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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Meditation

굳이 조셉 파커나 찰스 스펄젼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ft. 나는 거품인가?)

by Message.K 2023.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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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스팅은 조셉 파커와 찰스 스펄젼의 설교를 들은 미국 목회자들의 반응과 차이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결론은 우리가 대단한 설교자 조셉 파커나 찰스 스펄젼이 아니어도 좋다는 결론으로 이야기를 맺고자 합니다. 심기 불편하신 분은 읽지 마시길 바랍니다.

 

굳이 조셉 파커나 찰스 스펄젼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ft. 나는 거품인가?)

 

 

 

조셉 파커 VS 찰스 스펄젼 의 설교를 들은 이들의 반응

19세기 미국의 목회자들이 영국교회를 둘러보면서 방문했다고 합니다. 죠셉 파커의 설교를 듣고서는 '조셉 파커'는 진짜 훌륭하고 용감하고 담대한 설교자라고 설교자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고 합니다.

 

"조셉 파커는 얼마나 위대한 설교자인가!"

 

그리고서 찰스 스펄젼의 교회로 가서 설교를 들었습니다. 당시 찰스 스펄젼은 최고의 설교자인 만큼 교회도, 시설도 모든 면에서 앞서갔을 것입니다. 한때 스펄젼의 교회에 너무나 많은 청중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다가  화재가 난 사고도 있었죠. 방문자들이 찰스 스펄젼의 설교를 듣고서는 이런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얼마나 위대한 하나님인가!"

 

 

 

우리는 종종 조셉 파커가 되고자 합니다

우리가 사역을 하면서 목회자라면 설교자여야 하고 설교자는 또 설교를 잘 하고 싶어하는 성향이 다들 있습니다. 그런 욕심이 없다면 인간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설교라는 것이 청중들의 마음에 던지는 메시지이기도 하지만, 장차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우리의 메시지에 대해서, 그 영향력에 대해서도 판단을 받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말은 힘이 있기 때문에 얼마나 그 말로 많은 사람을 살렸느냐? 얼마나 그 말로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저주를 퍼부었느냐? 제가 하나님이 아니기에 알 수는 없지만, 우리의 입술의 열매로도 분명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설교자는 설교를 통해 승부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설교는 연설speech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죠셉 파커가 될려고 할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부교역자 시절에 동료 교역자가 설교를 하고 교역자회의를 하면 담임목사님이 설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설교하고 나서도 이야기를 합니다. 물론 담임목사님의 스타일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그런데, 담임목사님이 어떤 분이냐? 어떤 스타일이냐에 따라서도 이런 설교에 대한 피드백의 장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부교역자 시절은 굉장히 바쁘고 사역도 많습니다. 가정사역도 해야 하는데, 교회의 행정도, 행사도, 교육부 아이들과 밥도 먹어야 하고, 설교도 준비해야 하고 행사도 준비해야 하고 쉴새 없이 바쁩니다. 일을 만들어야 제대로 효과가 나기 때문에 일이 점점 늘어나고 집에 들어가는 시간은 늦습니다. 그런 와중에 만들어내는 설교입니다. 그런데 그 설교가 죽이 되느냐? 밥이 되느냐? -물론 이런 판단도 인간적이긴 합니다. 사람들의 반응도 중요하지만, 교회는, 목사라는 직은 언제나 신적인 반응에 집중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사람들의 인기와 찬사와 칭찬과 환호도 중요하지만, 항상 하나님의 시선과 반응에 목매어야 하는 직입니다. 하지만 목사도 인간입니다. 그래서 설교에 대한 평가나 비난이나 비판이나 칭찬에 자신이 휘둘릴 수 있습니다. 찰스 스펄젼 같은 거인이라면 다 감당이 되겠지만, 우리는 찰스 스펄젼이 아니거든요. 더 나아가 조셉 파커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먹고 살아야 하고 어떻게든 사역을 해야 하고 인정을 받아야 하니깐 말입니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시행착오도 많이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청중은 성도들이기도 하지만, 더 궁극적인 청중은 '단 한 분의 청중the Audience of one'입니다. 윈스턴 처칠이 기자들로 공격받으면서 자신의 행정과 정치에 대해서 비난을 받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질타를 받습니다. 그 때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 바로 '자신이 신경써야 할 청중은 바로 '단 한분의 청중'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정치인이, 영국 수상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물론 교회의 목회자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또 비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자신만 직통계시를 받느냐? 자기만 하나님 섬기느냐?' 그럴 수 밖에 없는 자리가 목사의 자리이고, 목회자의 자리입니다. 이래저래 세상에 쉬운 직업은 없습니다. 먹고 사는 것이 힘듭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이후로 먹고 사는 것은 노동의 결과물이 되었고 그 노동은 쉽지 않습니다.

