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선교역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의료선교입니다. 셔우드 홀 선교사는 부모님의 대를 이어 선교사로 헌신한 경우인데요. 그는 평생 조선 땅의 결핵퇴치를 위해 헌신하였던 의료선교사였습니다.
셔우드 홀 Sherwood Hall 1893-1991, 서울, 미국 감리교
1893년 11월 월리암 홀.로제타 홀 선교사의 아들로 서울에서 출생했다. 1907년 평양에서 하리영 선교사의 설교에 감화를 받아 부모를 따라 한국 선교사로 헌신했다. 어머니의 수양딸인 조선 첫 여의사 박 에스더가 결핵으로 병사하여 평생 결핵퇴치에 앞장서기로 결심했다.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 '크리스마스 씰 운동'을 보급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돌아와 1932년 '크리스마스 씰 위원회'를 조직했다. 일제의 의해 추방당한 후 1941-1963년 인도에서 결핵 퇴치 사역을 감당, 은퇴한 후 캐나다 밴쿠버에서 자원 의사로 봉사했다. 1991년 4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고인의 유언대로 양화진 부모의 묘 옆에 안장되었다.
최초의 결핵전문병원을 세우다
셔우드 홀이 해주병원에서 사역하며 결핵퇴치운동에 힘을 쏟고 있던 어느 날, 폐결핵 계몽집회를 가지려 할 때마다 허가를 내주지 안고 앞장서 반대하던 관리가 병원으로 찾아왔다.
"선생님, 하나밖에 없는 제 아들 좀 살려주세요. 무당이 하라는 대로 다 해봤지만 더 심해지기만 합니다. 그 기독교 신의 신통력 좀 제발 써 주세요."
자신과 자신의 아들이 폐병에 걸려 찾아온 것이다. 이후 극진한 치료와 간절한 기도로 관리와 그 아들이 회복되었다. 어느 날 평양 행정장관(관리의 부친)이 셔우드 홀을 찾아왔다.
"셔우드 홀 선생, 당신은 나를 모르고 있겠지만 나는 당신을 잘 알고 있소. 당신은 전에 내가 죽이려 했던 사람의 아들이오. 기독교인들을 박해했던 우리는 점점 세력을 잃고, 기독교인들은 매우 강해졌소. 나는 관직에서 물러나 이제 박해받던 그들이 나를 보복할 차례를 기다리고 있소. 그러나 당신네 기독교인들은 당신이 내 아들과 손자에게 사랑을 베풀어 준 것 같이, 보복대신 사랑과 친절을 보여주었소. 이제 나는 기독교인들을 존경하게 되었소."
이후, 그와 그의 아들은 해주 의료선교회와 교회를 보호해주겠다고 자청했고, 손자는 빠지지 않고 주일학교에 나왔다. 이런 일련의 기적들을 통해 셔우드 홀 선교사는 마침내 조선에 최초의 결핵 요양소를 세우고, 결핵요양소의 운영비와 결핵 계몽운동 재정모금을 위해 한국 최초의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하며, 일제의 의해 강제추방당할 때까지 조선 땅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오늘은 한국교회, 한국선교역사에 있어 결핵퇴치운동에 자신의 인생을 바친 선교사 셔우드 홀에 대한 일화와 이야기를 해 보았습니다. 한국교회는 수많은 선교사님들의 섬김과 수고의 터 위에 이렇게 부흥하였던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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