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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Meditation

사무엘상 13:1-12 묵상, 사울의 첫 번째 실패

by Message.K 2023.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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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13장의 초반부는 사울이 블레셋과 전쟁을 앞두고 있는 절박한 상황인데, 여기서 사울은 첫번째 중대한 잘못, 실수를 저지르게 되면서 이것이 사울의 첫번째 실패로 이끌게 됩니다. 이  본문에 대한 묵상을 통해 사울의 모습 속에 있는 우리의 모습을 한번 비추어보았음 합니다.

 

사무엘상 13:1-12 묵상, 사울의 첫 번째 실패
사무엘상 13:1-12 묵상, 사울의 첫 번째 실패

 

1.블레셋과의 전쟁의 정황 V.1-7

  사울이 왕이 된지 이년에 나이가 40세였다. 40대가 된다는 것은 여러모로 안정되기를 원하고 명예와 명성과 자신의 입지에 민감한 시기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자기의 아들 요나단이 장성하여 자신과 함께 전쟁에 임하게 된다. 이스라엘 군대는 3천명의 숫자였다. 그러나, 이 숫자는 블레셋군의 숫자와 비교해 볼 때 턱없이 부족한 열세를 드러내주는 숫자이다.

 요나단이 블레셋 군대의 수비대를 쳤다. 블레셋 군대는 이 소식을 들었고 사울은 히브리 모든 사람들에게 전쟁에 임하라는 강력한 명령을 내뱉었다. 하지만 블레셋군대는 이스라엘 보다 우월한 전세를 가지고 있었다. 병거 즉 전차가 삼만이었고 마병이 육천이었다. 이스라엘과 비교해 볼 때 완전한 우위를 점하는 숫자였다. 얼마나 많았으면 해변의 모래의 셀 수 없음에 비교했으리요?

and people as the sand which is on the sea shore in multitude

 

  원래부터 블레셋과 이스라엘은 인간적으로 볼 때 겜이 안 되는 싸움이었다. 수학적인 어떤 대차대조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얼마나 의지하고 나아가느냐 하는 그것이 관건이었다. 결국 이스라엘의 무리들은 흩어져 전부 숨을 곳을 찾는다.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나라의 싸움은 뒤로 제쳐두고 두려움과 불안 (for the people were distressed ,)에 떨고 있다.

and all the people followed him trembling

 

 이러한 상황은 사울에게 대단한 위기였고 사울을 궁지에 몰아넣는 순간이었다. 이 순간 사울은 선택을 해야만 했다. 용기 있는 리더쉽이 다시 한 번 필요한 시기였다. 결과적으로 사울은 실패를 선택하게 된다.

사울...그는 참으로 인간다운 인간이었다.

 

→세상과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원래부터 잽이 안 되는 싸움이다. 우리들은 세상을 겨루어 이길만한 그러한 능도 힘도 없다.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승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유일한 도움은 바로 ‘우리 주 하나님’뿐이다. 우리는 늘 위축되고 쫄고 조바심을 내면서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미천한 인간들이다.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를 거두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오갈데 없이 「굴과 수풀과 바위틈과 은밀한 곳과 웅덩이」에 숨어서 헉헉거리는 추잡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얼마나 이러한 세상과의 싸움에서 열세를 보이며 살아왔던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나만의 그 어떤 것을 생각하며 살아왔던가?

수련회가 바로 코 앞인데 이처럼 태연하게 지낼 수 있단 말인가? 절대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오히려 하나님은 자신이 개입할 여지를 더 생각하시며 조바심을 내신다는 것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망각하고 있는 듯하다. 나 또한 그러하다.

기도하자(오늘 수요예배 마치고난 후 『개인기도시간』을 기도실에서 가질 것!!!)

 

 

2.사울의 첫 번째 실패 V.8-12

  V.8 전쟁의 위급한 상황에 눈앞에 펼쳐졌고 시간은 점점 흘러 사울은 조바심과 불안은 더해만 갔다. 거기다가 백성들은 흩어졌고 the people were scattered from him. 사무엘은 코뺏기도 보이지 않았다. 이레를 기다렸다. And he tarried seven days , according to the set time that Samuel had appointed 사무엘은 애초부터 사울에게 이러한 지시를 내렸던 것 같다. 이것은 어쩌면 규례이고 전통이고 이스라엘의 법이다.

 

  여기서의 『이레』는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주신 기회인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이레>라는 시간을 주심으로써 우리를 테스트하시고 검증하시고 기다리게 만드신다. 오래 참게 만드신다. 인내하게 하신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기다리지 못한다. 나 또한 대단히 성질이 급하고 조급한 나머지 ‘이레’를 기다릴 수가 없다.

