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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왕기상하

열왕기상 19장, 영원한 챔피언은 없습니다

by Message.K 2021.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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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챔피언은 없습니다 왕상 19장 강해설교
영원한 챔피언은 없습니다 왕상 19장 강해설교



2014년 한 학기를 달려왔고, 전반전을 마쳤다. 오늘 이 수련회는 2014년 한 해의 어쩌면 축구경기의 Half-Time과 같은 시간이다. 하나님께서 오늘 전반전을 어떻게 돌아보고, 후반전은 어떻게 달려가야 할지를 조망해주고 다시 한번 마음을 새롭게하는 영역으로 나아갔음 좋겠다.

 

 

열왕기상 19장 강해 "영원한 챔피언은 없습니다"


INDEX


1. 영원한 챔피언은 없습니다!
2. 승리와 기적 이후에도 변하지는 현실에 대한 complex(trauma)
3. 불만의 배후에는 교만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
4. 하나님의 음성은 세미한 소리에서부터
5.파트너십: 엘리사를 붙여주심

 

 

2014년, 이번 브라질 월드컵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쏟아낸다.
특별히 디펜딩 챔피언의 몰락, 스페인이 그렇게 처참하게 무너질 줄이야!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선수들로 구성된 최고의 호화군단이었지만, 그들은 이름값을 하지 못했고 일찍 짐을 싸야 했다. 디펜딩 챔피언의 몰락은 이미 예견된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의 일이란게, 최고의 선수들, 최고의 팀, 지난번 대회의 우승팀이라면 당연히 승승장구해야하는데. 그게 생각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또 하나의 큰 이변은 바로 브라질의 탈락이다. 그것도 1:7이라는 엄청난 스코어로 깨진 것이다. 특별히 이번은 개최국이 브라질이다. 이번 월드컵이 20번째 대회인데, 브라질이 6번째 우승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웬 날벼락? 최고의 공격수, 네이마르의 부상과 주장이자 핵심수비수, 정신적 지주인 티에고 실바의 부재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참담한 결과였다.

과거의 챔피언 스페인도, 영원한 우승후보인 브라질도 이번 월드컵에선 챔피언 자리를 내놓아야 했다.

 

사랑하는 대학. 청년 여러분! 꼭 기억합시다.

 

1. 영원한 챔피언은 없습니다!

오늘 구약의 선지자, 불의 선지자 엘리야도 챔피언이었다. 그는 850:1(450:1-성경을 자세히 보면. 400명은 부재중이다)의 영적 전쟁, 신들의 전쟁에서 승리한 챔피언이었다. 엘리야는 승승장구의 선지자. 850:1의 승리의 선지자였다. 갈멜산 꼭대기에서 영적 큰 충격을 받고 승리를 경험했다. 하나님의 불을 경험하고 신과 신들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하나님은 그의 간절한 기도에 불로 응답하여 제물을 불태우셨다. 그리고 3년 반 동안 오지 않던 가뭄의 때에 그가 기도함을 통해 대지를 적시는 빗방울을 허락하셨다. 앞장의 41절에서부터만 보더라도, 그가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가뭄에 비오기를 기도했다. 그것도 7번씩이나 칠전팔기의 정신이었다. 과연 비가 왔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능력을 입어 갈멜 산 꼭대기에서 마차 타고가는 아합을 앞질러 갔다고 말한다. 그런 능력의 사자, 능력과 비전과 열정과 기도의 사람인 엘리야가 한 순간에 무너졌다.


누구, 무엇 때문에?



그런데, 지금 그는 마음이 무너지고 있다. 지금 챔피언이 무너지고 있다.

한 마디의 언어, 언어의 비수가 선지자에 가슴에 꽂히다!

아무리 탁월해도 가슴에 꽂힌 언어의 비수가 삶을 무너뜨릴 수 있다.
어느 스포츠평론가가 브라질 대패의 원인을 이야기하면서 이런 용어를 썼다.

‘유리 멘탈’!


