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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고린도전후서

에베소서 1장 15-23절, 사도 바울의 감사와 기도

by Message.K 2022.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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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단락은 사도 바울의 감사와 기도를 담고 있는 단락입니다. 개역한글판에서는 본 단락을 네 문장(15-16절, 17-19절, 20-22절, 23절)으로 나누어 번역하였으나, 앞 단락과 마찬가지로 본 단락도 한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 15-23절까지의 내용들 가운데 특별히 15-19절까지의 내용만 오늘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여기서 볼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사도 바울의 감사이고(15-16절), 둘째는 사도 바울의 기도(17-19절)입니다.

 

 

 

 ①사도 바울의 감사

 에베소에서 3년 동안 사역하면서 에베소 교회를 세운 사도는 그들이 복음을 듣고 믿었을 뿐 아니라 지금도 지속해서 믿음을 유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전국에서 유명한 절에 가본 적이 있다면 바울의 심경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부산의 해동용궁사에 간 적이 있는데, 그 바위절벽이 있는 해안가, 그렇게 경치가 좋은 곳에 절이 있다는 것이 참 이색적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우리나라가 이토록 우상숭배가 심각한 나라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군데군데마다 동상과 석상이 서 있는데, 그 앞에는 헌금함이 아주 정갈하게 놓여 있었습니다. 헌금함이 있다는 것은 헌금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배치가 되어 있겠지요. 깊은 향 냄새로 머리가 어지럽고, 나무관세음보살이란 염불이 계속 울려퍼지는 가운데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소원과 복을 빌며 헌금을 하고 우상숭배를 하고 그것도 아주 경건하게! 대한민국의 종교성의 한 부분을 볼 수 있었습니다.

 

 

  문득 그 분위기는 바울의 에베소에서 사역을 하면서 느낀 분위기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절 앞에는 포장마차가 즐비해 있고 음식과 음료를 팔고 있는 것이 마치 에베소나 당시 바울이 사역했던 전도여행지의 분위기가 아닐까 상상해보았습니다. 그런 불신과 우상숭배가 가득한 에베소 가운데 바울이 사역하였고 그 복음에 반응했던 에베소 교인들을 향하여 바울은 지금 그들의 믿음에 감사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또 다른 이유는 에베소 교회 성도들 안에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바울이 기도하는 이유가 15절에 나타나는데 한번 읽어봅시다.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바울이 감사하는 이유는 두 가지 바로 믿음과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른 서신에서도 성도들 안에 믿음과 사랑이 함께 있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골 1:4; 몬 1:5). 믿음과 사랑은 함께 가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사랑이 없다면 그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닙니다. 참 믿음에는 반드시 사랑이 있기 마련입니다. 간혹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대하는 것은 굉장히 표독스럽거나 매몰찬 모습을 가진 분을 본 적 있습니다. 참 믿음이 있다면 풍성한 사랑이 그 안에 있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믿음이 있습니까? 믿음과 사랑이 함께 있습니까? 담임목사님이나 교역자가 여러분을 위해 기도한다고 눈을 감고 여러분의 삶의 내용을 기억하는데 그 삶의 내용에 믿음과 사랑이 충분합니까? 그러면 목회자의 기도가, 중보기도자의 기도가 절로 나오고 감사와 감동이 넘칠 것입니다. 때론 그 성도를 생각하면 눈물이 절로 날 것입니다.

 

 

16절...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여러분의 믿음과 사랑이 그런 모양이 되길 바랍니다. 감사가 그치지 않는 믿음! 반대로 믿음과 사랑이 결여되어 있다면 기도가 건조하고 기도가 부실할 것입니다.

주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시고, 사랑의 기름부으심이 넘치게 하소서!

