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교/열왕기상하

열왕기하 2장 1-18절, 갑절의 역사를 내게 주소서

by Message.K 2022. 3. 3.

  영적인 욕심이 있는가?

  무언가 강렬한 흥미와 재미를 위해선 현대인들의 자신의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이번주의 핫이슈는? 아마도 김연아 복귀가 아닐까 한다. 김연아를 좋아하는 팬이라면 김연아의 2년만의 피겨스케이팅 복귀를 관람하는 것에 자신의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것은 아낌없는 것이다. 개그콘서트의 웃음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주일날 너무나 피곤한 육신과 컨디션이지만 그런 것에 아랑곳 하지 않고 두 눈을 부릅뜨고 볼 것이다.

 

 

 

  저는? 우리 집 아이 3명의 청결과 위생을 담당하고 있다. 즉 목욕은 제가 시키기 때문에 개그콘서트를 틀어놓고 목욕을 시키다가 한 번씩 넋을 잃고 티비를 보다가 아내에게 한방 먹는다. 아이들과 씨름하다가 보면 개그콘서트를 볼 에너지도 다 축이 나고, 애들 재우고 잠시 나온다는 것이 일어나보면 새벽기도 갈 시간이고 그렇다.

 

 

 

  무언가 호기심이 있고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에 우리는 욕심을 낸다. 제가 아는 애들 중에 집안 상황이 굉장히 좋지 않은 친구, 삼남매가 있다. 그래서 삼남매가 다 대학을 못 가고 알바를 하면서 생활을 한다. 제일 큰 친구는 커피숍에서 관리자, 매너저까지 갈 정도로 짠밥도 생겼다. 내가 생각할 땐 알바를 해서 자기가 앞으로 대학을 가야할 경우, 등록금이나 마련하면 좋겠다 싶었다. 그런데 남들 아이폰이 보편화되기 전에 아이폰3가 희귀하게 나오던 시절에 아이폰3를 구입하는 것이었다. 그 친구는 스마트폰을 사기 위해서 아르바이트를 몇 달 동안 한 것이다. 옆에서 볼 땐 좀 안타깝다. 하지만 시대가 그런 시대인 듯!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에 몰입하는 것은 다른 어떤 시대보다 더 강렬하고 집중하는 심도가 깊은 것이 현대인 듯 싶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영적인 관심은 있는가?

 우리가 영과 육 이렇게 구별해서 우리의 삶을 나눌 순 없지만, 보편적으로 생각할 때 우리가 가지는 관심도에 있어서 영/육 간의 구분과 차이를 둘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얼마만큼의 영적인 관심이 있는가? 말씀에 대한, 기도에 대한, 찬양에 대한, 우리의 영적 성숙에 대한 관심이 있는가? 한 번 물어보자.

 

  작년에도 비슷했던 그 신앙이 올해도 비슷하다면 그래도 본전치기는 한 것이다. 왜냐하면 신앙이라는 것은 가만히 놔두면 퇴보하기 마련이다. 그릇에 물을 담아두어도 물이 수증기로 증발해서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가진 것들은 가만히 놔두면 현상유지조차 힘든 것이 태반이다. 재산도 가만히 놔두면 지출을 하기 때문에 줄어들 것이다. 새로운 곳에 재투자나 저축을 해야 하는 노릇이다. 육적인, 물질적인 것들을 제외하고는, 영적인, 정신적인 모든 것들은 투자하지 않으면 퇴보되고, 퇴화하기 마련임을 기억하라! 잠언기자는 1:32에서는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인다고 했다. 작년에 성경일독을 하지 못했고, 올해도 성경일독은 지지부진인가? 작년에는 그래도 합심기도시간이나 금요기도회 때 나와서 기도하면 기도가 좀 됐는데, 올해는 같이 기도하자고 하면 그 시간이 죽을 맛이고, 지겨운 시간으로 둔갑해버렸는가? 자극적이지 않으면 반응하지 않는 시대에 신앙의 모든 요소들이 도전되기 보다는 오히려 나를 불편하게 하고, 성가시게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오늘 우리의 이러한 상태에 대해서 도전을 주는 한 사람을 만나봤음 한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 그 사람은 어떤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가? 같이 생각해보면서 은혜를 공유했음 한다.

 

 

  누군가 열정은 지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열정은 목소리가 큰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열정은 ‘지치지 않는 것’이다. 어떠한 일에 대해서도 집중하고 최선을 다하면서 땀과 수고를 바치는 것, 그것이 열정이다.

 

 

 

 

 오늘 주인공 엘리야? 아니 엘리사가 바로 그러한 인물이다.

