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교/열왕기상하

왕상 18:42; 마 2:11, 엎드림Facedown

by Message.K 2024. 3. 4.
반응형

구약성경 열왕기상 18:42와 마태복음 2:11의 본문을 가지고 '엎드림Facedown'이라는 주제로 찬양집회의 설교를 한 내용을 포스팅하고자 한다. 

 

왕상 18:42; 마 2:11, 엎드림Facedown 설교 썸네일
왕상 18:42; 마 2:11, 엎드림Facedown

 

 

 

온 우주의 하나님 앞에서, 이 땅 위에 사는 우리는

그 앞에 부복(俯伏,facedown)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 -루이 기글리오

 

  • (왕상18:42)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 (마 2: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Prologue...우리 찬양집회의 주제가 무언가?

엎드림FaceDown...말 그대로, 얼굴을 밑으로 하는 것, face를 down하는 것을 말한다. 엎드린다고 하면서 고개를 뻣뻣하게 쳐드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기의 의지가 아무리 견고하고 대단하고 출중하다고 해도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아래로 한다는 것은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상대방의 의견에 부복하겠다는, 자신을 내려놓겠다는 표현인 것이다.

 

  우리는 영화 같은데서 소년들이 싸움을 할 때 눈싸움을 하는 것을 본다. 눈싸움을 하다가 싸움을 한다. 치고 박고 싸우다가 한 쪽이 완전히 두들겨 맞으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입장을 내려놓을 수밖에, 도망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때 그 상대방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놈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싸움에 진 것을 분해하며 두고 보자면서 뒷걸음치는 놈도 있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엎드림은 후자, 진 것에 대해 분노하며 씩씩거리는 광경과는 멀다.

 

  전쟁터에서 싸움에 진 친구들은 어떻게 하는가? 무엇을 드는가? 백기를 든다. ‘항복surrender’을 의미하는 백기이다. 엎드림은 바로 ‘항복surrender’의 의미를 담고 있다. ‘아무리 내가 어떻게 해봐도 안 되겠다. 손들었다’ 이런 의미이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850대 1의 신과 신의 싸움터에 있게 된다. 영적 전쟁이고 신들의 전쟁이다. 고대에는 신이 많았다. 잡신과 다신, 수호신들이 많았다. 이스라엘이란 나라는 그리 크지 않은 나라였다. 그러기에 이방민족들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다.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영향을 받기도 하겠지만 종교적으로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언제나 이러한 종교적인 위기와 혼돈을 경험했고 그것이 ‘우상숭배’(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는 것, 하나님이 보시면 구토할 것만 같은 상위 Top5에 반드시 들어갈 죄List)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러한 전체적인 분위기 가운데 엘리야라는 한 사람, 하나님의 사람은 지금 갈멜산 꼭대기에서 엎드리고 있다. 시대의 분위기와 정치적인, 종교적인 분위기 그리고 자기 주위에 있는 이방 선지자들의 틈바구니에서 그는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내가 믿는 하나님을 포기한다'고 할 수 있었다.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그 자리에 있다면, 과연 그 사람들한테 항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850대 1로 팔씨름을 해도, 850대 1로 발씨름을 해도, 850대 1로 가위바위보(잠껨보)를 해도 이길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 K-1이나 Pride에서 볼 수 있는 그 흔한 코치도, 트레이너도 없는 엘리야가 아닌가?

 

 그래, 요즘 대세가 그렇지 않은가? 예수 믿는 사람들은 굉장한 소수이다. 예수 안 믿는 친구들이 더 많다. 또, 교회도 믿는 하나님이 있고, 절에도 믿는 부처님이 있고, 기타 등등. 그런데 굳이 머 그렇게 별나게 자기들만 잘났다고 믿을려고 하느냐? 그게 오늘날의 분위기이다. 포스트모더니즘(‘내가 좋으면 그만! 개성인데 어떻노?’)과 다원주의와 상대주의의 영향이다.

 

  하지만, 엘리야는 지금 그들에게, 이방인 신과 바알선지자들과 사제들 앞에서 항복하지 않는다. 엘리야는 세상의 분위기 앞에 항복하지 않는가? 세상의 영적인 대세에 자신을 내맡기지 않는다. 오히려 누구에게 항복하는가? 오히려 누구에게 자신을 내맡기는가?