 

목사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소명으로 있어야 하는 자리입니다. 그게 아니면 견딜 수가 없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 자리에서 눈물을 훔치고 통곡을 하면서 애통해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 자리를 빠져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빠져나오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성격과 기질에 따라 다르겠지만 쉽지 않습니다. 아무튼, 그래서 소명이 무서운 것입니다. 유명한 대기업을 다니다가 다 접고 목회자의 길로 들어서신 분들을 보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아시는 목사님의 자제분은 잘 나가다가 자녀의 사고사를 통해서 목사의 길로 들어신 분도 있습니다. 사역에 들어서는 경로와 루트는 너무나 다양합니다. 그 소명 하나만으로 이 자리에 왔는데, 사역의 현실은 너무나 답답하고 때론 견디기 힘들 때가 있습니다. 

 

신학대학원을 다닐 때 항상 노회기간이 되면 선배목사님들 앞에서 소명을 다시 재점검하는 인터뷰 같은 걸 했습니다. 그때 한 선배 목사님이 '소명이 무엇이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저는 아주 당차게 바로 이 말을 했습니다.

 

"피할 수 있을 때까지 피해보라. 피할 수 있으면 소명이 아니다"

 

적재적소에 찰스 스펄젼의 명언으로 대답해서 선배 목사님의 입가에 미소를 짓게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참 맹랑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생은 우리의 뜻대로 되는 게 없습니다. '내가 목사를 하는 것인지? 소명이 나를 목사로 이끈 것인지?' 이런 이야길 하면 소명이 워낙 충만한 분들은 굉장히 싫어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분들은 그분들 대로 살아가시는 것이고, 저는 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수많은 기질들이 존재합니다. 바울같은 강직한 스타일이 있는가 하면, 모세같이 우울질의 스타일도 있습니다. 다윗처럼 감수성이 충만한 친구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소명이 아닐까요?

예수님의 제자, 요한에게 예수님은 부활 이후 승천하시면서 당신의 모친, 마리아를 보필하는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요한은 밧모 섬에서 요한계시록의 묵시를 받기 전까지 줄곧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를 봉양합니다. 다른 제자들은 다 순교의 제물이 되었는데, 자신은 한 노인네의 수발을 들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주신 소명이 아니라면, 그 일을 왜 하고 있겠습니까?'

 