브라질 선수들의 멘탈이 완전 깨지기 쉬운, ‘유리 멘탈’이었다는 것이다. 엘리야의 멘탈이 유리이진 않았을텐데. 그의 멘탈도 상처받았던 것이다. 브라질의 대패로 인해 충격을 받은 네팔 카트만두 브하라울에 사는 10대, 프라야 타파(15)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대단한 축구팬이다. 하지만 멘탈도 정말 유리멘탈인가 싶다. 남미사람들이 축구에 대해 열광적이고 다혈질적인 것은 알지만 정말 폭동이 일어나고, 방화가 일어나고, 네이마르 유니폼 불태우고, 완전 난리도 아니다. 좀 잘 하지!



EX) 여러분에게 충격적이었던 언어, 말이 있었던가?

-어린 시절 어머닌 저의 *알친구였던 C를 항상 비교하셨다. 성적도 비교하셨고, 집안일을 도와주는 것도, 심지어 성경퀴즈대회 성적까지 비교하셨다. 모든 면에서 보이지 않는 라이벌이었다. 비교당하는 것만큼 맘 상하는 것도 없다.

여러분 마음을 무너지게 했던 그 말, 그 언어들에 대해 너무 크게 비중을 두지 말길 바란다.




우리 시대에 진정한 영웅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여론과 매체의 영향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만이 가진 진정한 소명the call에 의해 -영화 <글레디에이터>의 '막시무스'처럼-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리라.

영웅이 되고자하는 사람이라면 사람들의 이목과 반응, 여론에 먼저 무감각해지는 훈련을 해야할 것이다.

여론은 절대 중립적이지 않다. 자본과 권력과 상업성에 의해 언제나 치우치는 것이 여론이다.

그 여론에 의존하지 않고 삶을 거닐 수 있는 조건은 오로지 '소명'뿐 일 것이다.

그러한 자는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의 고백처럼-윈스턴 처칠이

한 번은 동료 국회 의원의 악한 공격을 받는데도 왜 고통스러워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내가 그 사람을 존경한다면 그의 의견에 신경을 쓰겠지요.

그러나 그를 존경하지 않는다면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자기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고 자신의 삶과 삶의 방향the call을 감당하리라.

 


"내게는 단 한 분의 청중the audience of one밖에 없다.

네 앞에서는 내가 입증해야 할 것도,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다."

 

아합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는데, 그의 아내 이세벨에겐 약해진 엘리야였던가! 아합은 원래 선했는데, 마누라 이세벨을 잘못 만나 완전 패가망신한 격이다. 우상숭배의 여제, 여왕이었던 이세벨은 아합보다 더 독한 여자였다. 여자가 원래 더 독하다.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남자지만, 남자를 지배하는 것은 여자인 것! 그 이세벨의 말이 엘리야의 가슴에 직격탄이 되고야 만다. 엘리야의 가슴이 새가슴이 되어버렸다.


2절에 ‘내가 내일 이맘때는....’엄포를 내려버린다. 우리가 그냥 저주성의 화나 분을 표하는 말로 ‘내가 너 죽여버린다!’이런 말은 무섭긴 하지만 현실성이 없기 때문에 크게 두려워하진 않는다. 그런데, 이세벨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한다면 했고, 자기 맘에 들지 않으면 사람죽이는 것은, 자신의 권력과 명성과 기득권에 방해가 되면 여지없이 생명을 없애는 것쯤은 식은죽 먹기였다. 그 여자에게서 엘리야 너도 죽을 것이다는 말은 엘리야의 가슴판에 꽃혔던 것이다. 그 말이 엘리야의 가슴에 꼽혀버렸다. HeartBreaker!

사람을 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근데 이것은 말의 차원이 아니라 진짜 그렇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엘리야를 압도한 것이다.

 

청년 대학부 여러분, 영원한 챔피언은 없다.
단 한분의 청중the audience of one을 위해 달려왔던 불의 선지자 엘리야도 넘어지고 자빠진다. 사람의 말 때문에 엘리야는 승리의 자리에 도망친다. 사람은 언젠가는 넘어질 수밖에 없는 유약한 존재임을 기억하라.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본성을 가진 인간이 사람의 말과 언어에 이렇게 저렇게 휘둘릴 수 밖에 없음을 기억하자. 영원한 챔피언은 없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내 본분과 내 자리를 감당할 뿐인 것이다.



