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본인인 <넘치는 예배자>라는 주제로 글쓰기를 기획하고 쓰고 있는 미완성된 내용입니다. 예전에는 본인의 책 출판이 꿈이기도 했는데, 그런 마음도 잠시 내려놓았습니다. 예배자의 마음을 담아보고자 노력했으니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특별히 이 글의 컨텐츠는 찬양사역을 하면서 제가 느끼고 연구하고 배우고 발췌한 내용들을 담았는데요, 지금 보니 너무 부끄러운 대목이 있지만, 솔직한 글이기에 예배자를 위한 글이라고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결혼 전에 몇 년 동안 썼다가 묵혀둔 것인데, 처음으로 고개를 내미는 미완성된 글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This is my destiny
영화 ‘불의 전차 Chariots of fire’에서 올림픽 육상 선수 에릭 리들(Eric Liddle)은 말했다.
“하나님이 나를 만드신 목적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분은 또한 나를 빠르게 달리는 사람으로 만드셨고, 나는 달릴 때 하나님의 기쁨을 느낀다.”
후에 그는
“뛰는 것을 포기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 될 것이다.”
라고 말했다. 주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와 능력은 소위 말하는 세상적이거나 세속적인 능력은 없다. 단지 능력을 오용하거나 남용할 뿐이다. 에릭 리들처럼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능력을 발휘해보라!
이 글은 21세기의 에릭 리들을 위한 글이다
달리다가 죽어도 여한이 없었던 그 육상 선수처럼, 찬양과 찬송을 하다가 죽어도 좋다는 사람들을 위한 글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만드신 그 목적이 표면적으로 볼 때-찬양사역은 표면보다 더 심오한 내면적인 사역이기에 이렇게 표현하였다- 찬양사역에 헌신하고 그것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고 확신하는 자들을 위해, 나는 이 글을 썼다. 이 일, 소명이 내 운명(destiny)이라고 믿는 사람을 위해 유용하게 쓰여졌음 한다.
예배는 간절한 기다림이다
2005년 가을이었다. 내가 거주했던 아파트는 교회의 사택이었다. 아주 오래된 아파트였으므로 간혹 아파트 자체 배관문제 때문에 급수가 중단되는 경우가 있었다. 신학대학원을 다니던 나로서는 금요일날 지친 몸을 이끌고 아파트에 들어왔으나 물은 나오지 않았고 물은 하루 지나서야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물 없이 지내는 하루라는 시간은 참으로 길게 느껴졌다. 공사가 오후 3-4시에는 끝난다고 하였지만 6시가 넘은 시간에도 여전히 화장실에 내려가지 않은 오물들을 바라보면서 조바심을 내었다. 물이 나오지 않으므로 손을 더럽히는 것도 조심조심해야 했다. 물이 나오는 시간이 참 기다려졌다. 그 시간이 빨리 오기를 기다리며 조바심을 내는 마음…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는 마음이 이러한 마음, 그 이상이어야 함을. 물론 이 보다 더 강렬해야 할 줄 믿는다.
물이 나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램만큼 예배시간이 기다려지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배하는 시간이 기대가 되는 그런 순간, 그러한 간절한 기다림이 바로 예배자에게 요구되는 자질일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예배는 간절한 목마름이다
"이른 아침 내 영혼에 목마름에 문을 열고 나의 사랑 내 주님께 이 하루를 맡겨요"-한웅재(꿈이 있는 자유)
'아침에 목이 마르다.
그것은 단순한 육적인 갈증을 차원을 넘어 영적인 차원까지 나아간다. 하루를 시작해야 하는 부담감과 오늘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불안과 떨림, ‘꿈이 있는 자유’의 한웅재 목사님은 매일 우리 앞에 펼치진 하루 하루는 바로 “삶 앞에 드리워진 어둠”이라고 표현하였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구도 가운데서도 이러한 설렘과 두려움은 존재한다. 하지만 정말 극박한 때라고 생각해 보자.
이른 아침에,
오늘 내가 맡고 있는 기업과 사업이 부도의 처리, 긴급하면서도 중요한 일을 처리해야 할 타이밍이거나 귀중한 국가시험이나 취업시험, 면접을 앞 둔 아침, 아니면 군대를 가야 하는 군입대자의 두려운 아침, 중요한 경기나 시합을 앞둔 운동선수의 긴장되는 순간, 결혼을 앞둔 신랑, 신부의 설레어오는 아침, 오늘 하루도 자녀들과 가정의 안전과 평안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하는 부모의 하루…기타 모든 순간들. 이 모든 순간들이 바로 ‘목마름’의 순간이 아닐까? ‘기다림’의 순간이 아닐까?
주님, 우리가 이 아침에 당신을 목말라합니다. 내가 이 아침에 당신을 뵙기를 원합니다.