저희 부모님은 100세되신 할머니를 보필하고 있습니다. 부모님의 연세도 쇠약한데, 더 나이드신 할머니를 보필하시고 계십니다. 쉽지 않습니다. 저더러 하라고 해도 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하지만 그게 우리 부모님의 자리입니다. 우리의 삶도, 인생도, 사역도 때로는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갈 때가 있습니다. 이게 소명이라고는 하지만, 정말 내가 여기에 이러고 있는게 맞는가? 그런 생각이 자주 들기도 합니다. 죠셉 파커가 되고 싶었던 시절이 있었고, 더 큰 거인, 찰스 스펄젼처럼 그렇게 커 보이는 인간이 되고 싶었던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도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강요는 아닙니다. 그게 좋아 보이면 그렇게 하시길 바랍니다. 저는 그렇게 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나의 소명은 어떤 색깔인가? 오늘 횡설수설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볼 지도 의문이고, 한 사람도 안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영향력이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저는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대단해지고 싶지만, 대단하면 뭐가 달라질까요? 수많은 업무와 사람들 속에서 저는 번 아웃을 너무나 많이 경험했습니다. 저도 사람들 좋아합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는 것, 설교하는 것 좋아합니다. 하지만 요즈음 드는 생각은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는 원고를 들고 설교하는 스타일의 설교자였습니다. 하지만 개척을 하면서 그것을 내려놓았습니다. 사람들 앞에 설 때는 원고, 간단한 원고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방법론은 부차적인 것이고 가장 중요한 것은 "나는 하나님 앞에서 존귀한 자이고, 부름받은 소명자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기억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건 근자감이 아니고 기독교인의 자부심이자 자존감의 뿌리입니다. 내가 사역을, 설교를, 행사를, 목회를, 직장생활을 잘 하든, 못 하든 그건 둘째 문제이고 하나님의 부르심과 나의 존재를 연결시킬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만 되면 조셉 파커가 되든, 찰스 스펄젼이 되든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볼 때 데나리온의 크기가 대단해 보이고, 달란트의 개수가 중요한 것이지 하나님 보시기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평가에 민감해야 하는 존재인지 늘 자신의 소명과 자신을 결부시키는 '골방'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박수소리와 웃음소리와 환호에 익숙해지면 '골방'을 기피하게 됩니다. 

 

 

 

"나는 거품인가?"

문득 작곡가 유희열이 생각이 납니다. 그 유희열 존재 자체 만으로도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왜 표절을 했을까요? 왜 대놓고 복붙하듯이 다른 사람의 멜로디도 가사도 가져왔을까요? 이 사태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음악인 김태원이 중요한 이야기를 합니다. 거울을 보면서 항상 자신에게 질문한다고 합니다. 음악인이자 예술가로서, 작가로서 자신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질문을 던진다고 합니다. 저는 김태원의 이런 질문과 자세가 너무 좋았는데요. 그가 자주 거울 보면서 던지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거품인가?"

 

요즘 신학대학원 입학생들이 줄어들고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 목회자의 길이 쉽지 않다는 것에 대한 현실적인 진단인가? 싶기도 합니다. 또 어떤 분은 이런 현상이 오히려 지금의 목회자들의 노후 생활에 득이 된다는 말도 합니다(무슨 뜻인지는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삶이 쉽지 않고 팍팍합니다. 한번 뿐인 인생, 하나님의 부르심과 성령의 조명하심,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없으면 버틸 수 없는 것이 사역이고, 인생입니다. 무엇을 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우리의 포지션을 가져가느냐가 아닐까요? 거품의 유혹에 빠지면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습니다. 거품의 유혹에 빠지면 안 되고, 거품이 빠져야 하는 것입니다. 

 

 

 

네가 가지지 못한 것이 무엇이냐? 

소설가 이승우가 자신의 소설 앞자락에 자신이 기도를 했던가? 하나님에 물었던가? 아무튼 원망하고 불평했을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응답이 있습니다. 참고로 이승우는 신학대학원을 다니다가 포기하고 소설가가 되신 분입니다. 

 

"네가 가지지 못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다 가지고 있다"

 

사도바울에게 주신 응답인데, 이게 이승우 작가에서 주신 하나님의 메시지였습니다. 저는 종종 이 말을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내 안에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니

  나의 죽음도 유익함이라

  내 안에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니 

나의 죽음도 유익함이라 

나의 왕, 내 노래, 내 생명, 또 내 기쁨 

나의 힘, 나의 검, 내 평화, 나의 주 

내 안에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니 

나의 죽음도 유익함이라"

 

 

 

그들은 왜 기독교를 떠났을까?(ft. Hillsong의 예배인도자 Marty sampson)

오늘 아침에 우연히 힐송의 예배인도자를 찾다가 2019년 뉴스를 보게 되었는데, 약간의 쇼킹을 받은 게 있어서 글을 적어보고자 한다. 기독교를 떠난 이는 힐송의 예배 인도자 마티 샘슨이고, 기

kkarl21.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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