2. 승리와 기적 이후에도 변하지는 현실에 대한 complex(trauma)

갈멜산 꼭대기에서 내려온 엘리야,

엘리야는 갈멜산 수련회를 은혜 가운데 마치고 성령충만하여 내려왔다. 기도의 증거로 비도 내렸고, 영적 사기 충만하였다. 갈멜산 꼭대기에서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달려갔다고 (18:46)에 나온다. 그런데 그 거리가 26km였다. 마라톤 길이의 절반 정도 되나? 단숨에 달려와서 무언가를 기대했던 엘리야, 이세벨의 변화, 정치인들의 변화, 현실의 변화를 기대했던 엘리야였다.

그러나 그는 충격을 받아 브엘세바로 간다.



이유는? 3;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거기서 사환을 남겨둔다. 브엘세바에 정착한 것도 아니고, 더 나아가 광야길로 한 시간이 아닌 하룻길을 지나 구석구석으로 내려간다. 갈멜산에서 브엘세바까지 무려 195km를 걸어갔다. 어떤 여행자가 부지런히 걸으면 6일 걸린다고 한다. 영적 승리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는 이세벨이 두려워, 이세벨의 말로 인한 상황과 현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아주 멀리 브엘세바까지 도망쳤다.


이세벨과 숨바꼭질을 하는 챔피언의 모습이다. 디펜딩 챔피언 스페인이나 영원한 우승후보 브라질이 그러면 안 되는 것처럼, 엘리야도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엘리야는 브엘세바에 사환을 남겨두고 혼자서 하룻길을 따로 홀로 갔던 것이다. 두려움과 불안과 함께 고독과 외로움이 자신의 사방을 움겨싸였던 것이다. 거기서 그는 로뎀나무 아래에 앉았다. 그 로뎀나무는 양고기를 구워 먹을 때 잘라넣으면 노란내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로뎀나무가 가지가 울창한가! 전혀 그렇지 않다. 너무나 엉성한 나무이다. 그 볼품없는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갈구하는 엘리야의 모습이 너무나 절박하고 너무나 안쓰럽게 느껴진다. 그 광야길 한 가운데 로뎀나무 아래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190km가 넘는 길을 몇날몇일 달려와 고작 그가 하나님께 한다는 하소연이 바로 ‘챔피언을 죽여달라’는 것이었다.


사람이 참 웃긴다. 죽으려면 갈멜산 거기서 죽든가. 왜 하필이면 브엘세바에서 다시 광야길로 한참 더 들어와 로뎀나무 아래에서 이러는건가? 도망치다 도망치다 이제 멘탈도 붕괴되었지만, 육신도 만신창이가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4절: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나이다



챔피언이 자신감을 상실해버렸다. 850:1의 유래없는 승리는 과거에 없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도 물거품, 신기루에 불과해보였다. 챔피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모든 것이 불안한 것 뿐이었다. 엘리야가 왜 지금 이러고 있는가? 지금 그의 관점은 왜곡되어있고 굴절되어 있다. 부정과 불능으로 무장한 그의 멘탈이다. 바로 이세벨에 했던 말이 자신의 모든 사역과 과거의 승리와 하나님의 부흥과 이력을 다 숨겨버린 것이다. 좋은 것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고 안 좋은 것만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고 도망쳐온 자신의 행로를 보니 미쳐 돌아버릴 것 같으니깐 죽고 싶다는 말을 한 것이리라.

사람이 무엇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관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얼마나 남았느냐? 아니면 얼마나 부족하냐?”



엘리야는 지금 부정성으로 무장하고 있다.


대학.청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사람인가? 챔피언도 이정도인데, 여러분은 어떤가? 늘 실패의식에 쩔어 있는가? 늘 실패의 트라우마 속에서 먹고 마시고 숨쉬며 살고 있는가? 그대 앞에만 서면 왜 나는 작아지는가? 하나님 앞에선 한없이 작아져도 되지만, 사람들 앞에 섰을 때 자꾸만 작아지고 낮아지는 나의 자존감은 무엇때문인가?