감당할 수 없는 삶의 무게들과 잠을 잤지만 밀려오는 피곤함, 둔중함, 아니면 오늘 벌어질 일들에 대한 긴장과 조바심으로 밤새 뜬 눈으로 지새며 보냈던 불면의 날, 무언가 깊이 아니면 무언가라도, 찌푸라기라도 꽈악 잡고 놓지 않고 싶은 이른 아침…하나님, 당신이 필요합니다! 당신이 옆에 계셨음 좋겠습니다! 당신이 내 안에 더욱 살아 역동하시면 좋겠습니다!
솔직히 하나님은 우리 곁에 늘 계시고 우리 안에 늘 살아 역사하신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알지만 현실을 인식하면서 진정한 영적인 현실인 ‘하나님의 함께 하심Presence of God’에 대해 무뎌져 있다.
이 찬양의 가사에 드러나는 것은
바로 하나님 편에서가 아닌 인간 편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강력하게 사모하는 사모함이 드러난다. 그것은 바로 ‘목마름’이다. 목마름이 문을 열고 있다. 아침이 되면 가게들이 문을 열고 하루의 일상을 여는 것처럼, 아니면 잠자리에 우리는 일어나서 창문을 열며-집에 창문이 없는 사람은 ‘마음의 창문’이라도 열자! ㅋㅋ- 하루의 기지개로 일상의 출발을 선언한다. 그러한 표면적인 ‘문’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목마름의 문’을 연다.
‘타는 목마름’으로
‘나의 사랑 내 주님, 나의 사랑 내 하나님, 나의 사랑 내 예수님, 나의 사랑 내 성령님’께 이 하루를 의탁하고자 한다.
하나님, 오늘은 어제의 무뎌짐과 익숙한 목마름이 아닌 좀 더 신선하고 좀 더 다른 목마름으로 당신을 찾아 뵙기를 원합니다.
‘이른 아침 내 영혼에 목마름에 문을 열고 나의 사랑 내 주님께 이 하루를 맡겨요’
출처: https://kkarl21.tistory.com/entry/꿈이-있는-자유의-아침묵상-가사-묵상?category=938620
[카알KaRL21의 heritage]
달린 첵을 향한 하나님의 대답
Hillsong의 탁월한 찬양인도자, 달린 첵이 자신이 싱어로서 공연을 하고자 했다. 그래서 직장을 구하려고 안달을 했지만 직장을 제대로 구하지 못했다. 그녀는 오페라 가수 쪽으로 일을 구한 듯 하다. 그녀가 고민하며 조바심을 내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녀에게 말씀하셨다.
“넌 더 이상 공연Performance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그녀를 공연가가 아닌 예배자로, worshiper로 부르셨던 것이다.
신학대학원에서 찬양인도를 할 때였다. 내 임기가 막 끝나갈 무렵 그 때 우리 찬양팀은 ‘One Way’, ‘King Of Majesty’라는 곡을 마스터했었다. 그리고서 그 곡들을 채플시간에 불렀다. 웅장한 세션과 곡이 주는 장엄함, 선율이 주는 매력과 보컬의 주고받음…연습하면서도 주위의 많은 학생들이 ‘그 곡 언제 하냐? 연습하는 것은 많이 들었는데 그 곡은 언제 하냐?’, ‘그 곡은 왜 안하냐?’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만큼 신학대학원에서 그 곡이 어울릴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보수교단의 채플시간에 보수적인 교수님들과 사역자들이 가득한데 거기서 그 곡이 어울릴까? 또한 악기팀이 전부 모이지 않는 이상은 그 곡을 소화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악기팀이 한 사람이라도 빠지는 날에는 그 곡을 미룰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신학 대학원의 특성상 주위에 친한 형님들이 참 많았다. 그런데 그 곡을 한 후에, 한 형님이 와서는 내겐 남긴 말이 있었다.
‘오늘 공연 멋있던데!’
우리의 예배는 공연이 아니다.
그러한 공연에 머무른다면 우리의 몸, 우리의 입술의 찬양인 ‘산 제사living sacrifice’가 되지 못한 것이다.
살리에리와 모짜르트
살리에리식 믿음-자신을 위해 믿음도 도구화!!!
파이프 오르간의 장엄한 프레류드가 연주됩니다. 한 소년이 진지한 모습으로 기도합니다. 두 손은 가지런히 모아졌고 초롱초롱한 두 눈은 십자가에 달려 고통 당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조그만 입술이 움직입니다.
“사랑의 주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저에게 음악적 재능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재능을 통하여 저의 이름이 세상에 널리 퍼지게 해 주세요. 하나님을 더욱 더욱 찬양하겠습니다.”
그의 기도 덕분인지 그는 음악가로서 점차 유명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와 교제하기를 원했습니다. 각지에서 몰려온 재능 있는 젊은이들이 그에게 사사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이제 비엔나의 사교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성공한 음악가가 되었습니다.
그의 특기인 이태리 오페라는 왕을 비롯하여 모든 귀족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만만하였습니다. 음악에 관한 한 누구도 그를 따라올 자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사실 시골에서 올라온 이 청년이 비엔나에서 갑자기 두각을 나타내기 전까지는 그의 명성은 영원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풋나기 시골 청년 하나가 이제껏 쌓아 올렸던 그의 명성을 우습게 만들었습니다.
