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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레위기

레위기 23장 22절, 너는 그것을 가난한 자와 객을 위하여 버려 두라

by Message.K 2022.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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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 레위기 23장 22절의 본문을 가지고 <너는 그것을 가난한 자와 객을 위하여 버려 두라>란 주제로 한 설교입니다.

 

 

 

(레 23:22)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너는 그것을 가난한 자와 객을 위하여 버려 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오늘 이 구절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구절이다.

추수기가 다가왔을 때 농부들은 자신이 땀 흘리고 애쓴 농작물과 곡물들을 벤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밭의 구석구석 깨끗하게 추수하지 말라고 명령하신다. 자기가 열심히 노력한 작황물을 벨 때 정말 뿌리가 보일 정도로 베어야하지 않는가? 하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금하고 있다. 그 이유를 ‘너는 그것을 가난한 자와 객을 위하여 버려두라’고 말씀하신다. 바로 ‘가난한 자와 객을 위하여’라고 말씀하시고 계신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빈부의 격차는 언제나 있어왔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그러한 현실은 여전했다.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많던 적던 간에 선천적으로 부유하게 생활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부모님으로부터 땡전 한 푼 받지 못해서 후천적으로 부유하게 생활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광야생활을 하는 그들에게 이러한 말씀을 주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농경생활을 하고 정착생활을 할 때 주신 지침서와 같은 말씀인 것이다.

 

 

 

  이방의 땅, 애굽에서 뼈저리게 고생하고 노예생활에 힘겨운 삶을 보냈던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에게 새로운 땅이 주어진다는 사실은 광야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신기루와 같이 느껴지진 않았을까? 비록 모세라는 지도자의 리더십에 복종하면서 출애굽하였지만 여전히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그들이었다. 사람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절망과 불만을 토로하며 생활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마치 이들이 광야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땅,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처럼 말씀을 하시고 계신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해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라고 하면서 이스라엘을 불러내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백성들의 번성하고 창성함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 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광야에 있는 것이다. 가나안에 도대체 언제 들어갈는지...하지만 하나님은 인간들의 이러한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계획, 자신의 철두철미한 구원의 계획을 지금도 그려 나가고 계시는 중이시다.

 

 

 

 

  광야...그렇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고생하고 고생한 그 땅,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을 거리였지만 그들이 광야에서 40년이란 세월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여러분은 그들의 ‘불순종’때문이었음을, 그리고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순종의 훈련기간’이었음을 알고 있다. 보이지 않는 땅을 향해, 보이지는 않는 꿈을 잡으려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염두해 두고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이 바로 현대의 우리들이 아닐까?

 

 

 

우리는 물질만능주의, 돈이면 모든 것을 다 해결할 수 있는 시대의 맘몬주의, 배금주의의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한 보이는 돈의 권세가 가득한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라고 하나님은 우리를 영적 이스라엘 백성으로 부르셨다. 그 순종이 쉬운 일은 아니다. 보이는 것도 믿기 힘든 시대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믿으라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이 훑고 지나가셨기에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마치 광야생활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쫓던 이집트의 ‘말과 적군을 이기신’, 홍해바다에 쳐 넣으신 구원의 사건과 만나와 메추라기의 사건과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기적...그리고 수많은 역사들...그러한 하나님의 역사의 흔적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었듯이 우리에게도 분명히 있었다. 그러한 믿음의 흔적, 사랑의 흔적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자!

 

 

 

  또한 우리가 인생의 여정, 광야 같은 인생의 여정을 지나오면서 느끼는 것은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 과연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이다. 우리를 지키시고 구원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신가?

 

 

 

  오늘 이 본문만으로 보아도 하나님의 성품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비록 보이진 않는다. 팔공산 갓바위의 돌부처처럼 만질 수 없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자기 가게에 붙여 놓은 부적처럼 붙일 수 없고, 누군가 ‘너희 하나님을 내게 보여 보라’고 했을 때 선뜻 명함 내밀 듯이 내보일 순 없지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시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 좋으신 하나님은 우리들만을 지키시고 애지중지하시는 수호신이 아니시다. 자기에게만 좋고, 자기 가정에게만 좋고 다른 사람들에겐 무관심하신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편파적인 하나님이 아니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온 인류에게 좋으신 분이시다. 온 인류에게 선하신 분이시다. 그러기에 우리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세계는 질서정연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그 질서는 ‘사랑’과 ‘공의’라는 두 거대한 기둥으로 보이지 않는 세상을 움직이시고 계신다.

 

 

 

  오늘 22절의 말씀 ‘너는 그것을 가난한 자와 객을 위하여 버려두라’는 말씀도 객관적으로 선하시고, 한 개인만을 우대하는 VIP의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자들을 위해 선하신 하나님이심을 볼 수 있다. ‘가난한 자와 객’을 위해서도 심각하게 배려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준다. 만약 세상에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얼마나 불행하겠는가? 있는 사람은 그래도 덜하다. 하지만 없는 사람은 어찌하란 말인가? 그래서 하나님은 공평하신, 공정하신 하나님으로 이 세상의 모든 자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라는 선물을 주셨다. 우리가 이 땅에서, 이 광야 같은 세상살이를 하면서 물질을 많이 가지거나, 권력을 많이 가지거나, 힘을 많이 소유했다고 해서 죽은 후의 천국, 하나님 나라의 삶이 보장되는 것은 결코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나님은 비록 이 땅에서는 빈부의 격차와 개인차와 수많은 차이가 존재하지만 하늘 나라에서의 우리의 삶은 이 땅에서의 소유물과는 관계가 없다. 모든 자들이 구원을 받기를 기뻐하신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자에게만 그 하늘 나라를 허락하셨다. 그리고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어떻게 대우하시는가?

 

(히 13:5)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세상의 사람들은 우리를 평가할 때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 얼마나 소유하고 있느냐? 에 따라 평가할지는 모르나 우리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선대하시고 우대하신다. 잘나건, 못나건, 많이 가졌건, 적게 가졌던...이러한 모든 것에 관계없이...

 

  구약의 이러한 ‘가난한 자와 객을 위하는’ 선한 하나님은 신약에서도 나타난다.

 

(약 1:27)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명절이다. 설 명절을 통하여 혈육 간의 아름다운 교제와 정을 나눔으로 이 광야 같은 세상살이에서 잠시나마 힘과 위로를 얻으시기를 소망한다.

 

 

  더 나아가서 우리가 이 광야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좋으신 성품들을 본받아 ‘가난한 자와 객을 위하며’, ‘환난 중에 우리 곁에 있는 영적인, 육적인 고아와 과부들을 돌아보는’ 믿음의 센스와 기치를 발휘하는 만민의 모든 성도들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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