또 다시 그가 간 곳은?

하나님의 산 호렙(8절). 호렙산의 시내산이며, 하나님의 율법을 거머졌던 시내산이다. 브엘세바에서 호렙 산까지의 거리는 약 400km이다.

-사십 주 사십 야를 보낸 엘리야/ 40년을 광야에서 보낸 선지자, 모세가 시내산에서 40일 주야를 보낸 경험. 하지만, 특이한 것은 그가 왜 하나님의 산 호렙까지 갔느냐이다. 특별히 이 절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표현이 나오지 않는다. 이 말은 9절에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질문하는 것을 비추어보면 이해된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그러니깐 엘리야은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해서, 이곳저곳으로 옮겨다닌 떠돌이신세였던 것이다. 왜 이렇게 엘리야가 방황하고 있는가? 모든 것이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엘리야는 850:1의 승리, 그리고 3년 반 동안 오지 않던 가뭄에 비를 내리게 하였다. 아합왕은 엘리야의 승리와 자신의 실패를 명백히 시인하며 궁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되면 이세벨도 항복할 줄 알았다. 그런데, 오히려 이세벨이 더 완악하여져서 자신을 죽인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엘리야는 영적인 쇼크를, 충격을 먹은 것 같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기도도 해보고, 말씀도, 큐티도 해보고, 나름대로 열심히 산다고 살아왔다. 남들보다 더 열심히 기도회도 참석하고 리더도 해보고, 임원도 해보고, 섬긴다고 열심히 섬겼다.

그런데, 지금 결과는?

그런데, 한 학기, 전반전을 돌아보니 완전 스페인전이나 브라질전 축구를 보는 듯 했다. 5:0이었던가? 완전한 참패를 맛본 하프타임! 여러분의 하프타임은 어떤가? 불신가정의 복음화를 위해서 달려온 한 학기, 그런데 나는 영적으로 바로 살려고 발버둥쳤는데, 그러면 결과가 나와야하는데. 완전 아직도 변하지 않는 현실, 어쩌면 더 한 현실, 더 나를 힘들게하는 부모님과 가정 환경과 형편들이 나를 더 절망케하는 것은 아닌지.



엘리야는 하나님의 기적과 천재지변의 기적을 경험했다. 기도를 했더니 3년 반 동안 내리지 않았던 비가 내렸다. 그런데도 변하지 않는 사람의 마음 때문에 실망하여 낙담하여 두려워하여 그는 동굴속으로 점점 들어가게 된다. 여러분도, 나도 엘리야처럼 로뎀나무 아래서 죽고 싶을 정도의 심경은 아닌가! 열심히 뛰었는데 골이 나지 않았던 한국축구처럼 우리의 한 학기가 그러하진 않았는가? 주일성수에 목숨을 걸고 살아왔던 시간들이지만, 과연 그게 내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성경을 보고 기도하고 섬기고 참고 인내하고 모여 회의하고 행사를 준비하고 그렇게 했는데 내게 남는 것이 무엇인가? 엘리야의 생각이 그러했다. 한 사람의 마음도 변화시키지 못하는 하나님께 보이지 않는 저항을 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하나님 중심적으로 생각하며 머리를 무릎팍에다 쑤셔넣고는 정말 낮아질대로 낮아지며 하나님께 기도한 기도의 용사, 엘리야 챔피언도 자신의 생각대로 일이 펼쳐지지 않으니 이토록 영적 침체와 그로기 상태에 빠진 것이다.

 

여러분, 영원한 챔피언은 없습니다!

그런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물으신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하나님 보시기에는 기가 찬 노릇이다. 지금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내려와 이스르엘 입구까지 왔다. 거기서 브엘세바로 엄청 내려왔다. 6일 길이었다. 그리고 다시 1일 길인 광야로 들어갔다. 그리고서 다시 400km나 되는 시내산으로 걸어갔다. 다시 이스르엘 입구까지 오는데 한 20일은 걸릴 것이다.