 

[왕상 18:36-왕상 18:37]

(36)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37)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엘리야는 사람들 앞에, 세상 앞에 마음의 무릎을 꿇지 않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화려하고 찬란하고 매력이 있는 이방 선지자들의 모습에 현혹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29)이같이 하여 오정이 지났으나 저희가 오히려 진언을 하여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를지라도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고 아무 돌아보는 자도 없더라

 

 하루 종일 자기 신들에게 통성기도, 합심기도, 묵상기도, 삼창기도를 했지만 자기의 신, 바알은 외출중? 바알은 죽은 신, 우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응답이 없었다. 하지만 엘리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러기에 그는 세상에, 바알 선지자 앞에 ‘항복하지 않고’, 바로 ‘하나님 앞에 항복한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왕상 18:38-왕상 18:39]

(38)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39)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와 능력을 체험한 엘리야이다. 그런 엘리야가 또 엎드리고 있다.

“무슨 일이고? 걔는 맨날 엎드리노? 문제아 아니가?”

 

 왜 엎드리는가? 바로 엎드리면 뭔가 나오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 엎드리면 뭔가가 나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엎드리는 자에게 반드시 보상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은행을 저금을 하면 이자가 나온다. 하지만 요즘 이자는 변변찮다고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 엎드리면 이자가 나오는데 그게 30배, 60배, 100배라는 것이다.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에 희망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엎드리는 것에 희망이 있는 것이다. 지난날을 추억해보라! 그런 경험이 없는가?

 

엘리야는 지금 갈멜산 꼭대기에 또 올라왔다. 그 꼭대기는 지난번에 850대 1(실제적으로 450:1)로 싸운 그 산, 그 갈멜산이었다(18:20). 영적 역사와 기적의 현장으로 자신이 또 다시 오른 것이다. 자기가 영적 승리를 쟁취한 그 곳, 하나님의 불을 경험한 그 곳에 엘리야가 다시 오른 이유는 지난 3년 반 동안 기근으로, 비가 오지 아니함에 대한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이다.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하기 위해서이다. 엘리야는 하나님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분이 나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 정말 별 볼일 없는, 때로는 컴퓨터 보다 더 못한, 네이버지식검색보다 더 못한, 내 여자 친구보다 더 못한 하나님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불을 경험한 자였다! ‘엘리야의 하나님’을 알지 않는가?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왕상18:42)

 

[KJV]왕상 18:42 So Ahab went up to eat and to drink. And Elijah went up to the top of Carmel; and he cast himself down upon the earth, and put his face between his knees,
 

  엘리야는 하나님을 경험하였던 자였다. 그런데 별나게 기도하고 있다.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었다고 한다. 무슨 연체동물도 아니고, 체조하는 것도 아니고, 엘리야는 김연아의 트레이너인가? 요가의 선두주자였던 엘리야? 아니었다. 엘리야는 보았다. 그냥 집에만 들어앉아 텔레비전을 보면서 이스라엘의 기근상황과 곳곳에 죽어가는 기아들을 무심히 쳐다보면서 약간의 동정의 눈빛만 보내다가 텔레비전 끄면 그냥 자기 자신의 문제로 돌아 가버리는 우리와는 달랐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기근을 실질적으로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그는 선지자였다. 나라의 영적 상황과 분위기를 느끼고 있었고 사람들의 형편과 모양새를 알고 있었다. 처절한 형편을 알고 있었기에 그는,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왕상18:42)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어 본적이 있는가? 엘리야가 장신이 아니었을 것이다. 내 키가 175-6인데, 얼굴이 무릎에 안 들어가더라. 키가 아마도 크진 않았을 엘리야이기에 얼굴이 무릎에 들어가지 않았을까? 허리가 굉장히 유연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얼굴이 무릎에 들어가든 들어가지 않든 머리가 땅에 닿았을 것이다. 평지라면 얼굴이 지면에 닿았을 것이다. 아니면 엘리야가 경사진 곳에서 기술적으로 얼굴을 기술으로 무릎 사이에 넣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기도의 사람 엘리야는 늘 그렇게 기도하였던 습관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기도의 자세는 쉬운 게 아니었다. 어떻게 그런 기도의 자세가 나오는가? 쇼를 하는가? 그는 민족의 상황과 시대의 형편을 읽고 있는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우리 교회 지체 여러분, 중딩, 고딩, 대딩 그리고 모든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의 교회의 형편과 오늘날의 세상의 상황을 알지 않는가? 들어도 모른 척 하는가? 교회는 교회고 나는 나? 나라는 나라고 나는 나? 가정은 가정이고 나는 나? 아니다. 우리가 평안한 삶을 살려면 우리가 소속된 공동체에 평화가 있어야 한다. 여러분이 엎드려야 가정에, 교회에, 나라에 평안이 있다. 엘리야가 미쳤다고 이런 짓(?)을 하는가? 당시 비가 오지 않으면 나라가 위태할 정도였다. 그것도 3년 반 동안! 우리 교회에도, 우리 가정에도, 우리 민족에도 비가 오지 않는다? 3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았다면, 나라가 얼마나 피폐해졌을까?