 

 

 

 

 ②사도 바울의 기도

  이 기도들은 바울서신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깊이 있고 본질적인 간구로 모든 성도들이 추구해야 할 기도의 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1:15-23은 ‘에베소 성도들을 위한 바울의 첫 번째 기도’인데, 이 기도에서 우리는 바울이 그리스도인의 인격과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무엇이며,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하다고 확신했던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확인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에베소서 1:17-19, 바울의 첫 번째 기도>

 에베소서에는 두 군데에서 바울의 기도가 나타난다. 그 본문은 바로 1:15-23과 3:14-21이다. 이 두 군데서 나타난 바울의 기도 중 첫 번째 기도가 바로 오늘 본문 1:15-23이다. 더 세부적으로는 1:17-19은 바울의 첫 번째 기도제목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바울의 기도는, 바울의 중보는 과연 어떠했는가? 그의 기도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첫째,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V.17)

  17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바울은 먼저 에베소 성도들을 향하여 ‘하나님을 알기를 간절히 바라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을 계속적으로 알아가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17절의 NIV번역을 보면 ‘I keep asking that...’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그들을 향해 계속해서 간구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더해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과 바램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관계하는 것, 교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어떤 지식적인 앎이 아니라 체험적인 앎을 말합니다. 체험적인 앎, 그것은 히브리어 동사 ‘야다’의 의미입니다. ‘야다’는 부부관계에서 체험할 수 있는, 고유하고도 독특한 관계-성관계를 포함한-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깊이 음미하는 것, 동고동락하는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의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는 지식적인 앎과 체험적인 앎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사람을 안다는 것과 차이가 있습니다. 대상자체가 다른 것이죠. 사람을 알면 알수록 싫어지는 사람이 있고, 알면 알수록 매력이 있는 사람, 진국이 사람이 있죠.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다 한계를 가지고 있고 단점이 무수합니다. 부부가 결혼을 하면 결혼전의 설레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마도 사람의 냄새가 더욱 나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지만 하나님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람냄새가 안 납니다. 그 하나님을 더욱 알아갑시다.

  바울은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라는 구절 앞에 무엇이라고 합니까?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선 지혜와 계시의 정신, 성령이 필요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기독교는 다른 종교들과 대별됩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지혜와 계시의 영'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성령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지혜와 계시의 성령님께 말입니다. 에베소서에는 보혜사 성령에 대한 언급이 풍부하게 나타나 있고, 또 하나님을 아는 것은 오직 성령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령님은 지혜와 계시를 공급하시는 분이시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령님의 감화와 감동의 신이 없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기에 바울은 ‘나의 나된 것은...오로지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고전 15:10)’라고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더해지기를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추구하십시오. 하나님을 더 알기 위해 힘쓰십시오. 지식이 없으면 망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망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배가되기를 기도합시다. 우리에게 이러한 기도제목이 더해졌음을 좋겠습니다.

 “오, 하나님 우리에게 하나님을 더 알게 해 주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는 ‘관계relationship’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그것이 전부(全部)이다. 기독교는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입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을 아는 것에 매진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더해지기를 위해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둘째,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V.18a)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인들이 하나님이 왜 불렀는지, 왜 그들을 선택하여 불렀는지를, 어떠한 부르심의 소망이 있는지를 알기를 원했습니다.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그 하나님의 부르심에 소망을 알기를 소원합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동역자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부르심으로 여러분을 향한 계획과 목적을 가지심을 기억하십시오!

 

 

1: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목적과 계획을 망각하고 부르심은 있었지만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자신의 소명의 소망이 무엇인지, 소명의 비전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일종의 망각이라든가 아니면 무지함의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우리의 무지함을 밝혀주기라도 하듯이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앞에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눈이 밝아진다는 것은 곧 신령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영적 통찰력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앤드루 링컨은 여기서 사용된 '마음의 눈이 밝아지는 것'(현재완료 수동태 분사)'페포티스메누스'로 표현하는데, 이것은 마음의 눈이 밝아진 것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이 회심할 때 일어난, 그리고 그 뒤에 계속 영향을 미치는 구원의 조명을 가리킨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지혜와 계시의 성령'이 주어진 결과로 일어나는 현상을 표현하는 분사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눈이 밝아져야 우리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고 바울은 피력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마음을 바울은 중보기도에 담아 내어놓고 있다.