그 청년은 무례했고 비도덕적이었으며 유치한 말과 행동을 거리낌없이 해댔습니다. 지위의 고하나 장소의 분위기에 전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교만하기 이를 데 없고 이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음악은 천재적이었습니다.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재능과 기술이 있었고 보통 사람의 상상을 초월하는 음악적 감각과 풍부한 악상이 있었습니다.
인기 정상에 있던 살리에리는 잘쯔부르그에서 온 모짜르트의 갑작스런 출현으로 인하여 당황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다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어떻게 저런 무례하고도 비도덕적인 인간에게 그토록 귀한 음악적 재능을 많이 주셨습니까? 저는 저 청년처럼 그렇게 나쁜 말을 하지도 않고 또 나쁜 장소에도 가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에게 더욱 많은 재능을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의 기도는 원망으로 바뀌었습니다. 모짜르트의 등장으로 살리에리의 음악은 어린아이의 장난처럼 우습게 되어버렸습니다. 살리에리 자신도 모짜르트의 악보를 보고 있노라면 그의 천재성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평은 분노로 바뀌었고 마침내 그는 서재에 걸어놓았던 십자가를 떼어 벽난로의 불꽃 속으로 던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의 원수(?)인 모짜르트를 죽이기 위하여 음모를 꾸밉니다. 모짜르트의 성격과 그의 어려운 환경을 교묘히 이용하여 레퀴엠(Requiem: KV.626)을 쓰는 동안 과로로 죽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동료 음악가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데 성공한 살리에리는 마침내 자신의 인격도 파괴되어 정신병동에서 비참한 죽음으로 자신의 생을 마감합니다.
이상은 ‘아마데우스AMADEUS’의 영화의 줄거리입니다. 이 영화의 내용 중에는 사실보다는 작가의 상상력이 발휘된 부분이 꽤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혀 터무니 없는 근거에서 씌여진 각본은 아닙니다.
살리에리(Antonio Salieri: 1750-1825)는 당대 비엔나에서 유명한 오페라 작곡가였으며 한때 베토벤이 성악 작곡법을 사사받기도 할 정도로 실력이 있는 음악가였습니다. 그의 명성은 잘쯔부르크 촌에서 올라온 모짜르트에 의해 충분히 손상을 받았습니다.
당대 유명했던 한 음악가의 생애가 왜 비극적으로 끝나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은 왜 그의 기도에 응답하지 안는 듯 보이실까요? 살리에리의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입니까? 살리에리의 문제는 과연 그 자신만의 문제일까요?
살리에리의 비극은 자기 자신의 세속적 욕망과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것 같지만 자기의 재능을 더 믿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영광을 구하고자 하는 세속적 욕망이 그의 마음 가운데 숨겨져 있었습니다.
그의 숨겨진 세속적 욕망을 하나님께서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그는 세상으로 향하던 그의 마음을 겸손히 돌이켰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살리에리는 자신의 죄악에 대한 회개는 생각도 못하고 하나님만을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무시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순간 사탄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의 마음 가운데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의 인생에서 비극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살리에리식의 믿음을 갖고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특히 음악을 하는 많은 사람 중에 그의 재능으로 온전히 하나님을 찬양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통하여 나 자신의 영광을 구하고자 하는 숨은 욕망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그 사람들은 사신 하나님을 온전히 믿을 수도 없으며 찬양할 수도 없습니다. 연주performance는 할지언정 찬양Praise은 할 수 없습니다. 찬양한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사신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위하여 많이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 잘 알지 못할 때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피상적인 관계가 됩니다. 그때 나는 하나님을 나의 경배 대상이 아니라 내 연주의 청중들 중 하나로 착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나의 생명의 관계가 튼튼하게 맺어져 있어야 나는 하나님을 올바로 찬양할 수 있습니다.
Heart of Worship
영국의 찬양 인도자 매트 레드맨(Matt Redman)은 자신이 목사님에게서 예배의 진정한 의미를 어떻게 배웠는지 다음과 같이 말해준다. 그 목사님은 예배가 음악 이상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다른 방법으로 예배하는 방법을 배울 때까지 예배 시간 동안 노래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 기간이 끝날 무렵 그는 ‘예배의 마음Heart of Worship’이라는 곡을 썼다.
노래 이상의 것을 당신께 드리겠습니다.
당신이 원하시는 것은 노래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깊은 곳을 보십니다.
당신은 나의 마음을 보십니다.
문제의 중심은 마음에 있다. Heart of Worship!!!(막 12:30)
(30)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강의 > 찬양예배사역'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넘치는 예배자Overflowing Worshiper④ (0) | 2022.04.03 |
---|---|
넘치는 예배자Overflowing Worshiper③ (0) | 2022.04.02 |
넘치는 예배자 Overflowing Worshiper② (0) | 2022.03.31 |
나의 찬송을 부르라- 홍해 바닷가의 대합창제 (0) | 2021.09.30 |
나의 찬송을 부르라 -창세기의 음악 (0) | 2021.09.2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