엘리야라면 다들 잘 알 것이다. 불의 선지자, 850명의 이방선지자들과 자신과의 영적 싸움에서 승리한 인물, 갈멜산에서 승리를 선포, 경험한 인물, 엘리야는 누구나 다 안다. 오늘은 그 제자의 이야기이다. 그 엘리야가 이제는 이 땅에서의 마지막 마무리하는 장면이다. 성경 속에서 죽음을 맛보지 않고 승천한 인물이 두 사람이다. 한 사람은 창세기에 등장하는 에녹이고, 또 한 사람은 바로 엘리야이다. 엘리야가 이제 이 땅에서의 사역을 마무리하고 떠나가는 장면에 엘리사가 집요하게 엘리야를 쫓아간다. 끝까지 스승과의 대면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이다.

 

 

 

  엘리야는 이제 지상에서의 삶이 끝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하나님이 어떤 특별한 방법으로 자신을 이 세상에서 데려가실 것임을 알았다. 영적 전환기에 영적인 사람에게는 거룩한 직감이 있었다! 그래서 엘리야는 마지막으로 선지학교를 둘러보기로 한 것이다. 길갈을 떠나 마지막으로 벧엘과 여리고1)에 있는 선지생도를 볼 요량이었다. 원래 사람은 자신이 죽기 전에 가장 의미 있는 장소, 가장 의미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싶어하는 법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골치꺼리, 엘리사가 계속 눈치 없이 따라붙는 것이었다. 프라이버시의 문제, 이제 떠남의 순간에 고집불통 엘리사가 따라온 것이다. 2:2 너는 여기 머물라...

 그러나 엘리사는 맹세를 들먹이면서 엘리야 당신을 떠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당혹스러운 순간이었다. 엘리야가 세심하게 후계자를 양성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포기하지 않는 엘리사의 집념이다(왕하 2:2). 엘리사 역시 하나님의 영이 충만한 사람답게 엘리야에게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다가오고 있음을 안다고 이런 행동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왕하 2:3, 2:5의 말씀에 벧엘과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제자들도, 선지생도(신학생)들도 엘리야의 신변의 변화가 있을 것을 안 듯하다. 3,5절...머리 위로 데려가실 줄 아시나이까? ...왜냐하면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는 항상 스승의 자리가 높다고 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회당의 랍비의 자리, 스승의 자리는 제자의 자리보다 높다. 스승을 하나님께서 데려가신다면 머리 위로 들려가는 셈이이다. 이렇게 선지생도들이 묻는 것이 앞으로 엘리야가 없으면 어떻게 하실려고 합니까? 도대체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느냐 하는 걱정스런 맘으로 물은 것이다.

 

 

 

  그러니깐 엘리사의 대답은? 너희는 잠잠하라!

‘나도 압니다. 여러분은 잠잠하십시오. 하나님의 뜻이 그러하니 그러한 이상 우리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는 슬프더라도 참고 그 다음에 나타낼 하나님의 뜻을 잠잠히 기다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일에 대해서 뭐라고 자꾸 이야기할 것이 없습니다.’

  잠잠히 참아 기다리라는 말씀이다. 엘리사가 왜 이렇게 이야기하는가?

 

  하나님이 엘리야를 하늘로 데려가실 시각이 임박했는데, 왜 철없이 이별하지 않고 끝까지 달라붙느냐고 나무라는 것이다.

 

 

길갈--->벧엘--->여리고

 

 

결국 항복한 것은? 엘리야였다.

  마침내 첫 출발지인 길갈 맞은편 요단강에 당도했다 오래전에 여호수아처럼 엘리야도 영적 카리스마를 발휘한다. 겉옷을 벗어 둘둘 말아 요단 강물을 내리친 것이다. 홍해를 갈랐던 모세와 요단강을 갈랐던 여호수아의 영적 카리스마를 엘리야가 계승한 것이다. 시대가 바뀌어도 자신의 사람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변함이 없는 줄 믿는다. 지상에서의 엘리야의 사역을 이 사건으로 마무리함으로써, 하나님은 변함없이 이어지는 그분의 위대한 구원역사를 위해 이제 엘리사에게 각인시켜 주는 것이다. 왜 엘리사가 진드기처럼 엘리야에게 달라붙는가?

 

 

 

‘나는 연약하고 힘이 없는 사람이며 또 그렇게 훈련도 많이 받지 못한 사람이요 밭에서 농사짓고 살던 사람인데, 나라의 형편은 이 모양이고 또 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일도 이렇게 많은데 제게 무슨 힘이 있습니까? 제게 선생님의 힘이 배나 와도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렇다. 엘리사는 어떻게 보면 단순 무식한 스타일이다. 그의 전직은 농부였다. 농사짓다가 부르심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단순 무식, 저돌적인 스탈! 그래서 그는 더 간절했다. 바울처럼 학식이나 학벌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누가처럼 의사같은 섬세함과 분석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기에 그는 더 간절했고 절실했다. 진드기처럼 달라 붙은 이유가 있었다. 엘리야가 능력을 주지 않으면 엘리사는 없다는 것을 자신을 더 잘 알았던 것이다.

 

 

 

 

  사랑하는 청년. 대학부 여러분!