 

  헬라어 본문에서는 바울은 한 가지 내용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알고 있는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셔서 그들의 마음의 눈을 밝혀,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 하나님의 기업의 영광,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 기도의 핵심은 성도들의 마음을 밝혀 주는 성령의 내적 조명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매일의 삶 가운데 부르심의 소망을 알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계속해서 보면,

 

 

 

 

  셋째,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V. 18b)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는 ‘그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와 연결되면서 동시에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와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V.19)과 연결되어집니다. NIV성경에서도 ‘부르심의 소망,(쉼표) 기업의 영광의 풍성,(쉼표) and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기를 바울은 세 번째 기도제목으로 내어놓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그 분 안에서 누리게 될 기업, 유업은 어떠한 것들입니까? 그것을 일일이 열거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것은 크게는 우리가 받게 될 영생의 선물로부터 시작하여서 우리가 일상가운데 누리게 되는 여러 가지 자잘한 축복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유산, 상속물, 기업 등을 물질적인 것, 가시적인 것으로 환산하려고 할 때가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세속주의의 영향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풍성하게 내려 주시는 그 기업은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일 것입니다. 세상 가운데 흩어져 먼지처럼 날려 버릴 허무주의와 비관주의의 허망한 그러한 기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업은 우리 안에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벧전 1:4)입니다. 또한 불멸의 요소로 남아 있을 영원한 생명이요, 소망입니다. 그 기업은 또한 겨우 쥐어짜내는 그런 부족함이나 결핍함의 그 무엇이 아니라 풍성함으로, 넘쳐남으로, 충만함으로 우리의 삶 가운데 나타날 것입니다. 바울은 ‘성도들 중에서’(among the saints)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어떠한 것인지를 깊이 깨닫기를 간구했습니다. 여러분들 안에 이러한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 축복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넷째,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V.19)

 여기서 하나님의 능력이 “지극히 크신” 것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NIV에서는 “비교할 수 없이 위대한”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그 개념에 있어서 다른 영역까지도 모두 포함하는 권능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V.19)하십니다.1) 그는 역사(歷史)에 개입하시기를 기뻐하셨고 그 역사 가운데 역사(役事)하십니다. 그러한 ‘역사 속의 역사’ 가운데 우리를 압도해 가시는 분이 바로 그 분의 능력이요 업적이요 성취이십니다. 이러한 그의 초월적인 업적,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은 바로 V.20에 나오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그리고 승천으로 나타났습니다. 그의 십자가에서의 처절한 죽음은 세상도 하나님조차도 그를 버리시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은 그리스도의 승리를 말하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죽음이 있고 부활이 없었다면 능력은 없습니다. 하지만 죽음 후의 부활은 곧 능력이며 승리입니다. 그 능력은 ‘지극히 크신’ 능력입니다.

 

 

 

 친애하는 동역자 여러분!

 여러분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여러분은 깨닫고 있습니까? 그 지극히 광대하시고 강력한 능력의 초월성을 믿고 있습니까?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하나님의 ‘부르심’이 시작이고 하나님의 ‘기업’이 내다보는 종국이라면 가운데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이 부르심의 기대를 성취하고 우리를 기업의 풍성함으로 인도합니다. 바울이 기도한 것처럼 여러분 들 안에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인지를 깊이 체험하여 알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오늘 우리는 에베소서에 나타난 첫 번째 기도제목을 살펴보았습니다

 

  첫째,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둘째, 우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셋째,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넷째,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되기를 구하노라...

 

 이 4가지의 바울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제목이자 우리의 성취이기를 기도한다.

 

 


1) '힘'이라고 번역한 '이스퀴스'는 힘을 행사하는 것, '강력'이라고 번역한 '크라토스'는 가는 길에 앞에 놓인 장애물을 극복하는 힘, '역사하심'이라고 번역한 '에넬게이아'는 내재된 힘, '능력'이라고 번역한 '뒤나미스'는 무엇인가를 이루어내는 능력을 가리킨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이러한 동의어를 중복하여 사용한 것은 그 뜻을 세심하게 구별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무한히 크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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