 

 

3-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대답하신 것과 권고하신 것을 살펴보라.

예수님은 그녀가 아름다운 일을 했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예배가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이 경우에는 여인의 드리는 행위, 그리고 여인이 향유를 예수님께 부은 후 온 방에 퍼진 향내fragnance가 바로 예배의 아름다움이었다. 그것은 정말 아름다웠다!

 

 

향기이것은 바로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향기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해 진심에서 우러난 사랑이 흘러 넘칠 때 나는 향내다.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방관자로 서서 자신을 드리는 성소 가운데 온전히 들어오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을 상자 안에 가두어 두고,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 같이 기뻐하려 하지 않는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고백했다. 그리스도인들이 늘 교회의 집회에 모이는 것이 정말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인가?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의 폐쇄적인 교제권 형성과 삶과 세상으로 드러나지 않는 믿음에 대한 질타 때문일 것이다. 존 스토트는 그의 강연에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둥글게 원을 그리고서 뒤를 돌아보지 않고 손을 잡고 있는 원의 사람들과 얼굴을 맞대고 웃고 즐거워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쏘아 붙였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기독교라는 종교 체계 안에서 허물어져가는 무너져가는 타성적인 기독교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이러한 교회 내에서의 지지고 뽂는, 아등바등거리는 모습은 우리에게 지워져야 할 대목이다. 제자들의 관점은 그러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살아가는 듯 했으나 마리아의 혁신적인 이러한 헌신과 예배에 대해서는 신선한 시각 보다는 오히려 비난하고 비판적인 시각만을 취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미리 예견해주는 상징적인, metaphor의 광경이기도 하다. 이러한 아름다운 헌신은 과거에서도 있었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 가운데서도 충분히 연출되어질 수 있다.  

 

 

 

언젠가 교회의 한 K집사님의 이야기를 듣고서 상당한 자극과 감동을 받았다. 그 집사님은 평소에 참 수수하고도 소박한 이미지의 주인공인데 비해 타고 다니는 자가용은 고급승용차였다. 내가 외모를 판단한 면도 있지만 그러한 면이 솔직히 있었다.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음 좋겠다. 보이는 면이 그러했다. 그런데 우연찮게 그 분의 이야기, 자초지정을 듣게 되었다. 몇 년 전 자기는 교회 건축을 하면서 건축헌금을 내는데 집이 너무 가난해서 건축헌금을 드릴 여력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집사님은 건축헌금을 작정하고서 자기가 직접 YMCA에 가서 청소를 해주고 받은 급여로 건축헌금을 내었다고 한다. 그렇게 하기를 2년 동안 하였다. 그 집사님은 거기서 받은 월급을 그대로 하나님께 드렸다. 자신의 헌신과 자신의 시간과 자신의 물질을 아낌없이 그러면서도 정성껏 드렸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자에게 물질을 부어주시지 않겠는가? 그 집사님의 탁월한 열정은 따라갈 수가 없다. 남들이 다 쉬고 싶어하는 휴가철에도 벽지촌에 들어가 여름성경학교와 새소식반을 1박 2일, 2박 3일씩 해 주고 오신다. 그 분의 귀한 헌신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다. 우리의 인간의 가슴도 이렇게 도전과 감동을 쥐어주는데 하나님의 가슴은 오죽하시겠는가? 분명히 하나님께서 그 집사님의 가정에 축복을 엄청나게 부어주실 것이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감동이 존재하면 참 좋겠다. 

 

 

 

한 자락의 감동의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한 자락의 감동의 눈물을 하나님으로부터 훔치게 할 수 있어야

이러한 감동impression을 주기 위해선 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흘러 넘치는 삶’, '흘러 넘치는 예배자'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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