  엘리사의 갑절의 역사를 구하는 것은 욕심이라기보다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였다. 저는 이 본문을 처음 대할 때 단순히 갑절의 은혜를, 갑절의 영감과 능력을 달라는 말로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엘리사는 사명감당할 만한 그릇이 안 된다고 자신을 자가진단했고 그에 따라 하나님께 간절히 열망했던 것이다. 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선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이 필요했던 것이다.

 

 

 

  새벽에 기도하면서 정말 이 말씀이, 엘리사의 이 간구와 부탁이 내가 해야 될 기도제목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저는 하나님께 그렇게 고백했다. 아내는 나에게 내가 어릴적부터 자취생활을 심하게 해서 사랑받는 것만 알고 사랑할 줄을 모른다고 한다. 할머니랑 자취생활을 오래해서 가부장적인 분위기의 장남, 나는 손 하나 까닥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나를 위주로 해서 돌아갔다. 그런데, 아내를 만나면서 모든 것이 깨졌다. 가사도, 육아도 같이 한다. 이런 모습을 보던 여동생 둘이가 놀랜다. 오빠야가 변했다고.

   올해부터 40이란 나이가 되면서 전에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세대차이란 단어가 떠오르기도 하고, 아기 셋의 아버지란 책임도 막중하고! 하나님께 그렇게 고백했다. 나는 영혼들을 사랑하는 선한 목자가 되고 싶은데,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 같다고, 갑절의 영감을 부어달라고! 갑절의 역사를 달라고 기도했다.

 

 

 

  ‘길이 멀다고 느껴질 때 유혹이 강하다고 생각될 때
 당신의 힘이 거의 바닥 났을 때 바로 그 때 힘을 내야 해
인내로써 모든 경주를 달릴지라
주를 의지하면서 주께 기도하면서 다함께 걸어갑시다!‘

 

 

  Burn out된 지체들을 보면서, 하나님 갑절의 역사를 주소서!

 진드기처럼 따라온 엘리사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가 강력하게 요구한 것이 있다. 그게 무엇인가?

 

 

 

  엘리야가 자꾸 쫓아오는 엘리사에게 묻는다.

 9절...“나를 네게서 데려감을 당하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

  9절...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갑절의 영감을 주소서!) "Let me inherit a double portion of your spirit,"

 

 

 

이 말은 엘리사가 엘리야의 영적 장자로서 그의 사역을 계속 이어받기를 원한다는 표현입니다. 상속법에는 아버지의 유산을 분배받을 때 장자가 다른 아들의 두 배를 차지하도록 규정되어 있었습니다(신 21:17). 엘리사는 이러한 상속법을 들어 자기에게 영적 장자의 자격을 물려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능력의 두 배를 달라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은 엘리야보다 더 탁월하고 특출난 능력을 달라는 말이 아니다. 엘리야의 능력과 엘리사의 능력을 견줄 수가 없다. 영적 장자로서 능력을 달라는 말과 함께 엘리야의 후계자가 되고 싶다는 표현이기도 하다. 절박하고 간절한 목마름이 사람을 움직인다. no pain, no gain!

 

 

  야베스의 기도가 왜 유명해졌는가? 하나님께서 그 기도응답하는 것을 허락하셨다고 했다. 야베스의 기도는 ‘야베츠’의 ‘기도’, 즉 ‘고통의 기도’란 의미이다. 고통이 있었기 때문에 기도할 수 있었고, 고통 때문에 더 하나님께 가까이할 수 있었다. 절박하게 하나님만을 붙잡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기에 남이 보기엔 욕심 같을 정도로 처절하게 주님께 매달렸던 것이다.

 

“우리 중에 인물이 없는 것은 인물 되려고 마음먹고 힘쓰는 사람이 없는 까닭이다.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는 그 사람 자신이 왜 인물 될 공부를 아니하는가?”-도산 안창호

 

  모든 것을 걸고 매달려라. 그렇게 점잔 빼고 폼 잡으면서 쿨한 척 할 때가 아니다. 세상 욕심은 버려도 영적인 욕심을 내야 한다. 최고의 은혜를 사모하라. 얍복 강가에서 밤새도록 여호오의 천사와 씨름하던 야곱의 절박함을 엿볼 수 있다. 진퇴양난!

 

 

 

10절...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라고 엘리야는 말합니다. 엘리사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은 엘리야의 권한 밖의 일이기 때문에 이렇게 대답한 것입니다. 갑절의 역사는 하나님의 권한이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이 문제를 여호와께 맡기고, 여호와께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이라는 조건을 달았습니다.

 

 

 

  영적 리더십의 능력은 솔직히 엘리야가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청년대학부 여러분!

 

갑절의 역사를 주시옵소서! 기도하자! 한 학기를 달려갈 힘과 은혜와 에너지를 엘리사에게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주시옵소서!


1) 이 두 곳에 선지학교가 있었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