왜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이런 말씀을 하고 있는가? 15절에 보면 다시 엘리야가 가야 할 미션사역지가 바로 ‘다메섹’이기 때문이다. 다메섹은 이스르엘에 한참 올라간 수리아지역에 위치했던 것이다. 엘리야는 불순종하여 침체의 늪, 슬럼프에 빠져서 완전 생고생을 하고 있다. 요즘은 자가용이나 택시가 있어서 가면 수월치만, 엘리야는 철저하게 두 다리를 의존하여 걸어가야 했다. 슬럼프로 인해 내려갔던 걸음걸이와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걸어가야 할 걸음걸이가 녹녹치 않았다.


 

여러분, 불순종하면 그만큼 돌아가는 것을 기억하라! 그 불순종의 댓가도, 책임도 자신이 지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며, 우리의 실수조차도 사용하시는 놀라우신 분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댓가의 책임은 여러분이 지는 것이다. 당사자 몫인 것이다.

 

엘리야의 슬럼프는 최소한 한달 정도 걸렸다. 근데 엘리야가 만약 브엘세바 광야에서 7절에 여호와의 천사가 나타났을 때 어느 정도 마음의 정리가 되었으면 좋았다. 그런데, 그 때 먹고 마시고 음식을 통해 힘을 얻었지만, 거기에 자신은 하나님께 불평과 원망이 있었던 것이다. 그게 400km를 더 가서 하나님의 산에서 표출되어진다. 엘리야의 불만은 무엇인가?


3. 불만의 배후에는 교만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

네가 왜 여기 있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에 엘리야의 대답이 참으로 기가 막히다.


10절: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브라질 축구, 스페인 축구 모두가 유리 멘탈이 문제였다면, 그 배후에는 그들의 축구실력에 대한 교만이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자신들의 축구실력이나 개인기나 이름값이나 모든 부분에서 꿀릴 게 없는 것이다. 브라질 월드컵 전만해도 레알 마드리의 카시야스 골키퍼는 레전드급의 실력파였다. 세계최고의 명문팀, 레알 마드리드의 수문장인 이 친구 때문에 스페인 축구 골키퍼후보가 쟁쟁하지만 다 대표팀에서 명함을 못 내밀고 있다.


-카시야스 (레알마드리드)

-발데스 (바르셀로나)

-로페스 (레알마드리드)

-레이나 (나폴리)

-데헤아 (맨체스터유나이티드)

 

그런데, 그 최고의 카시야스 골키퍼가 이때껏 주었던 수 많은 골보다 이번 월드컵 한 경기에서 내준 골이 더 많다는 것이 이해가 되는가? 영원한 챔피언은 없다. 거기에 인간의 겸손이 있어야 할 대목이 아닌가! 엘리야 또한 자신만이 하나님께 온전하고 순결한 예배자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내가 ...열심이 유별하오니...오직 나만 남았거늘....



이것이 바로 유리멘탈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영적인 교만이었다. 18절에 엘리야가 얼마나 교만했는지를 보여준다.

18절: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은 얼마나 위험한 생각인지 모른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꼭 이루고자하는 일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그 일에서 물러서거나 뒤로 나자빠진다면, 또 다른 사람을 통해 그 일을 대체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기억하라!

 

엘리야는 지금 자신을 통해 놀라운 일을 일으킨 것을 망각하는 듯하다. 하나님의 기적을 통해 사르밧 과부의 집에 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하셨고, 죽은 아이를 다시 살려 주셨다. 또한 갈멜 산에서 초자연적인 기적을 베풀어주셨다. 그 과정 가운데 하나님을 전심으로 따르는 사람들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엘리야는 한 가지만을 생각하고 있다. 우상 숭배의 우두머리 여인, 이세벨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가 자기 생각대로 하나님께 굴복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그는 분노하고 있다.