 

  영적으로 적용해보자!

  우리에게도 비가 내리지 않는가? 하나님의 성령의 기름부으심, 하나님의 비, 성령의 비가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언제나 냉랭하고 시니컬하고 냉소적인 우리의 가물은 영성의 대지 위에 하나님의 비를 내려달라고 하나님께 엎드리지 않겠는가? 하나님께 항복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너무나 쉽게쉽게 세상에 항복한다! 학교에서 컨닝의 유혹, 컨닝은 대세이다!!!, 에 항복하고, 성적의 열등감에 그리스도인의 자존심을 헌납하고, 시험은 예배보다 더 중요하고, 성경 읽고 기도하는 것은 언제나 옵션이고, 돈이 최고인 시대의 분위기에 언제나 쉽게 항복해버리는 우리가 아닌가? 이런 우리의 영적 정서 가운데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사랑과 은혜의 단비를 부어달라고 우리가 엎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그 하나님 앞에, 너무나 좋으신 하나님 앞에 우리가 항복해야 하지 않겠는가?

 

 

Epilogue... ‘네 평생 후회 안 할 자신 있나?’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이다. 성탄절 이브이다. 거리마다 성탄절의 의미도 모른 채 젊은이들은 이곳, 저곳에서 난리법석을 떨 것이다.

  

 

영화 ‘사랑’을 보았다. 거기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사랑’은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평생 지켜주겠다고 약속했던 홀어머니 밑의 한 남자, 사랑하는 남자를 평생 지켜주겠다던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버린 한 여자의 러브스토리이다. 자기가 지켜주겠다던 사랑하는 여자, 미주를 건드린 조직 건달인 치권을 찌르고 난 후 역 대합실에서 친구와 인호가 대화를 나눈다.

 

 ‘놀부야! 아무데나 멀리 가는 거 두 장 끊어줄래?’

 ‘네 평생 후회 안 할 자신 있나?’

 

  하나님께서 우리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실 때 이렇게 물으셨다고 상상해보자!

 죄 많은 인생, 자기 멋대로 믿음을 팔고, 하나님을 늘 뒤로 미루는 우리 죄인들에게 성육신하셔서 내려가시려고 할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물으셨다.

 

‘네 평생 후회 안 할 자신 있나?’

 

  우리 주님, 무어라 대답하셨을까? 분명히 이렇게 말하셨을 것이다. 분명히 ‘Yes’라고 대답하셨을 것이다.

‘나는 그들을 위해 내 목숨을 바쳐 사랑할 것입니다. 저는 평생토록 후회 안 할 자신이 있습니다. 그들은 나의 전부이자 나의 모든 것입니다.’

   엘리야가 하나님 앞에 엎드렸다. 하나님 앞에 항복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을 보면 예배는 항복Surrender이라고 했다. 예배는 엎드림이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시간을 내어 모인 것은 하나님께서 ‘네 평생 후회 안 할 자신 있냐?’고 물으실 때 자신 있게 대답했던 예수님을 축하하기 위함이요, 그 분 앞에 우리의 모든 문제들과 상황들을 내려놓고 항복하기 위함이요, 그 분을 영원토록 예배하는 엎드리는 자의 결심을 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마 2:11)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동방박사들처럼 우리가 황금과 유향과 몰약 만한 값어치 있는 물질을 드릴 순 없지만 우리가 드릴 수 있는 ‘노래 이상의 노래’를 주님의 나신 날 드리는 예배자, 엎드리는 자가 되자.

 

  일평생 하나님께 엎드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우리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바란다.

 

 

열왕기상 18:42과 마태복음 2:11의 본문을 가지고 '엎드림'이란 주제로 설교한 내용이다. 이전에도 하나님을 경험했던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불을 경험하고 곧 이어 3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은 땅에 물을 내리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게 된다. 동방박사들에게도 이런 엎드림이 있었다. 

 

 

 

열왕기상 19장, 영원한 챔피언은 없습니다

2014년 한 학기를 달려왔고, 전반전을 마쳤다. 오늘 이 수련회는 2014년 한 해의 어쩌면 축구경기의 Half-Time과 같은 시간이다. 하나님께서 오늘 전반전을 어떻게 돌아보고, 후반전은 어떻게 달려가

kkarl21.tistory.com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