 생각해 보라. 적군이 그것도 기하학적으로 엄청난 우위를 점한 블레셋 군대가 눈앞에 와 있다.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다. 도와 줄 이웃 군대, 동맹군도 없다. 오직 바라볼 것은 ‘하나님’밖에 없다. 이스라엘과 왕은 ‘하나님’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V.9-사울이 번제를 자기 스스로 드렸다는 것은 참으로 이해할만한 행동이다. 무언가 시급할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백성들은 자기에게서 멀어지고 군대조차도 해체될 위기에 처해있었을 때 그는 행동을 결심했다. 그것은 제사장직은 대행Substitution이었다. 인간적으로 볼 때는 가(可)한 행동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입장에선 그것은 명백한 ‘죄악’이었다. 하나님은 왕에게 제사장의 직분을 위임한 적이 결코 없다. 이것은 사울의 엄격한 ‘월권’이었고 ‘overaction'이었다.

 

V.10-참 희한하게도 무언가 일을 치르고 나면 하나님의 기회가 온다는 것이 사울에게 딜레마였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러하다는 생각이 든다. And it came to pass, that as soon as he had made an end of offering the burnt offering , behold, Samuel came

 

V.11-12; 사울의 심리적인 갈등;Because I saw that the people were scattered from me(-V.15, 2천명 가운데 1천 4백명이 다 흩어져 버렸다.) and that thou camest not within the days appointed , and that the Philistines gathered themselves together at Michmash ;

 

 

→사울에겐 그의 불안한 심리상태가 그를 압도해 버렸다. 사울이 가진 기분, 우울감, 답답함, 힘듬과 지침, 불안한 이 모든 심리적 정황이 그를 지배해 버렸다. 감정적인 기움은 사람을 이성적/객관적이기보다는 주관적으로 이끌 때가 허다하다. 사울은 하나님의 약속, 사무엘의 경고를 잊어버리고 자신의 생각대로 일을 처리해 버렸다. 모든 인간들은 감정적인 치우침에 평형성을 유지하기가 심히 힘들다. 이것이 바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아닐까? 감정, 분위기, 기분을 잘 다스리는 자는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를 줘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그런 측면에서 나는 너무나 멀었다..훈련에 훈련을..연단에 연단을...

 

 사울이 있는 곳, 길갈로 블레셋 군대가 밀려 내려오자 그 정한 기한을 지키지 못하고 사울은 번제를 서둘러 지내버렸다. 사울이 그렇게 ‘형식적인 절차’로 치루어 버린 그 제사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단지 형식‘form'만이 존재할 뿐이다. Therefore said I, The Philistines will come down now upon me to Gilgal , and I have not made supplication unto the LORD : I forced myself therefore, and offered a burnt offering .

 

→우리들에게는 얼마나 많은 형식적인 절차로 취급해 버리는 예배가 많은가? 형식, 형식, 형식...그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형식적‘이 되어버린다면 그것은 정말 문제이다. 사울이 그러했다. 전쟁을 치루기 위한 하나의 방패막이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배‘는 어쩌면 이스라엘이란 한 국가가 자신의 삶이 비록 여기서 끝나더라도 혼신의 힘을 다해 하나님을 예배하고 거기서 오는 능력으로 전쟁에 임해야만 했다. 이것이 『예배의 정신』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사울은 이러한 ’예배의 정신‘을 소홀히 하였고 상황과 환경과 정황에 편승한 나머지 전력을 얻기 위한 하나의 ’절차‘로 예배를 치부시켜 버렸다.

 

 

  사울은 실로 인간다운 인간이었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신적인 인간이기를 기대하셨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군주로서 갖추어야할 자질capacity이었다. 그러나 사울은 그것을 극복하지 못했고 인간미가 넘치는 인간에 머무르고 말았다. 인간미Humanism은 넘치지만 그 안에는 ‘예배’를 찾을 수가 없고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는 Worshiper, 구도자Seeker’의 모습은 발견할 수가 없다. 그러기에 사울은 왕으로 등극은 되었지만 ‘추락하는 날개’에 불과하다. 왕은 아니지만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사울을 통해서 자신을 들여다 보아야한다. 삶이 결여된 예배, 어떠한 결단도, 회복도, 능력도 없는 형식적인 절차와 제도적인 예배는 힘도 없고, 아무런 감동도, 아무런 영향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삶에 지친 사울, 정치와 전쟁으로 조급하고 심리적으로 대단히 불안한 사울의 긴박한 심리상태가 일을 그르치게 만들었다. 누구나가 다 빠질 수 있는 함정이다.

 

나 같은 인물은 더 위험하다. 29세의 젊은이, 감수성이 풍부하고, 결단력이 부족하고, 우유부단하고...사울보다 더 할래야 더할 수가 없다.

 

나의 삶...『참된 예배자의 모습을 찾기』

 

 

오래 전에 묵상했던 사울의 첫번째 실패의 장면에 대한 기록을 포스팅해 보았습니다. 늘 급한 일에 쫓기는 삶, 라이프스타일, 그리고 본질을 잃어버린 사울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 나의 모습이 아닌가 또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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