 

여러분, 상황과 환경이 여러분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죽은 하나님이신가? 여러분의 생각대로 움직이면 하나님이 여러분의 수호신이나 비서 밖에 더 되겠는가? 여러분에게 자유의지를 주시면서 지금도 여러분을 불꽃같은 눈동자로 보시고 계시는 분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창조주이시며, 거룩하신 구세주이시며 여러분의 주인이시며, 역사의 주인공이심을 기억하라!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챔피언이었지만, 지금 이세벨과의 대전에서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지금 낙담하고 슬럼프에 빠진 엘리야의 모습이 꼭 우리의 모습 같진 않는가! 하나님은 두 번이나 엘리야에게 9절, 13절에서 묻는다.

네가 왜 여기 있느냐?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ESV)?



그런데 엘리야의 교만은 여전하다. 두 번이나 똑같은 자신의 교만스런 발언은 한다는 것이다.

여러분, 여러분만 남았다고 느낄 때가 없는가? 나만 힘들어하고, 나만 절망스러운 환경과 상황에 놓인 것 같고, 나만 좌절과 낙담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 같은가! 아니면 반대로 나만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 같고 다른 이들의 믿음은 형편없이 보이진 않은가!



하나님께서 11절에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고 하셨지만 엘리야는 움직이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오셨지만 엘리야는 하나님의 생각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4. 하나님의 음성은 세미한 소리에서부터


엘리야는 하나님의 산에서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가운데 하나님을 찾았다.
그러나 그 가운데 계시지 않았다.
바람 후에 지진이 있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다.
지진 후에 불이 있었으나 거기 불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다.

불 후에 세미한 소리(a still small voice, 나지막한 속삭임NIV: a gentle whisper)가 있었다. 그 세미한 소리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면서 이곳 저곳을 귀기울일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음성은 지금도 간절히 찾는 자에게 임하실 줄 믿는다. 오늘 1day수련회 가운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귀담아 듣고 하나님의 음성에 반응하는 여러분이 되길 소원한다.

 

나의 상황, 환경, 조건, 컨디션, 감정을 들여다보고 무엇보다도 나의 마음의 본질을 체크하길 바란다. 내 마음의 좌소에 지금 무엇이 앉아 있는지. 하나님께서 '네가 왜 여기 있느냐?'라고 질문하실때, 나는 과연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지금도 말씀으로, 양심을 통해, 내 마음에 세미한 소리, 나지막한 속삭임으로 응수하고 계시는데, 내가 귀를 막고 있는 것은 아닌지. 비이커 안에 흙탕물이 너무 범람해서 안에 뭐가 들어넣는 보이지 않는다. 먼지가 뿌옇게 되면 시야를 가려 앞이 보이지 않는다. 내 안에, 내 마음과 영혼 안에 들어있는 쓰레기가 너무 많으면, 영적 쓰레기와 침천물이 너무 많으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 내 안에 불평과 원망과 교만과 콤플렉스와 좌절감이 너무 가득하면 영원하신 챔피언이 보이지 않는다. 내가 너무 낙심하고 좌절하면 영원하신 하나님, 영원하신 챔피언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내가 너무 가득 차 있어서 그렇다.


"네가 왜 여기 있느냐?"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말씀하신다. 나의 과거, 그리고 지금의 현재...나는 왜 여기에? 내 마음과 멘탈은, 내 유리멘탈은 왜 여기에 와 있는지? 돌아보고 묵상하고 고백하고 기도하고 하나님께 나아가자! 회개가 필요하면 회개하라! 하나님은 언제나 갈멜산에서만 역사하신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로뎀 나무 아래서도 역사하신다. 하나님은 이세벨 보다 크시다. 하나님은 우주보다 크시다! 

 

5.파트너십: 엘리사를 붙여주심
-"너는 흙(dot)이니 흙(a dot)으로 돌아갈지니라"


여호와 하나님은
사역의 바통을 이어받을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붙여주심을 통해 파트너십을 가지고, 동역자의식을 가지고 달려가게 하셨다. 엘리야의 사역의 피날레를 보게 하셨다. 이제 엘리야의 시대를 접으신다. 그리고, 엘리사의 시대를 열게 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섭섭하기 그지 없었던 엘리야, 낙심하여 자기 자신을 한없이 꼴아박게 만들었던 유리멘탈의 엘리야가 엘리사를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마스터플랜을 보면서 자신의 비천함을 다시 한번 깨달았을 것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

'네가 챔피언이라고 생각했느냐? 네가 갈멜산의 챔피언이라고 착각했느냐? 네가 지구 상에 존재하는 영적 거인이라고 생각했는냐? '

'No!!!! Never!!!

챔피언은 여호와 하나님, 나 밖에 없느니라! 영원한 챔피언은 나 하나로 족하니라!'
-너는 나 여호와를 아는 것 하나만으로, 나와 관계된 것 하나만으로 충분한 챔피언임을 왜 모르느냐?


사랑하는 그리스도인 여러분!
하나님 나라의 사역은 내가 끝이 아니다.
스티븐 잡스가 유명한 이야기를 했던 것을 인용해 보자.

우리는 '하나의 점'(DOT)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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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점(.)을 연결하지 않으면 점선이지만, 연결하면 하나의 선이 된다




그 점을 연결하면 하나님의 선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의 점에 불과한데, 엘리야는 자신이 not dot, but line 선을 그을려고 했다. 우리는 왜 선이 되지 않고 점 밖에 되지 않느냐? 그게 엘리야의 교만이었다.


우리의 자세는 하나의 점으로서 하나님의 나라와 사역에 사용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찬양하는 겸허함을 아는 것이다. 우리는 역사의 선이 아니라 역사의 점이라는 사실! 엘리야도 하나의 닷트, 엘리사도 하나의 닷트, 다윗도, 사도 바울도, 베드로도, 찰스 스펄젼도, 죠지 윗필드도, 조나단 에드워즈도, 빌리 그레함도, 존 파이퍼도, 마틴 로이드 존스도...모두가 하나의 닷트dot( . )에 지나가는 존재이다. 이 또한 지나가는 존재이다. 



모두가 DOT이다. 인간은 다 죄인이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이 필요한 존재이다. 인간은 다 죄 때문에 죽을 수 밖에 없다. 거기에 인간의 본질이 존재한다. 십자가는 '해골'이라는 뜻의 골고다 언덕 위에 희망의 십자가로 세워졌다. 인간의 죽음이라는, 멸절이라는 무덤 위에 세워진 것이 십자가이다. 그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부활의 그리스도로 우리에게 오신 것이다. 우리는 다 비천한 존재이다. 하나의 dot에 불과하다. 인간은 흙에서 와서 흙으로 가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의 닷트에 불과하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고평가될 것도, 저평가될 것도 없다.


우리를 고평가한다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이 나를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것이다'. 그거 하나면 된 것이다. 그게 세상의 모든 복을 초월하는 최고의 은총이다. 그걸 모르는 사람들은 자꾸 딴 걸 찾는다. 기독교를 축복의 종교, 기복신앙으로 변질시킨다. 딴 사람 보지 말고 자기 자신을 보라.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내 죄로 인해 심판받고 지옥갈 수 밖에 없는 나를 차마 볼 수 없어서 자기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삼위일체 하나님 자기 자신을 버리신 것이다. 우리의 존재감과 우리의 자존감Self_esteem의 근원은 여기서 출발하고 여기서 고평가될 뿐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주목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황과 환경과 여건과 조건과 소유를 보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하나의 점, 하나의 닷트인 나를 주목하신다. 내가 뭐라고? 이 또한 지나가게 만들어 놓고 왜 주목하시느냐고? 

하나님께서 질문하신다.  "네가 어찌하여, 왜 여기 있느냐?"

영원한 챔피언은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영원한 우리의 챔피언이십니다! 

그 영원한 챔피언이신 하나님께서 나를 주목하고 계신다는 것,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는 것이 인생의 bottom이다. 인생의 토대이다. 그게 가장 중요한 인간의 뿌리다. 

 

 






*찬양 및 기도

내가 서 있는 이곳에

아버지여 구하오니G

 

열왕기상 19장 강해설교로 '영원한 챔피언은 없습니다'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엄청난 영적 승리를 거뒀지만, 이세벨의 말에 충격을 받아 한 순간에 유리멘탈이 되는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라는 사실, 하나님만이 영원한 챔피언이심을 기억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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